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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본질과 그 결말
말씀 : 잠 6:6-11; 잠 10:4-5; 잠 20:4; ; 잠 13:4; 잠 14:23; 잠 12:11-12 등
잠언이 성경 66권에서 게으름에 대해서 가장 많이 가르치는 성경입니다. 그 비율이 70%이상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삶의 지혜를 말함에 있어서 이 게으름의 무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잠언에서 총 25곳에서 게으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총 45구절이 이 게으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자가 반복해서 말했다는 것은 이 주제가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의 게으름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서 “아 내가 게으르구나... 좀 생활습관을 고치고, 잠을 줄이고,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면서 살아야겠구나...” 그렇게만 적용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게 도전 받는 것은 꼭 성경이 아니더라도 성공한 사람들 강연이나 서점의 성공비결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도 도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아주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에서 도전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게으르냐 부지런하냐’의 문제는 어떤 의지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일차적으로 전제해야 합니다.
단순히 부지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왜 부지런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가... 그 부분을 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두신 의도를 따라서 신앙 안에서 참된 정신과 바른 자세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제대로 부지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한발 나아가서, 단순히 육적인 부분에서 부지런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의 여정에 있어서도 영적으로 얼마나 부지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영적인 적용도 필요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은 먼저 잠언 본문의 일차적인 의미로서 육적인 차원에서의 게으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게으름에 관한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서론으로 일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사람은 워낙 처음부터 일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아담이 선악과만 안 따먹었어도, 이렇게 고생 안하고 살았을텐데... 생명수 강가에서 매일 포켓볼이나 치면서 재밌게 살았을 텐데...” 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아담에게 일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고, 사명이자 축복이며, 특권이요 권리였습니다.
오늘날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의식주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에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일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 같은 데는 일부러 기계로 돌릴 수 있는 일을 장애인들 고용해서 일을 시킵니다. 그렇게 일을 하면 일의 효율이 얼마나 떨어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빌어먹고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사회에 뭔가 기여할 수 있고, 또 자기가 일한 것에 대한 보수를 받으면서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인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일은 축복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일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이 일에 대한 생각들이 달라졌습니다. 일은 하기 싫은 것이 되어버렸고, 돈벌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소원이 젊을 때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일 안하고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여가를 즐기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게을러 진 것입니다. 이 게으름이 어디서 나온 것이고, 그 결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잠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게으름의 결말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6-11)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지혜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라고 게으른 자에게 명령합니다. “보게 되면 지혜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그 하는 것”을 원어로 보면, “그녀(개미-여성명사)의 길”로 되어 있습니다. 즉 개미의 인생을 놓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여기서 제시되는 개미는 근면한 사업가의 모범입니다. “두령, 간역자, 주권자”는 지도자의 세 부류를 의미하는데, 개미는 지도자가 없고, 따라서 명령체계가 없으며, 외적인 권위와 강제가 없더라도 일을 성실히 수행하여 임무를 완수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미가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먹을 것을 여름동안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읍니다. 이것은 동의적 평행법이고 중언법입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말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름 때는 추수 때를 말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여름에 밀을 추수합니다(잠 10:5 참조). 그런데 8절에서 “예비하다”라는 말은 “확실하게 세우다, 견고하다, 안정되다”라는 뜻으로서 단순한 준비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든든할 정도로 충분히 잘 장만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으다”라는 단어는 추수하여 곡식을 곳간에 쌓아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미에게서 배우는 지혜는 모으는 지혜입니다.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입니다. 추수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실히 일해서 1년 먹을 양식을 예비하는 것이 개미의 지혜의 핵심입니다.
