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동식사 유월절 전날 저녁 주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다른 공동 식사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특별한 것은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으므로, 제자들에게 그가 없을지라도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이러한 식사 마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셨으며, 인간이 육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음식이 필요하듯 영적 양식이 필요함을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가능하다는 설명을 하셨다. 즉, 참 생명에 필요한 그러한 영적 양식이 예수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 마지막 식사와 같이 더불어 식탁을 마련하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아가페 사랑이 함의되어 있으며, 육적인 양식만이 아니라 영적 양식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취지에 따라 '아가페'를 자주 마련하였다. 사도행전 2장과 20장에서는 제자들이 함께 떡을 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두고 그것은 단순히 아가페였다는 주장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기억하는 의식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메시아이신 예수는 어떤 의식을 제정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말씀의 취지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예수와 더불어, 그리고 예수가 되어 실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 마지막 식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1년에 한번 날을 잡아거행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의 실천적 의미에서 떡을 떼는 공동식사이기 때문에, 절차나 식사의 재료는 매우 다양했으며, 각 지역의 공동체마다 달랐다. 마지막 식사를 의식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식사의 재료들은 빵+포도주 또는 빵 +물 또는 빵+물 섞인 포도주 또는 빵+치즈 또는 빵만으로 치르는 공동식사였다. 또한 절차에 있어서도 빵을 먼저 떼는 경우도 있었지만, 잔을 먼저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식사의 재료나 절차를 볼 때, 그 공동식사가 주의 마지막 식사를 의식화 시켜 날짜를 정해서 치르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가지지 않았다. 사랑이 존재하는 한, 그 식사의 마련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을 그들이 행했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11명의 제자들이 모인 식탁에 나타나 생선을 먹던 묘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따라서 오늘날 예수의 죽음을 제사지내듯 1년에 한번 기념해야 한다는 발상이나 그날의 음식은 특정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누구는 떡을 떼고 누구는 방관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원래의 취지에 벗어난 생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의 식사를 마련하고 예수가 없지만 있는 것처럼 예수를 생각하고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개인이 바로 그분이 되어 이 세상의 가난하고 영적 굶주림에 있는 자들을 도우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포함된 공동의 식탁에서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제 그점을 이해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있었던 소위 성만찬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과 그 기록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을 알아보자.
예배와 리터지(liturgy) 전문가들에게 ‘기독교 예배는 과연 어디로부터 왔는가,’ 즉 예배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풀기 어려운 과제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이 물음은 지금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있었던 초기교회 문서들의 대거 등장은 예배의 기원을 연구하던 학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문서들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로 하여금 추정만 해 왔던 초기 교회 예배의 모습들을 보다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연구들을 통해 학자들은 초기교회의 예배가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이 두 가지 필수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고대교회의 문서들은 현대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리터지와 예배 형식의 뿌리와 그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학자들은 간혹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초기교회가 드렸던 성만찬의 다양성 때문이었다. 