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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철옹성 삼년산성을 찾아서
<성곽(城郭)의 나라>
지난 몇 년 동안 대전에서 간행되는 잡지인 갑천문화와 마이라이프에 대전 지역 주변에 산재한 산성에 대하여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다. 대전과 옥천 지역에 무수히 축성된 산성들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자료를 분석하고 촬영하며 느끼는 감회는 대단하였다. 조상들의 피의 역사와 국가가 존재하려면 갖추어야 하는 힘의 우위가 산성의 축성으로 확인될 때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각 산성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백제의 멸망과 당대의 명장 계백과 김유신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이 국경 지역에 위치한 대전, 옥천, 보은, 청주, 상주 지역에 산재함이 확인될 때 비록 허물어지고 폐허가 되었지만 산성들이 간직한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내는 매력에 푹 빠졌었다. 보은 시내를 지나 마티고개로 향하는 길목 중간에서 우측 방향 오정산에 있는 삼년산성은 위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에 축성되었다. 옥천과 대전 지역의 산성들에서 느낄 수 없는 견고함과 성안에 작은 연못이 있는 점도 국경 지역의 단순한 성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대전에 있는 40개의 성과 옥천 지역 42개의 성들이 접경 지역의 산성으로 전쟁이 났을 때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삼년산성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수성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근처 속리산과 구병산을 따라 연결된 충북알프스가 천혜의 지형을 이루고, 옥천 지역으로 향하는 지점에 위치한 문티재는 거멍산과 덕대산 사이에 있으므로 접경 지역에 대한 보급과 수성에 중요한 지점이라고 여겨진다. 옥천 지역에 있는 산성들의 배후에서 병력과 보급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성의 축조 이유와 역할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삼국시대의 산성은 수도를 멀리 벗어난 국경 지역에 위치함이 특징이다. 전쟁이 진행될 때와 평안할 때의 삼국의 수도는 위치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작전 수행이 어렵다. 그러므로 국경 지역 산성과의 중요 지점에 거점 산성을 축성하고 전쟁 물자와 병력을 배치하여 지원하도록 하였는데 청주의 상당산성과 보은의 삼년산성이 여기에 해당된다.
<보은에서 들어갈 때 보이는 서문지 옆 삼년산성>
<서문 옆의 성곽 수구부>
<복원된 성곽>
<견고한 성곽 모습>
<서문지에 있는 문루 주춧돌>
좌씨전(左氏傳)에 거안사위(居安思危), 유비무환(有備無患) 즉, 평안할 때 위험을 생각을 하고, 평시에 유사시를 대비해 둠으로써, 훗날의 환란을 막을 수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성곽이다. 성곽이란 원래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두 겹으로 쌓았는데, 안쪽의 것을 성(城), 바깥쪽의 것을 곽(郭)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그러나 성곽은 고대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를 통하여 축성이 이루어졌는데 유사시를 대비하는 시설로서 성곽이상의 관방시설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BC 109년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에서 한 무제의 군대와 1년여의 전투를 벌인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성곽은 삼국이전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전술과 무기체계와의 밀접한 관련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특히 지형을 잘 이용한 산성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삼국시대의 산성은 구조적으로 우수하여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외적을 퇴치할 수 있었다. 최근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지역에만 1,848개소의 성곽유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파악되지 않은 더 많은 성곽유적이 있다고 보이며, 또한 이 통계는 북한지역이나 고구려와 발해의 전성기 때 경영하였던 만주지역의 성곽은 제외되었다. 이렇게 많은 축성사실에 대하여, 조선초기의 군사전략가인 양성지는 그의 문집 눌재집(訥齋集)에서『아동방성곽지국야(我東方城郭之國也)』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 하였다.
삼년산성 안내도에서 ②가 서문지이고, ③이 아미지 연못, ④는 암각자가 새겨진 곳이다. ⑥의 함석지붕은 보은사이고 ⑦ 남문지, ⑧ 남동치성, ⑨ 동문지, ⑩ 북동치성, ⑪ 서북치성이다. 또한 보은사 뒤로 북문지가 있으며, 보은사 앞에 우물터가 있다.
