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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다산초당외(강진2)〕
1.일시:'20.12.5.토.07:30~17:30(출발에서귀가:10시간)
2.코스:집-사의제-백련사주차장(관광안내소)-만덕산백련사-동백숲길-다산초당-백련사주차장(관광안내소)-다산박물관-강진만생태공원(철새관망지)-귀가
강진을 소개하는 안내서 표지에 문구가 특이하다.
‘남도답사1번지.강진 ♡愛를 흔들리다’.
강진에서‘멋과 맛에 흔들리다’‘길에 흔들리다’그리고는‘강진 愛에 흔들리다’라는 글이 써 있는데 강진관광을 하면 강진을 사랑하게 된다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
‘康津이라는 이름은 백제시대에 도무군의 도강과 동음현의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道康)의 "강(康)"자와 탐진(耽津)의 "진(津)"자를 합해 강진(康津)으로 호칭하고 있다고...’.
강진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장흥이요,서쪽으로는 해남이요,남쪽으로는 완도요,북쪽으로는 영암이다.
耽津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당시 탐나라 제주도를 떠나는 항구여서 탐진이라는 이름이 탄생 되었다고.
탐진에서 출항한 배는 바다의 파도가 심하면 중간지역 완도에서 머물었다고 한다.
강진여행코스는 4권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①영랑권역(사의재·저잣거리.남미륵사.강진만생태공원.세계모란공원.영랑생가).
②다산권역(백련사.다산박물관.석문공원.다산초당.가우도).
③청자권역(고려청자박물관.한국민화뮤지엄.강진청자판매장.초당림.마량항).
④하멜권역(전라병영성.하멜기념관.강진다원.무위사.백운동원림)이다.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유배길 4코스’도 곳곳에 안내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2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에는 지난주 방문 했던 영랑생가와 사의재가 그리고 오늘 가게 되는 백련사와 다산초당 철새도래지가 포함되어 있다.
영랑100년.다산200년.백운정원400년.전라병영성600년의 역사가 강진에서 숨쉬고 있다.
1000년고찰 백련사가있고 무위사가있다.
신라 800년대 애장왕원년에 만들기 시작했던 도자기는 세계적인 고려청자를 탄생시켰는데 천관산가는 길에 그 원조자리가 있다.
지난주 영랑생가 방문시에 들렸던 사의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한다.
영랑생가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사의제와 저잣거리와 다산체험관이 타운을 이루고 있다.
초가 건물 두체 중에서 하나는 東門賣飯家 주막이고 하나는 다산이 1801년 강진에 내려가 처음 4년간 묵은 집 四宜齋다.
사의제 앞 주모와 딸의 동상이 웃으며 반긴다.
四宜齋뜻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으로 생각·용모·말씨·처신에 대한 것으로 ①맑은 생각.②엄숙한 용모.③신중한 말씨.④진중한 처신을 하라는 뜻이다.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四宜)로 '담백한 생각(사의담, 思宜澹), 장엄한 용모(모의장, 貌宜莊), 과묵한 언어(언의인, 言宜認) 신중한 행동(동의중, 動宜重)'을 선비다운 덕목으로 꼽았다고 한다.
家齋舍구는 주모가 거주하던 집을 다산이 정해준 이른인데 ‘구’는 할머니를 뜻하며 주모를 호칭하고 있다.
(여기서 ‘구’자는 區자 옆에 계집女를 붙이는 한자인데 검색창에 나오지 않고있다).
東村禮舍는 다산이 머물던 곳 四宜齋를 다산이 스스로 호칭하여 불렀다고 알려준다.
지금의 과천에서 10여일 걸려서 1801년 음력 11.22일 강진에 도착한 다산이 감시속에 냉대 받은 다산을 당시 주막집 주모가 뒷방을 내주었고 6명의 제자를 모아 주고 나중에는 18명의 제자가 탄생하게 된 산실이다.
‘18’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인연이 재미 있다.
강진 머무는 기간이 18년 이였고 18명의 제자를 두었고 고향에서 18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 하였고 22세에 장원에 급제하여 18년간 (22세 시작 40세까지)벼슬살이도 끝내고...
