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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51년도 추계(서부 및 중서부)및 동계작전
제 1 절 개요
1. 전선상황 요약
가. 추계공세작전
1951년 봄 피아의 주력이 대결했던 이른바 춘계공방전을 통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6월 중순 캔사스-와이오밍 선까지 진출하였으나, 7월 10일에 개막된 휴전회담과 더불어 일단 추격을 중단하고 대체로 간성-한계리-양구-백암산-임진강을 연하는선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한 후 정치협상의 동향을 주시하며 확보한 진지의 보강과 주진지 전방의 주요 고지에 대한 타격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40여 일에 걸쳐 진행된 정치회담은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적은 전력을 증강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부진한 회담은 마침내 8우러 24일를 기해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유엔군 당국은 명예로운 종전과 안전한 전선의 확보를 위해 8월 하순부터 위력수색을 강화하면서 경화된 전국의 타개책을 모색하였다. 대다수의 일선 지휘관들은 강화되는 적진에 대한 제한공격을 건의 하였고, 또한 회담이 타결되어 비무장지대의 설정을 고려할 경우 현 전선의 화보를 위해서는 5km이상의 진격이 필요하다고 건의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전양락의 이점까지 감안해 공격작전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1951년 10월초부터 10월 하순까지 전개된 추계공세작전으로 휴전선 부근에 새롭게 형성된 전선에서의 전면공세였다.
이 작전의 결과, 수도사단과 제11사단으로 편성된 국군 제1군단은 북한군 제6군단을 상대로 남강 이남의 요지를 완전 장악하였고, 특히 수도사단은 전선 동측의 요충지인 월비산을 탈취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3사단과 제8사단 제7사단, 미 해병 제1사단 그리고 미 제2사단으로 가칠봉-단장의 능선-백석산을 공략하였고, 미 제9군단은 폴라선 적전으로 국군2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미 제24사단으로 금성분지를 제압하였으며, 미 제1군단은 코만도 작전을 전개해 제임스 타운선까지 약진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추계작전의 성공으로 요지 확보와 함께 휴전회담의 속개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 제10군단이 해안분지를 점령하는 등 동부전선의 방어선 개선 목표를 대체로 달성하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9월의 제한목표공격 결과를 분석한 다음 9월 25일 하계공세를 종료함과 동시에 추계공세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추계작전 지침도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종심깊은 탐색작전으로 적의 전력증강을 억제하며 잘 훈련된 유엔군이 교착된 전장으로 인해 침체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는데 있다.
1) 특공작전(코멘도)
군사령관의 작전지도 지침에 따라 아군의 추계공세도 제한목표공격에 국한 되었다. 그러나 추계작전은 비록 중동부전선에서 국군 제8사단, 미 제2사단, 등이 하계공세의 연장선에서 공격을 계속하였지만 중점이 서부전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방어선 개선에 두어졌다. 미 제1군단장은 철원-김화 지역 철로확보와 방어선 개선을 위해 타격작전이 취소된 이후 대안으로 "특공작전(코멘도작전)"을 계획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 코멘도 작전은 전선을 역곡천 남안에서 10km(소타격작전은 15km) 추진하여 방어선을 개선하고 연천-철원간 철로 및 병참선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으로 1951. 10. 3일에 실시되어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2)폴라선 진격작전
같은 시기에 미 제9군단장도 철원-김화간 철로를 안전하게 확보함은 물론 미 제1군단의 작전을 측면지원할 목적으로 적의 주요 작전기지인 금성을 통제하는데 목표를 두었으며 10월 10일에 작전을 개시하여 제1단계로 금성천(노메드라인)을 확보하고, 제2단계로 금성 남쪽 고지군(폴라라인)을 점령하여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그밖에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하계작전의 연장선에서 추계작전 기간 중 미 제2사단이 '터치다운작전"으로 10월 13일 단장의 능선과 10월 25일 1220고지(김일성능선)를 탈취하였다.
이때 국군 제8사단이 어은산 남쪽지역의 1090고지를 점령하였고, 국군 제5사단이 가칠봉 북방의 1211고지를 공격하였다. 이로서 군단은 통선골-문등리-해안분지선으로 전선을 밀어올려 방어선 개선 목표를 달성하였다.
또한 국군 제1군단도 수도사단이 월비산을 점령하고 전선을 남강까지 추진하였다.
제8군은 미 제1군단 및 제9군단이 추계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철원-김화 철로에 대한 적 포병사격의 제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으로 중부전선의 방어선을 철원 서북 송현리에서 평강 북서 1km 지점을 경유, 금성 동남 4km 폴라선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방어선(둘루스선)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제8군은 이 계획으로 제9군단이 금성을 점령하면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동해안에서 북진하는 국군 제1군단과 통천에서 연결하고 지대내 북한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해시계작전"을 계획, 11월 1일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취소되고 말았다.
나. 동계작전
1951년 9월과 10월에 걸쳐 단행된 일련의 제한작전을 통해 월비산-헤이즈선-개리선-폴라선-제임스타운선을 차례로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은 보다 유리한 지형에 따라 전선을 정제할 수 있었다.10월 25일 휴전회담의 재개와 더불어 유엔 당국과 미국은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다라 진격을 중단하고 전선을 제한하였다
따라서 지상전은 아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포기한 일방적인 조치로 인해 새로운 대진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후의 아군 작전은 진지를 강화하고 전진진지를 확보하기 위한 이른바 "공세방어"로 전환하였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진격을 정체하자 공산군은 휴전협상의 기간을 지체하면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여 시도하였고, 그들의 진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따라서 전선은 피아가 팽팽하게 대치하면서 연일 수색전과 전초진지 쟁탈전이 전개되며, 양상도 더욱 치열해졌다.
작전기간 동안 국군 제11사단이 치른 제2차 월비산 전투와 제6사단의 949고지 전투는 아군이 전선을 정리하자 적의 집요한 저항애 직면했던 전투였고, 제9사단의 281고지와 395고지 전투, 제7사단의 암동과 1090고지 전투, 제3사단의 662고지 전투, 제1사단의 두매리 부근 전투들은 전초진지 공방전 이었다.
한편 아군 지휘부는 서남지구에 출몰하는 공비들을 격멸하기 위해 수도 및 8사단을 후방직전에 전용함으로써 단시일 내에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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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분지 만곡부 해소]
휴전협상 초기부터 미 제10군단은 화천저수지에서 해안분지 남쪽을 따라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해안분지로 인하여 전선 중앙에 큰 만곡부가 형성되어 방어에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군단은 이를 제거하기 위해 7월 26일에 미 제2-38연대가 4일간의 공격으로 해안분지 서측에서 가장 높은 대우산(1178)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시작된 장마로 8월 중순까지 공격작전이 잠시 중단되었다.
우기가 끝난 8월 중순에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7사단이 화천저수지 북쪽에, 미 제2사단(프, 네 ,대대 배속)이 해안분지 남쪽에, 국군 제8사단이 서화계곡을 방어하였고, 국군 제5사단, 미 제1해병사단(국 제1해병연대 배속)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반면 적은 군단 정면의 화천저수지 북쪽에는 북한군 제5군단이, 해안분지 북쪽에는 제2군단이, 그리고 남강 부근에는 제3군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51. 8. 14일에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하계 제한공격작전"으로 해안분지 동측에서 포복작전을 실시함과 서측에서 983고지(후에 피의능선)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해안분지 서측 고지군과 동측(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능선"의 하단부인 1031고기를 공격하고, 제10군단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이 이 "J(낚시바늘)"능선의 중간에 위치한 884고지와 92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도 이미 2개월간의 교착기를 이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어서 전쟁전쟁 사상 최초로 진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남강으로의 진출]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군이 하계공세로 8월 중순에 "포복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수도사단을 서, 제11사단을 중앙, 제3사단을 동으로 하여 산머리곡산으로부터 향로봉 산맥을 따라 거진까지의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전선이 동부가 서부보다 10km 더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군단은 군사령부로부터 미 제10군단과 함께 포복작전에 참여, 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J)"의 줄기와 머리에 해당하는 924(향로봉 서북 7km)고지와 884고지(924고지 북 3km)를 탈취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군단의 좌측에 있는 국군 제8사단이 1031고지를 공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이 무렵 군단과 대치중인 북한군은 제3군단(1,15,45사)으로 향로봉 산맥 북쪽 884-월비산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강력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군단은 8월 16일에 수도사단으로 924-751고지를 점령하고, 제11사단은 884-591고지를 점령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공격은 이미 지난 7월27일에 실시하도록 계획 되었다가 장마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실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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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절 유엔군의 추계작전
1.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공산군 지휘부는 휴전회담에서 단기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연합병종작전의 수준을 향상시켜 지구작전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양측의 전황을 근거로 대규모의 기동전은 점차 감소되는 반면 진지전의 전쟁형식은 더욱 분명해져 진지공격과 진지방어가 더욱 분명해졌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바어작전에서는 반드시 적극방어와 게속반격을 실시하고, 끊임없는 진지반격 밀 소규모공격 형태를 채택하여 침범 또는 돌출된 적을 섬멸하므로써 적군을 보다 많이 살상하고 시간을 획득하여야 한다는 점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세부 방침을 확정하였다.