<성곽 두께가 견고함을 보여준다>
<김생의 글씨로 보이는 아미지(蛾眉池) 각자>
<각자 유사암(有似巖)>
<유사암 각자가 있는 깎아지른 암석>
<아미지>
<서문쪽 성곽>
<서남곡성>
<군사적 전통으로 본 산성의 역할>
문화재위원 손영식에 의하면 삼년산성은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지니고 있다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방하고 있다. 손자병법에 “백 번 싸워서 백 번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 최상의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일이다.”라 하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그의 문집인 삼봉집에서 “적병이 정예하면 수비하고, 적병을 해이하게 하려면 수비한다. 방어 전략은 적과 정면대결에서 불리함을 인식하고, 견성수비에 의한 장기전을 취함으로써 적군의 전력을 소모시켜, 종국에는 적을 퇴각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라 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군사적인 전통은 청야입보 또는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전술에 의존하였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개인의 화기는 소위 오병(五兵)이라 일컬어지는 도(刀), 검(劍), 모(矛), 극(戟), 시(矢) 등이었고, 성곽전의 공성무기(攻城武器)로 활보다 강력한 쇠뇌(弩), 고가(高架) 사다리인 운제(雲梯), 성문 등을 부수는 기구인 충차(衝車) 등이 보이고, 수성무기(守城武器)로는 성위에서 돌을 날리는 노포(弩砲), 하천 돌을 준비해 두어 던지는 뇌석(雷石),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마름쇠(鐵 藜)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술과 무기체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곽형태가 바로 삼년산성과 같은 성곽이었다.
첫째, 축성기록이 확실하고 유일한 고대산성이다.
삼년산성은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1번지에 위치하는데 삼국이 쟁패한 국경의 요충지로 축성시기와 축성기간, 동원된 인력, 성곽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알려진 유일한 고대산성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자비왕(慈悲王) 3년(470)에 “축삼년산성(築三年山城) ‘삼년자(三年者) 자흥역(自興役) 시종삼년글공(始終三年訖功), 고명지(故名之)’이라 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는데, 삼년이라 한 것은 3년이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 하였고, 소지왕(炤知王) 8년(486)에 “배이찬실죽위장군(拜伊實竹爲將軍) 징일선계정부삼천(徵一善界丁夫三千), 개축삼년굴산이성(改築三年屈山二城)”이라 하여, 이찬 신분이었던, 실죽장군(實竹將軍)이 일선군 경북 선산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고쳐 쌓은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곡성 또는 치성이라 불리는 성곽 모습>
<서북치성으로 오르는 산정의 옛 성곽 모습>
<성곽 너머 보은 시내가 보인다>
<성곽에서 본 옥천 방면 산줄기 모습>
<삼승 방면 산줄기 모습>
<성곽 주변 농경지>
<동쪽 방면 산줄기 모습>
<북문지>
둘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철옹성(鐵甕城)이다.
삼년산성은 둘레가 1,8㎞ 내외로, 오정산(烏頂山)의 계곡을 둘러싸는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산성은 마치 금성탕지와 같은 천연지세를 이용하면서 이곳에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높게 쌓아, 난공불락의 성곽으로 마련하였다.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절리가 발달된 점판암으로, 장방형으로 납작하게 가공하여 한 층씩 가로세로 교대로 정교하게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성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다소 높이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성벽은 대개 하부 폭 10m, 상부 폭 8m, 높이는 무려 14~16m에 이르는 구조이다. 또한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유일하게 여장유구까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은 높은 성벽의 엄청난 하중이 성벽의 기저부에 집중되어 성벽의 약화를 막고자 성벽하단에는 덧대어 석축을 한 보축을 하였다. 보축시설은 본성의 축조에 버금가는 물자와 공력을 필요로 하는 보강시설을 하였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세기의 신라인이 이루어 낸,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축성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문지에서 북동치성에 이르는 성곽 모습>
<보은사>
<북문지>
<허물어진 성곽 모습>
<이끼로 세월을 말해주는 옛 성곽>
<높다란 북동치성 부근>
셋째, 성벽이 무너져도 방어가 가능한 성곽이다.
