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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전경 |
2천년 파란(波瀾)의 역사를 간직한 순흥 절의의 상징인 금성대군 추모 제의(祭儀)
순흥면 읍내1리 입지 읍내1리는 순흥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과거 순흥도호부일 때는 관아와 육방 관속 건물과 흥주객관 등이 있던 읍치(邑治)의 중심지였다. 일제 때 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작로가 나면서 길을 사이에 두고 동쪽을 동부 또는 읍내2리, 서쪽마을을 서부 또는 읍내1리로 구분하게 됐다.
지금 읍내1리에는 면사무소(옛도호부 관아터), 파출소(옛 형방청 자리), 우체국, 순흥초등학교(1906.4.7 사립 흥주소학교로 개교), 예비군 면대, 흥주새마을금고, 제일교회, 순흥발전협의회, 전통묵집, 기지떡집, 암소갈비집, 일조봉, 순흥안씨추원단, 읍내리벽화고분 등이 있다.
지난 6일 읍내1리 마을회관에 가서 박병국 이장과 김인성 노인회장, 박연옥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순흥의 역사와 마을 이야기를 듣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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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마을 표석 |
파란의 순흥 역사
순흥은 오랜 세월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삼국시대 때는 고구려 영토로서 급벌산군(급伐山郡)이었으나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 재위 80-112)이 이 지역을 공격하여 빼앗음으로써 신라의 땅이 됐다. 고구려 장수왕(393-491)이 신라를 침공하여 이 지역을 지배한 기록도 있고 고구려 고분이 존재하기도 한다.
통일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5) 때 급산군(급山郡)이 되었다가 고려초 때 흥주(興州)로 개칭되었다. 그 후 현종 9년(1018) 흥주는 지금의 안동인 길주(吉州)에 속하게 되었다가 인종 21년(1143) 순안현(현 영주)에 이속(移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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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면사무소(옛 관아터) |
그 후 고려말 충렬왕(忠烈王), 충숙왕(忠肅王), 충목왕(忠穆王)의 태(胎)를 묻으면서 순흥부(順興府)로 승격(1348)되었다. 순흥부는 조선 초 태종 13년(1413)에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세조 3년(1457) 부사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함으로써 폐부 되고 말았다. 그 후 225년만인 숙종 9년(1683)에 다시 순흥도호부로 복설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순흥도호부를 폐지하고 순흥군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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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파출소(옛 형방터) |
조선조 때 대평면 ‘아신동(衙薪洞)’
1849년에 채록(採錄)된 순흥지에 보면 읍내1리 지역은 조선시대 때 순흥부 대평면에 속했다. 당시 대평면(大平面)은 「동쪽은 동원면(東園面)에 접하고, 서쪽은 풍기(豊基) 경계에 접하며, 남쪽은 풍기 외동촌(外東村)에, 북쪽은 내죽면(內竹面)에 접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대평면에 있는 마을 이름은 「아신(衙薪)[관아], 성하리(城下里), 봉양(鳳陽), 사현정(四賢井)[일명 천안내(川安內)], 위야곡(渭野谷)[옛날향교터], 석교(石橋), 신촌(新村), 산파(山坡)[산파단], 죽동(竹東), 세포(細浦), 묵동(墨洞), 태장(台庄), 한산동(漢山洞) 등이 있었다」라고 했다. 위에서 보면 관아가 있던 마을 이름이 ‘아신’으로 나와 있다. 당시 관아가 있던 읍내1리 지역은 대평면 아신동(衙薪洞)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신(衙薪)은 관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788년 5월에 기록한 순흥 성황당 중건기에 보면 「아신(衙薪) 동장(洞長) 오태성(吳泰成), 성하(城下) 동장(洞長) 이우춘(李遇春)」 등 동장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봐서 당시 동명이 ‘아신동’과 ‘성하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14년 4월1일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대평면 아신리, 성하리, 봉양리, 사현정리와 내죽면의 성북리를 병합하여 읍내리라 칭하고 영주군 순흥면에 편입시켰다」라는 기록에서 당시 읍내에는 아신리와 성하리, 봉양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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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대군혈석(두레골성황제) |
금성대군 추모 성황제
읍내1리 박병국 이장은 “우리마을은 만고충신이요 절의의 상징인 금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한 제의(祭儀)를 갖고 있다”며 “이는 우리마을의 첫 번째 자랑이며, 읍내리 사람들의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성황제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 중의 하나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을 지켜준다는 성황신(서낭신)께 드리는 대동제(大同祭)이다. 순흥에는 18개 마을에 18개 서낭당이 있어 예외 없이 두레풍습의 일환으로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특히 순흥초군청 성황제의 특이한 점은 제의 대상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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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산성황당(본당) |
정월 열사흗날(음1.13) 오전 7시(辰時)에는 순흥고을 주산인 비봉산(飛鳳山)을 진혼신(鎭魂神)으로 삼은 본당(本堂)에 제사를 올리고, 이어 보름날(음1.15 子時)에는 두레골 금성대군을 모신 상당(上堂)에 제를 올린다. 제물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소 한 마리이며, 이때 희생(犧牲)을 양반(또는 어른)으로 의인화해 제물로 드리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두레골 성황제가 이처럼 특별한 것은 비운에 승하하신 단종대왕을 기리며 왕위 복위에 앞장섰던 금성대군을 신(神)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김인성(여,79) 노인회장은 “어릴 적 어머니 손을 잡고 두레골 성황제에 가본 기억이 있다”고 하면서 “순흥 성황제는 면민이 대동단결하는 행사이고, 제의가 특이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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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아문루 |
