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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적 인물의 양성을 기하라
1. 현대 교육계의 통폐(通弊)
단지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작금의 일대 통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론에 실제가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일지도 모르겠다. 선전은 무척이나 잘한다.
그러나 실제 결과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육계의 실상을 바라보자.
시정해야 할, 또는 곧바로 실행에 옮겨야 할 부분은 얼마든지 있다. 과연 애국일의 행사는 보고대로 꾸밈없이 실시되고 있을까?
각 도마다 매년 1회씩 교장회가 있고 자문 답신이 이루어지고 있다. 듣고 있으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실행되고 있다. 말하는 사람은 하나의 항목이라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듣는 사람들은 “표현이 기가 막히다”라며 감탄하고 있다. 다시 눈을 아동에게 돌려보자.
부모에게는 효도, 임금에게는 충성, 벗에게는 신의라며 거의 모든 덕목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중국인 야채가게의 오이를 훔치고 친구 고무신을 고의로 바꿔 신고 가는 나쁜 사람은 없을까.
인고단련(忍苦鍛鍊)이라는 말은 매일 아침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불과 1개월의 라디오체조에 계속 출석하는 자는 결코 출석 가능한 아동의 전부가 아니다. 아동은 수신(修身) 이야기는 이상적인 것이고 현실의 자신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
선생들도 담배나 술은 해롭다고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피우거나 마시고 있지 않은가 하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교사와 아동 모두 실행의 박력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 충용한 장병들이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리고 잡초가 무성한 주검이 되고 있는 비상시에 이런 상태로는 안 된다. 목표는 정해져 있다. 요는 실행이다.
2. 국민적 예절을 훈련하라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두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있는 것에 일본 내지인과 조선인 두 민족의 풍속 습관의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자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사정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예기치 못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례들이말해주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아동에게 국민적 예절을 훈련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단순한 착상으로 지도하는 식의 임기응변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상(理想)을 말하자면 당국에서 예절 교과서를 편찬해 그 방침이나 방식을 제시하고 조선 전체가 일제히 통제해서 진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때까지는 . 어쩔 수 없으므로 각 학교에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예절 요목을 만들어매주 배당해서 구체적으로 지도하고 일상 예절을 습관이 되도록 연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매우다기에 걸쳐 있기 때문에 생략하겠지만, 현재의 실상에 비추어 경례, 방문, 통행, 식사, 관극, 승차, 하차, 차내의 공중질서에서의 청결, 정돈 등의 제반에 걸쳐 지도하고, 특히 실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소풍, 여행 등 모든 기회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학교에서 일정 시간 교사와 침식을 함께 하는 이른바 행적(行的) 훈련으로 일본적 예절을 습득하는 것도 유효한 수단이라 믿는다.
아울러 학교의 시설을 충실히 하고 변소, 물 마시는 곳, 숙직실 등에서의 예절은 가정에까지 연장시켜야 한다.
특히 조선인 소학교에서는 가장 중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봉실 등이 없는 관계도 있고 해서 앉았을 때의 예절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개선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수신(修身)과목 시간의 절반은 예절 훈련이나 기타 실천 방면에 할애하는 정도의 영단을 갖고 임해야 할 것이다.
3. 국가봉사를 제일의로 하라
원래 우리 황도정신은 나를 비우고 오로지 대군(大君)79)의 방패가 되는 것이 그 중핵이었다.
이것은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실행되어 전쟁터나 총후(銃後) 후원에서 수많은 미담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 행위와 경제 행위에 나타나는, 저 암거래는 어떤가.
사치품의 금지령이 나오지 않으면 생활의 근검절약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본래의 모습이서양 전래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파도에 휩쓸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3기 증상으로 진행된사람들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부장관이 말한 것처럼 국체의 본의로 되돌아가 자아공리의 사상을 배격하고 국가봉사를 제일의(第一義)로 하는 국민도덕을 건설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수신교육을 개선하여 그 선에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구체적으로 지도하라
국가봉사, 이타적 행위는 인생 최상의 도덕이다. 그것을 아동에게 잘 이해시켜 내일부터 곧바로 실행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만저만한 인식 부족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이타적인 측면도있지만 이기적인 측면은 더욱 강하다.
어린아이일수록 더 심하다. 따라서 이러한 아동을 지도하려면 순서에 따라 단계를 밟아 계획적으로 지도해야 한다.
일상적이고 비근한 공공에 대한 봉사, 학교 물건을소중히 여기는 일 등부터 시작해서 점차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종래에도 결코 등한시되었던 것은 아니고 실천 지도로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수신 교과서의 취급이 자칫 주가되고 실행 독려의 부분이 부차적인 것이 된 경향이 있었다. 개선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다행히 수신과는 각 학년에서 모두 주 2시간을 배당하고 있으므로 교과서 취급은 1시간으로 끝내도록 배당하고 절반의 시간은 예절이나 실천 지도에 충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래 수신의 점수는 각 학교에 따라 여러궁리를 하고 있겠지만, 단지 지적인 요소만으로 검사한 경향은 없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결국 아동들의
79) 천황.
실행적 관심을 잃게 된다. 나는 그 폐해를 다소나마 구제하고자 수신의 지적 부분을 5점, 실행 부분을5점으로 채점하는 방침을 세워 실시하고 있다. 그 실행 부분의 검정은 무엇으로 하는가.
이는 합리적인좋은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어서 결국 종래대로 담당 교사가 평소 품행을 관찰한 결과로 판정하고 있다.
위선자를 만들지 않고 진정 순진한 아동을 양성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지금도 생각하고 있지만, 매우어려운 과제이다.
따라서 평범한 옛날 방법을 실행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3월의 종업식 때에는 조행상(操行賞)을 모든 상의 최고에 두고 그리고 그 수상자 전형에는 담임뿐만 아니라 직원 전원의 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 신사참배 및 위인의 존경 장려
신사참배는 반도에서의 실천운동 가운데 가장 성적이 양호한 부분이라고 보는데, 참으로 바람직한일이다.
북중국에 종군하는 반도 청년이 개인적인 일로 고향인 조선에 돌아와 다시 현지로 귀환할 때, 혼자서 그 누구의 권유를 받지 않고도 신 앞에 열심히 머리를 숙이고 있는 숭고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반드시 그런 경지에까지 철저한 것이어야 한다고 느꼈다.
비교적 종교적 정조가 부족한 ‘반도인’에 대해서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신념으로까지 투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본 국민은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간에 신사와 천황폐하에 대해서는 일종의종교적 신념을 품고 있다.
반도인들도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신사에 친숙해짐으로써 그런 경지에 쉽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영웅과 위인의 숭배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아무래도 ‘반도인’ 아이들에게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위인이나 영웅이 적은 것 같다. 이는 다분히 역사적인 원인도 있을지 모르겠지만,일종의 평등심의 발로로 보이기도 한다.
중국인은 원래 왕후장상이 대체 뭐란 말인가 하는 철저한 평등관념에 서 있다.
순(舜)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라는 것이 중국인의 민족 신념이다. 이런 생각이 다분히 ‘반도인’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향상 진보는 어렵다. 또한 우리 국체에도 반하는 일이다.
영웅과 위인을 숭배하는 감정의 작흥은 앞으로 ‘반도인’이 길러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에 위인의 초상사진을 걸어 두는 것도 좋고, 또 가정에 대마봉재(大麻奉齋)와 함께 위인의 액자도 걸어서 아침저녁으로 그 감화를 받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사상의 충신과 걸사 또는 외국인이라도 예부터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나 수신과목 등과 연계해서 위대한 국가봉사의 행위나 정신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 스스로존경하는 시범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인들의 위대한 성격을 접하고 감격하도록 이끌어야한다.
이와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와카(和歌)나 명구 등을 때때로 낭독케 해서 사기를 고무하는동시에 위인의 고풍(高風)을 동경하도록 해야 한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이 몸은 설령 무사시노(武藏野) 들판에서 썩더라도 내 야마토다마시(大和魂)80)는 영원히 일본을 위해 바칠 것이다” 등도 쇼인의 초상화 밑에 이 와카를 붙여 두고 자신의 서재에 걸어 두면 감격성이 풍부한 청소년들의 마음을 분
80) 일본혼.
기케 할 것이다. 이런 기분을 반도 청년들에게 꼭 작흥시키고 싶다.
3) 행사 및 실행요목은 숫자를 적게 하고 철저하게 실행케 하라
현재 실행이 자칫 소홀해지는 것은 너무 행사가 많고 실행요목이 복잡하다는 것도 한 원인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을 골라 다른 사항은 임의 사항으로 하고 필행 사항이라고 정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서는 토지의 정황, 학교의 사정에 따라 벌칙을 두거나 감시원을 임명해서 일사불란한 통제 아래 전원이 실행에 힘써야 한다. 가령 신사참배, ‘국어’ 상용, 근로봉사, 출정 장병의 송영, 위문문 발송 등 실행에 옮겨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어서는 안 된다. 교사가 선두에서서 반드시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 강연회의 출석이나 창안품의 출품, 수학여행 참가 등 강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명료하게 구별해서 아동들에게 충분히 예고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4. 음악, 체육, 운동 등을 통해 국체적 정신을 계배(啓培)하라
1) 통제복종의 습관 양성
정치 기구, 경제 행위의 발동에서도 종래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경향은 청산되어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이행하고 있음은 세계적 추세이다. 공익이 있어야 사익이 있고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다.
그런 견지에서 장래는 모두 통제에 기꺼이 따를 수 있는 복종적 인물의 양성이 급선무이다.
우리 교육계에서도 과거와 같은 자유 교육은 사변 하의 오늘날 1개교도 있을 리 없겠지만, 여전히 교사의 머리에는옛날 찌꺼기가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교사의 이러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첫 번째 급선무이다.
반도에서는 교학연수소가 작년에 설치되어 교사의 재교육이 실시되고 있는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는 기구를 확대하여 각 도마다 하나씩의 연수소를 설치하여 하루 빨리 현직교원 모두 재교육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동에 대해서도 적절히 시대상을 이해시키고 이른바 권위 수순(隨順), 통제 복종의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해야 할 것이다.
2) 전교합창의 기회를 많이 가져라
이는 행사나 기념일에는 이미 실시되고 있다. 다만 나는 좀 더 횟수를 늘려 성적의 수준을 향상시키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따라서 적어도 1주일에 1회는 전교 아동들이 모두 모여 애국행진곡을 부르고 연맹가를 하나의 지휘봉 아래 정연하게 합창하기를 바란다.
1년에 1, 2회는 몇 개의 학교가 연합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합창한다면 통제 훈련뿐만 아니라 하나의 공동감, 국민감정의 함양에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만약 가능하다
면 당국에서 안을 정해 대강 불러야 할 곡명, 1주일에 최소한도의 횟수까지 규정해서 연초에 지시하고조선 전체가 일제히 실행하도록 한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음악, 특히 전체합창이 인생에 미치는 감화력은 위대하다.
저 지나사변이 시작되어 황군 장병등이 각 역을 통과할 때 일장기를 흔들며 노래한 용장(勇壯)한 군가가 얼마나 병사들을, 또 일반 대중들을 감격케 했던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 높여 군가를 부른 감격은 내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또한 여기에 교가에 대한 내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현재 각 학교에서 교가를 선정하려는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가사, 가곡을 총독부에 보내 검토를 받고 있는데, 참으로 시의적절한 조치로서 감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理想)을 말하자면 창가와 같이 일생토록 중대한 관련이 있는 것을 각 학교별로 가사를 달리하고 가곡을 달리하여 지방색이 풍부하게 하는 일은, 서로 친애협력하고 굳게 단결하는 선서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필자는 소학교 시절에도 중학교시절에도 교가는 없었다. 기미가요(君が代)81)를 부르고 일본 육군을 노래하고 반딧불을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애향심이 부족하다든가 옛 벗에 대한 친근감이 희박하다고는 볼 수 없다.