삼년산성의 성벽은 축성된 지 천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튼튼한 구조로 남아있다. 비록 일부 성벽이 무너진 곳이 있으나, 무너진 성벽은 점판암의 성돌로 정교하게 축조하여 급경사의 석루(石壘)를 이루고 있어, 비록 성벽이 무너진 구간이라도 다른 성곽의 성벽을 넘는 것보다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오랜 세월로 인해 일부의 성돌이 풍화되어 훼손된 곳이 보인다. 그러나 정교하게 축조한 성벽은 다른 성곽과 달리 부분적으로 탈락한 성돌이 보이나, 성벽은 그대로 유지되는 우수한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동치성>
<제법 높이로 고도감을 느끼게 하는 성곽>
넷째, 삼년산성은 우수한 성곽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삼년산성은 일반적으로 산지에 마련한 편축성(片築城)과는 달리, 협축성(夾築城) 구조여서 성벽을 높게 축조할 수 있었는데, 현재까지 조사된 성곽 중 가장 방어력이 좋은 최고 높이의 수직성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문의 구조는 방어력이 좋은 다락문 현문(懸門) 형식의 성문을 마련하였다. 성문은 각 방향으로 1개소씩 4개소의 성문이 마련되었다. 서문을 제외한 남문, 동문, 북문 등 3개소의 성문은 높게 축조한 성벽의 중간높이에 통로를 마련한 소위 다락문이라 불리는 현문형식의 성문구조였다. 이러한 현문형식의 성문으로의 출입은 사다리와 같은 별도의 기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여서 평상시의 통행은 다소 불편하나 유사시를 대비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문은 예외로 현문이 아닌 평문구조로 하였다. 이는 평시 병력과 물자의 편리한 출입을 위함이었다. 삼년산성의 서문은 조사결과 성문이 바깥으로 여닫는 구조로 밝혀졌는데, 이는 추정컨대, 당시의 공성무기(攻城武器)인 충차(衝車)로 성문에 부딪쳐도 쉽사리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한 장점을 지닌 구조라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수레바퀴의 홈 자국이 보이는데, 그 폭은 1.66m임을 알 수 있다.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출입이 편리한 서문이 마련된 곳은 계곡(溪谷)지역으로, 성문위치가 성 내측으로 휘어져 들어 온 곳에 성문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성문 좌우측의 가까운 곳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敵臺)시설인 반원형(半圓形)의 곡성(曲城)을 마련함으로써 성문에 접근한 적을 측면에서 퇴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다락문 현문형식이 아닌 상대적으로 취약한 서문을 성문의 보호시설로 보강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성 외벽은 산지에 마련한 성곽이어서 경사진 산성에 오르는 과정이 성벽에 오르는 것과 같은 전투력이 소진되는 구조였다. 또한 성내에는 농성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음수(飮水)의 확보를 위해 아미지(蛾眉池)라는 큰 연지(蓮池)를 마련하여 두었다. 서문에 들어서자마자 연지에 접한 암벽에 아미지라는 아름다운 글씨가 보이는데, 이는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리는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글·손영식 문화재위원, 전통건축연구소 소장 ▶사진·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국립청주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견고하게 축조된 성곽>
<거의 직벽으로 쌓은 성곽>
<동쪽 방면 마티고개 모습>
<북동치성에서 서북치성 성곽을 바라본 모습>
<신라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
보은군 자료에 의하면 삼년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 보은읍(報恩邑) 어암리(漁巖里) 오정산(烏頂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 둘레 1680m.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문터[門址(문지)] 4개소, 옹성(甕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고 전한다. 이 성은 자비왕 13년(470)에 축조되었으며, 486년(소지왕 8)에 개축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삼년군(三年郡)·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자 항(項)이 정(頂)과 헷갈려 오기된 듯하다. 이 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井字)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 쌓기, 한 켜는 세로 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1983년 발굴 결과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이용 편년(編年)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동쪽 부근 절벽 지대>
<삼년산성의 역사적 현장을 가다>
삼년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삼년산성에는 굉장한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여기 인터넷 웹 사이트에 전하는 당시의 전쟁 상황을 묘사한 현장으로 달려가 본다.
서기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당 고종은 백제 땅을 지키는 웅진도독인 좌위중랑장 왕문도로 하여금 신라에 가서 태종 무열왕에게 조서(詔書:황제의 공식문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백제가 항복한 것이 7월 18일 이었으며,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7월 29일에 금돌성에서 소부리성에 이르렀다. 9월 3일에 당의 군대 10,000명이 유인원의 지휘 아래 머무르게 되자 신라에서도 왕자인 김인태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 등의 휘하 군사 7,000명을 사비성에 머물면서 지키도록 하였다. 이 조치 이후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사비성을 떠나 삼년산성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25일이 지난 9월 28일에 왕문도가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와서 전달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왕문도는 동쪽으로 향해 서고 신라의 무열왕은 서쪽을 향하여 서서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였고, 이어 왕문도가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물건을 건네주는 사이에 갑자기 병이 나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옆에서 시중들던 사람이 전달식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이런 사건이 있던 삼년산성은 태종 무열왕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10월 9일 태자와 여러 군단을 거느리고 출동하였으며 이후로도 군사 행동이 계속되었다. 삼년산성은 신라와 백제 사이의 교통이나 전투 측면에서 신라 진영 최전선 요새이다. 그래서 왕문도를 이 삼년산성으로 오도록 하였으며, 신라의 태종 무열왕도 이 산성에서 왕문도를 맞았던 것이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맞을 수 있을 만큼 품격을 지닌 곳이어t으며, 그 당당한 성벽을 당나라에게 보여주면 결코 당이 얕잡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자랑스러움도 간직한 전 국력을 다하여 축조한 일선 지역 최대 요새였다. 삼년산성은 신라에서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전략적 요충지 산성이었으며, 가장 견고한 성벽을 구축한 방어 기지였다.
