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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육군3사관학교 충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래영
제사(祭祀)문화도 시대에 따라,,,/역대 퓰리처상 사진모음
일전에 동기생부부와 식사도중에 제사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는데 그분이 말한것이 파격적이고 처음듣는 내용
이라서 많은생각을 했다 나도 제사문화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사람에 의견은 어떤지?
들어보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조하였기에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동기생 이모님의 파격적인 제사문화 유언
이모님은 돌아가시기전에 자식들을 모두 불러서 유산을 분배하고난후에 자식들에게 부탁하기를 따로 마련한 통장을
내밀며 " 내가 죽은후에 제사를 지내지 말고 이돈으로 모두 모여서 식사하고 즐겁게 놀아라, 라고 말씀하셔서 후손들은
제사날에 모여서 부모님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고 그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어느집안 보다도 화합이 잘된다고 한다
동기생집안의 제사문화
동기생의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본인은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모아놓고 선언하기를 " 제사에 대한 부담이나
방식을 놓고 싸우는일은 가장 미련한 방법이다, 제사는식구들이모여서 고인을 추모 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네는 마음을 가지는것이 가장우선이다, "
바뿐사람은 자기일보고, 음식도 너무 절차에 구애받지말고 평소 식구들이좋아 하는 걸로 준비해서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새로운 일에 반박을 했지만 제일 큰 아들이 소신 있게 밀고 나가는데 어쩔 것인가?
오히려 지금은 모든 형제 들이 다 좋아 한다고....
집안에서 제사문제로 인하여 이혼사유 (종교갈등)
텔레비죤의 연속극이나 드라마, 대담에서 결혼후 종교간에 문제가 많이 나오는데 사회학자들은 이혼의 결정적인 이유는
성격차이를 내세우고 두번째로 심각한것이 고부간에 종교갈등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명절중후군이란말이 있어서
9,18일 KBS 방송에서는 법원의 하루 이혼건수 상담이 66건이라고 하는데 이런것을 보더라도 제사문화는 개선되야한다
그래서 이문제로 많은분들과 대화를 해보니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심각함을 느꼈다, 이제 시대가 변한만큼 제사문화도 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수천년동안 이어온 제사문화를 없애는것보다는 어느집처럼 할아버지이상은 " 조상의 날 " 로 정하여
한번으로 통합하고 부모님제사도 3년이 지나면 합치고, 산소도 각지역에 떨어진것을 납골묘로 통합하며 제례음식도
간소화 하여서 부담감을 줄이고 제례의식의 격식을 파격적으로 줄이고 생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집에서 제사지내고 산소에가서 다시한번 제사를 지내는것도 한번으로 통합해야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
한국사회에서 제사(祭祀) 문제를 잘못이야기하면 패륜아, 후래자식으로 낙인을 찍히기에 글을 올리는것 조차가 부담
스럽지만 우리사회에서 모든것이 변하듯이 제례문화도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간소화 하여서 젊은세대에게 걱정을
덜어주고 엄격한 형식보다는 모여서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 우리만해도 한글세대로 유세차로 이어지는 축문을 뜻도 모르는데 젊은세대는 오죽하겠는가 ?
나와 우리가족은 이러한 폐단을 너무많이 경험했기에 무덤도 만들지 말고 제사를 지내지말라고 합의하고 자식들에게 공표
했으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사날 복집한절차, 뜻도 모르는 한문축문, 제례형식에 매이지말고 고인이
생전에 하신말씀과 자랄때의 부모님의 추억을 생각 하면서 조카들의 진로와 결혼문제 등 현실적인문제로
대화를 가진다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자식세대 까지는 그럭저럭 제례문화가 있겠지만 그 다음세대는 급격한 인구감소와
글러벌화로인한 세계진출, 외국인사위와 며느리문제와 결혼조차 기피할려는 풍조로 인하여 앞으로 제사와 산소관리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될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기에 앞서서 미리미리 준비래야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제사(祭祀) 문화는 지금 변신 중이다.
■ 제사 문화가 복잡하면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
“제사(祭祀)는 조상님의 은덕(恩德)을 기리는 것으로 정성이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됩니다.
다른 건 시대 흐름에 따라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물론 급진적으로 바꾸는 건 어렵겠지만, 앞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제사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자손들에게 조금씩 제사 형식을 바꾸도록 얘기하고 있습니다.
”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가문인 진성(眞城) 이씨(李氏) 대종손 이세준 씨 얘기이다.