밭에 씨 앗을 뿌리고 자라는 곳도 밭이고 가꾸는 곳도 밭이거늘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 하며 천시하는 남존여비의 사상의 잘 못됨을 이야기한 주모의 이야기를 듣고 남존여비사상을 당연시 하던 시절에 다산의 충격은 컸다고 다소 과장되어 전해온다.
천민 주모로부터 교훈을 얻고 학문에 매진하였다는 미담도 훈훈하게 들린다.
동트는 시간은 7:30분이다.
집에서 四宜齋를 지나 백련사 입구에 1시간29분 도착으로 검색된다.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안내소 근무하는 여직원이 내가 도착하는 시간과 같다.
萬德山白蓮寺라는 첫 일주문을 보며 드디어 다산이 다니던 숲길을 걷고 초당을 가게 되나보다 마음이 설레인다.
1000년 고찰 백련사다.
다산은 2012년 한국인 최초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세계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가 10년 동안 살던 초당은 남도유배지의 상징이다.
많은 이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다산은 1762.6.16.~1836.2.22일까지 살았으니 200여 년 전의 역사의 현장을 보는 것이다.
긴 시간이 아니다.
일주문 입구 우측 빨간 열매나무가 동백꽃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동백을 닮았다.
양치중 해설사보다 젊은 윤부현해설사의 브리핑도 간결하였고 백련사까지 함께 걸으며 들려준 이야기도 고마웠다.
입구에서 백련사찰까지는 동백나무 터널이다.
언제 보아도 매혹적인 동백꽃들이 피어있다.
고혹적 자태라 표현하고 싶다.
‘진실한 사랑, 겸손한 마음,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동백의 꽃말도 동백에 어울린다.
짙고 짙은 녹색 잎들 사이에서 새빨간 꽃이 당당하게 피어나 있다.
“다산초당가는 길 동백숲에 500년된 동백이 있다고 하던데요?”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동백이 400년이 넘은 것들입니다”
동백꽃은 겨울 한철 엄동설한의 12.1.2월에 사랑 듬뿍 주고 3월이면 조용히 눈물 흘리며 떠난다.
동백나무 숲길은 다산과 초의선사가 교류하던 사색의 숲이며 철학의 숲이고 구도의 숲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동백나무 숲을 아무 말 없이 거닐어야 한다고...
붉은 동백이 뚝뚝 떨어지는 행운을 얻었다면 가슴으로 꽃들의 이야기를 들으라 한다.
백련사 동백나무는 고고하기만 하다.
백련사찰 대웅전 글씨 중 大자가 사람이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형상이다.
18세기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가 완도 신지도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백련사에 들러 대웅보전과 만경루의 글씨를 써 주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떼어라 했다가 훗날 그 진가를 깨닫고 다시 달게 하였다고 한다.
초당 가는 길 산모퉁이 돌아가니 언덕에 세워진 다산과 혜장의 이야기 안내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한숨 쉬었다 가는 자리이다.
백련사를 두고 펼쳐지는 다산 정약용의 주변 인물들 초의선사와 혜장과의 교류 이야기는 다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
강진 유배 중인 다산이 5년째 되던 1805년 어느 날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백련사에 들렀고 여기서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를 만나는데, 다산의 운명을 바꾼 강진 사의재 주모에 이어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래에 별도로 첨부한다.
초당가기 전 100여M 모퉁이에 세워진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구강포 앞바다의 모습은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고...
다산은 천일각에 올라서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님 정약전을 그리워하였을 것이라고...
지금의 나주에서 형님과 생이별을 하고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다산초당의 자리는 "바위를 끼고 돌면 시야가 확 트인다"는 글과는 다르다.
비좁은 공간 경사진 앞마당에 축대를 쌓고 연못이 있고, 본인이 머문 동암과 제자들이 지내던 서암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사경(茶山四景)은 조그마한 샘있는 바위에 친필로 새긴 丁石과 샘터 藥泉과 석간수를 손수 떠다 앞뜰 마당에서 차를 달이던 靑石 그리고 蓮池石假山이라는 작은 연못을 말한다.
우물가 앞 바위에 丁石이라 새겨 넣고 이것이 내가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로만 삼겠다고 하였다는데 훗날 사람들은 그의 소박함이라 칭송하고 있다.
