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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의 500년신화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경주 최 부자처럼 500년이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서양의 최장수 부자가문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200년 동안 부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 뿐만 아니라 정권의 실세로 권력을 행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등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행태를 보이며 결국 멸문되고 말았다.
하지만 경주 최 부잣집은 적정이윤 추구와 정당한 재산증식을 통해 부를 유지했다. 흉년기에는 절대 재산을 늘리지 않았고, 권력과 결탁해서 이권을 가로채는 일도 없었다. 나아가 마지막 부자 최준은 전 재산을 나라와 사회에 스스로 바쳐 부자가문의 종지부를 찍었다.
어디 그뿐인가. 경주 최 부자들처럼 대대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을 위해, 사회봉사를 위해 온몸과 마음과 전 재산을 다 바치며 살다 간 부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최 부자는 부자이면서도 자신들은 철저하게 근검절약을 실천했고, 투철한 사회봉사 정신으로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썼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을 위해, 일제 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사방 1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빈민구제에 앞장섰고, 노비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 노비가 도망가지 않는 집으로도 소문이 났다.
그래서 활빈당도 최 부잣집만큼은 공격하지 않았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리 없이 실천한 산 증표인 셈이다. 이 책은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인 경주 최 부잣집이 500년 부를 유지한 독특한 경영철학과 노하우 그리고 대를 잇는 부자교육과 가족문화를 밝히고 있다.
경주 최 부잣집에서는 육연(六然)과 가거십훈(家居十訓) 그리고 대대로 전해 오는 가훈의 형태로 엄격하게 후손교육을 실시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그들의 사람 사는 도리가 되었고, 부자경영의 노하우가 되었다.
부자에 걸맞은 신분을 유지하되 자제하고 절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고, 만 석 이상으로 재산을 모으지 말 것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시집온 며느리들에게 무명옷을 입게 한다든지 은비녀 이상의 패물은 가지고 오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또 후손에 대한 재산분배도 당시의 장자 중심에서 벗어나 장자 이하의 아들과 딸 그리고 서자에게도 비율에 따라 골고루 분배했다. 특히 경영학적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농사와 잠업에 힘쓸 뿐 아니라 당시 양반들이 취급하기 꺼려했던 해산물이나 한지 생산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 마름(농지 소유자의 집사)의 횡포가 심하다든가 지주가 소작료를 계속 올리는 등 소작제도가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도 최 부잣집은 직접경영과 병작제(竝作制)를 실시해 최 부자의 토지가 늘어날수록 수확량이 많아질수록 그에 비례해 소작농의 수입도 늘어나게 했다.
궁극적으로 항상 이웃에 대한 겸손과 나눔의 삶을 강조하며 온전하게 오래도록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참부자의 길을 자손 대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저자 최해진은 1997년 경주 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다.
또한 그동안의 자료수집과 현장취재를 바탕으로 경주 최 부잣집이 그동안 사실과 다르게 꾸며진 이야기와 몇몇 오류를 바로잡아 최 부자 이야기의 진본으로서 이 책을 내놓은 것이다.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는 신비한 비밀도 아니고, 한 가문에 대한 흥미 있는 전설로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온 가족 구성원이 대대로 사람 사는 도리를 잘 지킨 살아 있는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참다운 부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숨쉬는 우리나라 명문가의 역사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전재산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400년 巨富' 의연하게 포기했다
최부자 가계를 말할 때 어려운 이웃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집안의 나라사랑'교육 문화에 대한 투자도 전자에 못지않다. 독립운동에 대한 물심양면 지원은 국민들을 숙연케 한다.