나는 차별적 방면에 착목하는 교가보다는 대동을 목표로 하는 전 국민이 애창해야 할 가곡을 부르게하는 것이 국민적 의식을 기르고 대동단결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일억의 국민들이 사할린의 절벽에서도 대만의 끝자락에서 불러도 감격할 만한 훌륭한 가곡을 부름으로써 진정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현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교가 전폐(全廢)를 주장하는바이다.
3) 국체적 체육 운동의 중시
이유는 전적으로 앞의 가창 항목과 마찬가지다. 다만 가창과는 달리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따라서2주일에 1회나 1개월에 2회 정도의 특정일을 이용해서 약 1시간 정도 실시한다면 영속적으로 실행할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가창과 달리 1개교 전부가 완전히 모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조회의 라디오체조를 철저히 하고, 평소 같은 학년 또는 근접 학년의 연합체조 등으로 그 기초를 확실하게 양성해 둔다면 비교적 통제적인 단체행동을 취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훈련을 하는 것이 학교 전체의 통제적 분위기를 만들어 일종의 교풍이 되어 교육상으로도 위대한 감화를 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소시간이 걸리거나 시간을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매년 수차례는 몇 개의 학교가 연합해서 체육일 등을 이용해서 이러한 행사를 실시해야 한다.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쇄신
1. 초등학교 쇄신 방책의 준용
이상으로 나는 주로 초등학교의 교육을 대상으로 논했는데, 그 쇄신 방책은 일부 수정해야 할 점을제외하고 그대로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에도 준용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다만 대상이 아이들이 아니고 교육의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방법은 상당히 다르겠지만 정신은 거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령 초등학교에서 교사의 덕화(德化)의 중요성은 중등학교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국어’의 상용, 단체 훈련의 중요성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오늘날 부진의 대상은 오히려 초등학교보다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에 두어야한다.
다음 구절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씨의 저서 '황도일본의 세계화(皇道日本の世界化)'에 있는문장이다. “
……오늘날의 교육에서는 중학 이하는 다소 형식적으로나마 교육의 결실을 거두고 있지만,중학 이상에 이르러서는 지식을 조금씩 끄집어내 전달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오늘
81) 일본 국가.
날 우리 일본정신이 가장 희박한 장소는 어딘가 하면 아마도 관립, 공립 고등학부일 것이다.
또 우리일본정신이 가장 희박한 자는 누구인가 하면 그러한 고등학부 출신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실이없는 염주알 같이 개별적이어서 거의 염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학문은 국적을 망각하기 위한 학문이고 국가에 진췌(盡瘁)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기타 고려할 점
1) 공민과 교과서의 개선과 교사 문제
중등학교에서 공민과가 담당하는 역할은 크다. 생도는 수신과목 이상으로 흥미를 갖고 관심을 갖고있다.
따라서 종래의 공민과 교과서로는 부족하다.
법제·경제의 기초 지식과 사회기구의 일부를 공부함으로써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것들은 다분히 서양에서 수입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완전히 청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공민과의 내용은 역사, 지리, 법제, 경제, 종교 등 전반에 걸친 자료에서 선택하여 진정 하시다(橋田) 문부장관이 말한 것처럼 자아공리의 사상을배척하고 국가봉사를 제일의로 하는 국민도덕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의 공민 교과서 어디에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폭격할 만한 자료가 담겨져 있단 말인가.
어디에 동아에서 국가생존권을 내세우고 맹진(猛進)해야 할 박력 있는 부분이 있단 말인가.
어디에 건국정신이 진정 만국에 비견할 바가 없는 훌륭한 이념이라는 설명이 있단 말인가.
반드시 이상적인 교과서를 편찬해서 애국의 정열에 불타는 이른바 국사형(國士型) 교유(敎諭)로 하여금 담당케 해야 할 것이다.
즉 수신교사와 공민교사는 한 학교의 도덕적 부문의 지도 중심이 되어 배속장교 등 기타 일반 교유와 연락하고 발자(潑刺)한 교풍의 수립을담당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장이나 교두(敎頭)82) 등 비교적 상석의 교사가 수신 공민에 흥미를 갖고 연구해서 몸소 통솔하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정말 듬직할 것이다.
2) 음악과는 상급생에게도 가르쳐라
음악은 인생에 소중한, 또 공동훈련의 내부적 결합요소라는 점은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다.
이 중요한 과목을 중등학교 3학년까지만 하고 4, 5학년 …… 물론 사범학교나 여학교는 그렇지 않지만 …… 에게
는 가르치지 않는 그 정신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야영노래가 장병들을 고무하고 <바다에 가면(우미유카바)>이 장엄하게 연주되고 있는 때에 감격하는 것은 비단 필자 혼자만의 주관이 아니다.
이런 위대한 힘을 지닌 과목에 1주일에 1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또 전교생이 함께 합창해야 할 가곡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3학년까지 완료한다고 하면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개인의 가정에 피아노나 오르간을 갖고 있는 서양인의 가정이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특히 반도에서는 실업학교든 중학교든 최종학년까지 반드시 이 과목을 두길 바라는 바이다.
3) 외국어 시간의 단축
종래 우리나라의 중등학교에서 실시된 영어라면 일부 천재적 우등생은 다르겠지만, 대다수 생도들은
82) 일제 강점기에, 소학교나 중학교의 수석(首席) 교사를 이르던 말.
사회생활의 실제에서도 영국인·미국인과의 대화에서도 원서 연구 등에서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귀중한 시간을 1주일에 10시간, 12시간이나 들여 공부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귀중한 시간을 이과나 수학 같은 과목에 돌린다면, 혹은 체육 운동 등으로 충당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히 기대할 만한 것이 있으리라 본다. 물론 어학을 폐지한다고 해도 지장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다른 과목의 학습에 불편을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얼마간 존치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외교관이나 번역에 종사하려는 특수 희망자에게는 정과 외에 설치하면 될 것이다.
현재와 같이 영어를 일본어로 통역해서 배우는 간접법에 의거하는 한 그 효과는 뻔하다. 또한 모든 중등학생이서양인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될 필요는 절대 없다. 장래에는 일본어를 세계어로까지 적어도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내에서는 국제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반도인’의 중등학교에서는 ‘국어’를 습득해야 할 중대 임무가 있다.
일국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몇 년이면 가능하다.
웅변이 되는 것은 평생이 걸려도 어렵다고 한다.
반도 청년이 ‘국어’를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음성 언어 쪽은 아직도 더 수련할 필요가 있다.
정말 일본 내지인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말하고 또 쓰기 위해서는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런데 거기에 외국어까지 익혀야 한다면 생도들이 불쌍하다.
단어를 끼워 맞춰 외국인과 대화가 가능하다 해도 문화 흡수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
만큼의 시간으로 상사(相似)이론이라도 생각하고 역학의 초보라도 연구해서 반도의 과학연구의 바탕이 되는 편이 더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문교 당국의 선처를 희망하는 바이다.
사립학교, 기타 각종학교의 교육쇄진
1. 황국신민의 육성에 협력하지 않는 학교의 기구 개혁 또는 폐지
외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나 종교단체가 경영하는 사립학교 중에는 진정 황국신민의 육성에 협력하지않는 학교가 있지는 않을까. 요즘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학교나 국가적 행사에 참가하지 않는 학교는 없을 것이다. 그
러나 자발적으로 황국신민의 육성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국어’ 상용을 통해 학교를 통일하고, 내선일체를 향한 대도를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 학교는 있을 수 있다.
교육의 내용이 얼마나 민심을 자극하고 청소년의 동향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는 장제스(蔣介石) 정권의 항일교육과 나
치스 독일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아직 지나사변이 종말을 고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민중의 마음속에 스며든 항일교육의 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이 전후의 피폐를 극복하고 왕성한 기력으로 유럽의 신질서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용기도 청소년에 대한 교육에서 생겨난 것이다.
반도의 사립학교 중에서는 아직 편협한 감정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학교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비상시에, 그리고 장래에 신속히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두어야 할 긴급한 시대에 직면해서 주저할필요는 전혀 없다.
곧바로 교과목의 내용, 교사의 사상 등에 철저한 검토를 하고 개선해야 할 곳에는 기구의 개혁을 명령하고 인적 구성을 쇄신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곳은 미련 없이 폐지해서 교육을 정지시켜야 한다.
유효하지 않은 교육은 백해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무지한 자는 그래도 낫다. 나쁜 방면을 교육받은 자는 처치 곤란이다.
종래 우리나라에서는 비단 사립학교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 걸쳐 너무 관대했다.
때문에 이익보다는 도리어 폐해가 많았다. 좀 더 안팎으로 모두 우리는 강력한 정치를 환영하는 바이다.
2. 서당 폐지를 단행하라
의무교육이 실시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이다.
산간벽지에서 교육기관이 없는 시골 민중들에게는 동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서는 과도기의 방편으로서 서당을 일정 기간 존속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곳에서는 어쩔 수 없으므로 교사의 임명만큼은 군수나 지사가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교사를 고용하지않는 서당은 물론 폐지해야 한다. 교육은 중대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당국이 의도하는 정신에 합치하지 않는 교육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조선 전체의 서당이 불건전한 교육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완전한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고 낙관하지도 않는다.
현재는 공립소학교장이 시찰해서 지도하고 있는데, 사실 1, 2회 시찰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건국정신의 현현을 기하기 위해서는 주로 교육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기관만큼은 비용이 얼마가 소요되든 구석구석까지 이상적인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끝)
나카조노 씨― 희천읍(熙川邑) 상(上)공립소학교장
<출전 : 中園源藏, 「半島敎育革新論(四)―科學·音樂敎育を振興せよ」, '綠旗' 1941년 4월호, 85~96쪽>
6) 오바 유노스케(大場勇之助), 기원 2600년 축전음악을 말한다
오늘날의 일본은 한편으로 전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의 꽃이 활짝 피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귀로 포성과 음악을 동시에 듣고, 눈으로 전차와 회화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국민이란 말인가. 황국(皇國)에서 태어난 자 모두 감사하고 감격해야 한다.
특히 작년, 이번 성전(聖戰)이 한창일 때 맞이한 기원 이천육백년의 환희와 감격이 여전히 우리 국민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다소 객관성을 띠고 보다 분명하게 과거의 사건들이마치 두루마기 그림을 보는 것 같이 인식되고 있다.
이 광고(曠古)의 대업을 기념하기 위해 수많은 문화적 행사들이 거행되었는데, 물론 국내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음악 문화면에서 대단히 국제적인 교섭을 갖게 된 것은 이천육백년 봉축사업 중에 하나의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독자들이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맹방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4개국에서 당대의 거장들이 축전 관현악곡 4곡을 기진(寄進)한 일이다.
물론 전 세계의 열국으로부터 축사와 축전이 산더미처럼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례적 행위에 지나지 않
으며 큰 문화적 의의는 없다. 그러나 축전 음악의 기진은 단순한 의례로 볼 수는 없다.
