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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정론
풍성한 의식과 열정이 그려낸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미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나의 수긍이다. 그러나 얼마나 잊고 살았던 말인가. 세탁기의 물높이를 조절하는 것을 몰랐다가 알았던 것이 몇 해 되지 않고, 화장품 바르는 순서를 제대로 익힌 것 또한 십여 년밖에 되지 않으니 어른들이 말하는 선머슴으로 살았던 격이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칩거하면서 다시 나를 챙기는 일로 돌아섰다. 오늘의 봄이 어둡다할지라도 내일의 봄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 열정을 가라앉히면 안 된다. 가라앉히는 것은 의욕 상실이며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나를 있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열정을 나의 꽃으로 만들어야 한다.
- <어느 봄날의 적> 중에서
Ⅰ.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의 저자 미국의 작가 시드니 셀던은 “삶의 다음 페이지에서 또 다른 멋진 나를 발견할 테니까 너무 일찍 책장을 덮지 말라.”고 했다. 다음 페이지에 숨겨진 멋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박미정 박사는 두 번째 수필집 <베란다>를 내기로 마음먹는다. 역사를 보면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중요한 변화와 혁신은 한가로운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 진행 중일 때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수필 <어느 봄날의 적>이 이를 증명한다. 이 수필에는 그녀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혁신의 길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수필집을 내기로 했다. 나에게 하던 칭찬을 계속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는 것이 나에게 또 칭찬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참 어리석게도 늦게 만난 깨달음이다.’라고 썼다. 수필은 반성적 성찰의 글이다. 그녀가 늦게라도 깨달음을 얻었기에 우리는 그녀의 보석 같은 산문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화장품 바르는 순서를 제대로 익힌 것 또한 십여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른들이 말하는 선머슴으로 살았던 격이다.’라며 살아오면서 모르는 게 많았던 자신의 무지를 나열하면서, 그녀는 코로나19로 칩거하면서 놓친 자신을 다시 챙겨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느 봄날의 적>에서 그녀는 ‘오늘의 봄이 어둡다할지라도 내일의 봄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 열정을 가라앉히면 안 된다. 가라앉히는 것은 의욕 상실이며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나를 있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열정을 나의 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미정 박사는 글을 쓰기 위한 이상적 공간으로 ‘베란다’를 설정해 두고, 유토피아적 감상에 젖어 글을 쓴다. 호접란 꽃으로 시작한 글머리가 머뭇거림을 끝내고 서사의 울림으로 중간 지점을 지나면, 이쯤에서 고요한 여명과 새벽이 오버랩되는 쯤에 깨고 싶어 시간을 예약해 두고 갈등 없이 평화롭고 푸근한 침실에 든다. 눈을 뜨면 정갈한 마음으로 베란다의 유리창을 활짝 열어놓고 베란다를 거쳐 오는 맑은 햇살을 받으며 밀어 둔 글을 꺼내어 다듬는다. 그녀의 루틴은 문학적이고 낭만적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제2 수필집 <베란다>다. 자신을 있게 하는 열정을 꽃으로 피워낸 것이다. 흙은 꽃으로 웃는다는 말에 비춰보면, 그녀는 대지요, 흙이다. 척박한 자연 환경을 견뎌내며 한 송이 꽃을 피워낸 위대한 자연의 어머니 대지인 것이다. 한국전쟁때 여성 종군 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영하 30도의 강추위에 시달리며 죽음의 공포에 지친 병사에게 “무엇을 가장 절실하게 원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병사는 “제게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박미정은 <어느 봄날의 적>에서 ‘오늘의 봄이 어둡다 할지라도 내일의 봄을 위해 우리 스스로 열정을 가라앉히면 안 된다.’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가라앉는다는 것은 의욕상실이며, 죽음이라고 했다. 이 수필집은 인생의 험로를 딛고 삶의 주인으로 내일을 사는 지혜가 담겨 있어 감동을 준다. 그녀의 수필은 불행을 뒤집어 행복의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깨달음의 기록이라 하겠다.
Ⅱ.