초기교회의 성만찬은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화된 모습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발견들이 교회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는 신학적 차원에서 초기교회 성만찬의 다양성들이 교회의 예배서 속에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교회들은 확대된 성만찬 신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만찬의 실제 속에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예배학자들에게 는 풀기 어려운 한 가지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만찬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만찬의 기원을 마지막 만찬에서 그 근거를 찾아 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만찬은 마지막 만찬에서 기원하여 점차 발전하여 갔을 것이란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전제가 사실이라면, 성만찬의 신학과 형태는 초기에는 단순한 하나의 형태에서 후기로 갈수록 점차 다양해지고 예전적으로 발전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문헌들에 대한 연구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특별히 로마제국에 의해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졌던 1-3세기의 교회 문헌들은 성만찬 신학에 있어서, 어떤 일관된 신학이나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다양함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성만찬의 실제 또한 마지막 만찬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만찬에서 성만찬의 기원을 찾는 전통적 성만찬 신학을 지지하는 예전학자 (liturgist)들은 초기교회 성만찬의 다양성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에게 초기 성만찬의 다양성은 성만찬의 기원을 밝힘에 있어서 그리 큰 골칫거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만찬의 기원은 마지막 만찬이라는 전통적 기원설에 대한 너무나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초기 문헌들에 대한 그들의 주요 연구 목적은 성만찬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만찬의 기원으로 이미 결론 내려진 마지막 만찬에서 후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찾는 일이었다. 20세기 중반에 출간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전통적 성만찬 신학을 가장 잘 학문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연구서는 성공회 예배학자인 딕스 (Dom Gregory Dix, 1901-1952)에 의해 1945년에 완성된 『리터지의 형태』 (The Shape of the Liturgy)이다. 여기서 딕스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만찬 관련 문헌들을 포함하여 초기교회의 다양한 성만찬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성만찬의 공통적 특징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딕스는 소위 4중 행위 즉, 네 가지 형태의 공통적 요소가 성만찬에 존재함을 발견하였는데, 빵을 취함 (taking), 감사기도 (giving thanks), 쪼갬 (breaking), 나누어줌 (distributing)이 그것이었다. 그러면, 이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이 물음에 대 해 딕스가 찾은 답은 마지막 만찬이었다. 딕스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묘사된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사에서 공통적으로 포함된 7가지의 식사행위를 발견하였다. 그 7중 행위는 (1) 빵을 취함, (2) 감사기도, (3) 쪼갬, (4) 나누어줌, (5) 잔을 취함, (6) 감사기도, (7) 나누어 줌이었다. 딕스에 따르면, 마지막 만찬의 이 7중 행위를 후대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맞게 변형하면서 초기교회의 다양한 성만찬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포함되어 있는 성만찬의 필수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4중 행위였다. 이러한 논증을 거쳐, 딕스는 결국 성만찬의 기원, 즉 가장 원초적 형태는 마지막 만찬임을 역설하였다.1 딕스가 주장한 성만찬의 4중 행위로 초기교회 성만찬의 꽤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리터지 연구사에 남긴 그의 큰 공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론으로 초기교회 성만찬의 다양성을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기교회 성만찬이 가진 다양성을 그의 이론에 모두 담기에는 그 종류가 너무나 많았다. 성만찬의 4중 행위라는 규칙에 위배되는 초기교회의 리터지들의 존재에 대해 딕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워 놓은 규칙, 즉 4중 행위로 설명될 수 없는 성만찬 문서들의 경우, 딕스는 그것을 이단 교회의 성만찬으로 해석하거나 온전한 방식으로 치러진 성만찬 (the Eucharist)이 아닌 교회 공동체의 교제를 위한 일반적인 식사, 즉 “아가페” (the Agape)였다고 단정지었다. 그 결과, 디다케 9장과 10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성만찬의 경우, 디다케의 저자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성만찬” (Eucharis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딕스는 본인이 세워 놓은 4중 행위라는 규칙에 디다케의 성만찬이 부합하지 않으므로 디다케는 “성만찬”이 아닌 “아가페”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2세기 초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디옥 교부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의 『서머나에 보내는 편지』 (The Letter to the Smyrnaeans) 제 8장은 교회 감독 (bishop)의 권한을 설명하면서 성례전에 관한 내용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편지에서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의 허락 없이는 “침례”나 “아가페”를 거행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린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곳의 “아가페”는 “성 만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해 보이며, 또한 침례와 성만찬은 언제나 교회의 두 가지 중심적 의식이었으며, 이 두 의식은 항상 함께 언급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이 오히려 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딕스는 “성 만찬” (Eucharist)과 “아가페” (Agape) 사이의 용어적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이 편지 속의 “아가페”는 “성만찬”이 아닌 일반적 식사로서의 “아가페”였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만다.