제사(祭祀)가 달라지고 있다. 제사 문화가 복잡하면,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 제사 음식, 절차, 횟수 등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제사를 지내는 주체, 제사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제사 비용도 제사 준비도 제사 진행도 모두
장남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이제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옛날 얘기이다. 한국의 전통 4가지 의례 중
하나인 제사가 제 의미를 찾고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 술은 한번만 올리고, 음식은 10개 이하로 간소화
제사(祭祀) 때 술을 세 번 올리는 삼헌(三獻) 절차도 점차 단헌(單獻) 절차로 간소화되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 역시
“제사 때 과일을 높게 괴지 말고, 나물은 한 그릇에 담으라”는 말씀을 남겼다. 조선 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
이라는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는 제사를 간소하게 지내기로 유명하다. 윤완식 씨는 “떡과 전을 안 하니, 여자들이 고생
을 덜 하고, 경제적 부담도 적다. ‘제물 보다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라’는 게 대대로 이어져오는 교훈”이라고 말했다.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갓집에서 차리는 제사상은 간소하다. 과일과 나물 각각 3가지, 밥과 국 뿐이므로 종류가 10개
이하 정도이다. 또한, 윤 씨 가문에는 대물림되어 내려오는 제사상이 따로 있다. 크기가 가로 99㎝, 세로 68㎝에
불과하다. 사실 더 차리고 싶어도 차릴 수가 없다.
■ 명절 차례(茶禮)는 원래 차(茶) 올리고 절하는 것이었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상은 더 간단하다. 제사상 차림에서 밥과 탕, 나물과 적이 빠진다. 윤 씨는 “설 및 추석 차례(茶禮)는
말 그대로 차(茶)만 올려놓고 간단히 하는 것인데, 언제부턴가 허례허식(虛禮虛飾) 때문에 제례(祭禮)를
올리는 것으로 변질됐다”며 안타까워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한 진성 이(李)씨 대종손 이세준 씨(65)도 제사를 간소화했다.
경북 안동 주하리 주촌(周村) 대종가에 기거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이세준 씨는 “예전엔 홍동백서(紅東白西) 등의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정성 들여 상(床)을 올린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귀띔했다.
■ 제사 문화 변화의 핵심은 제사(祭祀) 간소화이다.
이(李) 씨는 복잡한 제사 절차도 대폭 바꾸려 고민 중이다. “보통 제(祭祀)사 때는 삼헌(잔을 세 번 올림)을 하는데 이를
단헌(잔을 한 번만 올림)으로 줄이고, 2배(再拜) 절하는 것을 단배(單拜)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하는 축문(祝文)도 뜯어고칠 계획이다. 어려운 한자가 많아 제관들마저 뜻도 모르고
올리는 경우가 많다. 축문(祝文)을 한글화하면, 추모의 참된 뜻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모두 8분의 제사와 설, 추석 차례상 등 기본 10번씩이던 제사를
합쳐서 연(年) 2-4회로 줄이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가 되고 있다.
제사 음식도 간소화되고 있다. 이제 제사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1주일 전부터 그릇을 손질하고 나물을 다듬고 밤을 깎는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간소화되다 못해 심지어 직접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고, 전문 업체에 맡겨 준비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간소화’라기 보다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설과 추석에 차리는 차례상은 더욱 간소화되는 추세이다. 사실 이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간소화’라기 보다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법에 관한 어떤 책도 차례 때 상차림을 그려 놓은 책은 없다. 그저 큰 접시에
송편이나 떡국 같은 시절 음식을 놓고, 그 사이에 과일과 나물 몇 가지를 곁들이면 된다고 했다.”
방동민 성균관 의례팀장의 설명이다. “명절은 원래 제삿날이 아니다. 옛사람들이 명절이라고 잔치를 즐기면서
조상을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당에 차(茶)를 올렸는데 그것이 차례(茶禮)이다.
제사가 아니니 제사 보다 상차림이 훨씬 소박했다.”
최순권 국립 민속 박물관 박사도 같은 얘기를 한다. “원래 조상 제사는 기일에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 것이었고, 차례는
제사가 아니라 명절을 맞이했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간략한 의식이었다. 차례에 올리는 제물도 주과포(酒果脯)를
중심으로 차리는 정도로 간소하며 축문을 읽지 않고 단헌(잔을 한 번만 올림)의 절차로 거행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차례가 점차 중시되면서 차례상에 올라가는 제물도 제사에 버금가는 음식들로 채워졌다.
제사를 가문(家門)의 위세(威勢)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제사는 무조건 장남이 지내는 풍습 역시 바뀌고 있다.
제사와 관련한 각종 인식이 바뀌고 있다. ‘제사는 무조건 장자(長子)가 지내야 한다’는 인식이 가장 먼저 깨지고 있다.
장남이 제사를 맡아 지낸 풍습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가문(家門)을 영구히
이어간다는 의식이 미약했다. 따라서 재산과 조상 제사를 특정 자녀가 독점적으로 물려받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아들, 딸 상관없이 또 출생 순서에 상관없이 부모 재산은 공평하게 분배됐고, 조상 제사도 함께 모셨다. 김미영 한국
국학 진흥원 박사는 “고려 때는 사찰에 부모 위패를 모셔두고 제(祭)를 올리는 방식으로 조상을 공양했는데,
이때 소요되는 비용은 모든 자녀가 공동으로 담당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17세기 조선 후기에 유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하면서 재산 상속과 제사 계승에서 장자(長子)가 우선권을 갖게
됐다. 제사를 맡을 장남에게 재산을 좀 더 많이 물려줘 불만이 없게 한다는 취지였다.