(가) 제 1선 부대는 예상되는 적의 공세를 물리칠 준비를 하면서 수시로 소규모로 교란하는 적을 섬멸할 준비를 한다. 동시에 적의 돌출부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소규모 적의 견고한 적의진지에 대한 공격작전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되, 이러한 공격마다 미군 1개 중대~대대급 병력을 섬멸하고 견고한 진지에 대한 공격전투의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나) 정면전선으로부터 공격하거나 동서해안에서 상륙하는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군은 방어진지의 강화를 전략과제로 삼아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 진지의 공사를 보다 강화하고 또한 동서해안의 종심방어 공사와 제3방어선 구축공사에 착수한다.
(다) 중간 수송선을 강화하고 언활한 보급수송을 보장하기 위해 전군은 즉시 양덕-곡산-이천선, 양덕-마전리-가려주-세포리선, 시변리-수안, 시변리-오리정-삭녕선, 세포리 동부지역선, 이천-옥동리선 등 전략적인 도로의 보수에 착수한다.
(2) 작전계획
중공군은 작전방침에 따라 장기전과 단기전 사상을 확립하고, 제1선부대의 소규모 작전을 적극 진행함과 동시에 진지 구조물을 강화하면서 동서해안의 해안방어에도 중점을 두었다. 유엔군의 측후방 상륙에 대한 방어는 유엔군의 해/공군력 우세와 상륙작전에 대한 경험들을 고려할 때, 중공군 전략지도상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들 중앙군사위원회는 한반도 동서해안의 방어를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해안 방어의 작전 빙침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현재 우리가 기장 고려해야 할 점은 동서해안의 방어이다. 적의 가능한 상륙을 방어하고 동서해안 측후방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을 해상에서 막아야 하고, 적의 어떠한 상륙도 분쇄해야 한다~~. 적이 상륙하거나 또는 적을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방침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가) 이를 위해 공산군은 화북지역에서 동북지역으로 이동한 제11군단과 제16군단 중 제16군단의 1개 사단으로 함흥지역의 해안방어를 강화하고, 제9병단에 배속시켜 북한군과 합동으로 함흥과 흥남지역 해안방어 임무를 담당한다.
나) 동해안 고성, 원산, 함흥을 연하는 선의 해안방어선작전 준비와 지휘를 강화하기 위해 고성과 원산지역의 ㅂㄱ한군 제7군단과 함흥지역의 북한군 제46사단을 제9병단에 배속시킨다
나. 유엔군의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유엔군측은 하계공세작전을 종료하며 목표하였던 동부전선의 방어선 개선을 일정 수준 달성한 것으로 평가하는 한편 추계공세작전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추계공세작전은 하계공세작전과 마찬가기로 휴전협상의 타결을 지원하고 아군의 방어선을 개선하면서 공산군의 공세역량 축적을 거부하기 위한 균형파괴에 중점을 둔 제한목표공격작전이 기본 방침이었다.
따라서 작전지침은 작전의 주도권을 보유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종심깊은 탐색작전으로 적의 전력 증강을 억제하며, 잘 훈련된 유엔군이 "교착된 전장(sitdown war)"으로 인해 침체상태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2) 작전계획
1951년 8월 중순 미 제8군사령관은 한 달간 지속된 장마로 인한 전선의 침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Talons 작전(맹금발톱)"을 계획하였다.
작전목표 : 현 전선을 장전-금강산-금성-김화선으로 추진한다
기본방침 : 동부전선(제10군단)의 만ㄱ독부를 수정하기 위해 동 전선을 10~15마일 북진시킨다
그 후 원산 부근에 상륙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중동부 전선에서 공세로 이전한다
그러나 이 작전의 수행은 손실이 큰 것으로 예상한 사령관은 작전계획의 실행을 취소하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수립하여 유엔군사령관에게 승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 제8군의 계획을 ㄱ덤토한 유엔군사령관은 정략적인 차원에서 제고를 요하면서 3단계 계획을 보류하고 제1.2단계만을 승인한다
제1단계 : 9월 주으로 동부전선에서 뚜렷한 목표선을 부여하지 않고 현 전선을 밀어올려 당면한 만곡부를 수정하여 제9군단의 전선을 정제한다
제2단계 : 10월에 들어서는 동부전선의공세를 중지하고휴전회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서부전선의 제1군단을 북진시킨다
제3단계 : 제1군단의 공격이 진척되면 동해안의 통천 부근에 상륙하여 김화 부근으로 동북진한 제9군단과 연계하는 새로운 전선을 형성한다
유엔군사령관의 조치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각 군단에 제한된 공격목표를 부여하고 수색활동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면소 제10군단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목표 1 : 사태리-문등리 부근의 고지군
목표 2 : 통선곡(어은산 서남쪽 4.5km) 부근의 고지군
목표 3 ; 간무봉(가칠봉 동북쪽 7.5km) 부근의 고지군
이와 같은 군사령관 명령에 제 10군단장은 다음과 같이 목표를 정하여 각 사단에 점령토록 명령하였다.
국군 제8사단 : 854고지
미 제1해병사단 : 749고지(854고지 서남쪽 4.5km)
국군 제5사단 : 1211고지(가칠봉 서북쪽)
미 제2사단 : 894-931-851(단장의 능선)
국군 제7사단 : 883고지(백석산 남쪽 2.25km)
2. 전투 경과 및 결과
가. 군사적 압력과 진지전
(1) 제1차 월비산 전투('51.10.12~10.15일)
고성
*122 적벽산
*201
*146
고봉리
*95
*350 *148
*187 포운리
사랑리 *459 월비산 *351
정월리 *208
*339
남강
*240 대강리
*203
독산리 기갑연대
26연대
(가) 전투 개요
월비산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동부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무렵, 수도사단이 '51.10.12일부터 15일까지 간성 북방의 월비산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9사단을 격퇴하고 이를 탈취한 공격전투이다.
전술적 요충지인 월비산을 탈취 및 고수하기 위한 양측의 격전으로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사단은 우세한 화력지원 아래 4일간의 공격으로로 목표점령에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은 전 전선의 최북단에 위치한 월비산을 확보한 반면 북한군은 남강 북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국군 제1군단은 1951년 9월 6일 단행된 군의 전선 조정으로 군단 서측의 방어선이 2km 축소되어 향로봉-건봉산-깔치봉-송현리에 대한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군단은 좌익의 전선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수도사단을 동해안으로 이동시켜 제11사단과 수도사단으로 주저항선을 편성하고 제3사단을 예비로 전환하는 등 사단을 재배치하였다. 이때 수도사단은 9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 제3사단 지역을 인수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8월 18일부터 8월 27일까지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한 다음 9월 8일 군의 전선 조정에 의거 군단 서측의 방어선이 2km 축소됨에 따라 향로봉-건봉산-까치봉-송현리(동해안)를 방어하게 됨에 따라 사단을 재배치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도 해안분지 일대에서 제2군단이 큰 타격을 받자 동해안에서 국군 제1군단과 대치하고 있던 제3군단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제2군단과 교대시켰으며, 동해안 지역에는 서부전선에서 재편성힌 제6군단을 투입하였다.제6군단은 에하의 제19사단을 남강 동안에, 제9사단을 고성으로부터 통천가지의 해안선에 배체하고 제18사단을 예비로 보유하였다.
이중 동해안에 수도사단과 대치하게된 북한군 제19사단은 까치봉 서북능선-월비산-351고지 부근에 주력을 배치하여 강력한 거점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제9사단은 적벽산-146고지-고봉리선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1군단장은 10월에 접어들어 군이 전개하고 있는 제한된 종심의 전선 "밀어올리기"작전의 일환으로 월비산을 확보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획득함은 물론 동해안의 적을 남강 북쪽으로 구축하기 위해 수도사단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 전투 경과
[월비산 전투일지]
제1차 월비산전투 : '51.10.12-10.15 (수도사단 기갑연대 : 북한군 제19.9사단)
제2차 월비산전투 :'51.11.18-11.24 (국군 재11사, 제5사 36연대 : 북한군 제9사)
남강 남안 고지쟁탈전(351고지) : '52.7.10-7.14 (국군 제5사 : 북한군 제47.9사)
351고지 전투 : '53.6.2-7.18 (국군 제15사 : 북한군 제3.7사)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적을 일거에 몰라내고 고지를 점령하기 의해 '51.10.12일 06시에 월비산을 공격하기로 한다.