만약 이러한 악곡을 고맙게 받고 그저 이를 사장시키는 데 그친다면 문제외겠지만, 오늘날의 일본 악단은 이러한악곡을 사장할 정도로 빈약하지 않았다.
이천육백년 봉축회가 결연히 일어나 동부악단의 정예, 실로 160여 명의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작년12월 도쿄, 오사카(大阪) 2대 도시에서 발표 연주회를 가진 것은 이미 보도된 바와 같다. 도쿄 가부키자(歌舞伎座)의 발표회에는 황송하게도 각 미야(宮) 전하들께서 참석하셨고, 맹방의 외교단을 초청해 조야의 명사들 수천 명의 면전에서 연주했다.
그 성관(盛觀)은 아마 일본이 시작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일것이다.
나아가 또 하나의 사실은 동 봉축회의 알선 아래 이 4곡을 훌륭하게 레코딩을 완성한 일이다.
이와같은 대곡을 일본인의 손으로 레코드에 수록한 것도 공전의 일이며, 어쩌면 앞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다.
이 두 가지 행사야말로 우리나라 음악 문화사상 대서특필할 만한 일이며, 강대한 의의를 부여할 만한 사안이다.
게다가 기진된 작곡자는 모두 당대의 일류 명장들이고, 이른바 근대음악의 정수에 도달한 음악 도인들이다.
따라서 그 기교와 해석이라는 점에서 모두 지난할 뿐만 아니라 관현악의 조직에 있어서도 매우 방대한 것이다. 그러한 것을 모두 정복하고 모두 일본인의 손으로 연주하고 레코딩한 것은 우리 악단인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널리 우리나라 사람들 전체의 자랑이 되어 마땅하다.
또한 이로써 우리나라 음악 문화의 수준이 현재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이 연주를 직접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라디오와 레코드로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그 인상의 대강을 말하는 것도 그리 무익한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축전 음악(독일, 리햐르트 슈트라우스 작)
슈트라우스는 독일의 지보(至寶)로서 세계에 칭송을 받고 있는 명가이다. 1864년 뮌헨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올해 77세의 연령이다.
현재는 일체의 음악적 활동을 중지하고 고향 뮌헨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이 노대가가 일본의 천황폐하를 위한 일이라며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자와 같이 용감하게 일어나 펜을 든 것이 바로 이 곡이다. 원래 슈트라우스 옹은 가장 급진적인 작가로, 정말 의표를 찌르는 작곡을 해서 세인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축전 음악도 어김없이 곡의 모두(冒頭)에 14개의 종을 사용함으로써 축의를 표하고자 했다.
일본에서 이 종을 구하는 데 당혹스러웠다고 하는데,궁하면 통한다더니, 신 교향악단의 타악기의 명수 고모리 소타로(小森宗太郞) 씨가 착안한 것이 절에 있는 종이다.
그래서 그는 도쿄 가나가와(神奈川) 주변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다니며 쓰루미(鶴見)의 총지사(總持寺), 이케가미(池上)의 본문사(本門寺), 오토와(音羽)의 호국사(護國寺), 아사쿠사(淺草)의 묘음사(妙音寺), 시바(芝)의 증상사(增上寺) 등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교섭을 한 끝에 마침내 문외불출(門外不出)의 종, 그것도 슈트라우스 옹이 기도한 음률의 종 14개를 모아 연주에 사용했다는 눈물겨운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한편 슈트라우스 옹도 독일 그라마폰 회사의 간청으로 직접 일어나 지휘봉을 잡고 레코딩을 하기로 했지만, 뮌헨에서도 역시 종을 구할 수 없어서 결국 트라우토니움이라는 전자악기를 종 대신 사용했는데, 지금 그 두 개의 레코딩을 들으며 비교해 보면, 일본 쪽이 훨씬 훌륭한 효과를 올리고 있음은 정겨운 아이러니이다.
슈트라우스 옹도 지금쯤 일본의 레코드를 듣고 뮌헨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곡의 내용은 하나의 교향시이다. 먼저 축전의 종이 울려 퍼지고 그 종의 주제가 다양한 악기로 이행되어 점차 변화하고 발전해서 이천육백년을 맞이한 기쁨이 일본국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그리고 무언선율(無焉旋律)을 넣어 이천육백년에 걸쳐 무궁함을 우의(寓意)하고 나아가 팡파레를 부가하여 한층 힘을 싣고 가장 근대적인 수법으로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행진 속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힘과 열을 느끼게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축전 악곡 중의 백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향곡(헝가리, 베레슈 샨도르 작)
이 악곡은 3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다.
이는 축전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곡상(曲想)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선물을 보낼 경우 반드시 그 축사와 직접적인 교섭이있는 것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축의를 표하는 정신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도 크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샨도르 씨는 다른 세 명과 비교해서 가장 젊은 만큼 그 곡상도 청신하고 발랄하고, 게다가 정열적이며, 헝가리의 무곡 풍이 많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매우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곡이다.
교향곡(이탈리아, 일데브란도 피체티 작)
피체티는 현대 이탈리아의 거장으로 1880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현재 밀라노의 음악학교 교장을 맡고있다.
이 곡은 4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으로, 레코드 7장 13면이라는 축전 음악곡 중에서 가장 긴 것이다.
이와 같은 대작을 우리 일본을 위한 노력에 대해 특별히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탈리아는 노래의 나라이다. 시의 나라이다. …… 과연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차 있는데, 특히 일본의 기미가요(君が代)83)의 선율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테마가 각 악장을 통해 나타나 있고, 그것을 기초로 다양한 악기로 이주(移奏) 발전하는 수법이 매우 교묘하게 이루어져 있다. 또 그 테마가 우리에게 매우 그리움과 애착을 느끼게 하고 잊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필자는 이 테마를 기미가요 선율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가 그런 의도에서 작곡했다고 한다면 일본국의 발전성을 이 음악으로 표현한 것으로 상상된다. 거의 1시간이나 걸리는 대곡이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이 곡이 끝을 알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축전 서곡(프랑스, 자크 이베르 작)
서곡은 원래 가극의 개장악인데, 현재는 가극을 떠나 독립된 악곡에 서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매우 자유로운 형식 아래 아무런 장애 없이 만들 수 있다는 특이성을 갖고 있다.
본 곡은 이런 형식을 따른 것으로, 슈트라우스처럼 축곡을 표징(表徵)하는 특수한 악기의 사용은하지 않았지만 최초의 출발이 그야말로 축전다운 느낌을 갖고 있다. 또 화려한 선율이 잇따라 전개되는
83) 일본 국가.
데, 역시 프랑스의 찬란한 문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이베르는 순수 파리 출신으로 1890년에 태어나 현재 프랑스의 아카데미음악원의 원장직에 있는 사람인데, 홀로 이런 느낌을 강하게 갖고 있는 듯하다.
(1941.5.4)
(오바 씨―경성 제1고등여학교 교유)
<출전 : 大場勇之助, 「紀元二千六百年祝典音樂を語る」, '綠旗', 1941년 6월호, 108~111쪽>
7) 데라모토 유타카(寺本寬), 시국수상 -음악추방
교만과 광조(狂燥)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재즈’가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저 요란한 소음은 뒤엉킨혼란과 어지러운 현혹을 청소년 남녀의 생활에 주었을 뿐이다. 마치 고귀한 일본정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 젊은이들의 부박경조(浮薄輕佻)한 날들이 색전등에 비치는 찻집 풍경을 그리고, 비정조적인 탭댄스의 공허한 구두소리가 저 나약한 신경쇠약적 증상을 고양시켰다.
그것은 마술과도 같다. 새로운 세기의 음률이라고 자랑하는 저 수많은 불협화음의 연속과 폭발은 묘하게도 의미도 없고 젊은 마음을 현혹하고 취하게 했다. 그들은 몽유병자 같이 저 찬란함 속에 방황하고 일체의 숭고한 전통을 망각하고 심취했다.
참으로어리석지않은가―게다가저화려함뒤에숨겨진두려운전율은알아차리려고도하지않았다.
이는 누구의 죄도 아니다. 마술과도 같은 이 화려한 매력이야말로 미·영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파괴 침략의 비겁한 상투적인 수단이다.
외관적으로 비치는 찬란한 화려함을 지닌 것이 이른바 미·영이 자랑하는 ‘문화’이다.
그들은 이 문화의 미과(美果)로 국민의 젊은 마음을 취하게 하고 그 건전함을 빼앗아 국가를 쇠망의 저편으로 내몰고,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식민지적 국가 건설을 노리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비력(非力)한 저들의 무기는 이 비열한 기만과 모략이라는 두 가지 외에는 없었다.
오랫동안 메이지(明治) 이래의 늠름한 일본의 눈부시고 급격한 국가적인 신장 속에서 뿌리 깊게 배양된 미·영 문화의 불결한 해독이 얼마나 많은 건전한 일본정신을 파먹고 상처를 주었는지는 그 급격한 신장 발달 도상에서 종종 현저한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문화는 미·영 의존의 문화로 변한 느낌마저 있었다.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새로운 사회의 중견이 되어야 할 청소년은 그 사상과 생활의 모든 것을 시종일관 부박과 경조와 화미(華美)의 피상적인 미·영의 모방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축시킨 두발을 끝을 예리하게 삼각형으로 자르고 핑크색으로 물들인 손톱의 손으로 쓸어 올리고, 거무죽죽한 눈두덩이 속의 속눈썹을 유독 과장해서 펼치고, 새빨간 립스틱의 짙은 입술을 움직여 부르는 아르헨티나의 퇴폐적인 가사에 망아적(忘我的)인 향락을 즐기는 천박한 모습은 그것이 그대로 일본의 모습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형식적인 생활양식상에서도 나아가서는 정신문화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미·영 문화의 나쁜 영향 감화를 받아 전통적인 일본 문화가 상당히 침식당하고 상처를 받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상적인 침략―저 무서운 마수에 놀아나면서 과거 일본은 그 얼마나 위기에 직면했던가.
게다가 미·영의 사상적인 침략은 공산주의적인 급격한 것이 아니기에, 표면적으로 붙잡을 수도 없는 악마적인 존재였다. 오랜 ‘시간’의 경과로 서서히 사람들의 생활에 파고들고 마음을 마비시키고 마침내 그 무서운 모략의 효과와 실적을 드러내며 침략의 목적을 수행하려 한다. 종교에, 문학에, 미술에, 연예에,그리고 음악에 그 침략에 사용되는 무기는 모든 문화의 각 분야에 걸쳐 풍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미·영 문화의 배격은 대동아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어난 늠름하고 용감한 외침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라고 있던 미·영 문화의 ‘악(惡)’과 ‘추(醜)’를 뿌리째 뽑아내고 건전한 일본 문화 본연의 올바른 모습으로 되돌아갈 날이 온 것이다.
미·영 음악의 연주와 그 레코드의 사용금지가 선언되어 그것이 실현되기에 이른 것도 그와 마찬가지 의미임에 분명하다.