이후 장자 상속의 원칙은 최근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친족법이 개정되면서 모든 자녀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예전처럼 장자(長子)가 모든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하는데, 인식은 여전히 장자가 제사(祭祀)를
도맡아 지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제사 때마다 가족 간 갈등이 분출되어 큰소리가 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 가가풍속(家家風俗), 집집마다 풍속이 모두 다르다.
김경선 성균관 석전교육원 교수의 얘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가풍속(家家風俗)이라는 말이 있다. 집집마다
풍속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제사든 뭐든 각 가정이 처한 상황에 맞게 가족끼리 합의하고 그에 따르면 된다.
다른 사람이 참견할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창피해서 어쩌지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모든 전통이 다 변하는 만큼 제례 전통 역시 현대 사회에 맞게 인식과 절차가 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 명예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가례(家禮)에 대한 주자(朱子)의 기본 입장은 이렇다. ‘예법이란
시대가 중요하다. 성현(聖賢)에게 예법을 쓰게 하면, 반드시 옛 예법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옛 예법을 감안하여
지금의 예법(禮法)을 따를 것이다.’ 옛 예법에 의존하는 범위를 줄이고, 당대 사회의 예속(禮俗)을 적극
수용해도 된다는 의미이다.”
제사 형식은 간소화되고 있지만 제사(祭祀)를 왜 지내는가에 대한 명확한 생각과 중심은 있어야 한다.
이욱 한국학 중앙 연구원 박사는 “일상적인 삶 속에 묻혀서 자칫 망각(妄覺)하기 쉬운 조상(祖上)과 나의
시원(始原)을 반복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제사(祭祀)이다. 제사를 통해 내가 태어난 곳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내가 나아갈 곳을 바라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 제삿날 형광등 켰는데, 촛불 밝힐 필요 있나요?
예전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제삿날 광명(光明)을 밝히기 위해 촛불이나 등잔불을 사용했었다. 형광등(螢光燈)이
환히 밝혀주는 요즘 밤에는 촛불의 필요를 못 느낀다. 제삿날 밤에 형광등을 켰는데, 번거롭게 촛불을 밝힐 필요가
있겠는가? 밤이라 어두워서 광명(光明)을 밝히고 싶다면, 형광등(螢光燈)을 켜면 되는 것이다.
촛불(candle light) 연기는 각종 암(癌)이나 천식 등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 되었다. 촛불이 타는 실내에서는 건강에 해로운 각종 유해 물질과 발암 물질 및 미세 먼지가 매우 증가하게 된다. 촛불(candle light)을 켜고 공기 중의 화학 성분을 조사한 결과, 발암 물질인 벤젠(benzene). 톨루엔(toluene) 및 각종 유해 물질 등이 검출된 것이다.
(매일경제 M 매거진, 입력: 2012.10.11)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 바다출판사)
글머리에서 저자는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
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 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
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라고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다.
‘신토불이’에 대하여도 일종의 기피증과 문화적 폐쇄성이 교묘하게 숨어있다고 보고 있다. 기피증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솔직
하지 못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싫어하거나 불안하게 느끼면 미리 도피해 버리는 증세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핑계를 만들게 된다. 핑계를 대지 말자.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자
한국인들이 회식을 즐기는 이유는 공돈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 내에 공돈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먹자’는 공범심리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각자 번 만큼 돈을 받고 돈을 쓰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 심리가 어느 조직에나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판공비다. 그까짓 공짜 술 한잔이 무에 그리 대단해서 자존심을 다 내던지고 껄떡거리나? 이제 아주
배고픈 시대는 지났고 자존심을 생각하면서 살아도 될만한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언제까지 공짜 술에 취해서 비틀거려야 하는가
동양사회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3가지는
1. 법치가 되지 않는다, 2. 늘 과거에 묻혀 산다, 3. 주검을 숭배한다
이 세 가지는 유교의 특징을 뒤집어 놓은 형태에 불과하다. 전통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유교의 특징 세 가지는 1. 인문(人文)의식 2. 온고지신(溫故知新) 3. 조상숭배
중국이나 일본인의 그것과 뚜렸이 구별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끼리 만들어 놓고 우리끼리
의미 부여해봐야 결국 서로 속고 마는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태극기의 태극이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라는 한 철학가의 머리에서 나온 단순한 철학공식이며, 관련된 내용 전문이 249자에 불과
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당혹스럽다고 한다. 중국인 들이 태극기의 내력을 물을때가 많다. 그것이 1882년 박영효가 임호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 수신사로 가던 중 배안에서 만든 것이었노라라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난처했다
1996년 마오쩌뚱에 의해 시작된 10년 문화대혁명이 유교를 공격 목표로 한 것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정치적 이유가 숨어있었
지만), 중국인들의 유교인들의 유교에 대한피해의식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근대 국가 건설의 성공을 위해 두 가지 점에 특히 유의했다.