<동쪽 절젹 부근 성곽 축조 모습>
<얕은 부분을 겹으로 쌓은 이중 구조 성곽-동문지 부근>
<남쪽 방향의 남동치성 부근 성곽>
<남동치성>
<남동치성에서 남문지에 이르는 성곽>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 흘해니사금(訖解尼師今 : 310~355) 때에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서력기원 후 64년인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8년에 백제군이 와산성(蛙山城:보은 지역 혹은 그 부근으로 추정됨)을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한 해 전 백제의 다루왕(多婁王)은 낭자곡성(娘子谷城 : 청주지역)에서 신라의 왕에게 회동하자고 초청한바 있었으나 신라에서는 감히 응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백제가 낭자곡성까지 영토를 개척할 만큼 강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준비 없이 나가 만날 수 없었음이다. 백제의 이 방면 공격은 신라로서는 두려움이었는데 백제 탈해니사금 8년 8월에 와산성을 공격하고 10월에 구양성을 습격한 전투가 있었다. 또한 탈해니사금 10년(66)에는 백제군이 와산성을 점령하고 200명을 살도록 하여 지키게 하였다. 와산성은 지금의 보은지방에 있던 산성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을 지키기 위하여 이주하여 살던 백제 사람들이 몰살되었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와산성을 삼년산성의 전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기의 기록 중에서 백제와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와산성은 자비왕 때 축조된 삼년산성의 전신으로 관련된 것으로 학계에서 보기도 한다. 백제의 빈번한 공격을 막기 위한 신라의 강구책으로 삼년산성을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반대로 백제는 신라를 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거점 확보 지역으로 이곳을 택하여 전쟁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로 백제는 신라 지역 영토 확장을 위한 거점으로 이곳이 중요시 되었으며, 이런 양국 간 국경분쟁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여 나제동맥까지 맺는 등 치열한 공방전의 연속이었다. 또한 서로의 분쟁으로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무려 66회의 전투를 벌였으며, 백제 멸망 뒤 부흥운동으로의 싸움이 8회였던 것을 제외하면 58회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나제간의 분쟁은 크게 전후 두 시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탈해이사금 7년(63)부터 22년(283)까지 220년 사이에 해당되며 29회의 분쟁이 기록되어 있다. 후기는 실성니사금(實聖尼師今) 2년(403)의 한 차례 싸움을 제외하면 진흥왕 14년(553)부터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항복(660년)할 때 까지 약 100년 동안 28회의 전투가 있었다. 서기전 50년에 시작한 신라와 백제의 전투는 668년까지 700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하루도 평안하게 보낸 날이 없었다. 백제와의 분쟁은 주로 신라 서쪽 변방에 해당하는 보은의 삼년산성과 와산성, 옥천의 관산성과 적현성, 괴산의 괴곡성, 구양성, 청주의 낭자곡성에서 진행되었다. 신라군이 이 변방을 잘 지킬 때는 한남금북정맥 북쪽에서 백제군을 막았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백제군이 능선을 넘어 남진하여 상주와 선산 지장이 공격받기도 하였다. 신라는 이 서쪽 변방의 방어에 온 국력을 쏟았으며, 왕이 직접 서방으로 순행을 여러 차례 실시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또 상주나 선산 지역에 후방 기지를 설치하여 일선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일선에는 요새에 축성을 하여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축성 작업은 백제와 수교하여 전투가 소강상태에 머물렀던 유례니사금(儒禮尼師今) 3년(286)부터 진흥왕 14년(553) 사이에 많았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맞아 의식을 거행할 때에도 삼년산성을 택한 것은 당나라 군대에게 삼년산성의 당당하고 견고한 모습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다. 삼년산성은 신라와 백제가 전쟁으로 성왕을 살해한 고간(高干) 도도(都刀)같은 용장에 의하여 통치된 요새이기도 하였으며 신라와 백제의 최전선 제 1의 요새이기도 하였다.
<남문지 부근 성곽>
<남문지에서 남동치성으로 연결된 성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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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현장답사를 하는 것보다 더 상세한 설명과 사진으로 보니 꼭 한 번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년 5월 옥천지방(용암사의 마애불,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의해 죽었다는 구진벼루,정지용생가,육영수생가, 청마리탑신제당)답사를 하면서 멀리서 관산성을 보았습니다.
예~그러셨군요...꼼꼼히 답사하시면서 늘 행복하신날 되세요 오작교선생님...
엄청 고생하셨네요. 이렇게 자세히.... 속리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보았던 곳입니다.
반갑습니다 무루헌주인님~월요일 활기차게 열으셨지요?
넵.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넘 길어서 나누어서 읽어야 겠네요! 자주 읽겠습니다. *^^*
예~그리하세요 동하님~오늘도 좋은날 입니다
정말 견고하고 짜임새 있는 성곽 옛선조들의 솜씨 감탄합니다세밀하게 올려주셔서 감하고 갑니다감솨
저도 감사합니다 편안밤되세요 지성님~
삼년산성과 온달산성 공부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