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생존의 법칙
아침에 보일러실과 연결된 세면장에 세수하러 가니 비누 곽에 놓아둔 비누들이 온데간데 없다. 황당하지만 마침 선반위에 여분으로 남겨진 빨래비누로 겨우 세수를 시작 할 수밖에 없었다. 빨래비누는 세숫비누와 달리 산성기운이 강해서인지 비누특성의 역겨운 냄새가 강하다. 몇 번이나 물로 헹구어도 안면에 비누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엊그제 쓰다가 둔 빨래비누를 쥐가 갈아 먹은 표시가 조금 있더니만 아예 남은 빨래비누와 세숫비누마저 모조리 먹어 치운 것 같다. 두개의 비누가 밤사이에 송두리째 없어졌으니 쥐 한 마리가 아니고 쥐의 가족 소행인가 싶다.
쥐가 들어온 통로를 조사 해 보니 보일러 연통구멍을 집주인이 만들었는데 블록을 연통보다 크게 깨트려 그 사이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은 부산 해운대구 아랫반송으로 반송은 약 40여 년 전에 구덕수원지 범람으로 이재민이 발생하여 그곳의 주민과 영주동등 부산의 영세민들이 옮겨와서 살았던 곳으로 윗반송과 아랫반송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은 지하철 4호선이 들어왔고 인접한 대학교에 유학을 온 중국학생들도 많이 산다고 한다. 그 지하철과 유학생 덕분에 가난한 영세민촌에도 부동산 바람이 불어 전세 값이 올라가고 매매가격도 올라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기야 그 당시 정부에서 집단 이주민에게 할당한 건물 평수는 윗반송은 한가구당 10평이고 아랫반송은 15평 이었다. 집들 대부분은 쓰레드 지붕에다 겨우 방 한,두간으로 요즘 기준으로 보면 겨우 비와 추위를 피하는 식의 집들이었다.
요즘은 타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윗반송엔 주공아파트와 민영아파트를 여러 채 지었고, 해가 갈수록 쓰레드지붕이 스라브주택으로 바꾸어지며, 적벽돌집이나 맨션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인구밀도가 아주 높아 한때는 8만 명을 웃돌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6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랫반송의 산 밑에는 쓰레드 지붕의 집들이 간혹 남아 있으며, 윗반송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전에 살던 집은 스라브 3층집으로 아랫반송 지하철 인근이었는데, 2층과 3층을 동시에 임대하여 몇 년 동안 살았었다. 15평이라고 해도 2개 층을 혼자서 살다보니 넓게 큰 불편 없이 살아온 것이 기실 행운이었다.
이번 여름에 내린 많은 비로 2개 층의 집에 누수가 되어 옥상으로부터 집 천정의 여러 곳에 물이 떨어지는가 하면 끝내는 누전사태가 발생하였다.
집주인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30년 이상 오래된 집이라 어쩔 수 없고, 큰 수리를 해야 하니 나가 달라” 는 이야기 이었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전셋가격은 폭등했고, 전세에 덧붙여진 사글세도 많이 올라 이사 갈 좋은 집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싼집을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급하게 구한 집이 쥐가 들어오는 15평짜리 쓰레드 집이었다. 요즈음 밥술이라도 먹는다 하면 모두들 아파트 생활을 하니 집안에 쥐가 든 이야기를 하면 젊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 해 보면 쥐는 오래전에 잊힌 우리네 가난한 생활의 단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수시로 쥐꼬리를 잘라 학교에 바쳤다. 돌이켜 보면 쥐를 잡는 것도 고역이고 어려운 일이지만 ,어린 시절에 살아있는 쥐나 죽은 쥐의 꼬리를 자른다는 것은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 시절 쥐의 퇴치는 국가적 사업으로 당연시 되었고, 한 때는 파리를 가득 잡아 조그만 성냥갑에다 여러 곽을 넣어 학교에 제출하기도 했었다. 대략 50년 넘은 지난 일이라 우리의 뇌리에 잊혀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난 지금도 쥐에게 빨래비누와 세숫비누를 빼앗기며 살아가고 있다.
면도를 하는데 빨래비누라 거품이 잘나지 않아 면도칼이 억지로 턱을 베려 하고 있다.
이러다간 잘못하면 크게 생채기가 날판이다.
면도를 하다 말고 비누가 없어진 휑한 비누 곽을 쳐다본다. 쥐는 비누라도 먹어야 이 추운 겨울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어른들 말로 쥐가 비누를 갉아 먹는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쥐 식구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밤새도록 갉아 먹은 것을 체험한 형편이 되었다.
비누는 거품이 많이 나는 세척제로 쥐란 녀석이 그것을 먹고 밤새도록 쥐의 내장이 얼마나 니글거리고 불편했는가? 에 대해 생각을 해보니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오래토록 잘 먹지 않고 남겨둔 싹이 나온 감자가 든 봉지를 비누대신에 비누 곽에다 넣었다. “ 잘 처먹어라! 먹어야 살제, 비누는 더 이상 먹지 말고 싱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희들이 먹은 비누보담 몇 백배나 좋은 식량이니!” 우쨌던간에 이 추위를 견뎌 살아가야 할 것 아닌가?
