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 때문에 고성을 또 찾아갈까/靑石 전성훈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에 떠나는 인문학 기행은 강원도 고성(高城)이다. 사람은 저마다 가슴 속에 저 멀리 아련하고 뜻깊은 추억이 어린 ‘기억의 창고’ 같은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견딜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맛보았거나, 혹은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했던 나 혼자만의 비밀의 정원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강원도 고성은 따뜻하고 정감 어린 느낌보다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체온을 유지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첫사랑의 실연을 맛본 곳이거나 힘들고 고된 군대 생활을 하였던 곳도 아닌데, 살가운 느낌보다는 서먹서먹하고 조금은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은 감정이 앞서는 곳이다. 7년 전 처음 고성을 찾았을 때, 가을이 끄트머리로 밀려나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비비고 서 있었던 때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조금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손이 시려 호호 불면서, 세찬 비바람에 떨어져 버린 수많은 낙엽을 바라보며 슬픈 마음에 가슴으로 눈물이 스며들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고성으로 떠나는 날 아침 기온이 상당히 차갑다. 영상 5도 정도인데 한낮에는 25도까지 오른다는 일기예보이다. 일교차가 크면 몸이 적응하기 쉽지 않다. 남양주시 사릉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 차창 밖으로 아침 해가 붉은 기운을 떨치며 아름답게 빛난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도로 주변의 나무들은 저마다 가을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아마도 고성에 도착하면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것 같다. 안개가 심하게 낀 구간에서는 사물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벗어나 화도 I/C를 거쳐서 양양고속도로로 들어선 관광버스는 신나게 달린다. 안개가 자욱이 낀 가평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뜨거운 어묵 국물을 마시고 늦은 아침을 해결한다. 10시 40분이 넘어서 건봉사에 도착하니 바람이 많이 분다. 금강산(金剛山) 건봉사(乾鳳寺), 삿갓을 쓰고 긴 지팡이를 짚은 도인 복장 차림의 현지 남성 해설사의 목소리는 다소 둔탁하다. 하지만 그 말씀 내용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 아주 개운하고 경쾌하기 그지없다. 세 번째 찾아간 건봉사, 비를 맞지 않은 채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리가 굽은 두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는 조용히 서로 마주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듯하다. 하늘에는 공사용 자재를 나르는 헬리콥터의 소리가 요란하고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문(不二門)의 뜻을 나름대로 새겨보면, 속세와 출세간을 구별하지 않고 중생의 세계와 산중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고 여겨진다. 불이문을 지나 사찰의 경내로 들어서니 바람의 골을 따라서 단풍이 서로 다르게 무르익어간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맑은 날의 건봉사보다는 가을비가 뿌리는 늦가을 고즈넉한 건봉사의 운치가 더욱 멋지게 마음에 와닿는다. 거친 파도를 건너갈 수 있다는 아름답고 멋진 아치형 능파교(凌波橋)를 건너면 대석단(大石檀)이 보이고 대석단 중앙통로 좌우로 사각형 석주(石柱) 2기가 보인다. 이 석주는 십바라밀 도형이 음각되어 있어, 십마라밀석주(十波羅密石柱)라고 부른다.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보시(報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바라밀에 더하여 보조하는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知)의 네 바라밀을 첨가하여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잠시 고개를 숙인 후 주위를 둘러보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는, ‘석가세존 진신치아사리 친견장’을 알리는 표시를 발견하고, 보안원(普眼院)에 들어가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볼 수 있는 커다란 기쁨을 맛본다. 2015년 1월 스리랑카를 여행하였을 때 그곳에서 ‘불치사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보안원에서 안내하시는 보살님의 모습이 조금은 경직된 듯하여 신경이 쓰였지만, 독경하시는 스님 목소리는 너무나 청아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건봉사를 떠나서 찾아간 곳은 바람이 불어 쓸쓸한 화진포 바닷가와 이승만 대통령 별장 그리고 김일성 별장이다. 아름드리 금강송이 울창한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김일성 별장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소박하다. 오래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들 가족 모두와 함께 강아지 ‘설이’를 데리고 거닐던 화진포 백사장에는 오늘따라 인적도 끊기어 속절없는 그리움만 진하게 풍겨온다. 같은 장소라도 다시 그곳을 찾을 때는,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세상에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고,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 지나가는 자연의 이치처럼 생각도 변하고, 형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과 마음도 변하기 마련이다. 눈앞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무심히 빠져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202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