하나는 중국문화의 잔재를 최대한 씻어버리고 철저한 서구화를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은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런데 쇼군을 정점으로 270명의 영주인 다이묘, 그 아래의 사무라이, 그리고
평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던 신분사회가 천황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한 신분으로 바꾸게 되었다. 모두 평등해진 것이다.
중국의 약 4,000년 전에서 3,000년 전의 하나라, 은나라의 왕실 파일들을 모아놓은 것이 『상서』다. 문제는 이 책의 변질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하나라, 은나라 왕실 기록들의 일부를 공자가 100편으로 추려서 묶었고, 이는 다시 29편으로 줄어들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때 모든 경서가 불타 사라졌다가 한나라 때의 유학생 복생에 의해 다시 29편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래의 역사적 실록이 공자와 복생이라는 인물을 거치면서 유교적 가치와 편의를 위해 상당부분 변질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 변질의 역사는 3,500년 이상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상서의 오류를 밝히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오류를 인정하지 못하는 풍토속에서 자란 동양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 동양사회의 뿌리깊은 가짜문화라고 볼 수 있다.
왕이 된 조갑은 제례문화를 정비하였다. 그는 이전에 있던 모든 토템, 즉 황하신, 천신 등에 대한 제례를 폐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직계혈족의 제례만을 강화했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위상강화를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조갑과 그의 신하들은 우선 자신들 조상의 족보를 재 수정했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례화했다. 이것은 주변 부족들에게 자신들의 조상이 모든 토템과 샤머니즘적인 숭배 대상들을 초월한 존재임을 과시
하기 위한 대단히 정치적인 전략이었다. 유교문화의 족보 만들기, 족보 캐기 등의 출발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으며, 자신의
씨족 혈통 우월의식 또한 여기에 뿌리를 둔다.
천자는 정치적 존재인 동시에 종교적 존재였다. 수시로 신분을 바꿔가며 권위를 지켜 나갈 수 있는 길이 트인 것이다. 동양정치의
검은 그림자인 통치자의 카리스마, 혹은 쉽사리 법을 유린해 버릴 수 있는 초법적 권한 행사의 문화적 면죄부가 바로 이때
주워진 것이다.
초월자의 아들인 천자는 자신의 아들을 각 지역의 정치 책임자로 보내 제후를 만들어내었다. 통치체계는 혈친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주나라 때의 종법 정치로 후일 동양사회의 뿌리 깊은 혈연주의의 시발이 되었다.
또한 지방으로 보내야 할 정치 책임자를 만들기 위해 한 여자에게서 낳은 남자의 수가 적다는 이유로 축첩제도와 남존여비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찾기 위해 공자의 제자들 모두는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했으며,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고 미화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유교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바로 공자의 교훈이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요약하면 ‘과거 무결점주의’ ‘조상숭배’ ‘수직윤리’ ‘인과
의’ 등인데, 동중서는 이 중에서 ‘인과 의’에 대한 교훈은 완전히 들러리로만 써 먹었다. 왜냐하면 그는 공자 교훈의 실패가 어디
있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장의 제자였던 이사와 한비자 역시 유교를 버리고 법가로 돌아섰던 기억은 당시 동중서의 논리에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동중서는 공자의 유교를 끌어들이되 몇 가지 보완과 수정을 가했다. 몇 가지 주술적 분위기를 첨가해 정치에 힘을 더하였다.
우주의 모든 존재를 하늘, 땅, 사람, 음‧양, 금속, 나무, 물, 불, 흙 10가지로 단순화시켜 10단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금속, 나무,
물, 불, 흙 5가지를 강조해서 오행설이라 부른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기업이나 대학, 연구소 등 조직을 들여다보면 의사결정 구조나 정책 입안 등에서 거의 동일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기업총수의 개인적 희망이나 취미로 인해 결정되는 사업 아이템, 전문가의 분석을
재해석 할 수 있는 정치적 결단(?), 연구원이 능력보다는 여전히 ‘친구의 아들’로 채워지는 현실, 연구비의
책정이 동문이나 스승, 제자의 학연 등에 영향을 받는 현실을 여전히 목도할 수 있다.
효도는 자식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해드려야 하는 일방적 희생의 위험부담이 있는가 하면, 받는 사람도 자신의 처지에 걸 맞는
적절한 처방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희생당하기는 마찬가지다. 효도는 그것을 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에게 있어 적절한 안전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무한 책임론이다
노인들의 문제는 효도로 풀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 사회에서 제도와 설비와 관심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와
설비 마련이 더딘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우리 사회가 이제껏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숭상해 왔던 효도에
대한 터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가슴 속에서 거품처럼 부글대는 이 문제를 숨기면 숨길수록 희생자는 점점 많아져 간다.