당시 수도사단은 군단의 전선조정에 따라 동해안으로 이동, 제1연대와 기갑연대를 전방으로 제26연대를 예비로 554-고황봉-36-강정을 연하는 선을 방어토록 하였다.
사단은 이 중에서 월비산의적과 대치한 제1기갑연대로 공격임무를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월비산 공격의 사전 포석으로 351고지(월비산 동쪽 2km)-148고지(고성 동남족 3.5km)선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기갑연대는 '51.10월 10일에 사단 포병과 군단을 지원하는 미 제196포병대대 동해안의 함포지원을 받아 가경지고개-명호리선에서 돌진하여 다음날까지 7km를 진격, 351-148고지선을 확보하여 월비산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기갑연대는 10월 12일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주공인 제2대대는 동측의 148고지에서 월비산 북쪽의 350고지를 점령한 다음 이를 발판으로 삼아 남쪽으로 공격하고, 제1대대는 조공으로 곧장 261고지를 경유하여정면으로 월비산을 공격, 주공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여 목표탉취에 실패하고, 다음날인 10월 13일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재공격하여 8부능선까지 진출했으나 각아지른 절벽 위에 구측한 잔지에서 수류탄을 굴려 내리며 대항하는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시 물러났다. 반면에 조공으로 진출 중인 제1대대는 고전끝에 월비산에 접근하여 일제히 돌격하여 일각이 무너지는 순간, 엄체호에서 1개 중대의 적이 뛰어나옴에 따라 백병전 끝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날의 전투에서만 적사살 355명, 포로 14명의 전과를 올ㄹ리지만 아군도 전사 18명, 부상 77명이 발생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에비인 제3대대와 연ㄷ대 수색중대로 하여금 협동하여 161-고봉ㄹ리선을 확보한 다음 고성으로부터 증원되는 적을 견제하여 억류한라는 명령을 내렸다.이에 제3대대의 2개 중대가 350고지를 점령하여 북쪽의 210고지로부터 증원을 차단하고, 나머지 1개 중대는 수색중대와 같이 146고지를 기습하여 적벽산의 적 역습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적의 포격에 사상자가 발생하여 148고지 부근으로 복귀하였다.
연대장은 기필코 월비산을 탈취하기 위하여 '51.10.15일에 제3대대를 주공으로, 나머지 대대를 조공으로하여, 제3대대는 350고지에서 제9중대를 선두로 북쪽에서 월비산을 공격하였고 제2대대는 서쪽에서 제1대대는 동쪽에서 공격하였다. 마침 포병과 박겨포 사격이 목표지점에 명중하는 틈을 이용하여 돌격으로 월비산을 탈취하였다. 16~17 일에 적의 역습이 있었으너 모두 격퇴하고, 201-적벽산까지 확보하여 남강 남쪽의 적을 모두 격퇴하였다.
(다)전투 결과
추계공세작전으로 월비산을 탈취하고 남강까지 진출한 수도사단은 11월 16~17일에 방어지역을 좌인접 제11사단에 인계하고 후방지역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새로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호남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수도사단은 작전기간 중에 적사살 891명, 적 포로 37명을 획득한 반면에 전사 70명 부상 250명이었다.
제11사단장은 현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중인 제13. 20연대는 그대로 두고, 예비인 제9연대로 수도사단의 주저항선을 인수하도록 하는 한편, 대전차 공격대대(2개 중대 결)에 사단 수색중대를 배속시켜 월비산과 남강 이남의 전추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1개 사단지역을 1개 연대가 맡고, 1개 연대지역을 1개 대대가 맡는 상태였다.이에 군은 11월 16일부로 군예비로 야전훈련소에서 교육중인 제5-36연대를 제11사단에 배속 조치하였다.
(2) 월비산 2차 전투(제11사단, '51.11.18~11.24피탈) * 동계작전에서 세부적 명시
(가) 전투 개요
한편 북한군도 제6군단 예하 제19사단이 물러나고 제9사단이 새로이 전방에 투입되어 18일 부터 월비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전투(제2차 월비산전투)에서 제11사단은 월비산과 구선봉까지 제9연대 정면의 모든 전초를 상실하였으며 한때 351고지까지 피탈되었다가 역습으로 351고지는 회복하였으나 월비산은 회복하지 못했다.
(나) 전투 결과
이 전투에서 부대교대와 관련된 군의 지휘조치상의 문제 외에도 대전차 공격대대가 월비산에 투입될 때에 2개 중대나 결한 상태에서 전력이 부족하였으며, 월비산 및 사단 전초에 토입된 후 남강에 대한 경계가 부실하여 적의 도하를 미리 간파하지 못하고 기습공격을 당한 점 등 여러 교훈을 남겼다.
이와같이 국군 제1군단은 하계-추계공세에서 남강 이남의 지역을 확보해 방어선을 크게 개선하였고, 수도사단은 38도선으로부터 80KM 북쪽에 위치한 고성까지 진출함으로서 유엔군의 전 전선에서가장 북쪽으로 진출한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동해안에서는 적의 동계공세를 적절히 방어하지 못하고 월비산과 구선봉 북쪽의 전초진지를 빼앗김으로서 고성을 적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전 기간 중 사단은 적사살 1064명, 포로 7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49명 부상 167명 실종 28명이었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참전용 증언]
1)강석호( 수도사 제26-3-10중대) : '51. 9. 15일에 소대장으로 월비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우리 중대장도 전사하고 중대원이 30%정도만 생존했다. 연대 장교의 2/3가 전사할 정도로 아군 피해가 컸다.
2) 정배봉(제5-36연대-11중대-화기소대) : 본인은 '50. 12. 3일 입대하여 대구훈련소(동인국민학교)에서 14일간 교육받고 제5사단에 배치되었다. 우리는 제11사단 제9연대와 진지교대 했는데 351고지와 261고지 사이의 무명고지에 주둔했는데 최전방이다. 제11사단이 우리와 교대하기전에 월비산과 261고지가지 빼앗겼다.
진지교대후 수색정찰을 나갔는데 아래 계곡에 70~100여 명으로 추산되는 국군 유해가 쓰러져 있고 부패 직전에 악취가 심했는데 유해의 호주머니를 조사해 보니 전부 제11사단 제9연대 대원이었고 군번이 030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유해를 그대로 놔누고 왔고 그 후로도 유해처리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제11사단 참전용사님들은 월비산 전투에대해 언급이 없었다. 왜일까?
3)김태심(제11-9-2-8중,'19) : '50.9.1일에 입대하여 제11사단 창설과 동싱에 배치되엇다. '51년 11월에 강원도 고성 남강 전투에서 월비산전투에서 고지 점령간 약 7부 능선에서 공격간 6중대장 등 중대원들이 많이 전사했다
4) 안태진(소도사-기갑-본부 근무중대0 : '50.12.13일에 입대하여 소총병으로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가서 월비산전투에 참가했다. 당시에 공격으로 우군이 고지를 탈환하면 밤에는 적이 탈환하는 식의 반복이었다. 고지 정상에서 약 7~8부 능선상에 포탄 피해로 피아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피아 군인뿐만 아니라 노무자 시신도 많앗으며 아군 전사자는 영현처리반이 수습한 것도 있었으나 미쳐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5) 왕영도(수도-기갑연대) : '51.3.6일 군에 입대하여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수도사단 기갑연대 소총병으로 동부전선에 월비산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공격작전에 소대장.선임하사.취사병 포함 본인도 부상을 입고 후송되엇다. 피아 전사자분만아닐라 노무자 시신도 많았으나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 지역탐사는 제한됨 : 북한지역
[351고지 일대를 전면 발굴하라]
351고지 바로 앞까지 DMZ지역을 들어가 탐사를 해 봤다. 고지 밑은 구릉지역으로 당시의 집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함께 고성 전망대에 오른 참전용사님이 351고지에서 우리 철책으로 이르는 능선에는 아군이 탈출하다가 다 죽어갔고, 수습도 못했다 한다. 더욱이 마지막으로 351고지를 피탈시에는 고지에 완전한 유개호를 구축하여 방어중에 휴전의 기다림이 방심을 만들어 적의 기습에 호안에서 탈출하지못하고 절명했다 한다. 적의 화염방사기에 안에서 다 연기에 질식하고 불에 타 죽어서 유개호 가 무너지고 그대로 매장되어 버렸다 한다.