예전에 장막생활할 때, 집에 바퀴벌레와 개미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장난삼아 바퀴벌레를 죽여서 개미 집 앞에 놓았는데, 처음에는 개미 한 마리가 와서 발견하고 나서, 곧바로 자기 집으로 들어가더니, 그리고는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벌떼같이 달려드는 것입니다. 사실 개미 입장에서는 이 바퀴벌레가 얼마나 크고 육중한 것입니까? 거의 산만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너무 커서 안 되겠다 그냥 포기하자” 그랬을 텐데, 개미는 포기를 모릅니다. 그 큰 바퀴벌레를 수백 마리가 붙어서 낑낑 대며 겨우 자기 집 앞으로 옮긴 다음에, 입구가 작아서 안 들어가니깐, 그 바퀴벌레를 일일이 다 분해해서 자기 집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나중에 보니 바퀴벌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자기 집에 모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지혜를 발견합니다. 누가 명령하고 지휘하는 사람 없어도 일치단결하여 그 일을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힘이 없어서 그 일을 하려면 많은 수고가 필요한데, 그것을 끝까지 참고 끈기와 인내와 극기심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울 지혜는, 우리 같으면 “와~! 먹을 거다. 나와라, 먹자!” 그러고서 달려들어서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울 텐데, 개미들은 잠시 힘쓰기 위해 조금 먹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은 다 집 안으로 운반해서 창고에 쌓아놓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잠언은 세 번째 지혜에 포인트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어 치우지 않고, 모아두었다는 것입니다.
왜 개미는 먹이를 발견하면 항상 모아두는 걸까요? 그것은 먹이를 항상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으로 축적해놓아서 먹이가 없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미가 농사짓는 것도 아닌데, 추수 때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1년 내내 언제든지 곡식으로부터 알곡을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1년에 딱 한번, 추수 때에만 수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1년 내내 쫄쫄 굶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추수 때에는 발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일해서 최대한으로 많은 알곡을 수확해서 자기 곳간에 쌓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추수 때에 늦잠자고, 일 안하는 것입니다.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책망의 형식입니다. 추수철은 기회의 때입니다. 뭔가 결정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데, 게으름뱅이는 잠만 좋아합니다. 잠언에서 게으름의 가장 궁극적인 특징은 잠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름과 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100% 게으른 사람입니다. 잠을 많이 자는 사람도 100% 게으름뱅이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일수록 자기 잠을 줄이고자 애를 쓰고, 잠자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는 것이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잠을 많이 자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이룰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침에 학교를 가고 직장을 갈 때, 알람시계가 울리면, 그때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서 학교 갑니다. 왜요? 안가면 안 되니깐... 그러한 어떤 목표가 있으면, 사람은 자기 잠자고 싶은 것 참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그렇게 자기를 이끌어줄 분명한 목표가 없습니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10절 말씀은 최후의 순간까지 뒤척거리며 침대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좀더”라는 말은 뭔가 일어나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면, “좀만 더 자자” 하지도 않고, 그냥 퍼질러 잘 것입니다. 뭔가 지금 일어나야 할 때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자고 나중에 하자는 것입니다. “손을 모은다는 것”은 손을 포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어나서 열심히 추수해서 1년 양식을 예비해야 하는 목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잠이 주는 쾌락을 포기하고 싶지 않는 욕망이 더 큰 것입니다.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그렇게 할 때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세상은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잠에 취해서 빈둥댈 때 결국 인생을 낭비하여서 나중에 빈궁과 곤핍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곤핍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오직 잠언에서만 사용된 단어로서 절대적인 빈곤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핍절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강도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그의 처참한 상황은 노상강도를 만난 사람과 일반입니다. 강도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이것은 마치 운전하는 사람이 졸다가 그만 중앙선을 넘어 오는 차와 정면충돌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조금 더 자자 조금 더 자자” 하다가 그만 그 인생이 한순간에 비참한 상황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군사처럼 온다는 것은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장한 사람이 신속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격해 올 때,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고, 그리고 도착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인생은 심어야 할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세워놓으신 창조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기를 준비하고, 실력을 갖출 때가 있고, 그 실력을 발휘하여 열매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열심히 준비한다는 것은 그것에만 오로지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단순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면, 도서관하고 학교밖에 모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자기 학문의 분야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나오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까불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공부 안하고 게으르고, 빈둥빈둥 놀면서 그 기회를 놓치게 되면, 결국 나중에 나이 들어 취직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또 취직해도 별로 좋지 못한 곳에 들어가서 박봉을 받으며 평생 고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취업난이 심각한데, 물론 나라가 정책을 잘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라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기가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취업난이 아니라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다들 편한 것만 하고자 하는 것이죠. 힘든 것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힘든 일 안 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싶으면,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 공부할 때 놀고, 남들 도서관에 갈 때 자기는 PC방 가고 노래방 가고 영화보고 TV보고, 남들 좋은 대학 갈 때, 자기는 이름 없는 대학가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래놓고서는 자기 게으르고 놀았던 거 생각 안하고 모든 취업난의 책임을 국가에 돌리는 것이야 말로 적반하장의 태도입니다.