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예배학자였던 융만 (Josef A. Jungmann, 1889-1975) 또한 마지막 만찬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다른 유형의 성만찬적 문헌들에 대해서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 (the sacramental Eucharist)이 아니라 초기교회 성도들의 일반적 식사에 성만찬과 유사한 의식이 가미된 것일 뿐이라고 평가하였다. 딕스와 같은 견지에서, 융만은 디다케 9장과 10장에 기록된 기도문을 분석하였다. 그런 후 융만은 디다케의 기도문이 잔에 대한 축복기도, 빵에 대한 축복기도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로 마무리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전형적인 초기교회의 일반적 공동식사임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디다케에 묘사되는 식사 행위를 정식 성만찬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교우간의 하나됨 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식사 나눔을 목적으로 행해지던 초기교회의 공동식사, 즉 “아가페”였다. 하지만, 그는 초기교회가 아가페를 성만찬의 한 형태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보지 못했으며, 왜 아가페가 성만찬이 아닌지에 대한 구체적 근거들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독일 개신교 신학자 리츠만 (Hans Lietzmann, 1875-1942)은 위의 학자들과는 다르게 초기교회에 두 가지 형태의 구별된 성만찬 즉, “아가페”와 “성 만찬”이 존재했다고 보았다. 먼저 아가페는 디다케, 히폴리투스의 교회규범 (Canons of Hippolytus) 등에서 발견되는 성만찬으로 잔이 빵보다 앞서 등장하 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리츠만도 주지하듯이 아가페라고 해서 언제나 잔이 빵보다 앞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리츠만이 제시한 바와 같이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교회문서들에서는 도리어 그 반대 순서로 아가페를 구성하고 있다. 아가페는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식사를 그 기원으로 갖는다. 이 아가페는 기쁨 가운데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 체적 식사의 성격을 갖는다. 또한 아가페적 성만찬에는 성만찬 제정기사2가 등 장하지 않으며, 기도문에는 강한 종말론적 기대사상이 담겨져 있다. 리츠만은 초기교회가 아가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성만찬을 시행하였다고 보았는데, 이 두 번째 종류의 성만찬은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마지막 만찬을 그 기원으로 한다. 이 두 번째 형식의 성만찬에서는 성만찬 제정기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기억된다. 리터지 연구사에 있어서 리츠만의 공헌은 그의 연구를 통해 초기교회가 아가페를 성만찬으로 인식했다는 예배신학적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리츠만의 연구에서도 여전히 한계는 발견된다. 초기교회의 다양했던 성 만찬을 아가페와 성만찬이라는 두 개의 특정된 범주로 구분하려는 그의 시도는 앞서 소개된 “잔-빵”의 순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수많은 예외적 상황들을 만들어 냈다. 또한 성만찬의 기원을 이분화 시킴으로써, 아가페와 성만찬이라는 두 예전 사이의 연관성은 도리어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루터교 신학자 쿨만 (Oscar Cullmann, 1902-1999)은 리츠만의 두 가지 종류 의 성만찬 이론을 따르면서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색다른 해석을 시도하였다. 쿨만은 초기교회가 예수의 부활사건 직후 가졌던 성만찬과 곧바로 이어진 사도 바울에 의해 재해석된 성만찬이 후대교회 성만찬의 두 갈래 흐름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먼저 쿨만은 예수의 부활 직후 초기교회가 가졌던 식사들에 집중한다. 그는 이 식사 전통에 “주의 만찬” (the Lord’s Supper)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마지막 만찬” (the Last Supper)과 구별을 시도한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의 현장은 당연히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과 마지막 만찬이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과거이며 그들은 현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다. 쿨만에 따르면, 사도행전 2장에서의 “빵을 뗌” (the breaking of bread)이라는 용어는 성만찬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2장 말미에 묘사된 초기교회가 빵을 떼던 성만찬의 현장은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했다. 