● 철책을 연하여 남강을 끼고 탐사 (앞에서 언급됨, 노전평 전투 부분)
● 건봉령의 비밀(건봉사 주지 스님과 여인)
(3) 가칠봉부근 제2차 전투('51.10.22~31, 국군 제3사단)
(가) 전투 개요
가칠봉 전투는 전선이 교착된 후 국군과 유엔군이 주저항선 전방의 주요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먼저 국군 제5사단이 미 제2사단으로부터 대우산과 가칠봉을 인수받아 전방으로 진출하여, 가칠봉 전방 1211고지를 '51.9.4~10.14일까지 공격하다 확보하지 못한다.
이어서 다시 국군 제3사단이 미 제10군단으로 배속되어 '51.10.22일부터 제5사단이 공격하던 1211고지와 그 서측 1052고지를 공격하게 된다. 미 제10군단의 중앙우익이 되어 국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전선을 인수한 국군 제3사단은 1211고지 일대를 계속 공략하였다.
공격의 목표인 1211고지는 동으로 만대리를 포함항여 소양강변의 작전로를 감제하고, 서로는 문등리 계곡까지 견제가 가능한 공수에 있어서 요충이었다. 따라서 이 고지를 장악하면 적선을 성내천 건너 매봉-간무봉을 연하는 선까지 밀어 올릴 수 있을 뿐만아니라 성내천 남쪽 일대를 장악함으로서 만곡을 이룬 전선을 정제할 수 있었다.
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2군단은 일명 "영웅고지"라 명명한 1211고지를 중심으로 2개 사단을 일선에, 1개 사단을 예비로 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51.10월 20일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된 국군 제3사단은 양구 동북쪽 11km의 골말로 이동하여 제5사단의 진지를 인수하였다. 사단은 제18연대를 우일선으로 서희령 일대의 제36연대 진지를, 제23연대로 중앙일선으로 가칠봉의 제27연대 진지를, 그리고 제22연대로 좌일선의 제35연대 진지를 각각 인수케 하여 가칠봉 서남쪽 능선-841고지 간에 주진지를 확보하였다.
(나) 전투 경과
미 제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은 '51.10. 22일 제3사단은 주저항선을 확보하면서 1개 연대를 초월하지 않는 병력을로 1051-1211고지를 탈취하여 만복부를 이룬 전선을 정제하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장은 1211고지보다 1052고지를 먼저 탈취하기로 하고 제22연대에 주진지를 확보하면서 일부 병력을로 1052고지를 탈취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제22연대장은 10월 27일 03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한다. 제1대대가 1052고지를 공격하고, 제2대대는 연대 특공대가 무명고지를 탈취하는 즉시 필요한 병력으로 이를 초월하여 B-C를 탈취한 다음 1052고지 서측방을 공격하여 제1대대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하였다.
가칠봉 부근 1052고지 전투
H
G
1211
E F
사태리
C
B 1052
A
844
국22-2대대
국22-3중 국22-1대대
미7사=국3사
달령
진고개 제22-11중 제22-9중
제22-3대대
직접지원하는 제11포병대대의 공격준비사격이 1052고지에 집중되는 사이에 연대 특공대와 제2대대는 10월 27일 ㅇ3시 30분에 무명 A고지에 대한 협공을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연대장은 06시를 기해 1052고지에 대해 제1대댈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목표 70M 전방에서 적의 최후 저항에 막혀 멈춰졌고, 중대장은 병력을 3면으로 돌려 돌격을 개시하였다.
때마침 제11포병대대와 군단 155밀리 포병대대의 포격이 집중되면서 백병전을 전개하여 적은 c고지로 물러나고 1052고지를 11시 50분에 탈취하였다. 그러나 적 1개 대대규모가 역습을 감행하여 결국 20시에 1052고지 남쪽능선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제2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으로 05시 30분에 증강되 5중대로 무명고지 A고지 공격에 나서, 연대 특공ㄷ대와 협공으로 정상을 탈취하였다. 이어 중대는 B고지로 공격을 전환하여 탈환하고 다시 C고지로 향하였으나 적의 저항으로 세차레의 공격에도 실패하고 20시 30분에 다시 ,A고지로 철수하였다.
다음날 11월 28일, 연대장은 1052고지에 대한 탈환을 제1대대에 지시하였다. 제1대대 제3중대는 진내전과 백병전을 벌이며 08시 50분에 1052고지를 다시 점령하였다.
가칠봉 부근 1211고지 전투
서희리
쌍두동
국18-1대 H
G 국18-3대
서희령 국18-5중
1211` 국18-3중
E F 국18-2중
국18-1중
D 국18-1대 국3사=미 제1해병
국23-1대 국23-3대 국3-23연=국3-18연
국3-22=국3-23
가칠봉 부근 1052고지 전투
H
G
1211
E F
사태리
C
B 1052
A
844
국22-2대대
국22-3중 국22-1대대
미7사=국3사
달령
진고개 제22-11중 제22-9중
제22-3대대
한편 새로운 명령으로 1052-무명 C고지 확보를 부여받은 제3대대는 백병전과 진내전을 거듭하며 1052고지의 탈취로 적이 물러나기 시작하여 고지를 탈환했다.
다시 사단은 제23연대로 하여금 제18연대의 1개 대대를 통ㅈ제하여 1211고지를 탈취하도록 명령했다. 1052고지를 탈취한 제22연대는 1211고지의 서남쪽을 게속공격하여 당면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에 제23연대장은 제3대대를 주공으로 10월 28일 05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G-H일대를 탈취한 대대는 1211고지의 동북쪽 능선으로 우회하면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은 거점을 형성하고 수류탄으로 대대의 접근을 저지하였다.이에 대대는 포병지원과 75MM무반동총, 3.5"로켓포로 적을 집중 공격함며 9시간의 고지 탈환에는 실패하고 가칠봉 동쪽 1KM지저의 1006고지에 집결하였다
한편 서희리 일대를 탈취하고 제23-3대대 지원임무를 맡은 제18-2대대 서희리 일대를 확보하였으나 연대의 명령으로 서희령으로 철수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29일, 연대장은 제1대대에 F고지를 탈환 후에 1211고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새로 배속된 제3-18-1대대에 고지 G-H를 점령한 후 제23연대 제1대대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가칠봉의 주진지를 제3대대에 인게한 제23-1대대는 목표를 탈환한 후 1211고지를 향해 공격했으나 역시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다시 F진지로 물러나야 했다.
이에 사단장은 기필코 1211고지를 점령하려 군단에 항공지원을 요청하고, 제23연대장 김종순 대령은 10월 30일 제1대대를 F의 서쪽능선을 따라 정면으로, 배속된 제18연대 제1대대를 동북쪽으로 우회시켜 공격했으나 오히려 적이 F고지탈취를 기도하는등 쌍방간에 공방전을 게속하다 일몰로 F선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하였다.
한편 무명 H-G-F를 확보한 제18-1대대는 1211고지를 향해 공격을 진행하다 제23-1대대의 공격차질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원진지로 복귀하게 된다.
공세로 이전한 북한군이 예비전력까지 투입하여 10월 31일 새벽에 H-G-F선을 기습하여 결국 치엻란 공방전이 벌어져 F선을 점령한 상황에서 적의 역습을 저지하고, 제18-1대대는 원대 복귀하게 된다.
(다) 전투 결과
사단은 '51.10.31일부로 1211고지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11월 2일 제23연대를 우일선, 제22연대를 좌일선으로 하는 뉴 미네소타선상의 주진지를 조상하고, 고지 H-G-F와 1052고지 C의 전진진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제18연대는 사단 예비로 현리 부근에서 새로운 공격준비를 하였다.
반면에 적은 주 전진 거점을 상실한 가운데 주거점인 1211고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북한군 제2사단의 에비인 제4연대의 증원 알래 고지 H-G-F에 대한 역습을 게속히였다.
이후 사단은 육본 지시로 미 제10군단에서 육군 직할ㄹ로 배속이 변경되어 미 제7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였다.
당시 사단은 적 사살 502명, 포로 19명이었고, 손실은 전사 132명 부상 182명이었다.