박미정 박사의 <역설>이란 수필을 읽는 순간,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이 떠올랐다. 20세기 철학의 거장 비트겐수타인을 현대에 들어 중요하게 꼽는 이유는 그의 독창적인 연구 방식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언어에 집중한 철학자였고,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접근방식으로 언어를 파헤쳤다. ‘수없이 나타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언어가 그 중심에 있다. 언어가 어떻게 세상과 상호작용하는가, 언어와 세상의 관계는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 그는 평생을 할애했다. 그는 <논리철학논고>에서 세상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했다. 그는 오직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미정은 문학 전공자로서 비트겐슈타인만큼 언어에 민감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수필 <역설>은 자신의 언어관과 문학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지 오웰의 고전인 <1984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언어의 힘을 잘 이해할 것이다. 오웰의 소설에서 전체주의 정부는 ‘전쟁은 평화이며, 자유는 노예고, 무지는 힘이다’라는 세 가지 구호를 선전한다. 이 구절은 보통 사람의 생각을 뒤집는다. 한마디로 역설이다. 이 체제의 시민은 언어의 올가미에 포박된 탓에 그들의 사회정치적 현실이 비틀려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정부의 언어에 마음을 빼앗겨 정부가 자기 멋대로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역설> 역시 이런 관성을 지적하며 대안적인 어구를 찾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자 한 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빠르게 전달하려는 산 자의 욕심이었을까 싶다가도 설명할 수 없는 추적거림에 한 줄 메시지의 충격을 얼른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만남의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그렇게 급했을까 하는 의문에 닿으면 경황이 없는 시점을 이해하기까지 한 줄 문장보다 빠른 매체를 부정한다.
문장 한 줄로 가장 좋은 말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무엇일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가 아닐까. 한 마디면 ‘사랑한다.’인데 이 한 마디는 평면적 표현이 아니다. 진실입네 하는 장식을 달지 않아도 입체적으로 끌림이 있어 따듯하게 수용한다. ‘돌아가셨다.’ 역시 진실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후자는 너무 간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둡고 무거운 것을 다 망라한 한 마디인 그것의 진실에서 브레히트의「죽은 병사의 전설」에 나오는 강음, 그것과 같은 것이 담겨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역설> 중에서
위의 수필에서 저자는 부고의 한마디에 대해 저항한다. ‘돌아가셨다.’는 한마디로 끝낸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고전적 의미의 ‘수사’는 ‘말을 잘하는 기술’이란 의미지만, 현대에는 ‘설득 기술’로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수사학>에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활용한 설득 기술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말을 조리 있게 하고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수사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다. 박미정은 ‘돌아가셨다’는 단 한 줄의 문장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역설인가? 세익스피어는 ‘재치의 핵심은 간결함’이라고 했다. 간결한 말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길게 늘어지기 전에 날렵한 화살을 쏘듯 짧고 간결하게 말한다. 이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문제는 그 간결함이 반드시 짧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간결함은 추려진 핵심이며 알맹이다. 치열하고 밀도있는 알맹이를 담기 위해서는 사유의 과정이 들어가야 하는데, ‘돌아가셨다’에는 이런 사유가 전혀 없다. 언어는 말이나 대화의 도구로 축소될 때가 많다. 언어에는 지칭하는 기능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언어는 실제로 생각 지각 경험 현실을 창조한다. 이 창조야말로 언어의 힘이다. 20세기 사유의 주축인 이러한 생각이 박미정의 글에 담겨 있다. 언어를 통제하는 사람이 정신을 통제하며,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 현실을 창조한다. 그녀는 대안언어를 제시하기보다는 오래된 언어를 새로운 언어로 교체할 것을 주장한다. 적절한 문장이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모양이 될 때까지 문장에 흠뻑 젖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대 수필에서 문학적 성취는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역설’은 브루투스의 ‘역설’이 아닐까 싶다. 