쿨만은 이 기쁨과 찬양의 원인을 죽임 당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신앙고백에서가 아닌, 부활의 주님과 함께 먹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찾는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빵에 어떻게 그리스도가 임재하는지, 포도주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등의 신학적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현재이고 또한 곧 도래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에 임하여 성도들을 위한 양식으로 희생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만찬의 자리에 임재하셔서 교회와 함께 기쁨의 식사를 나누시는 분이시다. 쿨만은 “주의 만찬”이라는 잔치 성격의 성만찬과 함께 또 다른 흐름의 성만찬이 생겨났는데, 이 두 번째 성만찬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다고 주장한다. 쿨만에 따르면, 사도바울이 가진 신학적 강조점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었다. 사도바울이 보기에 “주의 만찬”에서 찬송 받으시는 분은 오직 부활의 주님이었다. 그곳에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는 없었다. 이에 사도바울은 “주의 만찬”이 가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학적 강조점과 “마지막 만찬”이 담고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연결함 으로써 온전한 “성만찬”을 완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제시한 “마지막 만찬”에 근거한 십자가 신학이 가진 영향력은 너무나 강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의 만찬”에 담겨져 있던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 기쁨의 잔치와 같은 신학적 강조점들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교회는 성만찬이 지녀야 할 중요한 의미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부활 이후의 식사들을 성만찬으로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만찬 전통 형성에 한 축을 형성하였다고 본 점, 마지막 만찬에 기초한 성만찬 전통의 형성에 있어서 사도바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힌 점 등은 쿨만이 성만찬 연구사에 남긴 공헌이다. 하지만, 쿨만의 연구에 있어서 아쉬움도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쿨만은 예수가 공생애 기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던 식사행위들이 성 만찬으로서 가지는 신학적 중대성을 간과하였다. 결국 이는 성만찬과 예수의 다른 식사들과의 단절을 가져오고 말았다. 또한 쿨만은 부활절 이후의 “주의 만찬”과 “마지막 만찬”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모든 성만찬들을 설명하고자 시도했지만, 초기교회 성만찬이 가진 다양성을 충분히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이후로도 성만찬의 2중 기원론은 예배학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받았 다. 예배학자인 마짜 (Enrico Mazza)에 이르러 2중 기원론은 2중 전승론으로 변형 발전된다. 마짜는 성만찬의 기원은 하나, 즉 마지막 만찬이라 단언한다. 다만, 초기교회에 다양한 성만찬의 유형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마지막 만찬에 대한 다른 두 가지의 전승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마가와 마태가 중심이 된 성만찬 전승이며, 다른 하나는 누가와 바울 계열의 성만찬 전승이다. 이러한 구분을 위하여 마짜는 각 성만찬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과 구조를 비교하였다. 마짜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으로 인해 하나의 전승을 확정하였고, 나머지 성만찬적 문헌들은 모두 누가-바울 전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누가-바울 전승에 다른 성만찬 문헌들을 포함시킬 때, 마짜는 어떤 경우는 내용에서 또 다른 경우들에는 구조에서 유사성을 찾았다. 일례로, 마짜는 누가-바울 전승에 요한복음 6:51의 성만찬 문구를 포함시키면서 그 근거로 빵에 대한 예수의 해석이 있었음을 들었다. 한편 고린도전서 10:16-17과 디다케 9-10장의 성만찬 기사들에 대해서는 잔이 빵보다 먼저 나오는 구조적 특성을 그 이유로 들어 누가-바울 전승 속에 포함시켰다. 이런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해석상의 문제는 구조적으로는 유사하나 기도문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에 어느 한 특징이 유사하다고 하여 모두 하나의 같은 전승을 이어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이다. 마짜에게서 발견되는 경우와 같이 그런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의 이론은 다수의 현대 신학자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또한 마지막 만찬 기원설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마짜로 하여금 부활사건 이후의 식사들, 그리고 공생애 기간 동안 베풀어주셨던 다른 많은 식사행위들에 내포된 성만찬적 의미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성만찬 기원에 대한 최근 연구 동향 최근 20여년 사이 성만찬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 으로 진행되어 왔다. 가장 큰 차이는 과거에는 “성만찬의 기원은 마지막 만찬” 이라는 가정 하에 그 근거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면, 최근 선호되 는 연구방법론은 어떤 가정을 미리 내리지 않고, 보다 객관적이고 비평적인 관점에서 초기교회의 문헌들을 살핀다. 또 하나의 차이는 과거 연구자들은 어떠한 분석을 통해 자료들이 쌓이면 그 자료들을 근거로 나름의 법칙을 만들곤 하였다. 