(4) 어은산 전투('51.10.6~10.28)
(가) 전투 개요
백석산을 확보한 국군 제8사단은 해안분지(펀치볼) 서벽 일대의 주보급로에 대한 적의 위협을 제거하고, 사단 정면에 위치하여 미 제10군단의 좌익 진출을 저해하는 고지군을 장악하기 위해 공격을 계속하였다. 천연의 장벽인 이 고지군은 사단의 우측에서 백석산-1050-1120-1220-어은산(1277)을 연해 북쪼그로 이어지는 능선과 좌측의 북한강 상류 동안에서 동북쪽으로 연결된 892-922-1065-977-1090-1220을 잇는 능선이다.
이 무렵의 전황은 우인접인 미 제2사단이 피의 능선을 초월하여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띠라 사단의 작전은 군단의 조공으로서 주공인 미 제2사단을 좌측에서 엄호하고, 우측 미 제9군단의 우익인 국군 제6사단이 노매드선 진출에 호응하여 문등리-어은산을 목표로 하는 제한된 진출선을 북상시키는 것이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12사단괴 제32사단으로, 아군의 공격으로 진투력이 상당히 저하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제12사단은 제2차 백석산 전투에서 1개 연대가 괴멸하다시피 하여 백석산-1050-1220 고지 일대와 1005고지 서남능선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급편하였다. 또한 군단의 우익인 제32사단은 743-650고지에 주력을 , 922-891고지에 제2연대 주력을ㄹ 배치하여 1220고지-1090고지 능선을 주저항선으로 어은산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51.10. 10일에 중공군 제20병단 제68군 예하 제204사단과 임무교대를 한다. 특히 이 사단은 2개월간 야전훈련을 마치고 '51.5월에 압록강을 건넌 후 원산에서 해안경비를 담당하다 현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어은산에 op를 설치하고 우일선에 제612연대를 , 중앙에 제611연대를 . 그리고 좌일선에 제610연대를 각각 배치하였다. 이들의 병력은 약 5,00명수준이었다.
적의 의도는 전략적 요지인 1220-1090-1065고지 선을 확보하는 한편, 국군 제8사단에 빼앗긴 백석산-1024고지 섲ㄴ을 탈환하여 문등리로 이어지는 주 보급로를 차단, 미 제10군단의 전면적인 진출을 저지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 전투 경과
'51.10월 해안분지(펀치볼) 서벽의 진출선을 북상시키기 위해 미 제2사단을 군단의 주공으로 한 미 제10군단장은 백석산-894-892고기 선을 확보하고 있는 국군 제8사단에 '51. 10. 6일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1050고지 점령과 922고지와 726고지에 강력한 정찰대를 파견하여 정찰기지를 설치하고, 군단 명령시 곡내-1220-1065고지 일대를 점령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피의능선을 초월하여 단장의 능선방향으로 진출 중인 군단 주공을 좌측방에서 엄호하는 동시에 백석산을 거점으로 공격정면의 어은산 선까지 공략하여 북한강 상류를 사이에 둔 좌인접 미 제9군단의 금성진출에 호응하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제8사단장인 최영희 준장은 3단계로 구분하여 목표선에 진출토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가) 제1단계 : 적의 주저항선을 공략하는 전진 거점을 확보하기 제10연대는 1050고지군을, 제16연대는 620-650-730-743-752고지을, 제21연대는 922-891-726고지군을 점령토록 하였다. 당시에 좌인접 국군 제6사단이 북한강 서안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미 제2사단이 110월 5일부터 1065-867-문등리 일대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게 되어 있었다.
주 목표인 1050고지는 1220고지에서 백석산으로 뻗어내린 능섡의 중간에 위치한 동서 양면으로 급경사를 이룬 고지이며, 정남쪽으로 백석산까지 곧바른 능선을 이룬 감제고지이다
명령에 따라 제10연대는 10월 6일 06시에 1050고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4시간이 경과한 싯점에 백석산 북쪽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항공지원과 포벼와력에도 더이상 진전이 어려워 사주방어에 들어간다. 같은 시간에 제16연대와 제21연대는 공격목푱에 대한 위력수색을 실시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제10연대는 다음날, 10월 7일 06시에 다시 공격을 실시, 협곡과 공격진로가 적에게 노출되어 항공지원과 2,000여 발의 포탄사격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다시 사주방어에 들어간다.
다시 10월 8일 06시에 제10연대 제3대대는 인법부대의 엄호와 화력지원아래 고지 중턱까지 진출하지만 , 적이 더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중간 목표인 1088고지와 1005고지를 점령하고 1050고지 공격에 돌입하였지만 실패하고 다시 1088고지로 물러나 사주 방어에 들어갔다. 이날도 제16연대와 제21연대는 부여된 목표고지 부근에서 중공군 일부와 가벼운 교전을 실시하였다.
10월 9일, 다시 06시에 1050고지에 대한 공격에 들어갔다. 진로가 노출되어 일부 병력의 손실이 발생하는 가운데, 미 공군 2개 편대가 근접지원을 하고 3개 포병대대가 2,700여 발의 포격지원 석에서 결국 적의 저지선을 넘지 못하였다.
한편 전투정찰과 위력수색을 실시하던 제16/21연대는 이날(10.9일) 오후 2시!4시경에 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5군단이 중궁군 제68군 예하 제204사단과 교대 중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바로 전 정면에 대한 공격지시를 내렸다.
제16연대는 10월 11일 04시를 기해 목표 621-650-743-752를 확보하라
제21연대는 10월 11일 04시를 기해 목표 922-891-726를 점령하고, 대전차공격대대를 10월 10일 17시부터 배속한다
제10연대는 계속 1050고지 공격을 계속한다.
어은산지역 분석도
금 강 천
송 거 리 천
제3단계 진출선
북 899
843
650 수
1273
949 우두산 가바우골 어은산 1277 수청리 제2단계 진출선
979
883 입
술구네미 통선골 819
한 천
국6사=국8사
1220 제1단계 진출선
군들 내곡
서당골 국8=미2사
1064 백석산
강 국8-21연=국8-16연 국8-16연= 국8-10연
이에 따라 제10연대장 정강 대령은 4일간의 격전을 거듭한 제3대대를 중앙 예비로 두고 우일선과 좌일선에 제2대대와 제1대대를 각각 전개시켜 10월11일 06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하여, 항공지원과 3개 포병대대의 포병지원을 받으며 목표 1050고지의 전진 거점인 무명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10월 11일 미 제5공군 소속 F4U 및 F-51 5개 편대는 1220고지와 , 726고지에 대하여 5회에 걸쳐 토켓포 76발과 각정 포탄을 투하하는 동시에 50MM기총소사로 근접지원하였다. 또한 포병은 미 제300포병대대 등 3개 대대가 3,100여 발을 포탄을 집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10연대는 목표 돌격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이 당시에 적은 1,000여 명으로 고지의 주요 위치에 진지를 구축한 채 자동화기와 박격포의 집중화력으로 저항하였다. 중앙에서 진격하던 제1대대 제2중대장 이금영 중위가 적진 20M에서 돌격조를 직접 지휘하여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수류탄으로 파괴하였다. 결국 17시 20분에 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중앙의 제16연대장 이존일 대령은 11일 04시에 620-650-743-752고지에 대해 공격을 명령하였다. 제1대대는 73 752고지 150M 전방까지 진출하고, 제3대대는 650고지 중턱까지 진출하여 적의 저항에 진출이 여의치 않았다.
한편 좌일선인 제21연대 연대장 전부일 대령은 제1대대로 922고지를 확보하고, 제3대대로 726고지를 확보토록 하였다. 그러나 적이 수류탄을 굴려 저항하고 지형이 급경사로 인해 저지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다음날인 10월 12일에 사단은 미 제5공군 소속 전투기 4개 편대의 4차에 걸친 근접지원과 3개 포병대대의 포격지원알래 목표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제10연대는 ㅁ비 제2사단과의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1005고지를 인수하고, 제1대대를 1050고지에, 제2대대를 백석산 주진지에, 제3대대를 백석산 서남쪽 능선에 배치하여 제2단계 작전에 대비하였다.
제16연 제1대대가 목표 752고지를 점령했으나 적의 역습에 밀려 8부 능선에서 방어태세에 돌입하였다. 반면 제3대대는 620고지와 650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제21연대 제1대대는 짙은 안개응 이용하여 은밀하게 목표 922고지에 접근하여 탈취하고, 제2대대는 891고지 공격에 나서 제1대대가 목표 922고지를 점령하자 , 16시에 922고지를 초월하여 922고지 북쪽의 967고지의 적 중대규모를 돌격으로 물리치고 17시에 확보하였다. 목표 726고지 확보에 나선 제3대대는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09시 30분에 목표를 점령하여 891-922-726고기를 연하는 능선을 확보하였다.
(나) 제2단계 작전 : 전면공격으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고 판단한 제8사단은 10월 13일 06시에 제2단계 공격작전을 명령하였다.