유교경전 상성서 보이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나 논어에 담긴 공자의 ‘여자와 소인배는 기르기 힘든 존재’ 언급은
동양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위상을 결정짓는 잣대가 되고 말았다. 중국은 물론 후대 조선 유교의 여성위상을 결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준 중국 당나라때의 당률에 담긴 ‘남녀 유별’의 내용도 이러한 사상의 연속선상에 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법으로 묻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를 때리면 징역 2년이다. 남자가 여자를 죽이면 징역 3년이다. 여자가
남자를 죽이면 즉시 목을 벤다. 남자가 부모를 때리면 곤장 100대를 친다. 여자가 부모를 때리면 목을 졸라 죽인다”
민족의 특성이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후천적 습성의 복합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문화권 내에서 형성되는 모든 유형, 무형의
존재들의 특성을 결정짓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다.무조건 우리 것이 좋다고 외칠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곁에서 배워야한다. 조금 솔직해지고 허심 탄회해지자. 그래야 인생이 즐거워진다
우리의 모든 문화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하면 싫은 것처럼 일본인들도 모든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건네 준 것이라고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문화 전파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더라도 중국의 문화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 일부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음을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교의 가치관 중 공자가 한 말로 이런 것이 있다. “괴이하고, 억지 쓰는 것, 상황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 귀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정상적이고, 순하고, 단순하고, 인간적인 것만 말하라는 뜻이다. 물론 이 상황들은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가치관의 측면에서 다시 다루어져야 하지만 이로 인해 600년(조선500년과 근대) 이상 억압된 상상력은 21세기가
다가오는 오늘날에도 터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주영을 보라. 남북대화의 물꼬는 정치학자들의 이론이나 정치인들의 잔머리로 트인 것이 아니다. 무식해 보이기까지 한
장사꾼의 아이디어로 열렸다. 중국인과의 대화는 철저하게 장사꾼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새로운 문화의 세대로 들어선 아이들에게 새로운 생존전략을 가르쳐야 한다. 인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자. 인사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따뜻한 감정이 전달될 수 있도록 사랑의 인터넷이다. 아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아이와 대화 할수있다
‘쓰기’가 능력테스트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유교사회가 숭상하던 ‘쓰기’ 문화에서 아직 벗어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는
‘만들기’를 천시하면서 ‘쓰기’만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분류했다. 특히 유교의 ‘쓰기’는 창의적인 쓰기가 아니라 경전의 테두리
안에서 ‘베껴쓰기’를 숭상했다는 점에서 후대에 큰 악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이제 말을 해야 한다. 자신을 감추고 진실을 감춘 왜곡된 목소리가 아닌 자기 스스로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도, 인물도, 사건도 모두 진실을 바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들어주어야 한다. 진실에 기초한 말은
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대화는 타협을 초청할 것이며 타협은 발전된 해결책을 가져다 줄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 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이 이방 인의 문화는 조선 황실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 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 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공자의 도덕은 '힘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수시로 우리 눈앞에서 휘두르는 '도덕성 회복'이나 '민본주의 사상' 등의 유교적
깃발들은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가부장적 독 재와 밀실 야합, 그리고 불평등의 가치를 옹호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말로는 표현할수없는 감동의 사진
역대 풀리쳐상 수상 작품 사진
출처: 루리웹 유머 게시판 크리스토퍼 존슨(blavkhawk)님의 글
(역대 풀리쳐상 수상 사진)에서...
1942년
1941년 4월 3일 아침 노동조합원의 해고를 계기로 벌어진 디트로이트의 르주 공장
에서1만 5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을 저지하려는 회사측과
노동자들의 투쟁에 경찰이 개입.난투극이 벌어졌으며 미국 자동차 산업
사상 최대의 노동쟁의가 되었다.
밀턴 브룩스 촬영.
1943년 "Water"
프랭크 노엘 촬영. 1942년 1월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의 공격을 받던 노엘 기자는
본사의철수명령을 받았고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수송선에 타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뢰공격을 받고 침몰, 77명의 선원중 27명의 생존자들과 구명보트에 타 표류했다.
표류한지 며칠, 다른 구명보트가 노엘이 탄 보트에 가까워졌을때 보트의 인도인
선원이 물을 구걸하다시피 청했고노엘은 그 광경을 촬영했다. 하지만 노엘의
구명보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1944년 "Homecoming"
Earle L. Bunker 촬영. 1943년 7월 로버트 무어 대령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광경.
1945년 "Iwo Jima flag raising"
조 로젠탈 촬영. 미 해병대 6명의 병사가 이오지마 정상을 점령하고 수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는 역사적 현장을 AP통신의 로젠탈이 촬영.
1949년 "Babe Ruth Bows Out"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Nathaniel Fein 촬영.
1948년 6월 13일 거인으로 추앙받았던 베이브 루스의 은퇴식을 촬영하였다.