국민생활에 미친 미·영 음악의 해독과 죄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미·영 음악 그 자체는 매우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의 가치에서 보더라도 특별히 뛰어난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 숫자에서 보더라도 매우 소수이기 때문에 그 음악이 추방당해 모습을 감추었다고 해서 아무런 지장도 느끼지 않는다. 특히 순음악 부분에서는 거의 완전히무관심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영국의 작곡가로서 다소나마 우리나라에 그 작품이 소개되고 그 이름이 전해진 것을 보더라도 퍼셀, 샐리번, 엘가, 그렌차, 델리우스, 윌리엄스, 포스터, 쿠센 등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지만, 정작 일반 음악 애호가의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이고, 겨우 사물에 대한 집착을 느끼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허버트, 맥도웰, 카펜터, 스폴딩 등의 미국 작곡가 이름은 극히 일부 사람들 사이에는 알려져 있지만, 그 작품은 연주된 적도 없을 정도로 순음악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미·영의 전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인 ‘음악의 빈곤’은 따라서 이번 음악추방에 의해서도 우리악단이나 일반 애호가들에게 약간의 쓸쓸함도 주지 않는다.
미·영 음악이라 하면 거의 경음악 영역에만 한정된, 작품적 가치에서 보더라도 매우 미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의 성질상 그것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강대한 보편성을 갖고 있는만큼, 생활 문화에 대한 파급력은 경시할 수 없다.
행진곡의 왕이라 불리는 수자84)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넓고 또 깊다.
일상의 여가 시간에 휘파람으로 부는 것에도 <미 중의 미>가 있고,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있다. <워싱턴 포스트>나 <사관후보생>의 선율은 너무나 많이 우리 귀에 익숙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곡들이 학교의 창문에서 흘러나오고 거리의 찻집 스피커에서 들리고, 연주회의 곡목 속에 선택되어 사람들 마음에 울림을 전하고 일종의 감명을 주는 것은 오로지 전력의 강화를 필요로 하는 오늘날의 시국에 적개심의 환기와 고양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무반성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적국의 행진곡으로 사기를 고양시킨다는 것도 큰 모순이다. 가령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해도사용될 리도 없고, 사실 오히려 그보다 뛰어난 곡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곡 그 자체에 가 조금 익숙하
84) John Philip Sousa. 1854~1932. 미국의 작곡가.
다고 해도 미련 없이 떨쳐버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며, 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홈 송으로서 오랫동안 친숙한 포스터85)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오, 스잔나>, <애니 로리>, <그리운 켄터키>, <올드 블랙 조>, <스와니 강>, <양키 두들>, <테이킹 로드> 등은 너무나 많이 애창된 목가적 서정가곡으로서 깊은 친근감을 주는 것도 있지만, 그 감미로운 감상에 지금은 도취되어 있을 때가아니다.
행진곡의 수자, 서정적인 포스터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미국 음악으로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없을정도로 그들은 음악적으로 아무런 재능도 갖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포스터의 목가적인 음률을 보더라도 마치 그것은 그들 자신들 속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음률 자체는 그들이 비하하고 또 그 국토와 자유를 빼앗은 미 본토 원주민인 흑인 입에서 옛날부터 전해진 민속적인 선율을 노골적으로 훔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음악은 그들이 “세기의 음악”이라고 자랑하는 유일한 ‘재즈 음악’이 있을 뿐이다.
전혀 정체를알 수 없는 그 음감의 혼란과 불쾌한 불협화음의 연속에서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음과 음의 중복으로 음악에 깊은 맛과 중후한 맛을 주고, 당돌한 화음의 규성(叫聲)과 조발(燥發)로 불협화의협화를 찾고자 하는 마비된 말초신경의 공허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음악적인 음악이다.
그야말로 세기말적인 퇴폐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표면적으로 화려하고 찬란해도 그저 싸움과 광조로 시종일관하는 재즈에 음악으로서의 올바른 의미에서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교만에 대해 강한 반감과 저조(低調)에 대한 모멸을 느낄 뿐이다. 엄정한 의미에서의 음악으로서는 물론 생각할 수 없는데, ‘음의 나열’인 재즈는 요컨대 즉흥적인 제례음악과 다를 바 없는 저속한 존재이고, 이러한 선정적인 것에 대해 정열을 느끼는 일조차 고귀하고 건전한 일본정신에 대한 큰 모독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위해 그런 저속한 것을 찬미하고 고귀한 우리 생활문화 속에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순수한 독자적인 음악을 갖고 있다. 신장하는 신일본 음악의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미·영 음악의 추방이야말로 미·영 문화가 초래하는 갖가지 악덕의 배격이며 건전한 일본정신으로의 환원이고 내일을 향한 늠름한 발족이다. 불건전한 선정음악의 소실로 우리는 다시 건전한 생활문화의 건설에 매진하도록 하자.
음악 애호가들이여, 함부로 한탄하는 짓을 그치도록 하라.
순정한 음악은 그로 인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뛰어난 것이 많이 남아있다.
게르만의 피로 불타는 바그너의 정열, 불세출이라고까지 불린 베토벤, 모짜르트의 단려(端麗), 견실한 하이든, 헨델의 향기로운 고전―그러한 순정 독일 음악이, 쇼팽, 리스트의 뛰어난 재능이, 슈베르트,슈만, 브람스의 아름다운 가요곡이, 혹은 로시니, 도니제티, 베르디 등 기타 수많은 천재를 낳은 15세기이래의 전통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가극이, 그리고 또 세자르 프랑크를 시조로 하는 생상스와 비제의
85) 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 미국의 작곡가. 미국의 전원 풍경과 남부 흑인을 소재로 한 많은 가곡을
작곡하였다.
프랑스 음악이 눈부실 정도로 우리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또한 이로써 우리 자신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오늘날의 일본 음악의 신장에 더욱 강한 박차를 가하게 되고 빛나는 미래를 약속받았음을 도리어 기뻐하는 바이다.
교활한 지혜와 거짓이 전부인 미·영 문화의 잔재를 모두 던져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생활의 정화이며, 생활을 정화함으로써 국력은 충실해지고 전력은 강화된다.
<출전 : 寺本寬, 「時局隨想-音樂追放」, '朝鮮行政', 1943년 3월호, 34~36쪽>
8) 아메미야 후미(雨宮史), 승리하기 위한 후생음악
지난번 본지에 「반도에서의 후생음악의 문제」를 내걸고 전시생활에서의 후생음악의 절대성을 규명했다.
청년 바이올린리스트 김생려(金生麗) 씨와 뜻을 같이하는 음악가들의 활동은 근년의 국민음악운동의 효시로서 이 지면을 빌려 한마디 하고자 한다.
그들이 작년에 행한 활동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건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이 모토로 삼는 “국민의 사기 고무와 근로자의 위안을 위한 음악”의 수립을 위해 모든 개인적인 감정 등을 포기하고 정신(挺身)한 공적은 크다. 어떤 일부 전문가들은 곡목의 선정, 연예의 좋고 나쁨에 대해 운운하겠지만,
오늘날 우리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승리하기 위한 생활소’로서의 음악, 전시국민의 사기를 고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운율이면 충분하다.
예술적으로이러쿵저러쿵하는고답적인것보다더생활적인것, 국민적인것이면충분하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서양음악의 예술성이라든가 순수함에 대해서는 우리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파악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선 이겨야 한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마음의 양식’이 없으면 안 된다.
이 양식으로서 아름다운 한 곡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음악을 들음으로써 전력증강에 매진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신념에 살고 신념을 결집해서 나아가야 함은 물론이다.
바야흐로 시인은 서재를 벗어나 시중에 나가서 애국의 지정(至情)을 명랑하게 국민과 더불어 노래하고 연극인은 산간벽지에 정신해서 국민에게 새로운 세기의 여 명을 연기하고 있다.
이 얼마나 풍만한 민족의 가성(歌聲)인가. 음악의 경우도 그러하다.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고답적인곡목을 한정된 관객을 상대로 부르기보다 순진한 근로전사 앞에 서서 유치해도 좋으니 국민적 애정을담아 노래하면 된다.
아무리 예술적으로 고상한 것이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기여하는 의의는 희박하다.
어떤 장소라도 좋다.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음악인으로서 국가 이념에 눈뜨고 승리하기 위한 근로자 위안의 음악이면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후생실내악단이 작년에 남긴 공적은 크다.
바라건대 올해도 싸울 것을 잊지 말고 이루어내기를 기원한다. 음악가여, 골방에서 벗어나라.
<출전 : 雨宮史, 「勝ち拔く爲の厚生音樂」, '文化朝鮮', 1944년 2월호, 44~46쪽>
9) 다케하라 생(たけにら生), 음악도 군수품
“음악은 군수품이다”라는 말이 최근 일본 내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가성(歌聲)뿐만 아니라 현
재 내지 악단을 전망할 때 내용, 의욕을 비롯한 기타 모든 점에서 이 말의 진실성을 뒷받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는 그야말로 악단인의 시국에 대한 자각 및 그들의 노력의 결정에 다름 아니다. 음악을
들은 직후의 산업전사의 일의 능률이 듣지 않을 때의 그것과 비교해서 놀라울 정도로 상승하고 있음은
단적으로 음악(건전하고 명랑한)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 적절한 이용법의 연구에 여지가 있음
을 암시하는 것이다. 새삼 여기서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결전 단계에 들어선 이때, 국가의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음악에서도 그러하다. 음악을 위한 음
악, 향락을 위한 음악, 예술이라는 탑 안에 갇혀 독선적인 그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음악 또한
그 좋은 의미에서의 사회성, 정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국가총력전의 일단을 담당해야 한다. 우리 반
도 악단의 과거를 되돌아 보건대, 걸어온 길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도(邪道)이다. 과거의 악단인에
게 한 조각의 음악적 양심이 있었던가. 허무적이고 퇴폐적인 곡을 만드는 일에 전심했고, 대중들과 영
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과연 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유행가는 사회에 범람하고 청소년의 자포자기를 조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음악의 사명은 정조의 도야와 민중에게 건전한 오락을 제공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종래는 이런 사명과 역행하는 느낌을 주었다. 새삼 과거의 잘못을 따져도
소용없다. 다만 앞으로 악단인의 반성 및 분기를 바라는 바이다. 앞서 산업전사의 예를 인용할 것도 없
이 진정 건전한 음악은 모든 방면에서 요망 받고 있다. 그날 노동의 피로를 음악으로 푸는 것은 한 모
금의 청량제와도 같고, 이는 또 내일의 직장에서 소모해야 할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음악이 지닌 사회
성, 정치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점을 상기할 때, 시국하에서의 음악인의 책무의 중대성을 통감
하는 동시에, 그 올바른 방향으로의 매진을 간절히 바란다. 부디 현재의 악단의 사명을 자각하여 일에
대한 정열을 국가가 요구하는 데 집결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필자는 모 잡지 기자)
<출전 : たけにら生, 「音樂も軍需品」, '朝鮮公論', 1944년 6월호, 86쪽>
5. 미술
1) 결전미술의 동향(좌담)
(서양화) 야마구치 나가오(山口長男)·미키 히로시(三木弘)
도오다 가즈오(遠田運雄)·히요시 마모루(日吉守)
(일본화) 가타야마 히로시(片山坦)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
(조 각) 도바리 유키오(戶張幸男)
(사 회) 데라모토 기이치(寺本喜一)
미술계의 새로운 동향
데라모토 : 작년 총후미술전(銃後美術展), 올해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의 개최 등 조선의 미술계도 여
러 의미에서 전시적(戰時的)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미술계의 장래에 대
한 동향이라든가 전시하 국민운동에 대한 미술계의 역할 등을 여쭙고 싶군요.
야마구치 : 현재는 아직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것 같지만 앞으로 이런 변화가 표면에서 내용의 변화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데라모토 : 총후미술전과 이번 결전미술전에서 장래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은 없습니까? 대개
총후를 그리거나 병사들을 그린 것이 많고 소재적으로는 상당히 변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서양화 쪽부터 부탁드립니다.