오늘 잠언 말씀에서 개미로부터 배우라는 것은 결국 미래를 생각하면서, 오늘이라는 기회가 주어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기회의 때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더 놀자 라고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결국 빈궁과 곤핍이 강도처럼, 군사처럼 오게 되는 것입니다.
(4)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5)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잠 10:4-5)
(4)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이 구절은 제유법입니다. 제유법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손이 게으른 자는 손만 게으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게으른, 곧 게으른 자를 말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지런한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게으르게 놀리다’라는 단어는 “레미야”라는 단어인데, “태만, 부주의, 느슨함”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부지런하다’라는 단어는 “하루쯔”라는 단어로, “끝이 예리한 칼, 엄숙한 결정과 결심, 열렬한 부지런함”이라는 뜻입니다.
그 인생이 태만하고 부주의하고 느슨하면 결국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에서 반짝반짝하면서, 예리하고 빠르고 민첩하게 반응하고 열렬하게 자신의 삶을 불태워 일을 하는 사람은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여러 가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늘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고 다 부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는 보편적으로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5절은 아버지 입장에서 부지런한 아들과 게으른 아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말합니다. 결국 여기서도 게으름과 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나타납니다. 추수의 기회에 때에 잠자는 자는 자기만 망할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부끄러움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부모로서 자식을 키울 때, 이 아이가 지혜로운 자로 자라도록 신앙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오직 자식의 마음에 신앙이 제대로 심길 때만이 그 자식이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참으로 부지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식이 지혜로운 아들이 될 때, 부모는 그 아들로 인해서 명예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4)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여기서 ‘가을’은 겨울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은 농한기로 쉬는 날이지만, 팔레스틴에서는 ‘겨울’이 시작될 때 ‘이른 비’가 내리면서 땅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름에 거둘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씨 뿌릴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게으른 자는 추수 때에 거둘 것이 없으므로 구걸하게 되는데,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에 떨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추수의 기쁨 가운데 풍족함을 누릴 때, 홀로 박탈감을 느낄 것이고, 자기 자존심 체면 다 버리고 구걸해도 사람들의 외면만 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마도 “굶어도 싸다...” 그렇게 안하겠습니까?
2. 게으름의 본질은 자기사랑
이런 잠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게으름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게으름의 결말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고, 가난과 궁핍과 빈궁과 구걸해야 하는 비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해서 굶어야 하는 핍절한 상태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결과가 있는 것이 게으름인데, 그러면 그런 결과가 있는데도 왜 사람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일까요? 좀 밖에 나가 일해서 돈 몇 푼이라도 벌면 될 텐데, 왜 일을 안 할까요? 그들이 풍족한 생활 자체를 싫어하고, 가난하고 싶어서 게으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풍족한 것을 원하고 가난은 죽기보다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이유는 풍족한 생활을 하려면 부지런히 일하고 수고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안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일하면 힘들기 때문에 일 안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본질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육체의 편안함과 만족을 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기까지 수고하기가 싫고, 당장에 편안한 것이 좋으니깐, 일 안하고 잠자고 쉬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자기 사랑이기 때문에 때로는 편안함보다 더 큰 육신의 만족과 쾌락이 있다면, 그것은 합니다. 게으른 자라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TV를 본다든지, 게임을 한다든지, 영화 보러 간다든지, 그런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아깝게 생각 안하는 것이죠. 드러누워서 TV 보는 것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목이 아프고, 한번 앉아서 연속극 3개를 연속으로 보십시오. 하늘을 보면 별이 반짝반짝합니다. 게임을 앉아서 몇 시간을 하면 손목이 얼마나 아프고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합니다. 때로는 잠도 안 자고, 식음을 전폐하고서 게임에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죽는 사람도 나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게임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육신의 만족과 쾌락을 준다면 열심히 하는 것이 게으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의 궁극적인 정체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잠하고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쾌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7)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잠 21:17)
(25)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 함이니라(잠 21:25)