공화정치를 지지하는 이상주의자 브루투스 일당은 음모를 꾸며 시저를 죽인다. ‘한마디만 더하고 물러가겠다. 내가 로마의 영광을 위하여 시저를 죽인 것처럼, 나는 시저를 찌른 그 칼로 나를 찌르겠다. 나의 조국이 내 죽음을 필요로 한다면 말이다.’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공화정 수호를 위해 독재자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살해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로마 시민들은 그의 연설에 환호한다. 박미정의 수필 <역설>도 독자의 환호를 받을 만하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설득을 위한 비유나 예화의 활용에 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인용한 텍스트는 ‘노래가사처럼 이별이 그리 쉬운가. 정말 충격일 때가 더 많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마지막 장면을 보러 간 것처럼 ‘마지막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이다. 그 장면이 ‘만남이거나 이별이거나 죽음’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의 삶과 배경을 잠시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관람자의 의식을 전제하면서 그녀는 삶의 종료를 알리는 데 한 줄은 영화의 마지막 한 장면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픔 그 자체를. 가슴 썰렁하게 한 그 통보는 차차로 무섬증을 안겨 주는 것이며, 그것은 돌아가신 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것이란 작가의 주장은 위의 텍스트의 채굴로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왈가불가 왈가왈부하는 일이 생기면 되도록 피한다. 언어에 대해서 나에게 자유 시간을 너무 주었다는 등 그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경의를 표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언어가 제공하는 자유 시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언어를 대하는 태도가 늘 엉성하여 쓰다가 말다가 했다. 그러다가 언어의 빛깔을 잃기도 하고 잊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들이 헛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는 직공이라는 작업복을 왜 벗지 못하는가. 언어와 헤어질 염려가 없다는 안심 보드는 또 뭐란 말인가. 직공에게 미학의 광장을 열어놓고 맡겨야 하는 언어의 난감함이 백지를 들고 앉으면 전해져 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직공은 언어 자체의 빛깔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합리론이든 신고전주의든 간에 언어 그 자체의 빛깔을 찾는다는 것에 어떤 사실적 조건이 없는 한, 계속 열린 장場에서 그 빛깔을 찾으려는 직공이 되어야 한다. 나의 언어는 내가 배열하기 전까지 긴 침묵을 기다리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소리와 외침으로만 팔짱을 끼고 짜깁기하고 있으니 갑갑하겠지만, 삼십여 년을 참아 왔으니 기다려 볼 참이라 여겨진다.
<언어의 직공> 중에서
웹스터 사전의 머리말은 ‘언어는 개념의 표현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 개념의 동일성을 보존하지 못할 때 그 언어의 동일성은 유지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영문과 다닐 때 청바지 뒤주머니에 꼽고 다니며 폼잡으면서 읽었던 타임지에는 ‘바벨탑 시대부터 언어의 혼란은 정치적 오해를 낳게 하는 가장 활성적인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되어왔다.’고 적혀 있었다. 쇼팽은 ‘언어는 도시’라고 했다. 그 도시를 건설하는 데 만인이 돌을 들고 와서 참여하였다. 하물며 시인임에랴. 물결치는 해안의 조약돌처럼 인간도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세련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사람과 동시에 태어난 것으로서 우리가 사회에서 사람의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다. 언어는 우리를 황량한 사막에서 찬란한 별로 날라다 주는 교통수단이다. 한마디의 언어가 타인의 생각, 감정, 행동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작가는 언어의 직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생명력이 있다. 한마디의 표현은 우리의 삶을 바꾸기에 충분한 힘을 지녔기에 우리의 일생을 이끌어가는 언어를 다듬고 연마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런데 작가는 “나에게 언어의 공장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했는가를 묻는다면, 이미 쫓겨났어야 하는 직공이다.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단 한 편의 대표시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아니다. 공장에도 내 결실에도 충실치 못했다고 늘어놓는 궤변이다.”라고 적고 있다. 수필가로 변신한 시인의 겸손이다.