도오다 : 대체로 새로운 시대의 미술이라는 것은 물론 일본 내지에서도 아직 탄생하지 않았어요. 그것
을 조선의 화가들에게 바라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조선 화가들의 화가적 지위는 일본 내지 중심이
고 항상 그 중심의 부수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죠.
데라모토 : 일본화 쪽은 어떻습니까?
가타야마 : 일본화는 대체로 오랜 전통이라는 것을 지키고 있고, 또 사적인 개인의 감정이나 개성에 중
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현실을 직접 파악해야 할 때 변모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그리
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예술가로서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갑자기 새로운 것을 회화화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제일선에 나서서 체험한다면 또 다
른 것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결국 그리고는 있어도 제대로 감정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를테면 포스터 같은 선전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는 해석으로 다루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직 그것조차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전람회에서 본다면 상당히 소
재적으로도 효과를 다소 받아들이고 그리고 있다는 점은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변
화는 충분히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에구치 : 전망을 세울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제가 느끼는 점은 이번 결전미술은 작가 입장에서도 일반인
입장에서도 상당히 생각해 볼만한 것이라고 할까요, 일단 하나의 단계에 온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작가도 현재의 전쟁이라는 것을 대체로 상당히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표현 방식이
적당한가 하는 점보다도 작가가 얼마나 전쟁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면 자연히 그런 것을 다루게 될 것이고, 표현 방법에도 자연히 그것이 드러날 것입니
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장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일본 내지에서
도 성전미술전(聖戰美術展)의 초기에는 매우 음참하고 비장한 장면을 그리고자 열심히 노력한 경향
이 많았어요. 그런 경향은 다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전쟁관은 그렇게 음참하고
비장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전쟁을 보더라도 매우 명랑하고 용장(勇壯)했지 비참하지는 않
았어요. 최근 애투 섬을 보더라도 대장 이하 피범벅이 되어서 용장하게 싸운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가 거기서 느끼는 것은 결코 야수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벚꽃이 지는 것 같은 청결함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일본인의 강인함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절박한 싸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일본인의 표현은 어디까지나 그런 일본인의 전쟁관에 입각한 표현이어야 합니다.
데라모토 : 조각 쪽은 어떻습니까?
도바리 : 조선전(鮮展)에서 본다면 상당히 향상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쨌거나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다소 떨어지긴 합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 점은 대화성(大和聖)이라는 연
구단체를 갖고 있으니깐.
수법에 대하여
데라모토 : 소재는 일단 변했지만, 수법에 대해서도 한 마디.
도오다 : 과거의 미술가를 생각하면 전쟁이 한창일 때는 훌륭한 그림은 나오지 않았어요. 전쟁화 걸작
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난 뒤 나오죠. 고안(弘安)전쟁86)을 다룬
그림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고증은 제각각이지만 제법 뛰어난 것도 있습니다. 붉은 비단 갑옷을 입
고 초진(初陳)의 젊은 무사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현대 젊은 장교들이 얼굴을 붉히고 처음 보
는 적에 대해 심장이 크게 박동하는 것을 느끼는 모습과 대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일전에 개
최된 성전미술전에는 병사들이 물을 마시고 있는 그림이 있었는데, 매우 목이 말라 물이 고여 있는
곳의 물을 마시고 있고 그 얼굴이 물에 비치는 그림이었죠. 또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이곳 의전
(醫專)의 교련 선생으로 있던 이마무라(今村) 씨는 군인들 중에서 최고의 화가였는데, 일·러전쟁 때
의 그림으로 눈에 부상을 입은 병사가 눈에 붕대를 감고 등에 부상병을 업고 후퇴하는 그림이 있습
니다. 그런 점에 훌륭한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더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소재는 얼마
든지 있을 겁니다.
에구치 : 화가에게 한 번 □□교련을 시켜서 거기서 파악하게 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림
이 살아 움직이지 않아요. 정지된 □물이 되고 말았어요.
데라모토 : 문학 쪽에서도 특히 조선의 작가는 이런 때에 문학의 방향전환을 도모해야 하는데, 그런데
무엇을 쓸 것인지, 전쟁에 대해 쓰려고 해도 한 번도 전쟁터에 간 적이 없고 또 당분간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부디 전쟁의 제일선에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데라모토 : 조각에 대한 장래의 방향에 대해서는…….
도바리 : 석고가 사라지면 시멘트, 목재 등을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칠식(漆喰)조각을 하면 됩니다.
도오다 : 도바리 군은 화석암에 조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바리 : 역시목포석같은사석(砂石)이있는데, 그런게좋아요. 그것이라면□□도걸리니깐말입니다.
86) 1281년(弘安4) 몽고군의 침략에 따른 전쟁.
데라모토 : 일본 내지에서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에서 크게 조각을 거론해서 건민운동(健民運動) 때
에 한편으로 시인을 동원해서 알몸의 늠름한 조각에 시를 첨부해서 전람회 등에 내놓은 모양입니다.
전시하에 몸을 강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봅니다.
도바리 : 우리도 6명 정도 있으니 합작해서 하나를 만들어,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표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데라모토 :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큰 것이어야 할 겁니다.
도바리 : 그렇죠. 그러나 칠식이나 시멘트를 사용하면 될 겁니다.
전시하의 미술 자재
데라모토 : 방금 새로운 자재에 관한 얘기가 나왔는데, 유화 같은 경우에는 페인트를 사용한다거나 특
수한 캠버스나 판을 사용하고 틀도 금색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고안을 한다는 등의 생각이 있으시
다면…….
도오다 : 제 동료 중에 아는 사람이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능한 자신들이 직접 만들고 있다
고 합니다. 지금 그림도구의 거의 일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천 쪽도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옛날
부터 판자에 그리는 것은 있었어요. 또 벽에도 그릴 수 있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리고자 한
다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죠. 저는 건축물에 잇따라 그린 적도 있어요.
데라모토 : 기름이 없어서 수채화를 그리는 경우는…….
히요시 : 저는 제 취미로 젊었을 때부터 하고 있는데, 띠 같은 데 그리고 있죠. 자재라는 측면에서는
도리어 유화보다는 수채화 쪽이 어렵지 않을까요.
야마구치 : 중요한 것은 자재나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본래의 입장을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 본래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사물의 부자유도 해결합니다. 자재 등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궁리할 수 있죠.
전람회의 형식
데라모토 : 전람회 형식은 시국이 점차 절박해지면 이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일본 내지에서는 전시하
의 전람회는 중지하자는, 문전(文展)에도 그런 의견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런 점은 어떻습니까? 그리
고 또 하나는 전람회를 해도 공습을 받게 되면 보러 갈 수 없어요. 지금 산업전사 등에 대해서는
반대로 이쪽에서 음악 등을 들고 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미술도 그런 식으로 가기 위해서는
더 손쉽게 어디든 운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도오다 : 최근 제가 알고 있는 판화가가 인천에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일본 내지에서는
□□가가 하나로 뭉쳐 잠수함에 기부한다고 해서 왕성하게 하고 있고, 그로 인해 도저히 여유가 없
다며 결전미술의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과연 잠수함이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
만, 일본국에서도 순회전람회라는 것을 하면서 각 공장과 직장을 도는 것은 좋은 일이라 봅니다.
데라모토 : 그런특수한방법을취하면수송도하기쉽겠지만, 보통전람회에서는운반이어렵지않을까요.
지도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
데라모토 : 만주국에서는 영화가 나뉘어져 있어서 하나는 계민영화(啓民映畵)로 이것은 선전영화이자
시국영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민영화(娛民映畵)라는 것으로 즐기는 쪽의 영화입니다. 이 두 가지
로 실행하고 있어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인심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는 적어도 미술이나 음
악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데까지 전쟁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시
각도 상당히 있지 않을까요.
히요시 : 험한 현 시국하에서는 미술 부문도 전력증강의 국가 대방침에 협력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 전의, 적개심의 고양이나 근로, 증산의 격려 등의 방면에 여러 가지로 미술이 이용될 것입니
다. 이처럼 미술도 결전체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면 작가가 나아가야 할 본도(本道)는 정해진 셈입
니다. 그렇다면 종래의 미술, 가령 이를 평화미술이라고 해 둡시다. 이 방면은 어떻게 될 것인지, 중
지 상태로 두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논의할 만한 문제입니다. 전쟁으로 가득 차 있는 부상병들을
위문하는 데도 전쟁미술적인 것보다는 꽃이나 풍경 등을 소재로 그린 것이 도리어 위안이 되지 않
을까요. 이런 심리는 총후 대중들도 갖고 있을 겁니다. 인심에 윤기를 주는 일이 미술의 하나의 사
명이라고 한다면, 이런 측면에서 협력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전력증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이를 공리적으로 악용하는 일은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데라모토 : 열심히 일하고 가끔 영화를 보러 가거나 혹은 음악을 들으러 가면 어디를 가든 전쟁, 전쟁이
라고 한다면 도리어 내일의 전력을 기르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도 있지 않을까요.
친절운동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하라, 친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여기저기 삐라를 붙이고, 개중에
친절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왜 친절하지 않느냐며 주먹이라도 한 방 먹이는 일이 생긴다면 도리어
불친절해집니다. 우체국 창구에 가면 ‘친절’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죠. 그렇지만 담당자가 불친절하
면 이런 종이까지 붙여두고 왜 친절하게 대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고 싶어집니다. 그보다도 스님이
나 목사의 말을 듣는 편이 훨씬 친절운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화
문제에는 그런 측면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타야마 : 이전에 저는 군의 부탁을 받고 군대우편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전쟁 그
림도 있고 총후의 여러 활동을 그린 그림도 있는데, 단순히 발랄한 젊은 아가씨만을 그린 것도 있었
습니다. 그런 그림을 들고 가서 보여주었더니 결국 병사들은 젊은 아가씨를 그린 그림이 좋다며, 총
후 부인들의 활동을 그린 것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의 병사들은 자기 마음에 드
는 것은 곧장 주머니에 넣어 항상 갖고 다니지만, 전쟁은 자신들이 실제로 하고 있어서 별로 그런
그림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아요. 산업전사의 위문에서도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미키 : 그건 평시와 전시가 다릅니다. 어째서 노몬한 벚꽃이나 애투 벚꽃을 병사들이 발견했는지를 생
각해야 합니다. 일러전쟁 무렵의 지요다함(千代田艦) 승조원이 발견한 꽆이 오늘날에도 재배되고
있어요.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 직관이 작동하는 것이고, 지금 친절운동 같은 것은 보편화되지 않았
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뿐, 모두 친절해진다면 친절운동의 필요성은 없어집니다. 충의라는 것도 모
두 충의를 다하게 된다면 굳이 충의를 다하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겠죠. 필요하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현상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가 군대에 관련된 것을 받아들
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현재 다양한 움직임에 대한 미술의 문제는 자재에 관한 것이죠. 자
재에 기초를 둔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 상태입니다. 이는 절대로 타락입니다. 자재와는 무관
한 별개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물자에 있
습니다. 그러한 것은 아무리 전쟁의 그림을 그려도 전쟁과 관련이 없죠. 도리어 꽃을 그려 병사들을
위로하는 편이 훨씬 충의를 하는 것입니다. 미술의 범위는 이동만화 같이 저속하고 들어가기 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고급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기 쉽고 저속한 것은 주로 격려하는 쪽으로 돌
릴 것입니다. 만화 같은 것은 사람을 웃게 하고 위로하는 두 방면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유화나 일
본화 같은 것으로 기록화 이외에 그런 것을 무리해서 반복해서 보여줘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
어 지금의 치열한, 가령 도쿄처럼 오늘 내일 폭격을 받는 것을 각오하게 되었고 또한 어떤 부분에서
그림의 감상을 하는 부분이 있어도 좋다고 보지만, 대체로 감상자의 범위라는 것이 높아질 테니, 그
런 사람들은 반드시 윤기라는 것을 어딘가에서 찾고 있죠. 그것을 종전 같은 자유주의적인 것이 아
니라 더 인간성이라든가 문화라는 것을 차분한 곳에서 찾고 있을 겁니다. 그런 때에 왼손으로는 용
맹한 유화를 그려도 오른손으로는 저속한 것을 그려 자재 획득의 원조 기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용
납할 수 없는 일이라 봅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국가가 나아가는 길을 보고 자재는 개별적으로 제공
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동안에는 나쁘게 말하면 거지근성이었습니다. 그 수단으로서 미사
여구를 나열하고 갖가지 명목을 내세우는 것은 그저 편승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다시
한 번 전환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현재 그렇게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방법으로서
는 다양한 형태의 수송에도 가장 편리하고 또 아마추어라도 다룰 수 있는, 굳이 여기서 먼저 나설
필요도 없이 공장의 담당자나 학교 선생이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이동전 같은 것을 연구하고 기획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미술가의 임무
데라모토 : 문화운동이라는 것을 저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미술가나 소설가나 음악가나
개인으로서의 창작활동을 국가 목적을 위해 연성(鍊成)해야 한다는 측면, 다른 하나는 대중에 대한
문화운동, 대중에 대한 문화의 침투, 다시 말해 사회교육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운동이라는 두 가지입
니다. 성전미술이나 총후미술전 등이 열려 화가들의 창작 방면의 연성이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일
반 대중에 대한 전시하의 미술을 통한 문화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미술계 분들이 정신(挺身)해야 한
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미키 : 미술가협회 내의 만화나 포스터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해서, 그리고 현재로서는 그런 것을 기획하
고 지도한다고 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운영하기 위해서는 역시 순수 미술가가 아니면 무리라
고 봅니다. 만화가 중에서 만화는 잘 그려도 글에는 좀 문제가 있다거나, 또 그림이 전황과 일치하
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것의 기획 기관이라는 것이 먼저 만들어져야 합니다.