그리고 그 법칙은 성만찬 문헌들의 계보를 짜 맞추는 데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현재까지 존재하는 모든 성만찬 문헌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만한 규칙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불완전한 법규에 의해 분류된 성만찬 문헌들 가운데는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많았으며, 학자들은 자신이 세운 규칙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또 다른 예외적 규칙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예배학 연구들 가운데 맥고완 (Andrew McGowan)의 『금욕주의적 성만찬』 (Ascetic Eucharist)은 초기교회 문헌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평적인 분석을 통해 성만찬의 기원에 대해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그동안 마지막 만찬 기원설을 지지하던 대부분의 전통적 신학자들은 성만찬에 는 반드시 빵과 포도주가 사용되어야 하며, 그 이외의 재료들이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성만찬이 아닌 일반적 식사이거나 이단적 교회의 식사행위였을 것이라 고 믿어왔다. 설령 정통교회의 성만찬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변방에 위치한 소규모 교회들의 예외적 성만찬이라 여겼다. 하지만, 맥고완의 연구는 전통적 신학자들이 당연시해왔던 기존의 연구 방식과 학문적 가정 (presupposition), 그리고 그들의 성만찬 기원에 대한 신념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브래드쇼 (Paul F. Bradshaw)는 전통적 신학이 고수해왔던 성만찬 기원에 대한 연구 방법론과 학문적 전제들에 대해 가장 강력한 비평을 가하면서, 초기 교회의 성만찬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기원에 있어서도 마지막 만찬과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문헌적 증거들을 통해 입증하였다. 특별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기독교 예배의 기원에 대한 연구』 (The Search for the Origins of Christian Worship)는 기독교 태동 이후 첫 3세기 동안의 교회 문서들을 객관적이고 비평적인 방법론을 통해 연구함으로써 초기교회의 성만찬이 매우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만찬에 기반한 성만찬들이 교회 리 터지 가운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우선 맥고완은 다양한 문헌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초기 교회가 빵과 포도주로 성만찬을 시행하였을 것이라는 일반적 추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증명하였다. 먼저, 초기 교회 문헌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성만찬 재료는 치즈이다. 4세기 살라미스 지역의 교회감독이었던 에피파니우스 (Epiphanius of Salamis)는 그의 글에서 “아토티리타이” (Artotyritai)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공동체에 대해 소개한다. 이들에 대해 그러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들이 성만찬을 시행하면서 빵과 치즈를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4세기 말, 브레시아 지 역의 감독이었던 필라스트리우스 (Filastrius of Brescia) 또한 그의 책 『다양한 이단 서적』(Diversarum Haeresium Liber)에서 갈라디아 지역에 살던 “아토티 리타이”들은 봉헌으로 빵과 치즈를 드렸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아토티 리타이” 공동체는 당시 정통 교회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몬타누스의 사상을 따르던 자들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마르시온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결국 그들의 성만찬은 정통 교회들에 의해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영지주의 계통의 이들 이단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통 교회들에서 경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들이 빵과 포도주가 아닌 빵과 치즈로 그들의 성찬을 대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탐구해 볼 가치가 있다. “아토티리타이” 공동체는 왜 포도주를 치즈로 대체하였는가? 맥고완에 따르 면, “아토티리타이” 공동체의 치즈 사용은 이교도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구별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당시 로마제국 내의 거의 모든 육류는 이방의 신전에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었으며, 포도주 또한 제사에서 사용되는 필수적 요소였다. “아토티 리타이” 공동체는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된 육류와 포도주를 먹는다는 것은 이방 신을 향한 제사에 동참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포도주 대신 치즈를 성만찬 재료로 사용하였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논쟁이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므로 먹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고, 반면 다른 이들은 그것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신학적으로는 전자의 견해가 옳다고 보았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후자를 택하였다. 30) 그러한 선택의 결정적 이유는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가 믿음이 연약한 어떤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 죄를 짓게 할 수도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우상의 제물에 대해 바울과 “아토티리타이” 공동체가 가졌던 신학적 해석은 다르지만, “아토티리타이” 공동체가 가졌던 신학이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으며, 그러한 신학적 견해에 대해 사도바울은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목회적 관점에서 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초기교회는 단지 이교도적 신앙행태로부터 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을까? 