김
부잣집 99칸 고택
순흥 전통묵집 앞 냉동창고 건물 자리에 김부잣집(김교림)이 있었다고 한다. 서부동에 있다하여 서부집이요, 자인현감을 지냈다하여 김자인댁이며, 의성김씨여서 김부자집이라고 불렀다. 이 고택은 1980년경까지 지탱하였으나 후손들이 이민 가는 바람에 소유자가 몇 차례 바뀌다가 끝내는 철거되고 말았다고 한다. 정필봉(83) 할머니는 “99칸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고, 연못과 별당이 있었다”면서 “그 고택을 잘 보존해야 하는데 잃어버려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박금순(81) 할머니도 “김부잣집이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면 전통마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지키지 못한 것을 모두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부자는 마을에 기근이 들면 솟을대문 앞에 쌀 두지를 내어 놓아 가근방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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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읍성 |
순흥읍성과 마을회관
순흥교회 맞은편 골목으로 20여m 들어가면 읍내1리 마을회관이 있다. 회관에서 권후남(82)·이창옥(70)·김옥겸(81)·이원희(81) 어르신을 만나 회관 이야기와 살아온 내력을 들었다.
마을회관을 남서(南西) ㄱ자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옛 순흥읍성의 남은 흔적이다. 당초 순흥읍성은 둘레 1,019척(약 300m), 높이 6척(180cm)이었으나 지금 60여m만 남아있다. 회관 마당에 있는 마을회관 준공기념비에는 「비록 허물어진 성벽일지라도 더 이상의 훼멸(毁滅)을 막고 그 현장을 보존하고 기념하기 위해 동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회관을 준공하게 됐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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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 |
박연옥(61)부녀회장은 “읍성을 지키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여 1991년 지은 마을회관에는 여름철에는 30여명, 겨울에는 50여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건강관리를 하는 곳”이라고 했다. 박순희(85) 할머니는 “남아 있는 옛 성(城)의 모습을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면서 “곳곳에 남아 있는 옛성의 흔적들을 지금부터라도 잘 보존해야한다”고 말했다.
전통묵집으로 가는 길에서 ‘한국의 얼을 찾아서’란 문화유산답사단을 만났다. 일흔이 넘은 원로 한 분은 “순흥면 읍내리 지역은 ‘역사박물관’이라 할 만큼 마을 전역에 유적과 유물이 많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옛 읍성을 보존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면서 “내가 본 것은 몇 m 남은 성의 흔적과 민가의 돌담으로 변한 성의 일부, 화단장식용이 된 성의 흔적을 봤다. 순흥읍성은 임진왜란 때 무너진 후 축성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마을 1호 읍내리 1991년 이어령 문화부 장관 때 순흥면 읍내리, 강원 평창(메밀꽃마을), 전북 고창(서정주의 고향) 등 3개 마을이 한국 문화마을로 지정됐다.
면사무소 앞 유적공원에는 도호부관아 출토석물, 석불입상, 선정비, 금술송, 척화비, 봉도각, 경로소, 보호수(느티나무) 등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박병국 이장은 “순흥에는 한강이남 유일의 고구려식 벽화고분을 비롯해 어숙묘, 일조봉고분, 태장리고분 등 비봉산 일대가 고분군”이라면서 “훼손된 고분을 원상복원하고 일대를 답사할 수 있는 체험코스를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읍내1리에는 140가구에 400여명이 살고 있으며 복숭아, 사과농사를 제일 많이 한다. 또 40년 전통의 묵집과 45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지떡집이 있는 것도 읍내1리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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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성 노인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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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국 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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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희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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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옥 부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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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후남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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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필봉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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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금순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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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겸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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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옥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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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희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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