밤이면 정석이 새겨진 바위아래에서 북녘의 상감마마를 보고 절을 올리면서 유배생활에서 공부를 하고 글을 쓸 수 있도록한 것에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백연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1km거리에 불과하다.
초당앞 산길로 내려가면 800M거리에 기념관이 있다.
유배시절에 쓴 그의 대표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는 그의 학문 체계를 그냥 '다산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훗날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은 자신의 관 속에 목민심서를 함께 담기를 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기념관에서 알게된 하피첩(霞帔帖)과 매화병도(梅花倂題圖)이야기는 다산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10년째 유배 생활하던 다산에게 부인이 보낸 다섯 폭 낡은 치마를 자르고 다듬어 4개의 서첩으로 아들과 딸에게 효도·우애 가르치고 폐족 신세 실망 말라 타이르는 아버지와 남편으로 애끓는 사연이 배어있다.
기념관 광장에 돌비석들로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 중에서 이해찬 후배가 세겨 놓은 글을 발견했는데
‘아첨 잘 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언하기 좋아하는 자는 배반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해찬의 평소 정치의 신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산은 우리시대 인생의 스승이다’는 생각하며 기념관 관람을 마친다.
유적지에서 사실여부를 떠나 전해오는 사담이나 여담이나 전설은 흥미롭다.
전남문화관광해설사 양치중님과 독대하는 행운에 거듭 감사한다.
다산이 집필한 500여권의 방대한 저서.
저서를 읽을 수는 없어도 다산의 세상에서 사상과 학문을 조금이나마 알아야 하는 의무감을 느낀다.
아래 첨부한 긴 글들은 요약한 것이다.
우리 같은 노년들이 읽기에는 지루할지라도 다산의 삶을 엿볼 수 있으니 기쁜마음으로 임하자.
다산은 18년간을 개혁의 현장과 유리된 상태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오랜 귀양살이가 오히려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이상과 현실을 哀絶陽이라는 시에서 엿 본다....^^
다산의 韓詩 哀絶陽에서 사회의 피폐상을 전하고 있는데 끔직한 이야기다.
‘절양(絶陽)’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것인데,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양근을 자른 사건과 그것에 목 놓아 우는 아낙의 모습을 그렸고 죽은 시아버지와 갓 낳은 자식이 군적(軍籍)에 올려 세금을 받아내는 이야기다.
백성들은 세금을 견디다 못해 이런 일을 저지른데 양반 부호들은 풍류나 즐기면서 한 톨의 세금도 내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고...
다산은 76세까지 당시로서는 장수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름진 땅 강진 맑은 산속에서 있다가 양평 두물머리로 돌아간다.
차를 즐겨 마셔 장수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웃어 넘기자.
지금 세대에 차 문화는 기호품이요 필수품이 되었는데 찻잎이 식품이고 약품이라고 애용하였다고...
茶山이라는 호도 이런 유래로 만들어 졌다...
다산초당 주변에 차가 많이 자생하였으니 茶山이다.
삼미자라는 말이 있는데 강진의 기후가 뜨겁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아열대성으로서 피자.비자.유자의 세가지 차 식물이 자생하였고
또 다른 삼미자는 다산이 천연두에 걸려서 눈썹 밑에 흉터가 세군데 생겨서 삼미자라하고 호로도 사용하였다는 우스겟 소리도 들려 준다.
전자를 한자로 표기하면 三味子요 후자는 三眉子로 적으면 될 것 같다.
다산은 자식(아들3+딸3)을 두었으나 천연두로 잃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딸과는 8세때 헤어져서 14년 후 22세에 만나게 되었고 죄인의 딸로서 시집가기 어려웠으나 해남 윤씨 가문으로 시집을 보낼 수 있었다고...
다산의 부친 정재용은 진주 목사로 있었으며 고산 윤선도는 다산의 외가였다고...
양평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의 과정도 덧붙이고 싶다.
다산이 해배되어 남양주의 여유당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9월 15일.
그해 1818년 봄에 목민심서가 마무리 된 해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다산은 18년간 강진에 있으면서 다섯곳에 열여덟마지기(3600평_구입당시 91냥, 1냥이면 엽전 1백닢이니 91냥은 당시 서울서 집을 두 채쯤 살 수 있는 거금_약 8억^^)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이 토지는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어 모은 곗돈 35냥을 받고 계답(契畓)으로 삼는다.