최부자집 명성은 왜 끝이 나게 됐을까. 취재를 시작하면서 드는 의문이었다. 취재를 마치며 느낀 소감은 '최부자집은 막을 내렸지만 최부자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부자인 문파(汶坡) 최준(1884~1970)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광복과 후학 양성, 문화창달에 쏟아부었다. 최준의 장손인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최염(79) 명예회장은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데 대해 "물려받은 것이 없어 조금 아쉬울 때도 있다. 최부자집 후손이라면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사주지 못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전 재산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쓰신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당대 최고 독립투사들과 교류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를 쓴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이 책에서 최준의 집을 찾은 독립투사'명사들 가운데 최익현, 안희제, 신돌석, 손병희, 김성수, 정인보, 박상진,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 등이 대표적이라고 기록했다. 최부자집을 찾은 독립투사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아가 최준이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희제, 손병희와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손병희 사후 그의 묘소에 손자 최염 회장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형제'친척이 독립운동 가문
박상진은 그의 사촌 자형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판사시험에 합격하고도 부귀 영화의 길 대신 대한광복단을 만드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한광복단은 1918년 조직이 일제에 노출될 때까지 4년간 국내외에서 활동한 가장 큰 비밀결사단체로 알려져 있다. 자형에게도 아낌없는 자금 지원을 했다고 한다.
형제 중에는 둘째 동생 최완(1889~1927)도 형을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백산상회 설립
최염 명예회장이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내용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백산상회 운영 비화는 최준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게 해준다.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백산 안희제가 문파를 찾아왔다.(백산과 백범을 '양백'이라 할 정도로 독립운동사에서 백산의 비중은 크다.) 서로의 명성을 익히 알던 터라 쉽게 말이 통했다. 자금 지원 요청에 따라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안전하게 보내려면 무역회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18년 문파가 주도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세웠다. 군자금을 지원하려면 논밭을 팔아야 하는데 일제에 탄로나기 십상. 이를 은폐하려면 돈을 해외로 자유롭게 반출할 수 있는 무역회사가 적격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최준은 전답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 자금을 수출입용으로 위장, 백산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10년 만에 부채가 당시 130만엔(쌀 3만 석에 해당되는 돈)에 달했다. 최부자집의 연수익이 1만 석이니 보증액수 3배 초과로 완전 알거지가 된 셈.
손자인 최염 명예회장은 "이때 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기로 작정했다는 말씀을 후에 내게 하셨다"고 전했다.
최준은 백산무역 설립 이후 한동안 대출과 상환을 제대로 해 은행의 환심을 산 뒤 본격적으로 거액의 대출을 받아나갔다.
◆멸문의 위기
조선 제일의 부자였기에 은행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8년 백산무역은 파산했다. 매출은 없이 차입에만 의존하니 회사 운영이 될 수 없었던 탓. 은행이 보증을 선 최준의 재산을 처분하면 13대째 내려오는 부자의 명성이 퇴색될 위기에 처했다.
대출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된 데는 일제의 작전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최준이 돈을 갚을 능력이 안 되면 상환유예 등의 조건으로 그를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킬 수 있다는 계산.
백산무역이 파산하면서 최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던 일본 총독부는 상환유예를 결정했다. 오랫동안 최부자를 연구해온 경주 교동 최씨고택관리인 최용부(69'문화해설사) 씨는 "총칼통치를 강행해서는 한국 민심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 문화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민중들의 존경을 받던 최부자를 파산시켜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최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의친왕과 식산은행 총재이던 아리가(총독에게 식민지정책을 자문하는 일본 귀족가문 출신)의 대총독부 설득도 한몫을 했다고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적고 있다.
◆독립자금 지원으로 옥살이까지
독립운동 자금 송금이 탄로 나서 헌병대, 경찰서 등으로 끌려다니며 옥살이를 했고 그 후유증으로 서거할 때까지 고통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부자가 재산을 늘리는 방법은 친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최준은 이를 거부하고 전 재산을 광복을 위해 바쳤다.
이런 그이지만 조국이 광복된 이후 건국훈장조차 신청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에 별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나서 공적을 자랑하던 때였다. 겸손으로 13대를 살아온 최부자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광복후 마지막 만석꾼 최준, 가족 불러 "남은 전 재산 대학에 기부하련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전 재산을 대학 설립에 쏟아부었다. 그가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만들면서 기증한 각종 서적들은 영남대 중앙도서관에 그의 아호인 문파를 따서 '문파문고'라는 이름으로 보관돼 있다. 이채근기자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 본가 옆에 있는 공터. 초가 민박집을 건립하기로 했다가 최양식 시장이 부임하면서 최부자 교육관을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최부자의 산 정신이 후손들에게 전승될 것이다. 이채근기자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는 것은 독이나 저주를 주는 것과 같다'며 전 재산을 기부한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라며 전 재산 기부를 약속한 중국의 기부왕 천광뱌오.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운동(더 기빙 플레지)에 동참을 약속한 억만장자(세계 1천 명 중 38명)도 쏟아져 나오는 세상.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기업기부는 늘어도 기업인들이 개인 재산을 기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의 대물림에 혈안이 돼 있다.
