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자 사람들이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인 이원진과 고모부인 김세렴을 사사한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효종 2년인 1651년 할아버지 상을 마친 뒤 평생의 지병인 폐병(폐결핵)으 얻어 부안의 우반동에 와서 요양과 저술활동을 하다가 1653년(효종 4)에 아예 부안현 우반동으로 이사를 왔다.변산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은 산으로 빙둘러 있으며, 가운데에는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이렇게 경치가 빼어난 곳에 터를 잡고서 살았던 사람이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이다. 그는 이곳의 토지를 개간하여 후손들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도록 하였다.나중에 부안 김씨의 현조顯祖중의 한 사람인 김홍원이라는 사람에게 농장의 일부를 매매하면서 매매문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그 매매문서에 우반동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저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앞이 탁 틔여 있으며, 조수가 흘러들어 포구를 이룬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마치 두 손은 공손히 마주 잡고 있거나 혹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혹은 나오고 혹은 물러나 그 모습을 변화무쌍하다. 아침이 구름과 저녁의 노을은 자태를 드러내면 이곳은 진실로 선인仙人이 살 곳이요, 속객俗客이 와서 머무를 곳은 아니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장천이 북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향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서가 자연히 나뉘는데 이 장천이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종래의 정통주자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국가를 재조하려 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1654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뒤 고금의 전적 1만여 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악습을 제거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실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종래에 소홀히 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어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경제 문제의 연구에 힘썼으며, 국방을 위해 군사학도 연구했다
유형원은 특정의 학파·교설(敎說)을 추종하거나 거부함이 없이 비판적·객관적인 방법으로 고문(古文)·육경(六經)이나 고제(古制)에 접근해갔다. 즉 사물의 실제·실상에 나아가 이를 실사(實事)로서 직시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경험사실의 가치를 고전(古典)에 근거해서 확인했다. 결국 고전은 현실을 정당하게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한 근거·수단으로 원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제에의 부단한 접근자세로 인해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뛰어넘어 실리(實理)를 궁극적 원리로 착안하게 되었다. 그는 이기를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로 인정하고 사회·정치 운영에 관한 근거논리를 이것으로부터 이끌어오는 점에서는 정통주자학파와 일치했으나, 그것을 구체적인 사물·현상 등 실사의 원리로 보고 이를 실리로 대치시킴으로써 유자·식자에게 사회적 과제의 실천궁행을 요구하는 도리(道理), 그리고 경제·법제 등 사회제도를 변혁하는 원리라는 2가지 의미, 즉 도덕(道德)과 공리(功利), 이론과 실천을 포괄하는 사회법칙, 사회변혁의 이론 근거로 만들어갔다.
그는 토지소유가 공정하게 되면 모든 일이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 경제 개혁론은 곧 신분·관직·토지소유의 세습제도를 폐지하고 이에 상응해서 균전제에 기초한 농본주의·병농일치를 실현함으로써 사민(四民)으로 하여금 항산(恒産)·항업(恒業)과 '각득기분'(各得其分)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농민의 균산(均産)을 전제로 한 사회·경제 운영방안으로서 국가의 수취체계를 전적으로 '토지를 근본으로 하는' 원리로 운영함으로써 부세제도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하여 소농경영을 중핵으로 하는 농업체제를 재건하고 이 기반 위에서 자유로운 계약노동 관계로의 이행, 봉건적 신분관계의 점진적 해체, 상공업·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반계수록(磻溪隨錄)은 2670년(현종 11년)에 완성되어 176년(영조 45년)에 간행된 반계 유형원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국가체제에 관한 책이다. 총26권. 유형원의 만년의 저작으로 20년에 걸친 연구와 탐구를 토대로 49세에 집필을 완성하였다. 젊은 시절 지방을 자주 유람하면서 직접 목격한 민생의 현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은거하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며 얻은 제세구민론(濟世救民論)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계'는 유형원이 살던 우반동의 이름에서 따온 그의 호이며, '수록'이란 '붓 가는 대로 갈겨 쓴 글'이라는 저자의 겸손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