이때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다신계의 절목을 작성하고 먼저 계답의 위치와 크기, 세액을 자세히 적은 후, 다신계 운영의 약조를 정하였으나
불행히도 얼마 못가서 다신계는 깨졌다고 한다.
다산은 강진에서 소실 사이에서 난 홍임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사연인 즉슨 1809년 다산초당 리모델링이 끝나고 강진읍내에서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저술에 힘을 쏟다 1812년 전후로 풍에 걸려 살림살이를 할 사람이 필요했을거라.
다산은 홍임모녀와 함께 강진을 떠나 보름이 넘게 제자들이 끄는 책을 실은 수레를 따라 머나먼 길을 걸어 한강에 배띄우고 미사리를 지나 팔당협을 지나 남양주 마재로 돌아왔다고 한다.
강진만이 깊숙이 강진을 침투해 들어 왔다.
탐진강이 흘러서 바다로 나가며 강진만 생태공원을 만들었다.
강진 조그마한 고을에 아홉 개의 산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어서 생태공원을 더 청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낙동강에서 강진으로 11개의 하구가 있는데 백조가 날아오는 곳은 강진만생태공원이 유일하다고...
순천만의 것은 흑두루미 뿐이라고 한다.
백조=고니는 왜 이곳 강진만공원으로만 오는 것일까.
이유는 백조들의 먹이 때문이라고...
세모고쟁이풀(?)과 섬매자기풀이(?)과 왕골풀이 자라고 있어 먹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베리아에서 물경 2500마리가 10월에 날아와서 월동하고 2월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
백조의 호수에서 볼 수 있는 멋진 모습은 백조들이 물위를 차고 오르는 장면이라고...
백조가 비행하는 장면은 비행기 이륙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하얀 몸으로 동아리를 틀고 갯벌에 움츠려 있는 백조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청둥오리들이 함께 모여서 헤엄치는 모습 눈에 담으니 저들 마냥 기분 좋다.
혼자의 시간을 가지며 인적 뜸한 길을 쓸쓸하게 걸었다.
凡人이 瞑想의 시간을 가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의식은 고요한 내적 의식에 있다는 가정에서 인간의 마음을 순수한 내면의식으로 몰입하도록 만들어 참된 자아를 찾는 동양종교의 수행법'을 瞑想이라고 한다.
여기 오늘 한 凡人이 초당길에서 瞑想의 時間을 흉내 내어 보았고 다산의 모습을 기념관에서 보았으며 청정지역에서 백조와 함께하며 해지는 호수길을 걸었다.
기쁜 마음 가득하여 배우고 즐기며 보낸 흐뭇한 하루다.
두서없이 쓴 글들이 여담이요 야사요 전설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함께 엉켜는 있어도 역사의 이야기라는 실감은 간다.
시 하나 남기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졸필을 마친다.
- 다산초당길에서… -
연꽃처럼 아름다운 백련사찰이.만덕산 아래서 큰 덕을 베풀었다.
동백으로 물든 초당 가는 길, 객이 와서 풍경 소리 듣고 걷는구나.
새들은 숲속에서 꽃 사이를 날고, 산 아래 바다에서 백조가 춤을 춘다.
홀로 가는 초당길이 쓸쓸다, 어디 유배길만이야 하겠느냐 헤아려 본다.
발자취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초인은 우리에게 크나큰 유산을 남겼으니
우리가 알아야 할 선비 다산, 담아 놓은 그릇이 하도나 크구나.
격변기의 삶을 살아온 일생을 알고서, 부끄러움마저도 죄스러운 것 인 냥.
그의 영정 앞에서, 깊숙히 고개숙여 머리를 조아린다.
【첨부】
첨부글에 일부 중복된 이야기가 있고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다산 정약용에 관해서는 『여유당전서』에 담은 [ 茶山 丁若鏞 ] 격변기의 삶을 참조하면 더 세세하게 알 수 있겠다.
¶2012년 정약용은 장자크루소,헤르만헤세와 함께 한국인 최초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된 세계적인 인물이다.
루소보다도 헤세보다도 더 훌륭한 점이 있다면 유배지에서 생활상 일 것이다.