이런 점에서 약 100년 전부터 시작된 경주 최부자의 전 재산 기부는 가히 혁명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재산 헌납 결심은 1918년
최준은 만석꾼 지위를 과감히 던지기로 작정했다. 후세 사람들은 최부자가 1947년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설립하면서 재산 대부분을 기부했다고 알고 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임에 틀림없지만 최부자의 재산 헌납은 1918년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의 요청으로 백산상회를 설립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때 선대로부터 내려왔고 자신이 키운 전답과 임야 등을 아낌없이 백산상회에 쏟아붓기로 작정했다.
다만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지목되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들까지 모진 고초를 당하기에 백산상회가 은행대출을 받는 형식을 빌렸을 뿐이다. 거액을 대출받을 때 그는 재산을 모두 담보로 잡혔다. 담보액이 3만 석 규모이니 연간 1만 석 소출을 내는 그의 재산 상황으로선 모든 것이 날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이를 결행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 전환과 민중들의 칭송을 받는 최부자를 파산시킬 경우 심각한 민심동요가 우려된다는 지적을 받아 일제는 상환유예 조치를 취했다.
해방이 되면서 고스란히 재산을 지켜내게 된 최준은 1947년 다시 한번 중대 결심을 한다. 어차피 국가에 바친 재산인데 국민들의 신뢰로 되찾았으니 이를 대학 만드는 데 쏟아붓기로 한 것.
최준이 학교 만들 결심을 한 것은 국권을 뺏긴 이유가 깨어 있지 못한 국민들 탓이라고 판단해서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마자 어떤 사업보다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주도적으로 대구대 설립
1945년 10월 30여 명의 지역 유지들이 모여 대학설립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대구경북의 유지와 재산가들을 설득해 참여를 유도했고 본인이 앞장서서 현금 40만원과 7천200여 권의 도서, 땅, 건물 등을 기증해 1947년 대구대를 개교시켰다. 이로 인해 현재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 일대 부지는 영남대재단 소유로 등기돼 있다. 기증한 서적 중에는 희귀본도 있는데 영남대는 지금도 중앙도서관에 그의 이름을 딴 '문파문고'를 만들어 보관 중이다.
손자 최염 회장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 최준은 대학을 만들 당시 손자(당시 20세)에게 "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소 섭섭함은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면면을 알기에 기꺼이 동의했다고 한다.
대구대를 만들고 남은 돈은 6'25전쟁 이후 서울에서 경주에 내려온 학자들과 교수들을 위해 경주계림대학을 만드는 데 전부 쏟아부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입었다.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에는 이때 투입된 재산이 대지 1만1천442평, 과수원 9천536평, 전답 1만2천772평, 임야 8천973평, 건물 16동 351평, 산림 276정보라고 기록돼 있다.
1955년 개교했으나 전쟁을 피해 경주로 왔던 교수들이 거의 떠나자 부득이 2년 뒤 휴교하면서 대구대와 통합했다.
이로써 최준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은 완전히 대구대 소유가 됐다. 최염 회장은 "이때도 할아버지가 내게 의견을 물었지만 할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따랐다. 유산으로 받았다가 부도라도 났다면 조상들 얼굴에 먹칠을 할 수도 있었다. 재산 만석을 받는 것보다 조상들의 명예가 훨씬 더 낫다"고 했다.