맥고완은 성만찬에서 포도주가 제외된 다른 많은 예들을 제시하면서, 그 두 번째 이유를 초기교회의 금욕적 삶에 대한 추구에서 찾는다. 맥고완에 따르면, 최소한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의 초기교회들은 빵과 물 혹은 빵만을 사용하여 성만찬을 시행하였다. 『도마행전』 (The Acts of Thomas) 의 성만찬에서 사도도마는 빵, 기름, 채소, 그리고 소금에 대한 축복 기도를 한 뒤, 그것을 교회와 함께 먹었다. 『콘테스타티오』 (The Contestatio)에는 빵과 소금으로만 이루어진 성만찬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행전』 (The Acts of Paul)에도 성만찬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빵과 물만이 등장한 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아테밀라 (Artemilla)라는 여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에 바울은 성만찬을 행하며 빵과 물을 그녀에게 주었다. 33) 2세기 후반 에서 3세기 초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행전』 (The Acts of John)은 사도요한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가지의 성만찬 기도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도문의 성만찬 묘사는 사도행전과 매우 유사하다. 여기서 성 만찬은 오직 빵만으로 거행되며, 사도행전에서도 사용된 “빵을 뗌” (Breaking of the Bread)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리고 성만찬을 위한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영광돌림이다. 『베드로행전』 (The Acts of Peter)에서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설교를 마친 후 찬양을 하면서 빵을 모인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34) 가장 흥미로운 성만찬에 대한 묘사는 『안드레행전』 (The Acts of Andrew)에서 등장한다. 안드레는 마치 마지막 만찬의 기사를 따르는 듯, 빵을 들고 감사기도를 한 후 그것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한다. “받으십시오. 이것은 우리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종 된 나를 통해 당신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잔은 등장하지 않는다. 35) 이렇듯, 초기교회 문서들 중 많은 곳에서 이교도들과의 구별된 삶 또는 금욕적 삶의 추구 등의 이유로 포도주가 제외된 성만찬의 예들이 발견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던 “아토티리타이” 공동체는 정통 교회들에 의해 이단으로 인식된 교회였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초기교회 문서들 중 어떤 것들은 교회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책들도 있다. 따라서 이들의 성만찬 을 정통 교회를 위한 하나의 모범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정통 교회가 인정하는 초기교회 문서들 중 “빵과 포도주”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성만찬의 예들은 없을까? 맥고완은 초기교회 교부였던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The Apostolic Tradition)에서 그러한 예를 발견하여 제시한다. 여기서 히폴리투스는 감독의 안수식에 대한 지침을 준다. 안수식이 끝나면 새롭게 세워진 감독은 성찬식의 재료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먼저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감사기도 후, 기름, 치즈 그리고 올리브에 대한 봉헌 (Offering) 이 이어진다. 여기서 봉헌은 오늘날의 헌금시간과는 달리 성만찬을 위해 사용 되는 재료들에 대한 봉헌을 의미한다. 물론 히폴리투스는 “빵과 포도주”와 “기름, 치즈, 올리브” 사이에 차이를 두고는 있지만, 성만찬을 위한 재료서 이 음식들이 사용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초기교회가 빵과 포도주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다른 형태의 성만찬을 시행했다는 증거는 3세기 중반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의 서신』 (The Epistles of Cyprian 63:1) 속에서도 등 장한다. 여기서 시프리안은 당시 인근 지역의 어떤 감독들이 성만찬을 시행하면서 포도주가 아닌 물을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앞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통해 온전한 성만찬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따라서 주님의 잔은 물만으로 된 것도 아니요 포도주만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물과 포도주는 서로 섞여야 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 주님의 몸이 밀가루만이나 물만으로 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밀가루와 물은 하나 되어야 하며 서로 섞일 때에 하나의 빵이 됩니다. 그러한 성만찬에 참여하는 우리도 하나가 됩니 다. 곡식이 모이고, 빻아져, 물과 섞여 반죽이 되어 하나의 빵을 이루듯이, 하늘의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 우리 모두가 모이고 연합하는 하나의 몸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성만찬의 잔은 물로만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시프리안이 이곳에서 주는 잔에 대한 지침은 흥미롭다. 