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플라워
박언숙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
바람 앞에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된 후마음은 여려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여자온 몸 물에 젖어 날마다 새파랗게 떨던 여자
마침내 마음자리 묶어 거꾸로 매달려진 여자
짓궂은 바람이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창가솜털 하나 빠짐없이 꼿꼿이 날 세우는 여자
길고 지루했던 생애 마음은 버리고 몸만 남긴 채 꼬장꼬장한 영혼의 뼈대만 아프게 버티고 있다
질끈 봉인한 은밀한 추억 한결 느슨해지고
수시로 그렁거리던 눈물 흔적 하얗게 지운 오후드디어 저 여자 영생불멸에 드는가 보다
잠시 캄캄하고 부쩍 가벼워졌다
오, 저런
부서지는 기억일랑 그저 바라보기만 하라고
저 허공이 붙들고 있는 등신불 같은
---애지문학회 사화집 최병근 외, {굴뚝꽃}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돈 많은 사람을 선택하면 사랑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불효를 저지르게 되고, 부모님의 뜻을 따라가면 사랑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전자는 심순애의 문제였고, 후자는 줄리에트의 문제였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싫고, 부모님의 뜻도 거역하기 싫어서 때를 놓치고 혼자 사는 여인도 있을 것이다.
혼자 산다는 것, 그러나 이것처럼 외롭고 쓸쓸한 삶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며 무리로부터 이탈하여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은 천형의 형벌과도 같은 삶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여자, “바람 앞에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마음은 여려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여자,” “온 몸 물에 젖어 날마다 새파랗게 떨던 여자/ 마침내 마음자리 묶어 거꾸로 매달려진 여자”----. 약속은 상호간의 신뢰와 믿음의 약속이며, 이 상호간의 신뢰와 믿음이 깨어지면 무차별적인 복수와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따라서 이 약속을 강제하려고 도덕과 법률이 제정되고, 약속을 깨뜨리거나 파기하는 상습범은 그 사회로부터 격리를 당한다. 정의와 사랑도 약속에 기초해 있고, 행복과 평화도 약속에 기초해 있다.
박언숙 시인의 [드라이플라워]의 여자는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파기한 여자이며, 수많은 후회와 자책 속에 “짓궂은 바람이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창가”에 “솜털 하나 빠짐없이 꼿꼿이 날 세우는 여자”이다. “길고 지루했던 생애 마음은 버리고 몸만 남긴 채/ 꼬장꼬장한 영혼의 뼈대만 아프게 버티고 있다.” “질끈 봉인한 은밀한 추억 한결 느슨해지고/ 수시로 그렁거리던 눈물 흔적 하얗게 지운 오후”, 드디어, 마침내 “영생불멸”에 들게 되었다. 영혼(마음)이 빠져나가고 몸만 남았다는 것은 수많은 후회와 자책감의 강도를 말하고, “꼬장꼬장한 영혼의 뼈대만 아프게 버티고 있다”는 것은 “수시로 그렁거리던 눈물의 흔적을 하얗게” 지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약속은 지켜져야 하지만, 그러나 그 약속이 깨어짐으로써 이 세상의 삶이 있게 된다. 정의, 사랑, 행복, 평화 등은 하나의 이상이고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들이 사실 그대로 실현된다면 이 세상의 삶이 없게 된다. 이 세상에는 지킬 수 있는 약속도 있고, 지킬 수 없는 약속도 있으며, 한사코 지키기 싫은 약속도 있다. 우리는 약속에 살고 약속에 죽지만, 그러나 이 약속은 천재지변과 상호간의 이해타산과 타인들의 간섭과 함정에 의하여 언제, 어느 때나 파기될 수도 있다. 때로는 강철보다도 더 튼튼하고, 때로는 살얼음보다도 더 잘 깨지는 것이 약속이다.
전지전능한 신도 없고, 이상적인 낙원도 없다. 정의, 사랑, 행복, 평화 등이 실현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정의, 사랑, 행복, 평화 등은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지만, 그 약속을 파기한 자로서의 수많은 후회와 자책, 또는 진정한 반성과 참회 속에서 진정한 성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예수, 부처, 마호메트, 제우스, 시바 등은‘파약의 상습범’들이며, 모든 문화적 영웅들의 삶이 비극적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즉심시불卽心卽佛,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부처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박언숙 시인의 [드라이플라워]는‘파약의 아픔’이 마른꽃이 되고, 이 마른꽃이 부처가 된 여인을 찬양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파약하고, 수많은 후회와 자책 속에 자기 스스로 천형의 형벌의 삶을 살고 있는 여인은 그 마음의 고결함과 진실함으로 저 허공, 저 하늘을 바치고 있는 등신불等身佛이 된 것이다. 극락은 없지만 부처의 마음 속에 있고, 천국은 없지만 제우스의 마음 속에 있다.
박언숙 시인의 [드라이플라워]는 약속의 땅이며, 이상적인 천국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시인은 전지전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