◆영원한 만석꾼
최준이 대구대에 쏟은 정성은 엄청났다. 교직원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고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기여입학은 일체 못하게 했다. 당시 상당수 사립대학의 기부입학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든 재산이 학교 설립에 들어가는 바람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다가 삼성 이병철에게 대학 운영을 위임했다. 이후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학교를 넘기게 되고, 대구대는 역시 대구의 사립대였던 청구대학과 합병, 영남대로 이름을 바꾼다. 이에 대해 최염 회장은 "정말 할 말이 많다. 영남대는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의 소유가 아니라 기증자의 뜻에 따라 대구경북민의 자산이어야 한다는 것이 후손들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 저자인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후손들이 가지는 조상에 대한 자긍심과 감사, 은혜의 마음은 새로운 씨앗이 되고 뿌리와 줄기, 잎이 되어 언젠가는 다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다.
최부자는 스스로 만석꾼의 지위를 반납했지만 그 정신은 후손들과 국민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경주 최부자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에게 8할을 받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만 받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최근 재평가받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가인 고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를 설립했으나, 박정희 정권 때 자신의 의사에 반해 영남대로 넘어갔다. 경북 경주 교동의 최씨 고택도, 경주와 울산의 선산도 영남대 소유다. 1월29일 교동 고택 사랑채 안에서 종손 최염(80)씨가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는 만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영남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주/강재훈 선임기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은 박정희의 영남대에 어떻게 무너졌나
▶부동산 투기를 하고, 동네 빵집에 진출하고, 권력 앞에 비겁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부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서라벌’에 정의로운 부자가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300년 넘게 민중의 사랑을 받던 경주 최부자는 일제에 저항하고 해방 뒤 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가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으로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남의 땅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최부잣집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시죠.
경주 교동 최씨 고택
″전 재산을 사실상 강탈, 선산 조상님들까지 나가라니…″
1970년 서울 무교동의 한 주점.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 두 명과 회포를 풀러 평소 다니던 단골집에 온 터였다. 셋은 학교생활을 추억하며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최씨의 무슨 말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친구 둘의 안색이 굳어졌다. 차례로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최씨는 그래도 남은 술을 다 먹고 가겠다며 혼자 남았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들어왔다.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하겠습니다.”-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친구들이 물었죠. 너희 가족 전 재산을 넣은 대구대학교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에게 넘겼는데, 그 이병철이 박정희한테 상납을 했으니까 굉장한 보상을 받았을 거 아니냐? 나는 이병철한테 돈 한 푼 받은 거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럴 분 아니라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죠. 박정희, 이병철이 정경유착해서 남의 것 빼앗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 아니냐….”신고한 사람이 종업원이었는지 친구들이었는지 아직도 그는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마친 뒤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 종로의 술집 종업원들을 정보과 형사들이 모아두고 수상한 사람은 즉각 신고하라고 교육하던 시절이었다.-경찰에 끌려가서는요?“구둣발로 차이고 실신하고… 밤새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서를 보니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종업원들한테 ‘이북 가면 대접받는데 왜 여기서 술심부름이나 하고 있냐’고 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내가 이북에 갔다 왔다고 조서에 써 있었습니다. 완력으로 지장을 찍었어요. 80일 구치소에 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여섯가지 가훈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80)씨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유일하게 이어온 종손이자, 일제와 군부독재 시대 경주 최부자의 도전과 핍박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서 지난 1월14일과 22일 두차례 인터뷰를 했다.-경주 최부자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할아버지(최준)는 생전에 어른들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13대조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어른이 중시조입니다. 공조참판에 기용됐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병자호란 때 종과 수하를 데리고 경기도 용인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습니다.
우리 가문이 모두 13대까지 이어져왔는데 흔히 ‘9대(에 걸쳐) 진사, 12대 만석꾼’이라고 합니다. 다만 정무공은 청백리로 살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부자는 아니었습니다.”-부자가 된 건 언제지요?“11대조인 최국선(1631~81)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어요.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는데, 소작인들은 섣달이 되면 양식이 없어 장리를 썼어요. 장리는 양식을 빌려 두 배로 갚는 고리채였지요. 한번은 명화적(조선시대 횃불을 들고 약탈하던 강도집단)이 국선 할아버지 댁에 쳐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네 소작농과 그 자식들도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패거리가 양식은 안 가져가고 장리의 증표인 채권서류만 가져간 거예요. 이튿날 친척과 가복들은 ‘우리 덕분에 먹고살았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배은망덕한 소작놈들을 경주 부윤에 일러 처벌해야 한다고 어르신에게 일렀죠. 한참 말이 없던 국선 어르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답니다. ‘그만둬라. 남은 채권 문서도 모두 돌려주어라. 그리고 앞으로 소작료도 5할만 받도록 하겠다.’”1923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이 ‘소작료를 5할로 낮춰달라’는 것이었으니, 최국선의 결정은 자그마치 300년을 앞선 ‘진보적인’ 조처였다. 최부자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사회적 나눔이 오히려 부를 불러온다는 선순환의 사례로 이 사건을 지목한다.