모든 사진기자들은 그의 앞모습을 촬영하였지만 페인은 그의 뒷모습을 촬영하였다.
루스는 은퇴 이후 얼마안가 세상을 떠났다.
1951년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막스 데스퍼 촬영. 한국전쟁의 비극을 가장 잘 나타낸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12월. 극심하게 추웠던 겨울. 국군은 중공군을 피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은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어떻게든 추운 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유일한 길이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 뿐이었다. 그 광경을 촬영한 사진.
데스퍼는 자신이 본 광경중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다고 회상한다.
1957년
해리 L 트래스크 촬영.
그는 안드레아 도리아호가 충돌에 의해 바다속으로 침몰하는 광경을
드라마틱하게 촬영해냈다.
1958년 "Faith and Confidence"
워싱턴 데일리 뉴스의 William C. Beall 촬영.
두살배기 어린아이가 거리의 퍼레이드에서 안으로 걸어가려는걸 경찰이
다정하게 제지하고있다.
1961년 "Tokyo Stabbing"
나가오 야스시 촬영.
사회당 당수였던 이네지로 아사누마가 연단에 나와 연설하던 도중 유세장에 한
학생이 달려들어아사누마를 찌르는 장면은 마이니치 신문의 나가오가 촬영
하였다.이 장면은 두번째 칼날을 빼는 순간을 촬영. 이후 아사누마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1963년 "Aid From The Padre"
헥터 로든 촬영. 6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 당시 파디랴 신부가 부상당한
군인을 총알이빗발치는 가운데 성사를 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1964년
로버트 H.잭슨 촬영.
케네디 살인범 리 오스왈드를 잭 루비가 살해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1968년 "The Kiss of Life"
로코 모라비토 촬영.
감전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는 동료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
"Dreams of Better Times"
토시오 사카시 1967년 6월 베트남의 미군의 모습을 촬영.
1969년 "Saigon Execution"
에드워드 . T 애덤스 촬영.
베트남의 경찰청장 구엔 곡 로안이 베트콩을 처형하기 직전의 모습을 찍은
모습이다.이 잔인한 장면은 이후 전파를 탔고 베트남의 여론을 반전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존 폰 필로 촬영.
켄트 주립대학교의 학생이었던 필로는 수업을 듣고 나오다가 학생과 방위군이
대치하는 광경을 보았다.그러다가 방위군이 실탄을 쏘았고 한 학생이
쓰러진 광경을 찍었다.
Jack Dykinga 촬영.
홀로코스트가 아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장애 특수아 학교의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다.
1973년
Huynh Cong Ut 촬영.
네이팜 탄 폭격에 판 틴 킴 퍽이라는 소녀가 불바다가 되어버린 곳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전쟁에의 참상을 순간에 포착한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4년
Slava Veder 촬영.
캘리포니아 트라비스 공군기지에서 베트남 전쟁포로였던 로버트 스텀이 1973년
3월 18일,가족들과 상봉하는 광경을 잡아내었다.
사진만이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1975년 "Lull in the Battle"
제럴드 H. 가이 촬영.
시애틀 남부의 화재현장에 달려들고 난뒤 쉬고 있는
네명의 소방대원들의 모습을 촬영.
1976년
스탠리 포만 촬영. 1975년 7월 22일 보스턴에서 일어난 화재.
한 모녀가 소방 사다리를 타고 피신하려고 했으나 그만 소방
사다리가 붕괴되면서 둘은 추락하고 말았다.
1978년
촬영자는 스탠리 포만.
1976년 4월 6일 보스턴 광장에서 흑인 대학 입교에 반대하는 백인 시위자들의
모습을 촬영하였다. 사진은 한 백인 인종차별 주의자가 대학에
등교하려는 흑인을 공격하는 장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75년부터 공립학교는 백인 흑인 공동 교육을
실행합니다.그 일환으로 강제 버스 통학을 실시 하였는데, 이것이 심각한 반발을
삽니다.루이빌이 1975년 9월 신학기에 흑인 - 백인에 관계없이 버스로
통학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1980년
자한지르 라즈미 촬영.
이란의 이슬람 혁명당시에 1979년 8월 27일 쿠르드 인 11명을 집단처형하는 광경을
촬영하였다.당시 촬영자의 신원 보호를 위해 익명처리하였으나
최근에 라즈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83년
1982년 엘살바도르의 폭력사태가 극에 달했을때 존 딕맨은 군부수행원들과 함께
시골을 방문했다.그때 당시 반정부 지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는 죽음의 분대가 있었는데딕 맨의 사진은 한 여인이 최후의 순간에
집행유예로 살아남자 풀썩 무너질듯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빌 폴리가 베이루트의 사브라 난민캠프에서의 학살에서의 피해자와 생존자를
담아낸 연작 사진들.레바논 사브라에는 당시 팔레스타인 난민캠프가
있었는데바시르 게마이엘 대통령의 암살사건의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고용한 용병에 의해 난민캠프의 사람들이 학살된 사건.
