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이 없다면 뿔노래도 없겠지」 / 장석주
뿔은 재능이 아니다
차라리 나의 가난이다
뿔은 고독이 세운 안테나
뿔이 두 개라면 하나에는 모자를 걸겠지
뿔은 없어도 뼈는 있겠지
뿔이 없다면 초식동물이 될 수는 없겠지
뿔이 없다면 뿔노래도 없겠지
뿔은 장미꽃 봉오리 두 송이
뿔은 침묵이 키운 야생 늑대
뿔이 없다면 뿔노래를 부를 사람도 없겠지
뿔이 없다면 단식광대처럼 굶겠지
뿔이 없다면 아버지는 미쳐서 거리를 떠돌겠지
뿔이 없다면 상심한 마음을 걸어둘 데도 없겠지
뿔은 뿔노래와 함께 온다
거기에서 여기로!
뿔은 뿔노래와 함께 온다
과거에서 미래로!
뿔은 누리에 퍼지는 태초의 평화
뿔은 영광이자 자랑!
- 장석주 「뿔이 없다면 뿔노래도 없겠지」 전문.
『꿈속에서 우는 사람』 《문학동네》
장석주 시인은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에서 멜랑콜리나 우울, 슬픔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관념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이 의식적으로 압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맬랑콜리의 이미지를 소개하자면 “추락하는 피와 빠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꽃은 우리에게 온다”(「음악」)고 서술한다. 꽃이 피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들을 애도하기 위해서 핀다고 보았다.
그렇게 본 이유는 무엇일까?
시를 쓰면서 망치로 못을 박듯이 존재의 증명을 하려고 애썼지만 구부려진 못을 발견했다. 인간은 한낱 구부러진 못에 지나지 않는다. “구부러진 못은 왜 시가 안 되는지”(「내일」) 존재의 증명을 하려 해도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의 말’에서 “시는 무, 길쭉한 공허, 한낮의 바다, 평온 몇 조각일 뿐”이라고 한탄한다.
시인이 그렇게 느낀 사유를 찾아보면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 (「여름의 끝 2」)는 선언에서 시인은 무신론자이다. 시인은 오로지 “내가 믿는 것은 중력과 기차의 운행 시간표와 충주 사과의 당도와 중국술의 알코올 도수뿐이다”(「강과 나무와 별이 있는 풍경」)고 강조한다. 시인이 믿는 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자연계의 자연 법칙인 중력과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과 충주 사과와 중국 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이 특히 위로를 받는 곳은 어디인가?
장석주의 「뿔이 없다면 뿔노래도 없겠지」를 통해서 시인의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잠재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인은 뿔을 노래한다. “뿔이 없다면 뿔노래도 없겠지” “뿔이 없다면 뿔노래를 부를 사람도 없겠지” 뿔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존재한다.
뿔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뿔은 침묵이 키운 야생 늑대”이다. 노래하고 싶어도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울부짖고 싶은 야생 늑대를 상징한다.
“뿔이 없다면 단식 광대처럼 굶겠지” “뿔이 없다면 아버지는 미쳐서 거리를 떠돌겠지”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누군가가 누군가의 등에 칼을 꽂는 행성에서/ 무명가수가 노래를 부른다”(「여름의 끝 2」)에서도 나타나듯이 죽음 앞에서도 뿔은 노래를 통해 위안을 얻기 위한 도구이며, 방편이다.
프랑스 인문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1995)는 실재성의 두 가지 측면으로 현실성과 잠재성을 언급한다. “보이는 세계가 현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들리는 세계는 그보다는 잠재성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한다. 보이는 세계는 영토성에 밀착된 색채의 세계이다. 봄에 피는 꽃은 가을이면 진다. 봄에 보였던 색채도 가을이면 사라진다, 빛과 열매가 사라지는 유한한 세상을 시인은 “무채색의 세상”(「음악」)이라고 하며, 고독한 세상을 “색채가 없는 고독”(「식물의 자세」)이라고 표명한다.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에 탈영토화가 진행되면 색채의 세계는 용해되어버리지만 음의 세계는 자율성을 갖게 된다. 들리는 세계에서 가사가 없는 음악으로 나아가 그것을 다시 추상적인 음악으로 탈영토화 시킬 때 더 세련되고 자율적인 음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들리는 세계는 사람에 따라 상이한 정서적 감응을 줄 수 있는 잠재성을 갖게 된다. 음악은 우리의 잠재성을 자극한다. 장석주 시인은 이 세상을 건너가는 동력으로 음악을 선택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작품이나 대상의 잠재적 부분 안에는 미분적 요소들, 비율적 관계의 변이성들, 독특한 점들이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음은 내면으로 침투하여 새로운 배아적 요소들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며, 환경적인 변화와 변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장석주 시인은 “음악은 눈과 불꽃을 삼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자라난다” “음악의 기쁨이 사라진다면 인류의 반은 돌연 땅에 이마를 찧고 싶을 만큼 불행해질 것이다”(「음악」)고 언술한다. “나는 부엌에서 라디오를 켜 아주 작은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게 이 세상에서 배울 진실의 전부인 것”(「강과 나무와 별이 있는 풍경」)이라고 표현한다. 더 나아가 “나는 몽골 초원에 가서/ 게르 한 채를 구해 마두금이나 켜며 살고자 한다”(「게르와 급류」)고 속내를 드러낸다. 잠재적인 것은 때로는 내적 폭풍을 일으킬 수 있으며, 때로는 내적 평안을 가져오기도 한다.
소리의 세계는 실존을 흔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소리는 내부의 소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뿔은 뿔노래와 함께 온다/ 거기에서 여기로!/ 뿔은 뿔노래와 함께 온다/ 과거에서 미래로!” 수평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하지만 수직적인 시간 이동도 가능하다.
실재성에서 음악은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적인 것은 운동 이미지인데 반해 잠재적인 것은 시간 이미지이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비해 “생성을 가능하게 하고 변화의 실재성을 보증”한다. “시간을 생성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시간을 물체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화(크로노스)인 동시에 잠재적(아니온)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뿔노래는 실제 노래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뿔은 시, 그 자체일 수도 있다.
- 감상자 이구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