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80)씨가 29일 울산 울주군 선산에서 가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염씨의 할아버지 고 최준 선생은 이 땅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기부했고,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 영남대는 이 땅을 민간에 팔아, 최씨는 묘를 이장해야 할 처지에 놓았다.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 없게 하라’
소작농에 파격적인 소작료
임시정부땐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를 세워
삼성 이병철에게 무상양도했다“최고 대학 만들겠다”던
이병철은 약속을 저버렸다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했고
박정희는 영남대로 바꾸면서
최씨 집안의 고택·논·선산이
동시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다-
어떻게 부를 쌓았습니까?“이앙법을 빨리 도입해 소출량을 늘렸어요. 땅도 많이 사들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보가 잘 유통되지 않던 시대잖아요. 경주 일대에서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농들은 경쟁하듯이 달려와 최부잣집에 알렸어요. 소작농들은 자신의 지주가 최부자에게 땅을 팔면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요. 어르신들은 그렇게 논을 사들여 만석꾼이 됐습니다.”경주 최부잣집은 조선 중기부터 경주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력 가문이 되어간다.
특히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등 최씨 집안의 육훈은 정경유착을 멀리하면서도 서당을 짓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농업과 잠업 등 실용에 집중하는 가풍을 만들어왔다.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1월29일 최염씨와 함께 경주의 최부잣집 교동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을 방문했다. 최씨는 서울에서 살지만, 이곳에 세간살이를 두고 가끔 묵는다. 최준이 묵던 사랑채 안에 들어가니 최준의 아호인 ‘문파’가 걸려 있었다.-지금 이 집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지요?“네.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1967년 영남대에 넘어갔지만 식솔을 내쫓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1959년 상경했고, 10년 전까지 어머니가 사셨지요.”-어렸을 적 집안을 드나들던 독립운동 인사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어렸을 적 최준 할아버지와 바로 이 방(사랑채)에서 함께 잤습니다. 워낙 드나드는 과객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돈을 달라고 온 사람들인데, 아무나 줄 수는 없었죠. 진짜로 임시정부에서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일제의 첩자에게 쉽게 돈을 줬다가는 당신도 잡혀가실 터이니까요.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열흘 보름 동안 과객과 술을 먹으며 이 사람이 진짜인지 따져봤습니다.내가 아랫목에서 잠을 잘 때 할아버지가 과객과 나누는 통음소리와 담배연기가 흘러들어왔습니다.”-할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98) 선생이 우리 집에 한참 숨어 살았습니다. 홍길동이나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줬답니다. 부잣집 맏아들로 컸던 할아버지는 그때 독립정신을 깨우쳤습니다.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도 경찰을 피해 자주 오셔서 오래 묵고 갔습니다. 독립운동하신 분들로 울타리가 쳐진 셈이었어요. 사촌누나 남편이 박상진(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해보니, 장인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처삼촌은 김응섭(임시정부 법무장관. 해방 뒤 김구와 남북협상파에 속했다)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할아버지 최준이 대구대를 세운 이유
최준은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에 참여하고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해 탈취한 자금을 관리하는 등 위험한 일에도 나섰지만, 동아일보·경성방직과 대구은행 등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민족자본을 키우는 데도 힘썼다. 짧은 옥고도 치렀다. 하지만 일제는 경주의 거부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민립대학인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대구대를 설립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910년 손병희 선생이 교주로 있는 천도교가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을 운영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3.1운동에 나서기 전 손 선생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보성전문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할아버지는 안희제와 백산무역을 준비하고 있었고,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여력이 없다며 인촌 김성수를 추천했지요.