인간 승리라는 말을 하기에도 웬지 쑥스럽다.
큰 스승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어 감격스럽다.
-茶山 丁若鏞 小考-
1762년(영조 38)6월16일~1836년(헌종2)2월22일까지 76세로 장수한다.
영조와 정조시대이전, 조선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나라의 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노론과 소론은 당파 싸움을 벌이며 권력을 독점하는 데 몰두했다. 그들이 법 위에 군림하는 사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정조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잘못된 법을 고치고 좋은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규장각을 설치해 당파 구분 없이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국왕 호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왕권을 강화했다. 지방 행정에 대한 통제를 높이기 위해 수령의 임기를 보장했으며,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해 지방 관리와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았다. 경제 개혁도 단행했다. 소상공인도 자유롭게 상거래 할 수 있도록 신해통공을 실시하고, 노론과 결탁해 판매 독점권을 갖고 횡포를 부리던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정조 개혁의 백미는 신도시 건설이었다. 수원 팔달산 아래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화성을 축조했다.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이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노론 기득권 세력을 압박한 것이다. 그개혁 정치의 중심에는 영의정 채제공과 젊은 정약용이 있었다.
[개혁 정치 펼치다 귀양살이] 정약용(1762~1836년)은 정조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1783년, 22세 때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온 뒤 뛰어난 학식과 재주를 보이며 곧바로 왕의 눈에 들었다. 28세에 대과 합격한 뒤에는 6개월 만에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배를 연결해 한강을 건너도록 하는 배다리를 설계하라는 영이었다. 약용은 탁월한 공학적 실력을 발휘해 신속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3년 뒤에는 화성의 설계를 맡았다. 10년을 예상한 공사였지만 약용은 도르래의 원리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중기 등을 개발해 불과 2년 6개월 만에 완공한다. 33세엔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 색출해 파직하기도 한다.
정조와 함께 사회 제도를 개혁하고 법을 바로 세우려 한 약용은 기득권 세력의 끈질긴 모함을 받았다. 정조는 노론의 공세가 심할 땐 그를 잠시 좌천시키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곁으로 불러들였다. 1799년, 38세엔 지금의 법무부 고위직과 비슷한 형조참의에까지 오르나 고작 한 달 만에 또다시 탄핵상소를 받고 사직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정에 이래로 11년간 여러 직책을 거치며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고 소회를 밝히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한다. 끊임없는 모함에도 그를 지켜주던 단 한 사람,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약용은 신유사옥에 연루돼 의금부에 체포된다. 천주교 신자라는 죄명이었다. 셋째 형 약종은 사형되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에 유배됐다가 흑산도로 이배됐으며, 무고함을 주장하던 약용은 포항 장기로 유배됐다가 다시 강진으로 보내진다. 그의 나이 40살 때였다.
[죄인 정약용 보듬어준 사의재] 정약용이 18년 귀양살이했던 강진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먼저 사의재를 찾았다. 강진에 유배 온 선생이 처음으로 머문 곳이다. 누구도 감히 죄인을 도와주지 못할 때 그를 거둬준 주모의 주막집 뒷방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수년 전 강진군이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고 한다. 한옥체험관까지 마련해 지금은 여행객들이 한옥에서 자고, 주막집에서 아욱된장국 곁들인 소박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사의재는 초가지붕에 흙벽으로 단장돼 있다. 마당엔 오래된 나무와 작은 연못이 어우러져 예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지금은 툇마루까지 갖췄지만 당시엔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비바람만 겨우 피하던 방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을 ‘네 가지(의로운 생각, 얼굴, 말, 행동)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으로 ‘사의재’라 이름 짓고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4년간 사의재에 머물던 선생은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 등을 전전하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의 흔적을 쫓아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목민심서’의 산실 다산초당] 강진읍에서 차로 20여 분 달려 도암면으로 가니 다산초당 못 미쳐서 다산박물관이 보인다. 수생식물이 어여쁘게 어울려 자라고 있는 박물관 안엔 선생의 일생이 일목 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선생의 사상과 업적도 잘 설명돼있다. 선생은 법학, 의학, 경제학, 지리학, 기상학, 자연과학 등에 두루 학식이 깊은 대학자였다. 유배 와서도 수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다산초당에서 무려 500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에게 유배는 학문을 완성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며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적은 책 ‘목민심서’, 토지·세금 등 모든 제도의 개혁 논리를 제시한 ‘경세유표’ 등이 초당에서 초안을 잡거나 저술됐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엔 수많은 나무뿌리들이 얽혀 나그네의 걸음을 도와주고 있다. 민중의 억척 같은 삶처럼 굵게 얽힌 뿌리의 길 끝에 다산초당이 단정한 모습으로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양옆으론 선생이 기거했던 동암과 그의 저술 활동을 도운 제자들이 거처했던 서암이 있다. 선생이 직접 ‘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는 병풍바위, 수맥을 찾아 직접 팠다는 약천, 약천 물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 등 선생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만덕산 자락에 위치한 다산초당에서 선생은 어느 때보다 안정을 찾는다. 산에서 자생하는 차나무 잎을 뜯어 차를 만들어 마시는 여유도 즐겼다. 다산이란 호는 이때 생겨 난다. 당시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11년을 머물며 선생의 학문을 집대성한다.