제10연대는 목표 730-1120-1090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적의 증원을 저지 격파하라
제16연대는 목표 730-977-1054고지를 점령하라
제21연대는 목표 1065-920고지를 점령하라
명령을 받은 제10연대장은 공격 1선에 제2대대를, 엄호부대로 제3대대를. 연대 예비로 제1대대를 편성하여 1050고지에 배치하였다. 10월 13일 07시를 기해 제1차 목표인 112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제2대대는 전진기지인 1025고지를 공격하는데 유리한 고봉을 점령하여, 백병전으로 중대 규모의 적을 무찌르고 고지를 확보하였다.
한편 제16연대장은 제2대대에 목표 977를, 제1대대에 목표752-1054고지를, 제3대댕에 목표 730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각 대대는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전 중에 모든 목표를 점령하였다.
사단의 좌일선인 제21연대는 현 진지를 게속강화하여 적의 반격을 봉쇄하는 동시에 목표 1065-920선을 신속하 점령하기로 게획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제2대대를 주공으로 하고 제2/3대대는 현진지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10월 13일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17시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적진 50M까지 접근에 성공했으너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처하였다.
제2단계 작전 이틀째인 14일, 제10연대는 목표 1120을 제2대대에, 목표 730을 제3대대에 부여하고, 짙은 안개를 이용한 제3대대는 은밀하게 계곡을 건너 15시 30분 무렵 묙표를 탈취하게 된다. 반면 제2대대는 전날에 이어 1025고지를 공격했으나 고지 중턱에서 돈좌되어 진지 재편성에 들어갔다.
한편 중앙의 제16연대는 목표 1054와 목표977를 공격하였다. 연대는 3개 대대를 공격일선에 참가시켜, 제1대대는 제21연대 제2대대의 1065고지를 공격을 측방에서 지원하던 중 제21연대가 1065고지 점령에 성공하자 15시를 기해 동북쪽 능선을 따라 공격하던 중에 고지 정상의 서남족 능선에서 적의 저항과 일몰에 동남쪽 능선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목표 977고지를 공격하던 제2대대는 백병전으로 18시경 고지를 점령하였으며, 1054고지를 공격한 제3대대는 8부 능선에서 돈좌되어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목표 1065를 공격하는 제21연대는 제2대대가 공격에 제5중대장 최한규 중위는 10명의 돌격조를 직접 지휘하여 고지를 점령하였다.
전날에 이어 15일에도 각 연대는 몰표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계속하였다.
제10연대는 제2대대에 1120를, 그리고 730고지를 확보 중인 제3대대에 1090을 확보토록 명령하였다. 각 대대는 15일 07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당일 17시 50분 겨에 어은산 방어의 주저항선인 1220-1090-977고지 선을 장악하였다.
한편 중앙의 제16연대는 제1대대에 1054고지를, 제3대대에 931고지를 확보토록 하여 02시 40분에 작전에 돌입한 각 대대는 1054고지를 탈환하고, 931고지 동쪽 능선까지진출하였다.
좌익의 제21연대는 목표 920-748에 대해 제3대대에 임무를 부여하였다. 대대는 1065고지를 초월하여 약 2시간 후에 백병전과 수류탄전을로 격퇴하고 1065-527고기 잔의 능선 일대에 주저항선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단은 1090고지와 748고지를 점령하고 진출선을 북상시킴으로서 군단에서 부여한 공격목표를 훨신 초월하여 어은산 선을 지향하였다. 반면 중공군 제204사단은 주저항선을 상실하고 1090-931-680-391고지 선에 새로운 급편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미 제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은 미 제2사단이 "단장의 능선:"을 점령함으로서군단의 중앙진출이 안정되자, 좌인접 미 제9군단의 금성진출에 호응하기 위해 신속한 북상 진출을 사단에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사단은 1220고지-1090고지-1277고지를 잇는 능선으로 주공을 지향하여 전면적인 공세를 전개하게 되었다.
제16연대는 진출선인 도피막 일대에서 10월 16일 06시를 기해 목표 931고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11시경 목표에 도달하였으나, 바우골 능선으로부터 적의 역습에 밀려 7~8부 능선으로 철수하였다.
제21연대는 목표 680-319를 공격하기 위해 제3대대에 임무를 부여하여 16일 07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12시 30분경까지 목표 고지를 점령하고, 연대 수색중대가 북한강 북안으로 북상하던 중 목표 391고지를 점령하고 삼막곡 일대를 장악하였다.
사단은 제21연대가 680고지와 391고지를 점령하자, 제16연대의 공격목표인 931고지 공략에 중점을 두었다. 제16연대는 17일 07시 40분에 공격에 돌입하였으나 3회에 걸친 돌격에도 적의 집중화망에 걸리고 일몰로 인해 서남단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10월 18일, 사단장은 제16연대의 931고지 공략을 격려하는 한편, 제10연대에 1090고지를 재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적은 문등리-1090-암동-931고지 선에 최후방어선을 확보하고 미 제10군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1090고지 일대에 병력을 중점 배치하였다. 1220고지로 진출해 미 제2사단 제38연대로부터 고지를 인수한 제3대대는 13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강력한 화력집중에 공격을 중단하였다.
제16연대는 931고지 공격을 위해 우일선에 제3대대와, 예비인 제2대대마저 공격제대로 편성하였다. 유엔 공군의 근접지원하에 고지 정상에 근접한 대대는 결사조를 편성하여 5차에 걸친 육탄돌입으로 17시경 적 주진지의 좌단 일부를 점령하였다. 한편 중앙의 제1대대도 연속된 돌격으로 진지 일부를 탈취하였으며, 좌일선의 제2대대도 돌진을 거듭하여 21시 50분에 수류탄과 백병으로 적의 교통호를 장악하였다.
한편 전날에 이어 1090고지공격에 나선 제10연대는공격제대인 제3대대가 제16포병대대와 미 제5공군 전폭기 2개 편대의 지원을 받으며 1090고지 남쪽 연봉에 이르렀으나, 적의 집주오화와 측방사격으로 더 이상 공격을 중단하고 사주방어에 들어간다.
적의 주진지 일부를 점령했던 제16연대도 야간에 적의 역습을 물리친 후 다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5공군 잔폭기의 근접지원과 대대별 협조된 공격으로 931고지를 15시경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다.
이에 사단은 3단계 작전의 최종목표인 1090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력을 경주했으나 폭우로 인한 기상조건으로 포병과 항공근접지원이 중단됨으로서 부득이 작전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기상조건이 개선되어 10월 27일 제10연대는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고지 남쪽 300M능선을 점령한 다음,,다음날인 28일07시에 목표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미 제5공군과 포병의 지원하에 정오 무렵 목표인 1090고지를 점령했다.
(다) 전투 결과
이번 전투기간 중 제1단계 작전에서 타격을 입은 북한군 제12사단과 제32사단은 중공궁ㄴ 제204사단에게 진지를 인계 후 원산방면으로 철수하여 부대 재편에 착수하였다. 중공군 제204사단도 사단의 연속되는 공격으로 어은산(1277)과 949고지로 철수하여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1277-900-949고지 선에 새로운 방어서능ㄹ 구축하였다.
반면 국군 제8사단은 23일간에 걸친 3단계 작전 기간을 통해 10월 28일 최종 목표인 1090고지를 점령하여 1090-931-암동-319고지로 이어지는 진출선에서 우일선 미 제2사단과 좌인접의 국군 제6사단의 진출에 호응할 수 있었다.
이후 사단은 11월 20일 작전지역을 제7사단에 인계한 후 백야전사령부에에 예속되어 서남지구 공비토벌 적전에 참여하였다.
작전 기간 중에 사단은 적 사살 1,472명, 포로 106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245명 부상 1,160여 명 실종 14명이었다.
*서부전선과 중서부 전선의 추계 및 동계작전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음
연천-철원지그 병참선 확보와 코만도 작전, 금성지구 확보작전(김화-금성진격ㄷ전.금성천-교암산 전투, 동계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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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바라본 한국전쟁
가. '51. 하.추계 공세 막다(P329~)
[25일만에 모든 도로를 개통했다]
유엔군이 진행하려다 기상악화로 몇 번씩 연기된 하계제한작전의 영향은 당시 중공군의 입장에서도 많은 피해가 일어낫다고 홍학지는 기록하고 있다.
'51. 7월 20일, 이날 부터 엄청난 장맛비가 며칠간 계속됐다. 강의 수위가 보통 3-4M씩 11M까지 불어나는 강도 있었다. 모두들 40년래의 최대의 홍수라고 아우성이었다.