이 수필은 매우 수필적이다. 언어의 직공으로서 성실하게 일하지 못한 반성으로 시작하고 반성으로 끝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어의 직공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서 왜 직공의 작업복을 벗지 못할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이 감상의 포인트가 되겠다. 찰스 디킨스는 신이 인간에게 귀를 두 개 주고 입을 한 개 준 것은 많이 듣고 적게 말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언어는 오직 그렇다 또는 아니다만을 용납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오류에 빠지기 쉽다. 박미정 박가가 ’왈가불가 왈가왈부하는 일이 생기면 되도록 피하는 것도 그런 언어의 성정을 파악한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언어의 제 빛깔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어쩌면 시인은 지금 언어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수필은 ‘직공’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전개부에서는 자신을 1994년에 입사하여 30주년을 코앞에 남겨 두고 있는 직공으로 소개한다. “이 정도 기간이면 회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면서 무게가 제법 나가는 행운의 열쇠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는가.”하면서 30년 봉직의 헌신을 회사가 인정을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지만, 직공을 쓰는 회사는 자신의 소유다. 공장에도 자신 결실에도 충실치 못했다고 늘어놓는 전반부 솔직함과 결말부 직공으로서의 충성맹세가 궤변이 아니라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튤립의 줄무늬 수를 세지 않는 시인으로 사는 신고전주의면 어떤가. 언어를 떠나 살 수 없는 직공으로 살고자 하였으니 제대로 일하는 직공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하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말 한마디가 남 앞에 자기의 직공으로서의 초상을 그려 놓은 셈이다.
글을 쓰는 일이 나의 삶 한 부분이 된 것은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읽은 후부터였다. 집안에 고단한 일이 생겨서 우울하던 날, 여고 동창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가만히 손 맺고 있으라는 말에 이런저런 책을 꺼내 보다가 그녀의 동생이『한맥문학』으로 등단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눈에 띈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읽었다. 설거지에 관련된 글인데 시선이 꽂혔다. 마치 내가 하는 설거지였다. ‛내가 설거지를 써야지 수녀님이 왜?’ 참 황당한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내가 할 일을 안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뭐하고 있지?’
‘왜?’
물음표는 나를 향했다.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때를 또 소환한다. 그해 한산대첩 백일장에 참가했다. 글제는 ‘돛단배’였는데 ‘차하’를 받은 것 같다. 나의 생애 첫 시, ‘돛단배’를 무의식적으로 외우면서도 다음 시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설거지’의 충격은 몹시 컸던 모양이다. 이후 시작된 습작은 꾸준하였다. 2년 후에『한맥문학』등단을 하고 그 2년 후에 첫 시집『밤에 쓰는 詩』를 출간했다.
<시간의 관조, 나의 해명>
논어에 보면, ‘언유종 사유군’이란 말이 있다. 어떤 일에도 뿌리가 있고,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물리학은 결정론적이고, 인과론적인 거시세계인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박미정 박가가 찾아가는 근원은 왜 자신이 문인이 되었나 하는 데 있으며, 문인이 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문재가 있어서 커서 문인이 될 수 있었고, 이 글에는 유년의 추억뿐만 아니라 등단의 과정과 자신의 문학관이 노정되어 있다. 이 수필에 나타나는 멋은 인간의 삶 자체에 초점을 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물론 다른 문학에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개인의 체험을 중시한다. 체험은 삶의 길잡이이고, 내일의 새로운 지혜를 여는 열쇠다. 수필의 제재는 가급적 자기 자신의 경험한 사실을 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소설가는 가상을 전제로 한 미지의 이상적인 세계에 몰입하여 허구의 진실을 유추해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의 진실은 사실적이고 실질적인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닌 여과되고 가공된 인간 삶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사실적이고 실질적인 진솔한 삶의 체험이 ‘시간의 관조, 나의 해명’이라는 제목으로 육화되어 서정성으로 승화되어 감동을 준다. 수필은 생활의 텃밭이 아니면 자랄 수 없는 식물이다. 미국의 윌리엄 테너는 <essay and essay writing>에서 글감 25개를 제시했는데, 전부 인간 생활에 바탕을 둔 경험적 사실이었다. 최고의 수필감은 체험이다. 글감과 주제가 잘 어울려 만남으로써 아주 좋은 작품을 빚어내었다. 8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으로, 2권의 수필집을 낸 수필가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부산문인협회 발간의 <문학도시> 주간뿐만 아니라 대학 강의도 맡아 하는 등 편집자로서 또 학자로서 큰 일을 묵묵히 잘해내고 있다.