시프리안은 잔에 채워져야 할 것은 “물이 섞인 포도주”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이 섞인 포도주”가 성만찬의 잔으로 사용된 예는 시프리안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인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서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저스틴은 그의 『제 1 변증서』 (First Apology) 65:3에서 성만찬을 소개하면서 “빵과 물 그리고 물이 섞인 포도주”가 담긴 잔에 대해 기록한다. 특이한 것은 2세기 초 무렵 저스틴의 공동체가 행했을 이 성만찬에 두 개의 잔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온전한 물만 담긴 하나의 잔이었으며, 물이 섞인 포도주가 담긴 또 하나의 잔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는 초기교회가 마지막 만찬전승과는 다른 재료를 성만찬에 사용하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단순히 당시의 관습이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교회 교부들이 이것에 대해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으로 볼 때, 이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한 해석은 앞서 맥고완에 의해 제시되었던 두 가지 이유 즉, 이교도들과의 구분 그리고 금욕적 추구에서 찾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초기교회 문서 중 가장 고대의 것으로 알려진 디다케에 대한 최근 예배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은 초기교회의 성만찬이 마지막 만찬 전승과는 매우 다르게 거행되었다는 학설에 힘을 불어 넣었다. 디다케의 성만찬은 전통적 순서인 “빵-잔”이 아닌 “잔-빵”으로 진행된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디다케는 예수의 수난과 연관된 어떤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디다케에는 또한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제정기사도 나타나지 않으며, “이것은 나의 몸, 이것은 나의 피”라는 전통적 성만찬의 대표적 문구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디다케는 예수를 생명 (life)과 지식 (knowledge) 그리고 영생 (eternal life)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와 더불어 디다케는 성만찬의 빵을 지칭 하면서 “빵 조각들” (the broken bread)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 또한 마지막 만찬 전통이 사용했던 “빵 덩어리” (a loaf of bread)와 구별되는 용어적 선택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고려할 때, 디다케 성만찬의 기원을 마지막 만찬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상과 같이 초기교회의 성만찬 문헌들 속에 나타난 특징들은 마지막 만찬에서 기원을 찾기 힘들 정도로 형식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며 내용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이들 초기교회의 성만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브래드 쇼는 소위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로 이름 붙여진 예수의 “식사 기적 사건”에 담긴 성만찬적 의미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건과 관련된 본문은 복음서에 총 6 회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브래드쇼는 특히 요한복음 6장에 집중한다. 여기서 요한복음 기자는 무리를 먹이신 예수의 “식사 기적 사건”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성만찬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브래드쇼는 요한복음 6장의 본문들 중, 53 절 후반부의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다른 어떤 본문들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성만찬과 관련된 구절이라고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브래드쇼는 초기교회가 마지막 만찬전승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 성만찬 실행에 있어서는 예수의 식사 기적 사건에서 비롯된 성만찬 전승을 바탕으로 리터지를 발전시켜갔을 가능성에 대해 더욱 무게를 두면서 그러한 증거들을 초기교회의 문헌들에서 찾아 제시하였다. 먼저, 디다케의 “생명의 빵,” “영생,” 그리고 “빵 조각들”이란 용어는 요한복음 6장에서 발견되는 대표적 표현들이다. 2세기 초 안디옥의 교부였던 이그나티우스는 성만찬에서 빵과 잔을 묘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body)이 아닌, “살” (flesh)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인용과 참고 출처: 이어진. "성만찬의 기원에 대한 연구 -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의 식사로 -." 신학과 실천 0.46 (2015): 89-116. -------------------------------------------------------------------------------------------------------- 1 Dom Gregory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NEW EDITION with an introduction by Dr Simon Jones, (New York, NY: Continuum, 2007, first published in 1945), 2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빵은 나의 몸, 포도주는 나의 피를 상징하므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말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