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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대성당(Nhà thờ chính tòa Đà Nẵng) ※그림을 클릭하시면 조금 크게볼 수 있습니다. ▲▼ 다낭 대성당(Da Nang Catheral) 다낭 대성당(Nhà thờ chính tòa Đà Nẵng)은 베트남 중부 다낭 대교구의 성당으로, 다낭 시 쩐푸 거리 156에 위치해 있다. 이 성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 다낭에 지어진 유일한 성당이다. 이 교회는 1923년 2월 현재의 쩐푸 거리의 빈 땅에서 사제 발레(Vallet)가 설계하고 건축한 중세 건물 양식의 가톨릭 성당이다. 다낭 대성당은 1924년 3월 10일까지 아주 짧은 기간에 지어져 봉헌과 취임식까지 진행한 건물 중 하나였다. ▲▼ 다낭 대성당(Da Nang Catheral) ▲▼ 성당 부속건물 사무실 대성당은 치솟는 선과 크라운 아치의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성당 안에는 서구 교회를 모티브로 한 성서의 사건을 그린 삽화가 있다. 연분홍빛 외관과 70m 높이의 첨탑으로 탑 꼭대기에는 수탉 모양의 풍향계가 있는데, 바람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사용되는 합금으로 만든 회색 닭 조각상이 있다. 그래서 이 성당을 수탉교회(치킨교회)로 부르기도 한다. ▲ 성당 초기 주교상 평일에는 05:00(Morning Mass)와 17:00(Evening Mass)에 두 번의 미사가 있고, 주일에는 )5:00시부터 6번의 미사 안내가 있으며 한글로 ‘미사시간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라고 입간판에 표기해 놓았다. ▲ 성당 정면 벽의 예수그리스도 상과 정원의 피에타 대성당이 세워진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헌종 13년(1847), 두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베트남에 은밀히 들어갔다가 두 번째로 수감된 도미니크 레페브르 주교와 뒤클로스)이 수감되자 이들을 구출하고, 베트남에서 가톨릭 포교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하여 프랑스의 해군 장바티스트 세실은 2대의 전함(글르와르, 빅토리외즈)과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을 다낭에 보냈다. ▲ 성당 좌측의 사도요한 상과 우측의 베드로 상 만약 라피에르 대령이, 레페브르 주교가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다는 점을 미리 알았더라면, 라피에르는 베트남의 배들의 마스트를 해체함으로써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상이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자 결과적으로 1847년 4월 14일, 프랑스는 다낭 항에 정박중이던 나머지 다섯척의 황동 갑판으로 되어 있는 배들을 침몰시키는 공격을 이어갔다. 1847년 4월 15일, 프랑스 함대와 베트남 배들 간의 전투(투란 포격)가 벌어져, 베트남 배들 중 세 척이 침몰하고 프랑스 함대는 도망쳐 나왔다. ▲ 성당의 내부 ▲ 성당 우측 베드로 상 앞 우리나라 철종 9년(1858),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인 카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 조정의 박해를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 개시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 야외 미사용 좌석 1858년 9월 1일,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 제독 지휘 하에 징벌적 코친차이나 전역의 일부로 다낭을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다낭은 투란(프랑스어: Tourane)이라고 불렸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5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 요셉의 목수 가정 상 우리나라 고종 3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20년 전에 이곳 베트남이 먼저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남북의 갈림 역사에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성당의 크기는 우리나라 명동성당(1898)이 준공된 것에 비하면 반세기가 넘게 먼저 세워진 다낭의 대성당인 것이다. ▲▼ 아베 마리아 정원 첨탑 꼭대기에 수탉이 앉아있는 이유 성경에서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베드로는 수탉이 울기 전, 예수라는 사람은 아는 바 없다고 잡아떼며 세 차례나 부인하며 배신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다낭대성당의 첨탑에 앉은 수탉은 성 베드로의 통곡과 회개를 담고 있다. 다낭 대성당 부속건물 주교관 Hand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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