중공군의 수많은 창고와 야전병원이 물에 잠겼고, 고사포진지도 있는 그대로 유실됐다. 북조선에 있는 2백 5개의 교량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삼등의 고사포대 병사들은 홍수가 갑자기 밀어닥치자 제때 피신하지 못해 전봇대에 올라갔다. 그러나 물이 물어 전봇대로 피하는 것도 잠시여서 1백 67명이 익사했다. 그토록 고생하며 후방에서 실어온 물자. 가까스로 공습을 피해 보존해 온 트럭들이 사정없이 홍수에 떠내려갔다.
[미군, 국군의 여름 가을철 공세]
"8월 18일, 미군. 국군 33개 사단이 엄청난 홍수피해와 공습에 의한 질식전의 위기를 맞은 틈을 타 북한강 동쪽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80KM의 전선에 공새를 시도했다. 바로 그들의 "여름공세"의 시작이다.
8월 22일, 그들은 중조대표단 숙소에 포탄을 퍼부었다. 당연히 회담은 중단되었다. 동부전선의 조선인민군은 양식과 탄약이 달리는 어려운 사정임에도 참호를 구축해 방어전을 펴는 등 최선을 다했다.
9월 1일, 그들은 대대, 연대 병력을 동원해 조선 인민군이 지키고 있는 항령, 두밀리 북쪽의 773고지(상대는 피의 능선이라함), 대우산 북쪽의 가칠봉, 1211고지와 가잔리 북쪽의 진지로 밀려 들었다. 9월 8일에 이르러 상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우리의 부분 전초진지를 점령하는데 그쳤다. 9월 9일 국군 8사단은 매일 1개연대를 동원해 전투기와 명렬한 야포지원을 하면서 황기와 송어우얼에 이르는 4KM의 아군진지를 계속 공격했다. 이 지역은 인민군 제3군단의 1개 연대가 방어를 계속했다. 낮에는 내주고 밤에는 도로 찾는 격전 끝에 4일 동안 꿈적도 하지 않았다.
14일 상대는 또다시 공격중점을 도미현에서 노전평까지의 4KM 구간에 매일 4,5개 대대를 교대로 공격시켰다. 인민군 제3군단은 4일간 이 격전에 전혀 땅을 내주지 않았다.
9월 18일까지 상대는 두밀리 북쪽의 851고지에서 1211고지까지의 계속하여 공격해 10월 중순까지 밀어붙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 서는 공격을 멈추었다. 상대는 851고지를 공격하면서 사상자는 엄청나면서 장악하지 못하자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쯤 이르러 상대가 동부전선에서 일의킨 여름철 공세는 드디어 우리의 조선 인민군이 분쇄한 것이다."
"미국합동참모분부의장 브래들리는 "이번 공세는 시기. 지점. 상태 등을 모조리 잘못 선택한 패전이었다고"고 말했다"
"상대는 여름철 공세가 아군에게 저지당하자 단념하지 않고 이번에는 서부전선에서 "가을철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이번에는 공격중점을 바꾸어 지원군 방어진지를 집중공격했다.
10월 3일 상대는 영연방사단과 2개 미군사단을 집중시켜 서부전선의 아군 제64.제47군 정면 방어 고지를 공격해 왔다. 아군 제64군 방어 정면을 공격한 상대는 영연방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5연대 일부로 공격중점을 고왕산. 마량산이었다. 상대는 매일 1.2개 연대 병력으로 아군을 맹렬히 공격해 4일 오후 고왕산과 서족의 227고지를 지키던 부대 주력이 철수했다. 10월 5일 상대는 공격 중점을 마량산과 서남쪽 217고지에 두고 매일 1개 연대 이상의 병력과 전투기. 야포의 맹렬한 지원을 받으며 교대 공격으로 마량산을 지키던 아군은 다섯 번이나 빼앗기기를 되풀이 했다. 217고지를 지키던 아군 1개 중대는 갱도모양으로 된 엄페부, 즉 2개의 고양이귀모양의 땅굴끼리 서로 통한 말발굽모양의 방공호에 몸을 숨겨 하루에 20여 차례의 상대 공격을 물리쳤다. 아군은 적은 희생으로 상대를 대량으로 살상해 처음으로 당굴의 우월성을 실감했다. 격전은 8일 끝났다. 상대의 인명피해가 심해 공격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천덕산과 418고지를 지키던 제47군 141사단 1개대대는 매일 상대 2개 연대의 맹공에 맞서 10여 차레 공격을 물리쳤다. 진지가 포탄에 의해 초토화로 변했으며 부연대장 1명만이 남아 10여 명의 부상병을 이끌고 끝까지 진지를 지켰다.
이번에 상대가 일으킨 "가을철 전역"은 1개월 가까이 진행됐다. 아군은 각 방향마다 밀려드는 상대를 물리쳤는데 동서 양 전선 모두 상대 7만 9천여 명을 살상했다. 피아 간의 인명피해는 3대 1 비율이었다.
상대는 여름, 가을철공세를 게속하여 시도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었다. 미국 측은 회담석상에서 얻지 못한 것을 전쟁터에서도 얻기 힘들다는 것을 깊이 개닫고 도로 회담테이블로 돌아와야 했다."
나. 한국전쟁 기간에 소련이 중공에 지원한 군사 전력(P310~
한국전쟁기간 소련은 중국에 64개 육군사단, 22개 공군사단의 장비를 제공했다. 대부분의 장비는 유상(할인가격포함으로 제공한 것이다. 전쟁기간 스탈린의 특별허가로 소련은 여러 차레 무상으로 무기장비의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1950년 소련 공군은 미그15전투기를 갖추었지만 중국측이 이 전투기를 사들일려하자 소련측은미그9전투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측에서 미그9의 성능이 미국의 F-84전투기보다 떨어진다고 지적하자 소련대표는 화를 벌컥 내며 "사회주의 소련이 생산한 무기의 우월성에대해 감히 회의를 품느냐"고 언성을 높혔다. 결국 이 문제는 스탈린에게까지 보고 돼 스탈린이 자국 협상대표에게 화를 내며 무상으로 미그15기전투기 372대를 제공토록 했다.
1951년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37개 보병사단의 장비를 구매한 뒤 조선인민군의 장비가 부족함을 고려하여 이 중에 2개 사단 장비를 조선인민군에 제공했다.
다시 스탈린이 이 소식을 듣고 중국에 20개 사단의 장비를 무상으로 제공햇다. 1952년 겨울 중공이 유엔군의 상륙저지 준비에 바쁠 대에 소련측은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어 무상으로 일부 장비를 제공했다. 그러나 교섭때마다 소련측의 태도가 바뀌어 중궁측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중공의 재정이 어려워 소련측은 일부 현금아닌 차관 형식을 취했는데 이자율이 연리 1%였다. 이런 것은 평화시에는 특혜를 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중공이 엄청난 희생을 칠며서 무상으로 인력. 재력을 털어 넣는 마당에 일일이 돈을 챙기려는 소련측의 태도는 납득하기어려웠다는 것이 중공측 주장이다.
다.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 ?
'51. 8월-9월의 홍수와 미군의 맹렬한 공중 폭격이 게속되어 동부전선의 제20병단은 엄청난 식량난에 허덕인 모양이다. 헤엄에 능한 병사를 골라 머리에 양식을 이고 청천강을 건너게 하기도 하고, 밤에 가교를 임시로 가설해 물자를 옮기게 한 뒤 낮에는 임시가교를 없애 미군전투기의 눈을 속이기도 햇다. 또 강을 건너는데 쓰이는 나룻배를 있는 대로 긁어모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음식을 말려 부피가 최대한 줄어들도록 했다.
당시 식량 사정이 극도로 어려워 후방부대도 양식이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조선 현지 관청과 협의하에 조선의 시골에서 식량을 빌리기도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51.9.18일 평양으로 홍학지가 들어가 김일성을 만나 대책을 협의 했다.
이로인해 11월부터 북한정부는 황해도의 재령 신주 전주 신원리 온정리에서 식량 4만 톤을 공급했고, 평안 강서군에서 식량 4천톤, 함경도 함흥. 영흥에서 식량 1만 톤을 떼어냈다.
[조선에 상점을 개설하시오?]
여기서 중요한 내용 하나는 김일성이 조선에 상점을 개설하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상점을 개설해 중국 물건을 팔아 어느 정도 조선화폐를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지원군이 조선에서 식량과 부식을 살 수 있고 조선화폐의 유통을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고 하다"는 제안 이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져서 지원군은 평양.사리원.양덕. 성천.구장.안주. 정주. 희천. 덕천 이천에 판매점을 세워 조선 인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을팔아 필요한 경비 일부를 충당했다는 것이다.
