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섬청년과 가수 김성희
나는 공군 위생병 (공군 병 268기) 출신.
1970년대 중반 무렵, 공군에 입대하여 기본 군사훈련을 마치고난 뒤,
나는 동기생 몇 명과 함께 의무 특기를 받아 우리나라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의무특기 받은 장병들이 모두 모이는 국군 군의학교에 들어가 몇 주 간에 걸친 위생병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의 그 국군군의학교는 대구시 효목동에 있었는데, 아주 오래 전에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해버렸단다.)
물론 이곳에 모인 장병들은 각 군에서 나름대로 위생병 교육을 받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지.
그때 나는 A라는 육군 친구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저 멀리 남해안 어느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쭉 살아온 그는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끝내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런 곳에 굴러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섬에서 중학교를 나왔다고 하면서도 희한하게 기본적인 영어 알파벳조차도 제대로 읽거나 쓸 줄을 몰랐다.
그래서 vocal 이라는 아주 간단한 단어조차도 읽을 수가 없어서 바로 옆에다가 토를 붙이듯 '보칼 (복칼=부엌칼?)'이라고 써놔야만 했었고,
어느 누구랑 말다툼을 벌일 때, '야 이 새X야! 그럼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잖어?' 라고 말을 한다는 걸,' '야 이 새X야! 그럼 아르바이트가 성립되지 않잖어?' 라고 크게 떠들어대어 좌중을 포복절도케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본디 군사훈련을 마치고 위생병 보직을 받아 교육생으로 이곳 군의학교에 들어오는 자들은 어려운 약품명이나 의학 용어 정도는 대강 해석할 줄을 알아야 하기에 사회에서 최소한 대학물 정도는 먹었어야만 하는 것이 기본.
그런데 어찌하여 요런 무지몽매한 친구가 당당히 뽑혀서 이곳에 들어 왔을까?
아마도 내 추측컨대, 그 당시엔 약간의 부정이 통할 수도 있었던 군사 정권 시절이었으니 군 인사 담당자가 모종의 청탁을 받고 그 친구 바로 옆에 있던 빽줄이 아주 단단한 자를 일부러 골라내어 위생병으로 뽑아내 주려다 보니 어떻게 덤으로 함께 따라 묻어서 본의 아니게 이런 곳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닐는지...
어쨌든 이것저것 거의 모든 면에서 한참 딸리다보니 그 친구는 위생병 교육 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교육기간 내내 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험을 봤다하면 그는 무조건 재시험이니 매시간 시험 성적 발표 때마다 그는 항상 앞으로 나가 원산폭격 기합 자세를 알아서 취해야만 했고, 틀린 문제 개수대로 손바닥을 얻어맞다보니 나중엔 오히려 회초리로 때려주는 조교들의 손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게 여기를 다 들어왔지?'
그 당시 교관이며 조교들은 밑바닥 최하 성적을 항상 긁어대던 그를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곤 했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성적이 아주 나쁘게 나오면 가르치는 교관이며 조교들이 상부로부터 문책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군은 무조건 까라면 까야한다는 식의 관행이 상식화 되어있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군의학교에 들어온 이상 그에게 소정의 위생병 교육을 시켜서 위생병 자격을 주어 내보내야만 했다.
(그 친구의 성적이 워낙 안 나오니까 교관과 조교가 일부러 쉬운 문제들을 골라 내주고는 자기들이 못 본 척할 테니 바로 옆 사람의 답안지를 보고서 그대로 베껴 써서 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의 이름자까지도 똑같이 베껴서 써놨다던가...)
아무튼 복날 개 패듯이 두들겨대는 주먹과 발길질에 견딜 수가 없던 그 친구는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위생병 교육을 마칠 때 즈음에는 간신히 영어 알파벳을 외웠다지만, 그러나 영어 자음모음이 한데 붙어있는 긴 단어는 제대로 읽거나 쓰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사상 유례 없이 최악의 바닥 성적으로 위생병 교육을 마치고 난 이 친구가 모 육군 의무대대로 배속된 뒤 그의 능력과 적성을 십분 고려하여 그는 제대할 때까지 약품 상자들을 나르고 창고에 쌓아놓는 일만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공군 제대를 하고 학교에 다시 복학한 나를, 이 친구가 어찌어찌 알아가지고 어느 날 불쑥 내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왔다.
