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계란
손 원
허기질 때 삶은계란 한 두개 먹는 것이 최고의 호사였던 때가 있었다. 배고픔을 면했던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가끔 식탁에 계란반 밀가루반 섞인 계란찜이 두리반 한 가운데에 놓였다. 식구 모두가 한 두숫갈 씩 뜨면 계란그릇이 금방 바닥이 나 버렸다. 학창시절 사각도시락 밥에 계란후라이를 덮어 온 친구가 있으면 모두가 군침을 삼켰다.
삶은 계란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초등시절 소풍을 갈 때면 어머니는 삶은계란 3~4개를 도시락과 함께 챙겨주셨다. 그리고 가을 운동회 때 가족 모두가 학교 운동장에서 점심을 먹을때에도 어김없이 삶은계란이 있었다. 계란 , 밤, 고구마를 삶아 가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은 어떠한가?
수시로 계란 한 판을 사와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있다. 너무 오래 두어 상할까 걱정할 정도다. 계란 후라이가 연달아 두 끼만 나와도 애들은 짜증을 낸다. 계란은 한 때는 귀한 먹거리였으나 지금은 가장 흔한 식품으로 푸대접을 받고있다. 세대별로 살펴봐도 흥미롭다. 30대까지는 계란은 질리기도 해서 잘 먹으려 하지 않는다. 장년층인 50대까지는 평범한 음식으로 여기고, 60대 부터는 추억의 음식쯤으로 가급적 먹으려 한다. 80대 이상은 여전히 계란을 귀한 음식으로 여긴다. 어르신들은 산해진미 가득한 음식상임에도 굳이 계란찜을 가장 먼저 드시는 걸 볼 수가 있다. 잔반을 남길때도 계란찜 만큼은 아깝다면서 다 먹으려고 하신다.
나에게 구순의 아버님이 계신다. 계란을 특별하게 여기시기에 아버님의 냉장고에 계란이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하고 있다. 아버님은 아침 식전에 날계란 하나를 꼭 드신다. 냉장고에 넣어 둔 차가운 날계란을 빈속에 먹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도 아버님은 여전하시다. 아마도 지난 날 어려웠던 시절의 계란 하나가 마음속 깊이 각인 된 식탐일 것이다. 식탁의 잔반으로 계란만큼은 남기려 하지 않으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조그마한 닭장이 있어 닭 몇 마리는 길렀다. 초봄에 병아리를 사다가 기르면 가을 쯤 알을 놓기 시작한다. 이틀 걸러 놓는 계란은 많은 식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가끔 찜이라도 해 먹을려면 며칠은 모아야만 했다. 식탁에 오른 계란찜은 유일한 육류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면에다 송송 파를 썰어넣고 곁들여 날계란 하나 깨뜨려 넣으면 누구나 즐겨먹는 국민 간편식이 된다. 오늘따라 고이 말아 낸 계란말이에 눈길이 간다. 노오란 빛깔 속에 시금치와 당근이 어우러져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기성세대는 단백질과 미네랄 등 영양분이 많고, 부드럽고 고소하기까지 한 계란을 최고의 식품으로 여긴다. 삼시 세끼 우리의 식탁에서 계란이 빠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계란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계란을 즐길 수 있도록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면서 계란먹기를 권장하지만 효과가 없어 안타깝다.
먹거리가 흔한 지금도 계란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품이다. 계란 값은 비교적 저렴해서 서민들의 식생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예년에 비해 두배는 비싸졌다. 그 만큼 주부들의 장바구니가 가벼워져 곧 예년의 가격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수 개월 째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그러에도 생활 필수품이 된 계란구입을 자제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평소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덕택이다. 한 때 농가에서는 생산비도 못 건질 정도로 가격이 폭락했을 때에도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을 즐기기만 했다. 조류독감으로 닭이 몰살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소비자들은 강건너 불보듯 했다. 생산비가 안나와 비용절감을 하려고 닭을 혹사하고 있을 때도 무관심했다. A4용지 만한 면적에 닭을 가두고 알을 낳게 했다. 동물복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계란이 귀했던 시절에는 닭을 집뜰에 방사하기도 했다.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녀 성가시기도 했다. 이웃집 닭들이 우리 마당에서 채전을 뒤져도 그러려니하고 너그러웠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닭은 우리에게 더 많은 헌신을 했다. 요즘 같이 껍질이 매끄럽고 희끄무레한 계란이 아닌 껍질이 거칠고 빛깔도 유난히 짙은 싱싱한 알을 선사했다. 닭고기도 지금과는 달랐다.
농가를 위하고, 동물복지도 고려함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모든 생명체가 함께 누리며 살아야 우리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식물은 말할것도 없고 나아가 지구를 아끼고 환경을 보전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한다. 인간은 천지만물과 공존해야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계란 하나의 소중함을 곱씹으며 라면을 끓인다. (2022. 1. 12.)
첫댓글 우리들이 어릴적엔 달갈은 귀한 식품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양계장 없이 가정에서 몇 마리씩 키워 계란을 낳으면 시장에 내다 팔아 생필품 구입에 보태고 모아 두었다가 병아리를 까고 손님이 오시면 계란찜 정도로 먹어보기 힘든 계란이었습니다. 지금은 AI등으로 인해 값이 올랐다고 하나 우리들 냉장고 한쪽을 언제나 차지하는 흔한 필수식품이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