그녀는 막내의 초등 6학년 때 학부모로서 백일장에 참가하여 장원을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작문 시간에 글짓기를 잘해서 칭찬을 받았고, 또 6학년때 한산대첩 백일장에 나가 차하 상을 받은 연유로 보인다. 이런 경험이 아마도 자신감으로 발전하여 초중고 어머니 백일장에 나가게 된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여기서 산문 <꽃길을 걸으며>가 장원에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고, 우연히 여고 친구가 등단한 문예지에서 이해인 수녀의 <설거지>란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녀 역시 2년 후 등단의 문을 두드리고, 등단 후 2년 뒤 첫시집 <밤에 쓰는 시>를 펴낸다. 박미정 수필의 쾌미는 체험의 진솔성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향기를 주는 것은 겸손에서 묻어나오는 반성적 성찰이다. 그녀는 경험을 이야기해 나가면서도, 성과나 자랑으로 연결될 조짐이 보이는 부분에서 성찰의 문장을 배치한다는 점이다. “시학 9장에, 시인이 해야 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다시 말해서 일어날 법하거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우리 삶처럼) 가능한 일 같은 것을 그리는 데 있다. 이 말을 수긍하면서도 탐색으로만 이륙하고 마는 것에 절망하기도 한다.”거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규정을 짓는 언어지만, 달리 언어가 나를 규정짓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언어가 나를 지켜보는 듯 무거운 짐이 될 때, 시를 짓는 일을 멈추고 나의 시간을,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수필을 읽게 된다.”는 식이다.
종강한 후 날 받은 산책 날인데 너무 춥다. 발걸음을 빨리 집으로 되돌렸다. 그나마 어깨에 내려온 까칠한 햇살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하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깥과 온도가 다른 탓에 꽃 피우기를 멈추지 않는 제라늄이 나를 보고 있다. 엄청 좋은 향기는 없지만 피고 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에 집중해서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오늘 보니 제라늄도 적응과 도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꽃빛깔이 의외로 좋다 싶을 때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퍼지다 사르르 끊어졌을 때도 있었다. 그냥 예사로 보고 넘겼지만 이제는 꽃 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영문도 모르게 우울해질 때, 제라늄이 피우는 꽃을 보면 그 우울함을 잊을 수 있다. 꽃대 하나가 수-욱 올라와 있는 것만 봐도 나도 모르게 다문 입술을 열고 말을 건넨다. 나무는 귀가 없다고 하던데, 그러나 늘 귀를 기울면 바람이나 햇빛이나 서로 다투어 귀를 만들어 주겠지. 행운을 기다리며 한참 제라늄 잎사귀를 쓰다듬었다. 커피포트에 물이 또르르 끓는다. 원두커피를 내리며 느리게 시간을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뒤로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지금, 커피 맛의 음미보다 하루에 하는 숙제처럼 한 잔 마시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익숙해졌다. 물 끓는점 100도씨를 천천히 기다리는 멋은 없어졌지만 헤이즐넛 향기는 배어 있다. 그리고 나의 삶에 장식이 아닌 적응과 도전이 있기에 내려놓기가 쉬워졌음을 말할 수 있어, 기다려지는 하루다.
<적응과 도전> 중에서
위의 인용 예문을 읽으면, H. 스튜어트의 “행복해지는 큰 비결은 외계의 사물을 자기에게 적응시켜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외계의 사물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데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생물의 성질은 지상에 있어서의 상태 및 그 살아야 할 장소에 적응해 있다고 볼 때, 우리는 적응을 잘해나가면서 환경에 도전해나가는 ‘제라늄’에서 크나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영문도 모르게 우울해질 때, 작가는 제라늄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우울함을 잊는다. 식물테라피에 젖어든다는 점이다. 베란다에서 커가는 제라늄은 좋은 향기는 없지만 피고 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작가가 좋아하는 꽃이다. 어느 날 베란다로 가서 제라늄과 대화를 시도하고, 예사로 보았던 꽃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데 도전하고자 한다. 보통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처럼, 도전을 먼저 놓고 응전을 뒤어 놓는데, 작가는 응전 대신에 적응이다. ‘도전과 응전’과 ‘적응과 도전’은 뉘앙스는 비슷하지만, 성격은 매우 다르다. 도전에 응전이 남성적이라면, 적응과 도전은 여성적이다. 제라늄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묵묵히 순응해가고 고정적인 영토에서만 정착되어 있는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은 잠들어 있다. 그들은 의식과 판단을 통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계의 자극에 조용히 순응하면서 잎 피어 가고 꽃 피우고 시들고 할 뿐이다. 박미정 박사는 꽃의 기후 적응을 통해 자기 생활의 융통성으로 승화하고 있다.