이 일은 할아버지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해방 이후 대구대 설립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할아버지는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길이 남기는 길이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지주가 재산을 불리던 시대는 지났고, 후손이 재산을 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재산을 기부하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회 환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할아버지와 지역 유지들은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했고, 대구대학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952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서 피난 온 교수들이 교편을 잡으면서 계림학숙을 만드셨습니다. 계림학숙은 대구대로 들어갔고요.
최씨 집안의 고택, 논, 선산도 다 대구대학으로 넘겼습니다.”대구대학은 그런대로 운영되어 갔다. 평지풍파가 몰아친 건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였다. 최염씨는 박정희 일가와 ‘악연’이 시작된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그때 할아버지가 대구대 이사장이었고, 심계원(현재의 감사원)을 다니던 나는 4·19혁명 이후 할아버지를 모시러 대구대 사무주임으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문희석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장관실에 들어가니까 군복을 입은 대령이 권총을 차고 거수경례를 합디다. 문 장관은 우리에게 ‘대구대 학장 사표를 받아라. 60살 이상 학장, 총장은 사표를 받기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화여대 김활란, 중앙대 임영신도 사표를 냈다며 (관련 문서로 보이는) 서류뭉치를 가리키면서 말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떻게 사표를 받냐’고 할아버지가 대꾸하니까 ‘우리가 결정했으니까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는 거예요.”
-자유당 때 부흥부(1955년 설치된 중앙행정기관) 장관을 했던 신현확이 대구대 이사로 있었지요?“신현확이 대구대에서 교수도 해서 학교를 잘 압니다. 당시 삼성이 시멘트산업을 시작하려고 신현확을 영입했습니다. 신현확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대학을 운영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당시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이병철에게 제안했고, 이병철은 ‘굿아이디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한테 찾아와 ‘정말 좋은 학교를 만들려 하니까 할아버지에게 여쭤달라’고 했습니다.” 1964년 이병철 삼성그룹 대표는 차남 이창희와 함께 경주를 찾아와서 최준과 최염을 만난다.
최준은 대구대 운영권을 흔쾌히 삼성에 ‘구두로’ 넘긴다. “경주 사랑방으로 찾아왔습니다. ‘한수 이남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며 대구대를 운영하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하더군요. 할아버지는 손병희 선생이 아무 대가없이 보성전문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이병철에게 흔쾌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할아버지는 ‘자네가 잘 하고 못 하고 내가 봐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이사로 남아 있어야겠네’ 하셨고, 이병철도 ‘당연한 말씀이다, 손자도 이사를 하셔라’고 했습니다.(최준은 손자 최염의 이사직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당시 이병철은 물론이고 제일모직 사장과 상무 등이 여러 번 찾아와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병희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김성수에게 보성전문을 넘겼다. 대학에는 주인이 없는 것이다. 상거래처럼 계약서를 써선 안 된다’고 거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대구대에 계속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삼성이 대학 운영에 미온적인 것 같으니까, 한번은 이병철을 찾아가서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가보인 ‘단계연’(단계석으로 만든 벼루와 오동나무로 만든 벼루집)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편안하게 자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성은 대구대 운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진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협의 속에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했고 이어 대구대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대구지역의 또다른 사립대인 청구대는 이미 대학운영권이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사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대구대와 청구대를 합병해 영남대를 출범시킨다.
최염씨의 셋째 할아버지 최완(최준의 동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 위원을 맡았다. 최완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오래된 탓에 누구인지 가리지 못했다. 최염씨 제공
영남대 부정입학 사태로박근혜는 이사직 물러났지만2009년 사분위 결정으로박근혜 측근 이사들이 들어와
박정희리더십, 새마을정책…낯 뜨거운 이름들이 우후죽순게다가 영남대 재단에선 최씨 집안이 기부한 선산 두 곳을
민간업체에 팔아넘겼다업체는 조상묘들을 옮기라면서 이장 촉구문까지 내다걸었다
k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