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풍경 서재필 기념공원에서 서재필박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지근거리에 있는 생가를 찾아 갑니다. 기념공원에서 1.4km거리니 차로가면 5분거리고 걸어서는 약 30분이 소요되는 거리 입니다.
서재필 생가는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성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의 생가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서재필.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으로 서재필의 생부 서광언은 투옥되어 자결했고 생모 성주이씨는 노비가 되어 자결했다. 양부 서광하와 양모 광산김씨 그리고 친형 서재춘 부부와 이복형 서재형 부부는 자결했다. 남동생은 서재창은 참수됐고 남동생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서 살아남았다. 누나와 누이는 겨우 살아남아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아내 광산김씨는 투옥돼 관기가 되자 음독자살했고 2살 먹은 아들은 굶어죽었다. 서재필과 관련한 양가, 외가, 처가 등 4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관리가 잘되어 깨끗한 가은당 보성군 문덕면 용남리 망일봉산 시내(가천)위에 조선의 철학자 가은(可隱) 이기대(李箕大 1972~1858)의 서재터 가은당을 세우고 책수천권을 쌓아놓고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이기대는 서재필박사의 외조부이기도하여 외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것으로 추측이 된다.
가은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쓰고 한말 호남유림의 정신적 지주로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 정조 22∼1879 고종 16)이 기문을 썼다. 이기대는 천상재, 일감헌,가은당과 함께 3학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으로 마련했다. 서재필은 문덕면 가천리 가내마을에서 출생했으며 보성은 그의 외갓댁에서 그의 7살이 될 까지 유년시절 가은당에서 가름침을 받았다. 그래서 서재필 기념공원에서 1.4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서재필의 생가에는 6.25전쟁으로 소실된 초당과 가은당을 복원했던 이유다.
가은당을지나 생가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이곳은 선생이 태어난 외가로서 7살까지 성장하며 교욱을 받은곳 입니다. 6.25의 화마로 마을전체가 전쟁의 피해로 소실되었으며 생가는 2003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송재 서재필의 서재
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의 모습입니다.
송재 서재필 박사는 1864년 1월 7일 이곳 초당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사의 어머니 성주이씨는 커다란 황룡이 초당옆 큰 바위사이에 있던 뽕나무를 휘감으면서 승천하는 꿈을 꾸고 태몽이라 직감하고 그 뽕나무잎을 전부따서 갈아마시고 외지에있던 부군 서광언을 오게하여 박사를 잉태하였다 합니다.
생가 뒤에는 서재필박사의 외조부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가를 둘러보고 나옵니다.
서재필 박사와 관련하여 비판과 평가가 있습니다. 평가로는 자유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선구자이며 개화사상가,혁명가,독립운동가등의 다양한 인물로 높이평가가 되는 반면에 양반이라는 우월의식과 이완용,박영효등의 친일파와 친분이 깊은점과 독립신문을 통해 동학혁명과 의병활동을 비난하였다 합니다. 역사라는게 원래 승자의 기록이라 하니 글쓴이는 어느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저 중용의 이치에 따르렵니다. 한편으로 사람이 죽으면 고국이나 고향에 묻히기를 바라는데 서재필 박사와 같이 머나면 타향땅 미국에 묻혀있는 일은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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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후니의 중고주방용품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Hoo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