그 친구를 근처 분식집에 데리고 들어갔더니 그 친구 왈,
자기가 사는 섬에 모 TV 방송국 촬영 팀이 왔었다는데, 자기가 이것저것 신경을 써서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잘 챙겨주고 또 횟감으로 쓸 고기도 잡아서 갖다주곤하니까 그들이 무척 고마워 하더란다. 그래서 그 보답을 하고 싶어서인지 그들이 서울로 떠날 때 그를 불러,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에 꼭 한 번 놀러오라. 보아하니 미스코리아출신 가수 겸 탈렌트인 김성희양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으니 우리가 정식으로 한 번 소개시켜주겠다!며 그 친구에게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그 친구(섬청년)에게 아주 간곡한 어조로 살살 달래듯이 말했다.
그건 방송국 사람들이 네가 듣기 좋게 해댄 빈말일 뿐이니 제발 섬으로 다시 돌아가라! 천하의 김성희씨가 어떻게 아무나 만나 준다든? 네가 힘들게 여의도 방송국을 찾아가 본댔자 말짱 헛일일 것이니 지금이라도 깨끗이 포기하고 어서 섬으로 돌아가라! 며 충고해주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막무가내.
내가 비록 섬에 살고는 있지만, 솔직히 인물이 빠지나 집이 없나? 그렇다고 여자 하나 데려다 먹여살릴 능력이 없나? 내 약점이라곤 학력이 조금 딸리긴 하지만 그거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두고 보라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두쪽으로 갈라진다 할지라도 기왕에 서울에 왔으니 김성희 가수를 내 색시로 만들어가지고 꼭 돌아갈 것이니께.
이렇게 말하며 그는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의 결과야 여기서 굳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 친구는 온 종일 여의도 모 TV 방송국 정문 앞에 죽치고 앉아서 가수 김성희를 만나기 위해 무진 애를 다쓰고 어쩌고 했으나 얼마 안 되어 완전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고, 결국 견디다 못한 그 친구(섬청년)는 완전히 풀이 죽은 채 섬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섬청년의 안타까운 심정이나 사정을 윤형주님께서 혹시 아셨거나 전해 들으신 건 아닐까?
그 친구의 애타는 마음을 은근히 그려낸 듯한 노래 ‘섬청년 마음’ (혹시 섬총각?)이 천재 가수겸 작곡가인 윤형주님에 의해 그무렵 나오게 되었으니. 그 노래 가사를 여기 적어본다.
비바람 몰아치던 바다가 잔잔하면
그대는 돌아오리 그대는 돌아오리
폭풍우 사라지고 어둠이 걷히면은
그대는 돌아오리 그대는 돌아오리
배가 오는 소리 님이 오는 소리
오 내 님 실은 배가 이곳으로 향해 온다네
배가 오는 소리 님이 오는 소리
그토록 기다리던 내 님 오는 소리
텁텁한 섬 총각은 바다만 바라보며
그 님을 실은배가 오기를 기다리네
하늘엔 갈매기가 발밑엔 파도소리
만나는 기다림에 답답한 마음이네
배가 오는 소리 님이 오는 소리
오 내 님 실은 배가 이 곳으로 향해 온다네
배가 오는 소리 님이 오는 소리
그토록 기다리던 내 님 오는 소리
배가 오는 소리 님이 오는 소리
오 내 님 실은 배가 이곳으로 향해 온다네
배가 오는 소리 님이 오는 소리
그토록 기다리던 내님 오는 소리
내 기억으로는 이 ‘섬청년 마음’이라는 노래가 나온 것은, 1980년도 초반 쯤이나 아니면 1970년대 말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나저나 나는 그때 그 순진무구한 섬청년과 헤어지고 난 후 이제껏 그의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그가 산다는 섬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고 그의 이름 석자 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윤형주의 ‘섬청년 마음’이라는 노래가 매스컴을 통해 어쩌다 흘러나오면
그때 풀이 죽어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돌아가던 그 섬청년의 어리숙한 뒷모습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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