1984년
Anthony Suau가 사진에 담았다.
전몰장병기념일에 한 여인이 남편의 묘비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
전쟁의 비참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의 스탄 그로스펠드가 촬영한 사진.
레바논 사태당시 스탄이 베이루트로 날라가 사진을 찍으면서 레바논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포화 속에서 뛰놀고 잇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그 사진을 담았다.
1985년
스탄 그로스펠드는 1985년 멕시코의 불법입국과 에티오피아 기아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본 사진은 1984년 수단의 난민수용소에서 식량배급을 기다리는
에티오피아 모녀의 모습.이 사진의 소녀는 그날 세상을 떠났다.
1986년
Tom Gralish 가 찍은 홈리스의 모습.
당시의 사회문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Carol Guzy 와 Michel duCille 이 촬영.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즈 화산의 분화장면을 찍었다.
1989년
프리랜서 사진기자였던 론 올쉬방거가 촬영한 사진.
1988년 12월 세인트 루이스에서 일어난 화재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올쉬방거는 한 아파트에서 소방관에 의해 구조되는 한 아이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소방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속의 아이 페트리샤는 심각한 화상으로
인해 6일만에 생을 마감했다.
1991년
윌리엄 스나이더가 촬영한 사진.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몰락 이후 에이즈에 걸린 고아원 아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1994년
프리랜서 사진기자였던 케빈 카터는 1993년 2월 수단에서 허기져 일어날 힘도 없는
어린아이를 찍었다.그리고 그 뒤로는 굶주린 독수리가 어린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을 찍은후 케빈 카터는 독수리를 쫓아내고 아이를 구호소로 데려다주었다.
이 사진으로 94년도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어떻게 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부터 촬영할 생각을 했냐는 비난 여론에 괴로와
하다가 자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어쨌건 이 사진 한장으로 수단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폴 와트슨 촬영.
소말리아 내전당시 추락한 헬리콥터에서 나온 미군의 시신이 분노한 군중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촬영하였다.이 사진 한장으로 미국 내에는 거센 반전 여론이
일어났고 수개월 뒤 미군과 UN는 소말리아를 떠났다.
이후 집권자였던 아이디드는 96년 살해되고 소말리아는 계속되는 혼돈에 빠졌다.
블랙호크 다운을 보신 분들은 중반에 추락한 헬리에서 미군의 시신을
발가벗기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1995년 AP통신. 르완다 내전의 광경을 시리즈로 찍어 수상했다.
아이들이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 와중에 한 아이는 지쳤는지 엎드려 있다.
한 어린아이가 자이르 난민캠프에서 병에 걸려 쓰러진 엄마를 깨우고 있다.
어린 난민들이 르완다에서 자이르로 향하는 다리에서 호소하고 있다.
르완다 난민들이 탄자니아의 난민캠프에서 물을 나르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캐롤구치.
아이티 공화국의 혼란상을 사진에 담아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
9월 27일 포르토프랭스에서 일어난 식량난동때 아이티 여인이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쌀이 묻어있다. 식량창고는 약탈당한
이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 미군병사가 9월 29일 포르토프랭스의 거리행진때 폭발물을 던진
용의자를 성난군중들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폭발로 5명이 죽고 40명 이상이 다쳤다.
눈물
희생
부활
분노
군중재판
두개의 얼굴
군중과 악수하는 미군
1996년
1995년 4월 19일 프리랜서 기자였던 찰스 포터 4세 촬영.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 사건때 구조되는 피묻은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AaP통신에 실렸고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이는 병원에 도착하자마 숨을 거두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스테파니에 웰시가 케냐에서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할례의식을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
할례를 받을 소녀는 세이타 렌질라라고 한다.
할례식에 사용되는 유일한 도구.
고통에 울부짓는 세이타.
선혈이 낭자하다
의식의 끝에는 고통만이 남는다.
1998년
1997년 마씨 리알 촬영. 호텔 르완다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인종분쟁과 대학살을 담아내는 여러장의 사진들로
98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7살짜리 Bitama는 자주 울음을 터뜨린다.
이 소녀의 부모는 94년 르완다 사태때 살해되었다.
르완다의 후투족 난민들이 탄자니아의 Benaco Junction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그들은 르완다에서 도망쳐 탄자니아로 흘러들어왔다.
군인들에 의해 르완다로 돌려보내는 걸 막기위해 피난민의 일부는
케냐나 말라위로 갈것이라고 말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4달바기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에 등에 업혀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룬디를 벗어났고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북 탄자니아의 북경지에서 형제들이 옥수수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부룬디를 벗어난 후투일가의 첫 식사가 될것이다.
40세의 부룬디의 후투족 여성으로 그녀는 옷을 내려 3년전 투치족 병사들에게
강간당하고 찔린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납치되어 그들에게 살해당했고 6아이들은 안에 있는 채로
불에 태워졌다.5명이 죽었다. 그녀는 임신을 했으나 유산되어버렸다.