수다는 일차적으로 시간의 진화, 이차적으로 그에 알맞은 분배로 여행이 설정되었다. 코로나가 사라지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오대양 육대주를 옮겨 다니는 것을 쉽게 한다. 알프스를 넘는가 하면 안데스 산맥을 거침없이 오르내린다. 마치 세계지도를 보고 이야기를 하듯 보이는 세계지도에 둘은 빠진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고향이야기에 멈출 때가 많다.
고향은 마음의 안착이다. 서로 만나지 못해서 길어난 수다에 여러 곳을 삥삥 두르다가도 돌아가는 곳, 고향은 할 이야기는 많지만 말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있다. 수다의 채널이 안테나를 높이지 않아도 잡음이 없는 곳이 고향이다.
“언니야, 언니도 그렇지? 나도 그래”
향수의 수다에는 진화가 없어도 좋다. 옛것 그대로 더 깊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가슴에 수두룩하다.
<진화하는 수다> 중에서
동기간에 주고받는 수다의 진화가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여행으로 다시 마지막에는 고향 이야기에서 멈춘다. 더 이상 ‘고향 이야기’에서 진화되지 않는다는 동기간의 하루 2회 아침 저녁의 수다가 주는 메시지는 수다의 힐링이라기보다 고향이 주는 편안함이다. 작가는 고향이 주는 편안함의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수다의 화제에 ‘고향’을 제일 마지막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본격문학이다. 이 수필은 수필의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려 진한 향기를 품어낸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박미정의 수필은 진정 자조적이면서도 인생사 속 인연에서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삶에서 여유가 사라진 단절과 소외의 시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박미정 박사가 그려내는 수다의 미학은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매간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줄기찬 수다에서 고향의 정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고 하겠다.
박미정의 수필세계가 사향 그리고 인정과 식물성의 추구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견고한 인성과 강한 인연의 연대라는 인생원리가 창작과정에 원천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진화하는 수다’라는 제목도 좋고, 요즘 보기 드문 자매간의 정이 펼쳐져 있고, 훈훈한 인정과 그리움의 세계는 물론 애향성이 담겨 있어 감동을 준다. 서정과 인정의 오솔길을 걷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수필은 여성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 그리고 고향을 떠난 출향인이면 품어야 할 가치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수다의 진화 과정을 차분히 읽어나가다 보면, 박미정 박사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과 서성, 그리고 그리움과 순수를 수필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리고 있는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통영이라는 아름다운 어촌을 고향으로 둔 인생사 속에서도 성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세우며 문인의 길을 걸어왔다. 누구보다도 예의 바르며 겸손한 시인이자 수필가로서의 성정이 그녀의 수필에 서정과 정감이 넘실되도록 한다고 하겠다. 잃어버린 원시의 정을 되살리는 것, 바로 인간미의 보고요, 수필의 향기라는 차원에서 이 수필의 문학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그런 저런 예쁨으로 우리 집 베란다는 나의 상실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평등을 공존케 하는 정신을 일깨우는 이상공간으로 확장되어 그 결과로 나의 삶을 융통성 있게 하고 있다. 참으로 작은 공간의 실체가 나의 우주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소재가 없으면 베란다를 자주 들락거리는 버릇이 있다. 거기에서 연장된 행동으로 컴퓨터 속 빈 문서를 열고 다양한 글감을 타진한다.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이러쿵저러쿵 꾸시렁거리는 글로 채우다가 그 중에서 가장 주도적인 글귀를 잡고 문패를 달아 놓는다.