에구치 :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가령 꽃 그림이라든가 전쟁과는 관련이 없는 것을 제공해서 위안을
준다는 견해도 있지만, 예컨대 여기에 매우 훌륭한 전쟁회화가 있다고 합시다. 아마추어에게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만, 그런 그림을 보고 그 속에서 진정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
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무리 훌륭하게 병사들의 그림을 그려도 그것
을 민중이 이해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만으로 그림의 역할이 끝난다고 한다면 미술로
서의 가치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전쟁 그림이 그려져 있어도 거기서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
이 나오지 않는다면 회화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론을 말하자면 병사들
에게 매우 □□한 전쟁 그림을 보여주어도 병사들이 거기서 위안을 받는 회화가 된다면 가장 좋다
고 봅니다.
가타야마 : 민중이 위로 올라가는 거군요.
에구치 : 레벨을 높이는 것입니다.
미키 : 그것이 본질적으로 전쟁화 속에 파고 들어가면 그것이 내용이 된다는 의미죠. 그럴 경우 꽃 그
림 이상의 것이 됩니다.
에구치 : 지금 문화 방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물을 지나치게 이원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키 :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기초를 물질에 두고 있기 때문이죠. 그 □□을 하지 않으면 □□□□ 가장
큰 원흉입니다.
에구치 : 지금 꽃 그림이나 풍경을 그린 것은 전쟁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민중이 느끼게 된 것도 지도
자 계급의 책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키 : 얼굴을 그리는 것만 해도 전쟁을 위해 신경쇠약적인 표정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전쟁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전쟁을 두려워하는 개인도 있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에구치 : 독일 잡지 시그날에는 두 가지의 구별을 정말 선명하게 하고 있죠. 중간부터 나머지 절반은
나체 사진이나 나체화를 가득 게재하고 있어요.
미키 : 작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창에 꽃을 놓으라는 것을 선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저는 드디어
독일이 장기전에 돌입했구나 하는 점을 느꼈죠. 아무래도 신경쇠약 계통에 빠지기 쉬울 테니, 그런
점을 대비하는 것도 직간접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에구치 : 좀 더 꾸준하고 당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미키 : 아무래도 당초의 전과(戰果)로 국민들이 들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선전계몽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에구치 : 또 여러 가지 일에 빈번히 최대급의 표현을 지나치게 사용했기 때문에 바닥이 드러났어요. 여
러 방면에서 그런 점에서 불행을 겪고 있죠.
미키 : 지도자 계급이 바라고 있는 것에 부응하는 것은 도리어 미술단체 쪽이 깊고 강인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움직이면 좋지 않을까요.
야마구치 : 종래 미술인이라고 해도 단지 습관적으로 긁적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죠. 더 진지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더 부딪쳐야 합니다. 거기에 본통(本統)의 힘이 그 사람에
게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에게도 미치죠. 예술가는 항상 배수의 진을 쳐야 합니다. 예술가의
심경은 항상 결전생활이죠. 늘 전쟁을 해야 하고, □을 내던져야 합니다. 단지 소재나 자재 등의 손
목만전환한다는단순한편승이되어서는안됩니다. 정말목숨을걸고해야합니다. 더욱예술의본
도(本道)에 파고드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왔습니다. 이것이 결전미술의 방향이라고 봅니다.
데라모토 : 여러 가지 귀중한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출전 : 「決戰美術の動向」, '國民文學' 제4권 제5호, 1944년 5월, 58~63쪽>
Ⅱ. 문예계의 친일협력
조직들
1.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1) 총력전의 문화부대(기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최초의 문화부회는 지난 29일 오후 두 시부터 부내 남미창정(南米倉町) 사무실에
서 가와기시(川岸) 총장, 미하시(三橋), 야나베(矢鍋), 오테아라이(御手洗) 각 부장과 부원 23명이 참석
한 가운데 열렸던 바 문화위원을 선정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문화위원은 금후 문화부 사업의 발전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다시 추가할 방침이며 각 부문의 연락위
원회는 이 문화위원 가운데서 선정할 터라고 한다.
그리고 1941년도 예산에 대하여도 심의가 진행된 바 시국에 적응토록 중점주의로서 편성하기로 방침
을 결정하고 동 4시 40분쯤 회의를 끝마쳤다. (하략)
<출전 : 「總力戰의 文化部隊-昨日各方面을 網羅하여 季員六十八名選定」, '매일신보', 1941년 1월 30일>
2) 문화익찬의 반도체제 -금후 문화부 활동을 중심하여 1~9(좌담)
출석자
국민총력 문화부장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
성대(城大)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문화부 위원 김억(金億)
문화부 참사 데라다 아키라(寺田瑛)
삼천리사장 김동환(金東煥)
문화부 마츠다 레이코(松田黎光)
보전(普傳) 교수 유진오(兪鎭午)
영화인협회장 안전진웅(安田辰雄)1)
연극협회장 목산서구(牧山瑞求)2)
문화부 다나카 하쓰오(田中初夫)
(無順)
본사측
금본(金本)3) 상무, 백(白)4) 학예부장, 홍(洪) 기자
1) 안종화(安鍾和)의 창씨명.
2) 이서구(李瑞求)의 창씨명.
1
금본 본사 상무 : 오늘은 다른 날과 달라 일기도 매우 춥고 겸하여 일상 □□에 다망하심에 불구하고
총력연맹의 야나베 문화부장을 비롯하여 여러분께서 출석하시어 여기에 좌담회를 개최케 된 것은
매일신보사를 대표하여 충심으로 감사하여 마지 아니하는 바이올시다. 그리고 먼젓번 총력연맹에
문화부가 창설됨을 따라 야나베 선생이 문화부장으로 취임하신 것은 벌써 신문지상으로 보도된 바
이오며 아울러 일반국민이 이 문화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바 기대는 실로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본지는 조선 유일의 언문신문으로서 총력연맹의 문화부가 짊어지고 있는 사명의 일익을 분담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책임을 더욱이 깊이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따라 본지는 문화부와 협
력 또는 신뢰하에 어떠한 방책을 세워 나아가야 좋을까 하는 데 대하여 여러분의 뜻 깊은 □□을
비는 바이오니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간략하나마 이것으로
첫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백 본사 학예부장 : 지금 본사 금본 상무께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맹 문화부의 금후의 활동에 있어
본사가 의례히 그 사명의 일익을 분담하게 되는데 특히 본사 학예부로 하여금 금후 문화부 일의 시
중을 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이 좌담회부터가 문화부의 시중을 하는 의미에서 개최하온 것입니
다. 이제 여기서 우선 말씀을 청하는 것은 문화부 그 자체에 대한 말씀이올시다. 일반 국민의 입장
으로 보면 새로 탄생된 문화부의 존재가 퍽 막연해서 그 일의 한계 또는 일의 성질들이 확연치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 대중만이 아니라 문화부에 참가하고 있는 문화인들로 봐도
문화부의 일은 대단히 막연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은 조선에서만 그럴 뿐이 아니라 내지의 익찬회(翼贊會)의 문화부에 대해서 일반문화인들
의 비판도 그 문화의 한계가 막연하다고 하는 것인 듯합니다.
이제부터 문화부가 어떤 주안(主眼)을 가지고 나아가는지 또는 문화부의 의의, 문화부의 사명, 이런
문화부의 전면적 활동범위와 또는 일방 점차 중대성을 더해오고 있는 이 시국에 처하여 문화부로서
는 어떠한 각오를 가지게 되는지 그런 것을 일반 국민 앞에 알리는 것이 문화부의 한 급무인 것 같
습니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구체적인 방면에 걸치어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시기를 절실히
희망하옵는데 우선 그 점에 대하여 야나베 문화부장께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야나베 국민총력 문화부장 : 국민총력연맹 문화부가 대체 어떠한 것을 하는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해 나
아가는가 이러한 것이 다소 막연하여 그것을 확연히 해달라는 것이 일반국민의 희망이라는 것같이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아직 문화부라는 것에 준비든지 방침이든지 완전히 정돈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명확한 점에 있어서는 여러분께 양해를 비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부를 어떻게 진
행시킬까 하는 것에 대하여는 지금 문화부에 종사하는 여러분과 여러 번 문화부 회의라는 회합을
열어 대체의 강목(綱目)을 심의 중입니다 하나 이 심의의 만전을 기하려면 각 방면의 의견을 충분히
듣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밑에 문화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게 되어 요전번에 각 방면 문화
3) 김동진(金東進).
4) 백철(白鐵).
