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술'은 이젠 옛말 와인·사케보다 잘 팔려
소비층 20~60대 다양 웰빙 바람도 '큰 몫'
8일 오후 7시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100석 규모의 주점 '무이무이'는 유럽 카페처럼 널찍한 야외 테라스에 앉아 웃고 떠드는 20~30대 고객들로 북적거렸다. 직원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유리병에 담은 술을 각 테이블에 놓고 갔다. 메뉴판에 '한국 와인'(Korean wine)이라고 써 있는 이 술은 다름아닌 막걸리. 900mL에 1만원이다.손님 김진형(여·33·학원강사·서울 압구정동)씨는 뽀얀 먹걸리를 유리잔에 따라 마시며 "톡 쏘는 뒷맛이 상큼해서 요즘 남편과 함께 즐겨 마신다"고 했다.
지배인 송석우(31)씨가 "경북 모처의 오래된 술도가에서 받아오는 옛날식 쌀 막걸리"라며 "요즘 서울 강남의 젊은 손님들이 막걸리를 많이 찾는데,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제대로 된 '물건'(막걸리)만 구하면 와인이나 사케보다 훨씬 잘 팔린다는 것이다.
'싸구려 술'로 신세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던 막걸리가 기사회생했다. 서울 시내 특급호텔, 강남의 고급 식당, 골프장 등 막걸리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장소에서 막걸리가 '최신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 소비자도 다양해졌다. 대학생 박보람(여·23)씨는 "피부 미용에 좋다 길래", 게임 디자이너 황상훈(32)씨는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이 좋아서", 자영업자 이동국(67)씨는 "소화가 잘 되고 뒤끝이 깔끔해서" 막걸리를 즐긴다고 했다.
경기도 하남시 캐슬렉스 골프장은 지난달 중순부터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다. 가격은 240mL 캔 1개에 5000원이다. 골프장 관계자는 "같은 용량 맥주보다 50%쯤 비싼데도, 맥주보다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미 많은 골프장들이 막걸리를 그늘집 메뉴에 올려놓고 있다.
- ▲ 8일 오후 강남구 신사동의 주점 ‘무이무이’에서 20대 여자 손님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서민의 술로만 여겨졌던 막걸리가 호텔과 골프장까지 진출할 정도로 ‘막걸리 열풍’이 불고 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이들에게 막걸리는 돈이 없어서 마시는 막술이 아니다. 중견 건설업체 상무 김모(50)씨는 "80년대에 먹던 막걸리는 마시고 난 뒤 머리가 지끈지끈했는데, 요즘 막걸리는 다음날도 깔끔하다"며 "동년배 친구들끼리 '건강 챙기려면 막걸리가 제일 낫다'고 한다"고 했다. 출하량으로 따지면 막걸리는 여전히 3등이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생산된 막걸리는 총 17만5398kL로, 1등인 맥주(205만8550kL)의 10분의 1이 채 안된다. 2등인 소주(100만3568kL)와도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체 상태에 놓인 맥주나 소주와 달리 막걸리는 국내외 수요가 매년 상승하고 있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08년 막걸리 수출량은 2004년에 비해 2배 넘게 늘었고, 같은 기간 국내 소비량도 9% 상승했다.
올해 상승세는 더욱 가파르다. 서울지역 막걸리 시장의 9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서울탁주의 경우 올해 들어 막걸리 판매가 23%가량 늘었다. 특히 '장수 막걸리'는 3월에만 852만여 병이 출고돼 지난해 같은 기간(679만병)보다 26%가량이나 증가했다. 국순당도 4월 한 달간 막걸리 판매가 지난해 상반기 전체 판매보다 4배가량 늘었다.
전문가들은 "막걸리 인기의 배경에는 '웰빙' 바람이 있다"고 했다. 부산 신라대 식품영양학과 배송자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막걸리의 단백질과 섬유질은 항암효과와 고혈압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류 열풍도 막걸리 인기가 되살아난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 맛집 안내서 '일본에 먹으러 가자'의 저자 강지현(32)씨는 "막걸리가 젊은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칵테일이 개발됐고, 이것이 다시 한국으로 역수입되면서 '막걸리는 고루한 술'이라는 선입견이 깨졌다"고 했다.
술 평론가 허시명(48)씨는 "막걸리의 인기는 웰빙과 한류에 의해 생긴 일시적인 유행"이라며 "와인처럼 다양하고 품질 좋은 브랜드가 여럿 나와야 막걸리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