육체의 즐거움과 기쁨을 구하는 정욕 때문에, 놀기만 하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게으른 자가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쏟아 내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력을 소진하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쏟거나, 정렬을 불태워서 무언가를 해야 되겠다는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4)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이 구절에도 보면, 게으른 자도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한자가 원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같이 원하는데, 하나는 그냥 희망사항이고, 하나는 진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게를 지고 사는 사람이 “밥을 벌어먹기 위해서 지게를 지지만 정말 힘들구나... 몸에 자국도 남고... 저 구루마가 있으면 더 편리할텐데...” 그래서 철공소에 가서 구르마 가격을 알아보니 30만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계획을 세웁니다. “매일 5만원 버는데, 4만원은 생활비로 쓰고, 1만원은 모아서 다음 달에 구르마를 사야 되겠다.” 그러고서 매일 조금씩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만원을 꼬박꼬박 모으는 것, 그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희망사항은 뭐냐 하면, 에쿠스 승용차가 옆에 딱 섰는데, “그래 저기 앉아 있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지금은 비록 지게를 지고 살지만, 조만간에 저 에쿠스를 타고 온 시내를 드라이브하면서 멋진 인생을 사는 거야...” 그것은 희망사항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라는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게으른 자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꿈입니다.
(23)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 14:23)
신체 노동과 입방아 노동 사이의 어떤 결과의 차이가 있을까요? 모든 수고는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꿈을 꾸고 말을 한 것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꿈만 꾸고 수고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어떠한 열매도 얻을 수 없고, 결국 가난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창조질서입니다.
3. 부지런함과 단순함
“강수진”을 아십니까? 세계 발레리나 계에서 이름을 알린 한국사람입니다. 얼굴도 예쁘고, 세계에 우뚝 선 발레리나입니다. 그런데 발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발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런 발은 처음 보았습니다. 발이 거의 기형처럼 되어버린 것이죠. 그 발은 그녀가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피나게 연습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한 열정에는 단순함이 있었습니다. 오직 연습, 자나 깨나 연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목표는 반드시 자기희생과 헌신과 절제를 요구합니다. 그 헌신과 절제는 단순함, 곧 Simply Life입니다.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 되는 것만 놔두고 나머지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다 단절하여 삶을 포인트 있게 단순화시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게 되었으면 좋겠다” 꿈만 꾸고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삶의 모든 것이 심플하게 재편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이 그 목표를 성취하도록 모든 것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삶을 단순화시키고, 쓸데없는데 에너지와 시간과 재능을 소비하지 말고, 오직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불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용 지불 없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하도 아멘을 잘해서, 한 목사님 “Say Amen by your life”라고 말했습니다. “입술로 아멘 하지 말고, 삶으로 아멘 하라.”라는 말입니다. 입술로 아멘 하는 것은 아무 비용이 안 듭니다. 그러나 삶으로 아멘하려면 피를 흘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볼 때, 환상 가운데서 책을 먹습니다.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었습니다.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0)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고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것은 아무 비용이 안 듭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살려면 피 흘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영적으로 게으르면 그 비용을 치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도전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말씀을 엔조이 하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때 사람들이 타락했는데, 어느 정도 타락했느냐 하면, 오직 혀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서는 다시 토한 후에 또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소화해야 살이 되고 피가 될 텐데, 오직 맛의 쾌락만을 위해 먹고 다시 토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감동 받고 도전받는 것 자체를 즐길 뿐 삶으로 체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엔조이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삶을 단순화시키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자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그런 목표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무관심하고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러한 목표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꿈만 꾸고, 비용을 지불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영적으로 파멸에 처해질 것입니다.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마에 땀이 흐르는 수고와 고통이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 세상의 질서요, 또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은 다음에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게으른 자는 비용을 지불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열매와 이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자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갈 것입니까? 자신의 게으른 삶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4. 불의한 자는 게으른 자
(11)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12)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잠 12:11-12)
(11)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여기서 “토지를 경작하다”라는 말은 땅을 갈고, 고르게 하며,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며 추수하는 모든 농사일을 말합니다. 그렇게 수고하는 지혜로운 자는 풍부한 양식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방탕한 것을 좇는 자, 곧 무가치하고 헛된 것을 좇아가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로서 결국 빈궁함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12)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그러면 지혜없는 게으른 자는 어떻게 먹고 삽니까? 바로 불의의 이를 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곧 불의한 자요 악인입니다. 악인은 수고라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정당하게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없습니다. 자신의 게으름과 불의함으로 인한 궁핍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확천금 또는 불의의 재물입니다. “불의의 이를 탐한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불의의 덫, 그물을 기뻐하고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살인과 폭력과 사기를 통해 강탈하기를 원하는 것이죠.