쥐를 잡는다는 생각보다, 쥐구멍을 메워 쥐의 출입을 막아 더 이상 비누의 분실을 막아야 하는 자신이 도로 쥐에게 먹이를 가져다주고 있다. 이래서 “적과의 동침”이란 용어가 생겨난 것일 게다.
반송지역은 바둑판처럼 10평,15평을 잘라 소방도로나 길을 중간 중간에 내고 상대방의 집과 간격을 조금 띄워서 건축 한 관계로 수많은 통로가 많다. 그러다 보니 쥐와 들 고양이가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고양이는 쥐의 천적이지만 서로 공생하며 산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고양이가 많은 곳엔 으레 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확인 한 바는 없다.
전에 살던 집 통로에 들 고양이(집 없는 고양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 고양이 중에 암컷이 새끼를 여러 마리를 낳았었다. 지난 여름에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며 교미를 하더니 그 산물이었다.
일주일에 세번 버리는 그 음식물 쓰레기 중에서도 고양이가 먹을 만 한 생선대가리나 뼈다귀등은 빠지지 않고 모았다가 이미 오래되어 사용하기에 불편한 냄비나 그릇에다 고양이의 먹이를 모아 주었다.
여름 날씨에 부패되기 쉬운 고기부스러기나 내장등은 냄비에 푹푹 끓여서 식힌 다음에 가져가 주곤 했었다. 맛있는 음식에 어미 고양이는 가만히 뒤에 앉아서 지켜보고 새끼 고양이들이 먹고 나서야 뒤늦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어느 누가 고양이에게 가르쳐 준 예절이나 도덕이었던가? 짐승이라 해도 타고난 모성애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사를 와서 더 이상 고양이들에겐 음식물 찌꺼기를 다듬어서 줄 형편이 못되었는데, 이젠 고양이 대신에 쥐에게 먹이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타자를 치는 손끝이 시리는 몹시 추운 밤! 쥐들이 썩어가는 감자가 든 봉지를 보고 “인간이 쥐약을 섞어 놓지 않았나?” 의심하며 먹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둘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평년보다 유난히 추운 이 겨울! 그 쥐들은 설사 죽더라도 먹을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얼어 죽으나, 쥐약 섞인 감자를 먹고 죽으나 매일반이라고 강변할게다. 소위 이판사판이라고!
TV를 보니 수십 년 동안 야당생활을 하며 결국 대통령의 비서실장까지 했던 사람과 야당대표를 지냈던 사람이 여당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고 나섰다.
국회의원 선거나 대선엔 정치철새들이 난립하고, 배신과 양심을 파는 정치인들을 더러 보아 왔지만 이번처럼 극명하게 처신한 두 노정객들은 살기 위해선 양심은 물론 쥐약이라도 서슴없이 먹어야 한다는 생존의 법칙 논리를 우리들에게 반면교사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야당을 하며 호남의 존경받는 대표적인 정치인이기에 그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자문 해 본다.
그래! 배신한 철새들을 키웠던 이미 작고한 그 분은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래된 옛날! 사색당파로 많은 사람들이 이리 저리 몰살당하고, 정권을 빼앗기고, 잡았지만 그래도 선비정신만은 있었다.
세태가 변하고 시류가 엄청 변한 이유일까?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에게 “영원한 텃새도 영원한 철새도 없다.”라는 실용을 가르치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얼마 전 가수 김국환의 유행가 가사가 생각난다. “산다는 것은 남는 장사라”고 했다.
그 남는 장사를 계속 하기 위하여, 이익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지조도, 양심도, 명예도 파는 치졸한 짓을 일삼는 그네들!
난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여든 야든간에 그 사람의 정치철학에, 사상에 따라 여야를 결정 지을 뿐이다. 여당으로 간다고 해서 나쁜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행한 그간의 정치역정으로 볼 때 노욕이며 노탐이 아닐런지?
깊어가는 가을에 떨어지는 단풍잎은 그 색깔이 매우 곱다라고 다들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위적이 아닌 자연생태에 의해 알맞게 색깔이 들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을비를 흠뻑맞은 단풍잎이 흙먼지를 덮어쓰고 거리에 내동그라져 뭇사람들에 의해 밟혀 질테면 추하디 추한 낙엽쓰레기로 변모하고 만다.
생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고 한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느냐! 먹기 위해 살아야 하느냐!”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먹지 않으면 죽으므로 먹기 위해 산다는 방식도 맞는다고 할 게다.
수양산에서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로 연명했다는 것조차 엄히 질책 했던 성삼문! 그 시조의 끝맺음이 생각난다. “주려(굶주려) 죽을 진들 채미도 하난것가
그뉘 따(땅)에서 낫더냐?”
고양이 가족에게 생명을 연명 할 음식물쓰레기와 쥐에게 생존을 시키기 위하여 썩은 감자마저도 가져 다 주는 행위에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모자란 사람으로 치부 될 성싶어 내가 때로는 너무나 밉다.
아니다! 이 배신의 계절에, 어쩌면 본인은 정작 생존의 법칙을 오래 전부터 깨달은 영악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자문하곤 흠칫 놀라며 망연자실 쥐구멍만 바라보고 있다.
칼럼니스트 / 수필가
2012.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