다. 중공군의 공군 참전(P370-
[미군전투기들의 융단폭격]
'51.7월, 그들은 조선북부에서 엄청난 홍수가 발생한 기회를 틈타 우리에게 엶가을공새를 발동하는 동시에 우리ㅏ 후방에 대규모의 "공중봉쇄전역' 즉 "질식작전"을 시작했다.
"공중봉쇄"는 1944년 3월 연합국 공군이 이탈리아 국경 내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철로를 주요목표로 일으킨 한차레의 공중전역을 미군이 본뜬 것이다. 그 전역은 최초의 공군합동공세로 일컬러지고 있다가 후에 "질식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조선반도의 지형, 교통선의 구성 및 미군공중봉소ㅓㅐ계획이 모두 이탈리아에서 진행했던 "질식전"과 아수 비슷했다. 질식전의 구체적인ㄴ 갖전은 조선반도를 가로지르는 허리부분에서 차단할 수 있는 곳을 정해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대부분을 동원, 오랜기간 융단폭격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지원군 후방교통선을 절단하고 아군 전후방의 연계를 가로막아 아군작전 역량을 질식시키는 작전이다. 그래서 질식전을 "저격전" "교살전'이라 불렀다.
미군조종사들은 대부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비행시간이 1천시간을 넘는 베테랑들이었다.그들은 비행술이 뛰어나 초저공비행을 능사로 삼으며 낮에는 산골자기의 목표물을 찾아내고 밤에는 실날같은 둥불마저 발견해서는 폭격을 일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당시 우리 대공무기는 변변찮아 한낮이면 미군전투기들의 위세가 극에 달했다. 차 한 대 의심스러운 물건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후방으로부터의 운송은 밤에만 이루어졌다. 우리의 트럭운전병은 대부분 해방전쟁에 참전한 노련한 병시들이지만 이러한 전투는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야간에 헤드라이트를 끄고 운전하는 경험이 모자랐다.
'541. 5월에 전쟁에 접어들자 전투기는 약 1천6백80대에 이르렀다.미군전투기들은 낮에는 대피해 있는 차량과 쌓아둔 물자에 폭격을 감행하여 주요교량, 노선에 시한폭탄과 건드리면 터지는 일명 "나비폭탄"을 떨어뜨려 차량통행을 막았다. '51. 4월에 삼등의 창고에서 80여 량 하물열차의 물자가 폭격을 당해 엄청난 군복의 손실을 입었다. 그 결과 우리의 1개 군 병력이 제5차 전역에서 군복을 입지 못하고 전투를 벌이는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1개 소송연대의 트럭이 대피한다는 게 한군데만 몰려 미군 전투기들이 한 번 공습에 70여 대가 불탄 적이 있었다. 바로 대피. 은폐. 위장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탓이다.
미군전투기들이 공습이 심해지면서 우리는 궁리끝에 철도터널이 가장좋은 은신처라 생각되어 부상병. 민간인. 운반부대원들을 대피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산이었다.
우리의 상상 밖으로 미군전투기 조종사들은 훨신 노련하고 비행 조종술이 뛰어 났다. 그들은 터널 안으로 날아들면서 로켓포를 정확하게 터널 안으로 발사하고는 잽사게 기수를 위로 올려 날아가곤 했다.
어쩔수없이 우리는 두꺼운 방벽을 터널 입구에 세우는 등의 방법으로 상대의 로켓포 공격에 맞섰다. 나중에는 허허실실 작전을 도입해 가짜 목표물을 내세워 상대의 전투기들이헛된 공격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빈창고에 가마니와 나뭇잎을 덮거나 뿌려놓으면 전투기조종사들은 물자저장창고라 여기고 정신없이 폭탄과 기관총세례를 퍼붓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허허실실 작전은 시간이 감에 따라 효과가 줄어들었다. 전투기 폭격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군수품이 끊이지 않자 상대 진영에서는 의심을 하기시작했다. 그결과 상대의 많은 공작원들이 우리 후방에 침투해 공습의 효과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공작원들은 "효과가 생각보다 형편없음. 대부분 공산군이 일부러 설치한 거짓목표물을 파괴한 것임" 이라고 탐지결과를 보고했다.
이후 미군전투기들은 아군진영에 날아들어도 당초 무조건 폭격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목표물의 진위를 가리기에 안감힘이었다.
[중공군 공군의 참전]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은 유엔군의 "질식전' 제1단계에서 평양 이북의 수송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1. 9. 25일 항미원조전장에서 우리공군 제4사단이 처음으로 미군전투기 1백여 대의 대편대와 공중전을 전개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27년 탄생부터 20여 년간의 국내전쟁과 항일전쟁 동안 줄곧 보병 단일 병과로 전투를 해왔다. 한국전 이후 각 군 병과의 전면 창설에 따라 비로소 단일 병과작전에서 제병과 연합작전으로 전환을 이룬 것이다.
1937년 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국공산단은 일찍이 특과병부대를 세울 계획과 함께 신강일대에서 소련원조의 장비를 이용해 자체 조종사. 기갑병과 통신인재를 양성하려 했다. 40년대는 신강 당국의 반공정책과 소련원조의 단절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5년 일본항복 후 중공해방군은 신속히 동북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그중 하나가 중요한 목표가 일본이 남긴 무기장비를 이용해 강력한 특과병과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일본이 남긴 무기장비를이용해 강력한 특과병부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국민당과 해방전쟁 시기 인민해방군은 포병. 공병과 항공병. 기갑병 등 기술병과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구의 경제적 여건이 낙후한데다가 외국원조가 모자라 이러한 기술병과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전쟁 시작 후 전쟁의 급한 수요와 소련이 대량으로 기술장비를 제공한 2가지 이유로 중공은 "일면 공격, 일면 건설"이라는 방침에따라 전장을 연습장으로 삼아 기술병과의 실전연습을 감행했다.
항일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은 신강에서 자체 조종사를 양성한 적이 있다. 일본 투항 후 공산당은 신속히 살감을 신속히 동북에 보내 일본군의 항공설비를 접수했다. 1946년 1월 동북지방 통화에 항공학교를 세웠다. 이후로 공군창설 작업이 시작됐다. 해방전쟁시기 인민해방군 항공병은 훈련단계로 실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1949년 여름 공산당은 앞으로 있을 도해작전과 국토방공의 수요를 고려해 공군을 정식으로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에게 비행기를 시들이기 시작했다. 8월 중앙군사위는 제4야전군 제14병단 사령부를 기초로 공군사령부를 창설하도록 명령했다. 같은달 북평에 제1작전 비행중대가 미국제P51형 전투기 10대를 갖추고 창설했다. 49년 11월 인민해방군 공군사령부가 정식으로 창설됐다. 당시 전군에는 전쟁 중 수백 대의 진투기를 노획했지만 정비 여건 등으로 겨우 60여 대를 가동시키는데 그쳤다. 동시에 전군에 10여 명의 조종사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공군은 남경에서 제12항공공병부대 제4혼성여단으로 창설했다. 주로 소련제 미그9. 미그11전투기였다.
1950년 10월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온 뒤 중공 공군은 3개 여단(11월에 사단으로 바뀜)을 보유했으며 연말가지 서둘로 5개 사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8개 항공사단에는 각 2개 비행단밖에 없엇고 사단마다 비행기 십여 대가 고작이엇다. 제4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훈련을 시작한 단게였다.
소련측은 전쟁초기 망설이다가 1951년 1월부터 그래 공군사단(사단마다 전투기 보유 1백 기가 채 되지 않음)을 보내와 제한적이나마 청천강 북쪽의 1백여 KM 수송선 엄호에 나섰다. 소련은 미국과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드러내놓고 참전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중국 동북에 주둔했던 소련 공군조종사들은 모두 지원군군복을 입DJ야햇고 일체의 소련말 사용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언제까지나 공중방어를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중앙군사위원회와 모택동은 1950년 말 공군을 참전시켜야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1950년 말부터 '51년 4월까지 공군은 9개 항공사단을 만들고 미그15기 전투기를 보유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공군기술자와 중국 측 비행교관들이 조종사들에게 비상훈련을 시켰다.
1951년 1월 21일, 공군 제4사단이 압록강 부근 상공에서 처음으로 미공군과 교전했다. 대대장 이한이 F-84 전투기 1대에 치명상을 입혔다. 공군사상 최초로 미군전투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올렸다. 1951년 9월에서 52년 6월 말까지 중국 공군은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정식 참전단계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