인을 망라하여 문화부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문화부 위원은 금후 문화부의 구체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일례를 들어 말씀하면 음악에 대한 것은 음악가, 영화에 관한 것은 영화인, 미술에 관한
것은 미술가들에게 이렇게 모든 것을 그 전문적인 방면에 맡기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에게 연락회(連絡會)를 여는 등 각각 전문적 부문에 걸쳐 협의해 갈 것이라는 의미에서 68명이란 위
원을 선출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문화부의 움직임을 좀더 명확히 세상 사람에게 지시하기에는
좀 더 일수(日數)가 걸릴 것입니다. 다음 문화부로서 어떠한 방침으로 나아가는가가는 대단히 곤란
한 문제이지만 총력연맹본부에서 그 실천요강을 정확히 작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가려고
생각이올시다. 여러분도 될 수 있는 한 이 □을 따라서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월 12일)
2
야나베 문화부장 : 그러면 각 방면에서 어떠한 형태로 그것을 실행하여 갈 것인가 또는 그 조직이든지
준비, 방법 이러한 것은 점차 작정키로 하고 여기 계신 여러분으로 말씀하면 자기의 일을 이 실천요
강에 수행(隨行)하는 일방(一方) 일반국민을 지도, 또는 감화시키어 나아가는 중요한 임무에 계신
분이므로 영화, 연극, 미술, 소설, 시가 등 여러분이 짊어지고 계신 힘을 같은 목표 아래서 같은 기분
으로서 일반국민에게 □하여 모든 힘을 써 주신다면 일억일심(一億一心) 각각 분산치 않고 이 사명
을 완전히 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각 부면에 계신 여러분들이 국책선(國策
線)을 따라서 즉 오늘 국가가 요구하는 방면에다가 국민을 지도하여 나가는 그 방책상 만일 곤란한
점이 생긴다든지 할 때에 이 문화부가 언제든지 그 협의에 응하는 것이 문화부의 사명의 한 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여러분과 같은 문화인들의 입장으로 보면 문화부라는 것은 본래 필요
치 않은 줄 압니다. 문화부가 있어서 문화인들을 지도한다든가 끌고 나간다든가 하는 문제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적극적으로 자진하여 금일의 국책에 맞는 문화를 창조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점에서 금후의 문화부의 모든 일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자진하여 참가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올시
다.
백 본사 학예부장 : 지금 문화부장께서 문화인 자신이 자진 봉찬에 참가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
이 있었는데 이 말씀은 문화부의 사명상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뜻 깊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에 대하여 여기에 모이신 각계문가(各界門家)의 대표자 또는 문화부의 위원으로써 각각 자기입장에
서 어떻게 하면 일을 희망하는대로 진전시키어 갈 수 있을까 간담적(懇談的)으로 말씀하여 주셨으
면 좋겠습니다. 가라시마 선생 한 말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라시마 경성제국대학 교수 : 글쎄올시다. 어떤 논점에다가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할지 다소 막연합니
다마는 문화부 일이라나 하면 문화부장의 배려 밑에 우리들은 단지 그 일을 보조하는 입장에 있음
으로 나로서는 지금 별로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김 삼천리사장 : 저는 야나베 선생께 이 기회에 일상 품었던 저의 의견을 고백해 보려고 합니다. 문화
부가 지금부터 일하려고 하는 대상인 국민 속에는 80만이나 되는 ‘내지인’5)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조선에 이주하고 있는 내지인은 모두 다소 교육이 높고 관청이나 은행 등 각 직장에서 전시하의 황
국신민으로서 정성을 다 하고들 있습니다마는 ‘반도인’6)의 경우로 본다면 지식계급, 즉 소학으로부
터 대학까지의 학생 수를 약 150만이라고 세상에서 말하는대로 잡고 또 이래 학교를 졸업한 지식층
을 약 배(倍)로 본다면 지식계급이 3백만은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2천만 국민은 거의 문
맹계급에 속하는 형편입니다. 문화부가 금후 일해 나아갈 방책의 중점은 이 문화의 뒤떨어진 2천만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금년의 지원병을 본다면 금년
지원병의 총원은 10만 명 이상이나 되는데 가령 한 가정에서 한 사람씩의 지원병을 냈다 치면 10만
호의 가정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현재 지원병은 실로 도회지보다 거의 대부분이 농촌에서 나온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실 것이며 따라서 그 지원병의 모친으로 보더라도 대개는 문자와 인연이 먼 자
격의 소유자인 것도 잘 아실 줄 압니다. 그것은 지원병의 연령이 거의 20세 전후인데 이들 모친이
이들을 20세 전후 내지 30세 전후에 나았다 하면 지금 40세에서 내지50세 전후가 될 것입니다. 헌데
일한병합 이래 금년까지 하여 겨우 30년 남짓하니 이들 지원병의 어머니는 거의 문맹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직도 적어도 10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지원병의 어머니가 소학교 또는 고등여학교 정
도의 지식계급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 됩니다. 만일 지원병의 어머니가 교양있는 부인이라면
현재 지원병 수에서 몇 배 더 되었을 것으로 상당한 비약이 있었을 줄 압니다. 물론 문화운동이 다
만 지원병 양상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마는 지원병의 어머니까지도 문
화란 미친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이들 2천만 문맹을 타개하는 데는 전번 학생국어보급운동 같은
계몽운동도 필요한 동시에 귀와 눈과 알기 쉬운 이야기로 교화를 보급시키는 연극, 영화, 소설 등에
힘을 써서 우선 교화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야나베 문화부장 : 김동환 씨의 말씀은 대단히 좋습니다. 문화부에서도 ‘농촌생활문화운동’이라 할까 이
런 농촌방면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이들 농촌사람들을 잘 지도할 수 있을까 하고 두뇌를 쓰고 있습
니다. 거기에는 시국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연극이라든가 영화라든가, 평론이라든가 혹은 좀 다른
방법, 예를 들면 종이연극 같은 어떻게 해서든지 농촌에 적합한 것을 주도록 고려이올시다. 거기에
대하여는 그러한 방면의 인사들이 다소 부족한 감이 있지만은 장래 여러분의 협력을 얻어서 이를
꼭 성공하도록 노력하렵니다.
(2월 13일)
3
목산 연극협회장 : 저희들은 조선연극협회라는 것을 결성하고 있는데 아직 결성된 날짜도 몇 날 안 된
관계상 얼음이라도 녹고 따뜻한 봄이 돌아오면 김 삼천리사장의 말씀과 같이 그런 일을 실천해보려
고 합니다. 즉 농촌위안연극을 하여서 촌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결과 교양도 되고 즐기게 하는 한편
5) 일본인.
6) 조선인.
또 지원병을 내보내는데 각오라 할까 이런 점도 강조하고 또 국민으로써 알아야 할 일이라든지 여
러 가지를 인식시키는 목적하에 지금 준비 중이올시다. 그리고 각 지방의 극장 또는 극장이 없는
곳은 소학교의 넓은 교실 같은 것을 빌려서 10명 내외의 단원이 지방순회를 할 계획입니다. 내지나
이태리에서는 벌써부터 실시하여 퍽 효과를 내고 있는 말을 들었으며 어느 때인가 가라시마 선생한
테서 들었는데 지나나 서반아에서는 전장으로 나아가는 용사들에게 이런 것을 실시하여 이것도 상
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좌우간 대단히 의의 깊은 일이 되리라고 믿고 있습
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수한 각본이 필요한데 이것은 우리 연극협회에서 선택에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지오만 문화부에서도 협력하셔서 현상모집를 한다든가 많은 원조를 하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그런데 그런 것들의 실천과정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곤란할 겝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그렇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건전한 오락으로써 향토극 같은 것은 필요치 않습니까. 내지에서는 이런 것을 많이
들 하고 있다는데….
목산 연극협회장 : 물론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실시하는 것은 좀 어렵겠습니다마는 때를 따라 실시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농촌이나 각 부락의 지도자 격 되는 사람과 연락하여 될 수 있는대
로 한번 실시해보려고 합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또 하나는 연출자와 연기자의 양성이 필요치 않을까요.
목산 연극협회장 : 물론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여도 지금의 현상으로는 연출자나 연기자가 죄다 부족되
는 상태에 있으니까요.
다나카 문화부원 : 연극협회에서도 이런 점에 대하여 특히 힘써야겠습니다그려. 다소 바쁘시겠습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물론 바쁩니다. 연극에서 그런 일까지 겸하여 나아가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으로는 자주 연출을 하여 연기자 자신이 국책에 맞도록 아주 익어져서 그 분위기에 젖도록 힘
쓰는 것도 좋을 줄 압니다.
다나카 문화부장 : 요컨대 이쪽에서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말하자면 건설적 의의를 가진 것이 아
니면 아니 되겠지요. 곧 그 효과가 국민 속으로 깊이 침투되어 국민이 거기에 동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산 연극협회장 : 네, 그렇습니다. 그에 대하여서는 그런 효과를 낼만한 각본을 다나카 씨 말씀같은
이념 하에 선택코저 합니다.
다나카 문화부장 :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겠습니다. 국민의 생활 일부분이 스스로 문화 속에 잠입하도
록 노력하여 주십시오.
백 본사 학예부장 : 무엇이든지그럴것입니다. 소설이라든가음악이라든가영화라든가죄다그럴것입니다.
(2월 14일)
4
데라다 문화부 참사 : 제가 한 말씀 하고자 합니다. 제 말씀은 좀 지금 토론하시는 것과는 틀릴지 모릅
니다마는 내가 모(某) 신문 학예부의 일을 담당케 된 것은 1938년 1월이었습니다. 그때까지의 모 신
문은 학예면만 아니라 가정면이든지 무엇이든지 내지의 그것을 그대로 옮기어 놓아 조금치라도 조
선적인 노력이 없었습니다 . 다만 내지로부터 오는 통신을 그대로 제목을 붙이어서 내는 것이었는데,
기 실(實) 조선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내지화(內地化)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선 ‘로컬’
신문으로서 나아가지 않으면 국민과 친밀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팔리지도 않는 관계상 과거의 그 신
문으로서는 상상치도 않는 조선부인 기자를 입사시키어, 우선 가정방문을 한다, 김치 담그는 법을
싣는다, 조선의복 발르는 법도 기재한다, 이렇게 노력하여왔습니다. 그러므로 국어신문인 그 신문이
국어의 일반보급과 병행하여 상당히 조선인 간에 퍼진 것을 자부하고 싶습니다. 특히 학예란에 있
어서는 내지 문사(文士)의 집필을 될 수 있는대로 피하고 조선 재주(在住)의 문화인에게 원고를 청
하기로 하여, 처음에는 성대(城大)의 선생, 그 다음 의전(醫傳), 법전(法傳), 고상(高商) 등의 선생들
에게 보조를 받았었는데, 이제는 저의 발이 넓어짐에 따라 조선문사들에게도 보조를 받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내지인이나 조선인이나 넓히 친밀하여지는 것이, 그것이 ‘내선일체’의 일
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더욱이 ‘지나사변’7)이 시작된 이후 이러한 느낌
을 깊히 갖게 되며, 현재 내지의 대정익찬회와 조선의 총력운동과 비하여 심모숙려(深謀熟廬)하여보
면 지금부터의 진로가 예측되는 것도 같습니다.
좌우간 총력연맹에서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기 전에 솔선하여 국책선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례로서 우리 신문계에 처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원고를 받았다 하더라도
일차(一次) 건설적인가 아닌가하는 관점에서 그 원고를 취급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며 또 자연 이렇
게 취급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반국민의 교양기관으로서 만전을 도모하여 그 담당된
책임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매진코자 합니다.