아암 혜장선사는 백련사의 주지이자 유배 중이던 다산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 두 사람은 초당과, 만덕산 반대편 기슭에 자리한 백련사를 산길 따라 수없이 오가며 학문을 논했다. 선생의 발자취 따라 백련사로 넘어간다.
백련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20여 분 동백숲길 걸어 당도한 백련사 앞마당에 서면 강진만 앞바다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다산은 이곳에 서서 흑산도로 유배 간 형님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818년, 57세 때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선생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다산이 초의선사와 추사김정희의 만남으로 삶이 바뀌었다는 중요성에서 그들의 인연을 싣는다.
-다산과 혜장의 인연-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다산과 혜장선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고 다산은 혜장 스님의 불심과 차도를 알아보고 혜장 스님은 다산의 인품과 학식을 알아보고. 유학과 불교의 교묘한 만남이라고...
【강진에는 210년 전 다산선생과 혜장선사가 만났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걷는 유명한 길이 있다. 다산이 신유년(1801)에 천주교 박해로 옥사를 당해 형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처음 4년 동안의 삶은 원망과 분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주막집에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1805년 가을) 백련사 아암혜장兒庵惠藏 선사와 대면을 하게 되었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에 귀양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 한번 꼭 찾아뵙고 정담을 나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대로 다산이 먼저 현계를 넘어 멀리 대흥사로 찾아가 짐짓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고 혜장을 만났다.
혜장은 이 촌로에게 거침없이 강설했으리. '저런 안하무인 무불이 있나'고 생각하셨겠지. 날이 저물자 다산은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십리를 걸어오다가 북암이라는 곳에 이르자 혜장이 뒤쫓아 왔다. '선생께서 어찌 저를 속이십니까? 선생님을 몰라 뵜습니다'고 하며 손을 잡아 이끌고 다시 대흥사로 가 하룻밤을 묵으며 그날 밤엔 '역' 얘기를 주로 나눴다.
다산을 강진읍 뒤에 있는 고성사(高聲寺)로 옮겨 살게 해주었다. 그리고 술 대신 차를 권하였다. 혜장에게 다산이 차를 보내달라는 편지글에 이렇게 썼다. 장난기 섞인 편지에 흐르는 아름다운 우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나그네가 요사이 차를 탐식하게 되었고, 겸하여 건강의 약으로도 충당합니다. 독서 중의 묘한 버릇은 육우의 『다경』 세 편을 완전히 통달하여 병중에도 건강한 누에처럼 노동盧同의 일곱 잔 차를 다 마셨습니다. 작은 구슬 같은 눈발이 날릴 때에 산사에서 등불 켜고 자순차의 향기를 맡고저, 활활 타는 불로 새 샘물을 길어다 끓이니 들에서 먹는 상서로운 맛입니다. 내가 듣건데, 고해의 좋은 양식은 시주의 보시가 가장 중하고, 명산의 차는 초단艸端의 으뜸을 가만히 보낸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내가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생각해서 은혜 베풀기를 아끼지 마시오.’
강진에서 다산은 혜장을 만나 술로 함께한 원망을 차로 치유하고, 이후에 혜장이 살던 인근에 다산초당을 짓고 왕래하며 400여 권의 저작을 한다】.