가장 쓰기 좋은 현실의 정황이 베란다에 있으므로, 현실인식을 분명히 할 수 있다. 기억이든 추억이든 끄집어내야 할 때 나의 회복이 가장 빠른 곳으로 나의 베란다는 그렇게 나를 도우고 있다. 실험의 장소로도 충분하기 이를 데 없어, 글의 성취나 미학적 완결성을 끌어올리는 곳으로도 이름하고 있다.
<베란다> 중에서
<베란다>는 박미정 수필집의 제목이자, 작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르트만은 공간을 삼분하고 있는데, 실제공간, 직관공간, 이념공간이다. 수필의 제재로서 ‘베란다’의 존재는 실제 공간이다. 여기서 실제공간은 우주적 자연 공간으로서 경험적 가시 공간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 수필에서 베란다의 공간성이 작가에게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공간의 지향성이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감상의 포인트다. 대체로 공간은 세 가지로 제시된다. 외적 공간, 내적 공간, 관념적 공간이다. 외적 공간이란 문자 그대로 우리의 감각적 세계가 인지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적 공간이란 시인에 의하여 주관화된 공간 그리하여 작가의 내면 의식에 의하여 다시 창조된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에는 없고 오직 인간의 의식에만 있는 정신적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념적 공간이란 실제로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신념을 통해 가상할 수 있는 혹은 소원 성취의 대상으로 설정된 그러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각적 세계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외적 공간과 구분되며 인간 의식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내적 공간과 다르다. 이 베란다란 외적 공간은 수필가에게 있어서 치유 공간으로, 베란다는 ‘상실을 채워주는 공간’, ‘평등 정신을 일깨우는 이상공간’ ‘융통성을 주는 공간’ ‘자신의 우주를 만드는 공간’ ‘글감을 채워주는 공간’ 작가에게 ‘성취, 회복, 완성의 공간’을 제공해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미정의 <베란다>가 수필집의 제목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는 문학과 자연의 반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수필의 베란다는 바로 상실을 복원해주는 치유의 통로로서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박미정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극복의 역사가 서려 있던 시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작가는 베란다에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체취를 드러낸다. ‘베란다는 나의 상실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었다’는 진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베란다’는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우리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베란다 공간을 통해 작자는 삶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글을 쓸 때 소재가 없으면 베란다를 자주 들락거리는 버릇이 있다.’고 말하는 작가는 베란다 공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란다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문학적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Ⅲ.
문학은 예술이기에 ‘품격’과 ‘언격’을 요한다. 창작에 있어서 정해진 어떤 법이라는 것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어떤 방법에 의해 미적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하는 의미의 조형화다. 한자 ‘말씀 언言 자’를 90도로 누이면 마음 심과 입 구 자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바로 두고 보면 머리 두, 두 이, 입 구로 구성되어, 머리로 두 번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는 언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는 측면에서 문학성을 유지해야 한다. 박미정 수필의 ‘품격’은 <힘의 균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늘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순수를 그리워하는 성정에서 찾을 수 있으며, ‘언격’은 진솔하게 쓴 글에서 나온다. <어느 봄날의 적>이나 <역설>, <진화하는 수다> 등에 보이는 치환의 미학에서 ‘언격’은 한껏 우러난다. 본론에서 다루었던 수필들뿐만 아니라 수필집에 실린 글 한 편 한 편이 문학성을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하나같이 식물성적인 가치에 닿아 있어서 생태적 합리성과 매우 가깝다.
순수로 회귀하려는 일은 어떤 종교에 심취하는 일보다 의의가 깊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생존권이 위협당하고 생태계가 파괴되어가고 있는 이때, 작가가 <적응과 도전>에서 “꽃 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다.”라고 하는 자연의 발신음을 듣겠다는 자세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한 생태적 세계관이고 생태적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정서녹화에 이 이상 더 좋은 것은 없다. 감동을 격조 있게 보여준 데 대해 높게 평가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박미정 박사는 풍성한 의식과 조용한 열정으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미를 충분하게 그리고 보름달처럼 풍성하게 수필 속에 수놓고 있는 시인이자 수필가라 하겠다. 그녀의 글은 성찰과 적응, 도전과 해명, 인연과 서정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눈동자와 가슴을 촉촉하게 젖게 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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