그녀는 걷기조차 어려웠으나 자유를 찾아 탄자니아로 떠났다.
그녀는 1996년 7월 케네바와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으며 치료를 받는중이다.
난민들이 Mtendeli 난민캠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숨진 어린 여자아이를 위한
또 하나의 무덤을 준비중에 있다.
탄자비아의 병원에서 한 르완다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이소녀는 부모와 4일간을 쉬지않고 걸어서 피난민 캠프에 도착했다.
어린 후투족 수년이 식량프로그램에서 받은 죽을 먹고 있다. 영양실조로
건강이 안좋은지라 그는 매일 4번의 식사를 한다.
LA 타임즈의 Clarence Williams 이 알콜과 마약으로 중독된 부모들과
살고 있는 아이들의 비참함을카메라로 담았다.
34세의 테오도라 트릭스. 헤로인 주사를 맞은뒤 3살난 딸 타미카를 잠재우고 있다.
3살의 타미카 트릭스는 롱비치의 허름한 집에서 그녀의 어머니 테오도라가 친구와 코카인과
헤로인에 취해있는 동안 더러운 매트리스위에 잠을 자고 있다.
타미카가 버스 창문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녀의 삶은 어머니의 마약복용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올해까지 타미카는 전 남자친구의 어머니의 집,
차고, 호텔, 마약을 하는 곳을 포함해 최소 9번을 옮겨다녔다.
딸을 등에 두고 테오도라 트릭스가 헤로인 주사를 맞고 있다.
그녀는 타미카를 사랑하며 자기들보다 더 심한 중독자의 아이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 약에 취할때는 타미카에게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아이다운 발랄함으로, 타미카가 웃으며 어머니와 잠시 동거하는 남자 조니 앞을
뛰어다니기 있다."아빠는 감옥에 있어요" 타미카는 최근 설명했다.
"그래서 엄마가 슬퍼해요."
테오도라 트릭스가 잠에 떨어진 타미카를 돌보고 있다.
어머니가 약을 찾으러 몇 시간 혹은 며칠을 안보일때면 타미카는 그녀의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조니는 에이즈에 감염된 테오도라와 같이 쓰기로 한 칫솔로 타미카를 닦아주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잇몸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알고는 테오도라는 먼저 타미카의
이를 닦아주라고 청했다.
8살 케빈이 환각제에, 알콜 중독자인 그의 아버지 칼빈 홀로맨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케빈은 작은 아파트에 종종 드나드는 중독자들을 일컫어 "나쁜 놈들"이라고 부른다.
케빈은 10살짜리 누나에게 줄 옷을 찾기를 바라며 쓰레기통을 뒤진다.
신발을 찾았지만, 너무 작았다.
잠들기 전 애슐리 브라이언이 다시 생활이 나아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무관심에 애슐리와 그의 동생은 일주일째 목욕도 하지 못했고 배고픔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2000년 콜럼바인 학교 총기사고 현장으로 수상.
Daniel Rohrbough 가 죽어 누워있는 동안 왼쪽에는
학생들이 경찰관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있다.
학생들이 대피용 학교버스로 달려가고 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이 철조망으로 도망치는 와중 벽에 붙어있던
다른 학생들을 경관이 수색하고 있다.
구조대원이 부상당한 학생을 엠뷸런스로 실어가고 있다.
참사를 피해 무사히 대피한 학생들과 희생자의 가족들에게도 오열만이 남을 뿐이다
희생자들의 장례식 현장
Carol Guzy, Michael Williamson, Lucian Perkins 공동 수상
코소보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세노코스 난민캠프에 도착한 모녀.
아파치 헬기가 폐허 위를 날라다니고 있다.
북 코소보의 미트로비카에서 온 알바니아계이들이 알바니아로
향하는 국경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람들로 가득찬 난민캠프에서 기다리는 동안 8살난 Avdullaha가
수천명의 난민을 알바니아로
태우고 간 차량과 비슷한 빨간 트랙터위에서 놀고 있다.
베나데트 수녀가 알바니아의 쿠크스에서 식량을 나누어주고 있다.
모리나 국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이 더이상 없자
그녀는 난민캠프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알바니아 쿠크스의 난민캠프에서 가족들이 재회했을때
2살의 Agim Shala가 철조망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 코소보 알바니아계 난민이 그녀의 삼촌 장례식에 애통해하고 있다.
난민들이 코소보로부터 피난길에 몇주 밖에 살지못한 아이를 묻고 있다.
집시 Velina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말하기를 그녀의 집은 돌아온 알바니아계 난민들에게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두 알바니아계 소년들이 집시의 폐허에서 불타오르자 도망치고 있다.
마케도니아 국경에서 남자가 그의 딸을 난민캠프로 향하는 버스에 태우려고 하고 있다.
2002년
뉴욕타임스진 일동에게. 9.11 테러의 모습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