[출처] 다산과 혜장선사|작성자 여백
-다산과 초의선사와 추사김정희의 인연-
茶道의 중흥 다선일미사상이 펼쳐진다.
초의선사는 산속 절집에 사는 스님이면서 홀로 명상으로 선(禪)만 하는 스님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를 위시하여 홍현주.석주형제, 윤정현, 권돈인, 자하신위,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형제, 산천 김명희, 신헌등과 교류 했으며,후에 남도종화의 대가 소치 허유는 그가 키운 제자이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보다 24년이나 후배였다.
초의는 다산에게서 유서(儒書)를 빌어 읽고 시를 배웠으며, 또한 역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들 교유에는 풍류스러움이 넘쳐 흘렀고 다산과 초의에게는 그들이 즐겨마시는 차가 있었다.
다산은 이미 혜장으로부터 다도를 배웠고 초의는 우리나라 다도의 달인(達人)으로 불릴만큼 조예가 깊던 인물이다. 다산이 처음 다도를 알게 된 것은 혜장으로부터 이겠지만 다도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아무래도 초의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자이자 실학자이며, 우리나라 제일의 문장가인 동시에 최고의 명필로 추사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충남 예산에서 1786년 태어난 그의 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등이며 자는 원춘이다. 추사의 아버지는 그를 무척 사랑하여 그가 24세 되던 해에 청나라에 동신사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류를 맺었는데, 그들을 통해 금석학과 실학 등을 배웠으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특히 청나라 상류사회에서 배운 차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후일 이 차 문화의 영향으로 동년에 태어난 초의선사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으며, 초의와의 인연은 무척이나 각별하였다.
추사는 제주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차를 마시기도 했고, 초의가 그를 못 잊어 제주도로 건너가 반년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추사가 10년 먼저 세상을 뜨자 초의는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저 세상에 가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라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의 교류에 고리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차였다. 언젠가 초의가 만든 차를 맛본 추사는 초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 문구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 차를 빨리 보내달라고 조르는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초의가 차를 제때 보내주지 않으면 그는 다그치듯 서신을 다시 보냈으며, 으르고 을러서 고대하던 차가 도착하면 샘물을 직접 받아 정성껏 달여 차를 음미하였다. 초의가 만든 곡우차를 추사는 특히 좋아하여 천하제일의 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또한 차에 관한 많은 글을 짓고 수백에 달하는 호를 지었다.
예를 들면 ‘승설’,‘고다노인’,‘다문’,‘일로향실’ 등의 호가 있고, 초의에게 차를 선물 받고 써준 ‘명선’,‘죽로지실’,‘다로경권실’,‘다산 초당’ 등이 있다. 이들 중 명선은 초의선사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그의 호 중 하나인 ‘경향다로실’은 그가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일찍이 초의가 추사에게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했으니 차란 군자와 같아서 사특함이 없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하였는데, 추사는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라고 화답하였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이 경지들이 모두 다선삼매가 아닐 수 없다. 추사는 또 많은 다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시구에서 백석(白石)의 소탈한 삶을 부러워하는 애틋함을 담았다.
-茶山草堂에서 이룬 삶-
【茶山草堂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법제,종교,악경,의술,천문,측량,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문화재. 1963년에 다산초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 일대가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 중 10년 동안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간의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강진군이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 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1801~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다산초당은 1963년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2018년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백련산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고성암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3년을 지냈다. 다산초당으로 옮긴 건 유배 후 8년이 지났을 때였다.
다산초당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네 가지 경물이 있다.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 부르는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이다. '다조'는 차 끓이던 부뚜막 바윗돌로 초당 앞마당에 놓인 평평한 바위를 가리킨다. 다산은 이 바위에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약천'은 다산이 평소 물을 떠 마시거나 차를 끓일 때 사용하던 샘으로 초당 뒤에 있다.
'정석'은 다산이 초당의 주인이 자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성인 정(丁)을 새긴 초당 서편에 있는 바위다. 다산은 하늘도 깜박 잊고 이름을 짓지 않았다며 초당 서쪽의 이끼 낀 바위에 정석이라고 두 글자를 새겼다. '석가산'은 초당 오른쪽 연못 중앙에 산 모양으로 돌을 쌓아 조성한 곳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