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있는 사람 잠언 3장 15~17절
신학교 1학년때에 윌 듀란(Will Durant)의 철학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를 공부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필로스 와 소피아가 결합된 단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필로스는 사랑,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 철학이란 말입니다. 철학이야기는 인류의 지혜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양한 대답이 있습니다. 제가 지혜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 제 아내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주보다 지혜를 더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주는 우리 딸이고 지혜는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의 오른 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장수를 원하시면 지혜의 오른손을 보시고, 부귀를 원하시면 지혜의 왼손을 보십시오. 그곳에 즐거움과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있는 사람,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석가모니가 추구했던 것이고, 공자가 추구했던 것이고,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경전인 ‘반야 바라밀다 심경’ 에서 ‘반야’는 지혜를, ‘바라밀다’는 극락에 이른다는 것으로 ‘극락에 이르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의 출발점이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원불변하는 참된 진리인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깨달으시고 축북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헤의 근본이라 했습니다.(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9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기초입니다.
시편 14:1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게시지 않는다고 믿는 두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명제가 있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쓴 알베르 까뮈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상금으로 고급 스포츠카를 샀고 그것을 몰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은 방자하게 삽니다. 제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한다.’ 이렇게 믿은 알베르트 슈바이쳐 박사는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도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 상금으로 병원을 짓고 토인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은 경건하고 진실하게 삽니다. 까뮈와 슈바이쳐 둘 다 노벨상을 받았습니다만 그들이 사는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대상 17:1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의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요? 라고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병원에서 부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 이었습니다.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이 덮여 있었습니다. 허구한 날 남편을 구박 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 없이 울었습니다.
부인이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말 했습니다.
"여보 ! 나 아직 안 죽었어 !"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
소크라테스는 그의 지혜의 출발점으로 ‘너 자신을 알라’ 했습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네 꼬라지를 알아라’ 했습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 생긴 줄로 안다고 합니다. 자기 친구보다는 자기가 더 잘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인 착각은 영원한 쪽팔림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니 보다는 내가 더 잘 생겼다’ 하고 ‘안녕하세요’ 라는 프로에 나온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면 한심하죠.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하는 말도 있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창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으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 그런데요, 나는 누구일까요?
역대상 17장 1-20절에, 다윗왕이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초라한 천막에 모시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드려야겠다. 그래서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왕이 무슨 의미로 그 말을 하는지 알아채고 왕에게 말하기를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 밤에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여 “너는 다윗에게 가서 말하라.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 다녔는데, 내가 인도한 내 백성 이스라엘 중에 어느 지파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짓지 아니하느냐? 라고 말 한적이 있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라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라는 과분한 복을 약속 하십니다. 나단에게 이 말을 전해듣고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같이 여기셨나이다’(대17:16-17)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이 누군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라는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얻었습니다.(요1:12) 내가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릴 때 우리집을 들락날락 하던 무당이 나를 보고 ‘저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주님을 영접할 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고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셋째, 인생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시90:3)
인생은 허무하니 영원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90편 3절에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는데 이 단어 ‘인생’ ‘에노쉬’라는 단어는 인간이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내 영혼의 집,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누가복음 12:16-20에 예수님께서 어떤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했습니다.
이 부자는 세상에 있는 헛된 것을 추구했습니다. 인생이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시편 90:5-6) 한때, 초원의 싱그러운 풀과 같이, 빛나고 아름다운 꽃처럼, 영광스럽던 우리의 젊은 날이 어느 순간 사라집니다. 한때 그렇게도 아름답고 빛나던 우리 얼굴이 어느 날 거울 앞에 서니 나는 간곳없고 어느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울 안에 있다하지 않습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흔들림 없이 바로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과 인생의 실상, 그 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여기 이 부자는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고,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리석은 부자’ 라 하십니다.
그는 많은 재산, 돈이 있었지만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 부자는 인생이 무엇인지 그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생명의 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그것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90:12) 그것을 모르는 이 사람을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