(18)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19)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20)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18-20)
위 구절들도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결국 게으른 자는 불의한 자이고, 왜곡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속히 부자가 되고자 하고, 요행을 바라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적은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원하고, 때로는 사기와 강탈로 불의의 재물을 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파멸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곧 부정직과 연결됩니다.
(19)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이 구절에서 게으른 자의 반대말은 부지런한 자가 아니라 정직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 게으른 자는 부정직한 사람이요, 불의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의한 사람은 모두 게으른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만연해 있는 부정직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몇 십억씩 버니깐, 저마다 다 부동산투기로 돈 벌려고 합니다. 그리고 로또 복권을 삽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벼락을 1년에 16번 맞을 확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권을 사서 그러한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뭔가 부정직하게 하고, 남의 돈이나 후릴려고 하고, 고객을 서비스대상이 아닌, 돈 버는 대상으로 한 건 해먹으려고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한번 바가지 씌워서 돈이나 뜯어낼 생각으로... 그렇게 허욕을 가지고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불의한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과는 다른 삶, 곧 정직하고 참되게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고용했는데, ‘신우회’나 조직 하려고 하고, 회사에서 교회 주보나 만들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직장생활 하면,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고, 그들은 어찌하든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박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꼬투리가 잡히면 급격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오히려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우리의 직장생활에 더 많이 힘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신자답게 기쁨으로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직장생활 해야 합니다.
옛날에 영국의 어떤 하원의원이 길을 가다가 골목을 쓸고 있는 청소부를 보았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골목을 쓸고 있는 것이죠. 하원 의원이 차를 세워서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이 큰 나라의 의원인데도, 이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든데, 청소부로 살면서 그렇게 기쁨이 충만하오? 비결이 있소?” 그러자, 청소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골목의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골목을 청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온 세계의 한 모퉁이를 정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직업전선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우리의 직업은 돈벌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일터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지런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령이 변화를 받아 새사람, 새 성품이 된 참된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그 참된 사람으로 회복되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문화명령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부지런한 자가 육적으로도 부지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직업의 소명을 가지고 그 일들을 감당해 가야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형통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보디발에게 요셉이 복의 근원이요 꼭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고용자들에게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회사 고용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길은 유능해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유능하고 성실하면 더 없이 좋지만, 최소한 유능해지는 것에 한계가 올 때는 성실해지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좀 더 늦게 퇴근하고, 남보다 적게 대접 받고 남보다 많이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서, 직장에서 내가 발령이 난다든지 다른 데로 가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신령하고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 생활하는 첫 번째 목표는 돈 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번째 세 번째 목표고, 첫 번째 목표는 세상 사람들에게 참으로 사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업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상사들, 직장동료들, 고객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크리스챤의 직업적인 소명의식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집에서 물건을 사면 허튼 것이 없고, 항상 똑 부러지는 물건이어야 하고, 모든 서비스에 천사표가 붙게 해서, 상사와 직장동료와 고객으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주께 하듯이 최선을 다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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