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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결혼과 가정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냥 토끼 같은 자식들 낳고 오손도손 신랑과 사이좋게 살았다.
결혼 생활이라는 게 별거 있겠는가?
다 그렇게 산다.
어제 댓글에서,
남자가 결혼을 잘못하면 한 가정이 망가지고..
여자가 결혼을 잘못하면 세 가정이 망가진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편견이 편향이다.
어째서 남녀의 차이가 있겠는가?
결혼을 잘못하면 양가와 자기집 모두가 망가지지 않겠는가?
이것은 조선의 그릇된 성차별이다.
처가살이는 고구려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옥제라고 불렸다. 양쪽 집안이 혼인에 합의하면 신부의 집 뒤뜰에 ‘서옥’이라는 별채를 지어 신혼집으로 사용했고, 아이가 장성하면 비로소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제도였다.
이 풍습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초기까지 남아 있었다. 사임당의 경우도 외조부 이사온이 강릉 오죽헌에서 처가살이를 했고, 아버지 신명화도 그곳에서 사위로 처가살이를 했으며 훗날 넷째 사위에게 오죽헌을 물려줬다.
따라서 사임당이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한 것은 당시 아주 일반적인 풍습이었던 것이다.
1522년(중종 17년) 8월 20일 형제 정승인 이기, 이행의 조카인 덕수 이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훗날 사이가 소원해진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친정을 떠나 이원수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때 고향에 대한 향수와 친정을 떠나면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은 시조들은 후일 그의 대표작으로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신사임당의 사친(思親)]
ㅡ대관령을 넘으면서 친정을 바라보며 지은 시
<김홍도의 대관령>
慈親 鶴髮 在臨瀛
자친 학발 재림영
身向 長安 獨去情
신향 장안 독거정
나의 어머니는 흰 머리 되어
임영(강릉)에 계시고,
이 몸 서울로 홀로 떠나는 심정이여
回首 北村 時一望
회수 북촌 시일망
白雲 飛下 暮山靑
백운 비하 모산청
북촌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흰구름만 날아 내리고
저문 산은 어둡기만 하네
千里 家山 萬疊峰
천리 가산 만첩봉
歸心 長在 夢魂中
귀심 장재 몽혼중
천리 내고향 산들은 겹겹히 (아득하기만 한데),
꿈속에서라도 돌아가
오래동안 머물고 싶구나
寒松 亭畔 雙輪月
한송 정반 쌍륜월
鏡浦 臺前 一陣風
경포 대전 일진풍
한송정 위 아래엔 두바퀴의 달
경포대 앞에 부는 한 떼의 바람
沙上 白鷗 恒聚散
사상 백구 항취산
波頭 漁艇 每西東
파두 어정 매서동
모래언덕 갈매기는 모였다 흩어지고
고기배는 물결을 일며 동서로 오가니
何時 重踏 臨瀛路
하시 중답 임영로
綵舞 斑衣 膝下縫
채무 반의 슬하봉
언제 내 고향 임영로 다시 돌아가,
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할까
*
리크라테스가 손은 좀 보았다.
번역도 창작의 한 부분이다.^^
사임당은 평소 가끔씩 비녀에게 거문고를 뜯게 하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사임당이 평소 친정의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나 효심 또한 일시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임당이 평생 동안 한결같이 가졌던 마음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동적이다.
시댁은 파주에 있었지만 결혼하던 그해 말, 친정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한성으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한성과 친정 강릉을 오가던 생활이 많이 불편했던 그는 남편 이원수에게 특별히 한성과 강릉의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주지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남편 이원수는 유교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런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고 한다.
家和萬事成!
(가화만사성!)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이원수씨도 고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