백 본사 학예부장 : 지금 데라다 씨의 말씀은 신문에 관한 말씀이었는데, 오늘날 문화를 통하여 내선일
체가 심화되는 문제에 있어 좋은 참고가 되는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엔 약간 화제를 돌려서 금번 문화부가 일을 해 가는데 있어 일종의 문화정책이라 할까, 하여튼
어떤 기본방향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여기 대해서 이건 제 개인의 의견입니다만은 문화부가 향방
(向方)하는 곳에 두 가지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요즘과 같이 미국같은 외국과의 시국관계
가 절박한 시기에 있어 조선과 같이 비교적 영미문화를 숭배해오던 경향도 있었으니까 그 점에 □
하여 그 영미문화를 비판해가는 일면이 있고, 내부로는 국민문화를 건설해가는 일면, 그런 두 면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런 점에 대하여 문화부장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월 15일)
5
야나베 문화부장 : 글쎄올시다. 이것은 나의 의견 같습니다마는 일본이 지금까지의 문화가 진보한 그
과정을 보면 일본은 외래의 문화를 취급하는데 비교적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껀뜻하면 일
본인은 흉내를 잘 낸다든가, 혹은 창작력이 없다든가 이렇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
7) 중일전쟁.
로는 문화가 진보되는 과정에 있어 최초에는 여러 가지 사물을 더러 흉내 내는 일이 있으나 그것이
축적됨과 함께 다른 훌륭한 창작적인 무엇이 나오는 수가 많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또 이 모방이라
는 것은 어떤 우수한 사물이 있다면 또한 남의 것이라고 채용치 않는 것은 도리어 어리석은 일로서
모방도 기 실(實) 저마다 못하는 것으로 비난거리가 될 이유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인간이 소학으로부터 대학을 마치는 동안 다만 가르침을 받고, 흉내를 내고, 그러
한 후에야 겨우 자기라는 것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런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
입니다. 즉, 일본의 문화는 지금 모방시대와 창작시대의 경계선에 있으니까 오래지않아 그 진가를
발휘할 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래 동아공영권이 성립되면 태국(泰國), 난인(蘭印)8) 등 여러 나
라 문화를 이입하여 그것으로써도 확대하고 □□한 문화를 짓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
므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내외를 전도하는 외래문화에 대한 무조건 호평을 하는 심리를 고치어 일
본문화의 독자적인 것을 동아공영권의 인민으로 하여금 인식케 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립하기를 절
실히 요망하며 또한 그것이 금후 일본에게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백 본사 학예부장 : 유진오 씨께서도 좀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 보전 교수 : 현재 조선에는 내지의 문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진 인사가 많은 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지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는 힘이 적은 것은 퍽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
론 여기에 대한 원인은 내지의 학자나 사상가, 또는 일류 철학자들이 역시 외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관계로, 좀처럼 동경까지 유학을 가더라도 일본문화에 대하여 존경한다든가, 인식하는 점
이 있다든가 하는 것에 대하여 다소 소홀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되고 있으므로 이런 관점은 멀지 않은 장래에 시정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말씀하고 싶은 것은 조선사람 가운데는 국어를 능통하는 사람들은 국어를 통하여 내지문학
이나 구미 각국문화에 친하고 있으나, 국어를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것은 문인협회의 일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내지의 우수한 작품을 조선말로 번역하여 될 수 있는대로 내지작품과 친하게 하
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래 그러한 번역물도 있었으며 우수한 문사에게 부탁코자
하여도, 원고료가 합당치 못한 관계상 여의치 않은 느낌이 있으니 이 점도 문인협회와 문화부가 협
력하여 좀 더 왕성히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한 예로는 요전번 제가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작(作)
『보리와 병정』을 번역한 것을 읽었는데 여간 좋지 않더군요. 이만한 정도로 내지의 작품을 번역
해보는 것도 여간 효과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월 17일)
6
백 : 마츠다 씨께선 화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마츠다 문화부위원 : 별로히 이렇다 할 의견이 없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 일본에서 일찍이 지나나 조선으로부터 문화를 수입하여 일본적인 사상이나 풍
8) 네덜란드 령 인도네시아.
류를 가미한 고대문학도 이식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백 : 가라시마 교수, 지나문학이 일본에 들어와서 어찌 소화되었는지요.
가라시마 성대 교수 : 글쎄올시다. 다만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본문화의 특수성이랄까요. 즉, 유
교 같은 것을 보더라도 알겠지요. 유교로 말씀하면 본바닥인 지나보다도 오히려 그 진가가 내지나
조선에서 발휘되었으며, 지나에서는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지금 현상인데, 그 전문적부분에 대
해서는 약(略)하기로 합니다. 아까 농산어촌 또는 광산방면의 문화문제에 대하여 김동환 씨로부터
이야기가 있었지만은, 이 방면에 연극영화 등으로 문화의 발전을 기(期)하려는 것은 대찬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지식계급이올시다. 현 문화부나 문화인에 대하여 다대(多大)한
관심(□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지식층으로써 이 지식층의 통합 여하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
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우리들 문화부 내부 사람으로 자주 이런 기회를 만들어 그런 방
면을 어떻게 지도□□하여야 옳을까 □□적인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 김억 씨, 조선의 시인층에 대해서 협력 지도하실 입장에서 한마디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 문화부 위원 : 아까 유 교수도 번역에 대해서 말하셨지만, 참으로 이 번역이란 문화인치고는 누구나
관심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저도 번역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 나라 문화이든지 그 문
화를 참으로 친하자고 하면 번역물 같은 것으로서는 그 윤곽은 파악할런지는 모르겠으나, 그 진의,
그 독특한 미각(味覺) 등에는 접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문맹인 사람에게는 ‘40
부터 공부시작’이라는 말과 같이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국어’보급에 적극 노력하여, 평이한 내
용물로 된 것부터 점차 읽히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또 그것이 ‘내선일체’상에도 상당한 성과
를 내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백 : 그런데 아까 다나카 씨로부터 국민생활의 일부분이 저절로 문화 쪽으로 잠입하도록 힘씁시다라고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국민대중을 문화에 화
(化)케 하는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저는 추측하는데, 이런 의미 아래서 안전 씨, 영화방면에 대하여
한 말씀 해주십시오.
안전 영협 이사장 : 간단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조선에서 취급하고 있는 영화는 대부분이 내지
나 외국물입니다. 조선영화도 이때까지 몇 편의 작품을 내었습니다마는, 그 □□상으로나 기술상으
로나 퍽 미약하고 때로는 일반국민을 지도하며 향락하려는 마음만 왕성하지 그 실제는 이와 역행하
는 일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국민총력연맹 문화부에서 영화방면을 어떻게 지도하시려는지 야
나베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2월 18일)
7
야나베 문화부장 : 별안간 너무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십니다그려. 내 의견으로는 지금 조선에는 배우는
둘째치고 일반국민을 잘 지도할만한 인재가 드문 것 같이 보고 있는데 우선 그런 방면의 인재를 양
성할 수 밖에 다른 방책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조선 영화가 빈약하다는 데 대하여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은 기성(旣成) 영화를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하는 까닭, 즉 조선 전체에 얼마 없는 영화극장에서 상영할 뿐으로 1만원이나
2만원의 비용이면 모르되 10만원이나 걸리는 제작물이면 채산이 안되는 관계이며 그렇다고 해서 내
지나 외지에 수출시킬 작품도 못되고 결국 이런 관계로 지금까지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
니겠습니까. 또 제2로는 보기 좋게 10만원이나 20만원 자금을 내놓는 □□가 드문 것이 아닐까요.
제3으로는 어쨌든 자본이 부족한 관계로 촬영기도 내지에서 쓰던 고물을 쓰니까 장면이 그리 좋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가라시마 성대 교수 : 또 우수한 각본가 연출가, 연기자가 존재치 않는 것도 한 개의 원인이 되지 않겠
습니까. 그러나 장래는 그 조직도 개선되고 크게 비약할 줄 압니다.
유 보전 교수 : 요전에 <집 없는 천사>를 그 시사회에서 보았습니다마는 조선영화가 그만큼 잘될 줄이
야 몰랐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수업료>도 좋았었다는데 애석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못보았습니
다만은 아무튼 근래에 드문 좋은 작품이라 하겠으며 조선영화기술도 여간 발달되지 않았던데요.
다나카 문화부원 : <집 없는 천사>는 참 좋았습니다. 저는 두 번이나 보았는걸요. 촬영기술이든지 연출
이든지 전례에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얼마 아니 있어서 내지영화의 수준을 따라 갈 것 같습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빈약한 설비를 가지고 그만큼 작성하는 이면의 숨은 고심은 알아주셔야겠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자본이 부족하고 모든 설비가 부족하지마는 장래를 기약하고 많이 활약해 주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운 문제는 조선영화에 대한 국민심리가 아닐까요. 외국영화를 보던 그들이 재
래의 조선영화와 친해지지 못한 것은 무리가 아니지마는 그렇게도 ‘머리에서부터 끝까지’ 보기도 전
에 악평하는 그 심리를 개선하도록 노력함이 어떠할런지요. 불란서가 전쟁에 패배 당한 오늘날 여
전히 우수한 영화를 내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 국민심리 여하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 : 문화영화는 어떻습니까.
안전 영협 이사장 : 근래 내지의 문화영화들은 물론 당국의 원조도 있었지마는 상당히 빨리 발전하여
참으로 영화사상(映畵史上) 특필(特筆)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아직 빈약하고 따라서 촬영기로 말
하더라도 망원‘렌즈’가 하나도 없어서 내지로 차용하러 가는 상태이며 기타 불비한 점이 여간 많지
아니합니다. 따라 그 활약은 장래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2월 19일)
8
목산 연극협회장 : 그러고 영화의 매력은 상당히 큰걸요. 도회는 물론이지만 영화관이 없는 농촌에서는
‘바라크’나 광장 같은 데서 영사를 하는데 아무런 영화라도 대단한 인기입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참으로 그러니만큼 좋은 영화를 많이 감상시키고 싶은 걸요.
유 보전 교수 : 그렇지요. 더욱이 영화로서 받는 영향이 심대하니까요.
목산 연극협회장 : 그러므로 제재는 될 수 있는대로 참으로 생활문화 속에서 취해 낼 필요를 더욱이
느낍니다.
가라시마 성대 교수 : 당국에서도 아마 열의를 가지고 노력할 것입니다.
유 보전 교수 : 그렇게 된다면 여간 좋지 않은 일이지요. 그런데 농촌에서는 영화를 영사할 때 아직도
설명을 해 주어야 할 걸요.
목산 연극협회장 : 그렇습니다. 도회와 같지 않아 아직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만큼 도회와
농촌의 차가 있는 것입니다.
가라시마 성대 교수 : 그 전에 모 신문에서 ‘뉴스’ 영화를 작성하였었는데 그 효과는 매우 컸었지요. 그
러고 또 하나 총력연맹 속에 이동영화반이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이것 역시 다소 빈약한 듯 하니
이것도 강화시킬 필요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안전 영협 이사장 : 귀 신문사에서도 무엇인가 제작한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금본 본사 상무 : 네, 있습니다. 문화영화를 두 세 개 만든 일이 있습니다.
김 삼천리사장 : 좀 화제가 바꿔지겠습니다마는 일찍이 이조시대의 곧 지금으로부터 한 1백년 전후에
전 조선에서 젊은이들을 10여만이나 동원하여 경복궁을 지을 때 제일 풍류가 많이 유행하였다고 하
는데 그것은 속칭 ‘민요’라 하여 춤이라든가 노래라든가 기타 그 지방을 따르는 예술을 굉장히 잘하
게 되어 나중에는 나라에서 이들 풍류가를 뽑아서 왕성을 건축하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도록
힘썼다는데 이에 관련하여 문화부에 한마디 청(講)할 것은 지금 부여에 신궁을 건축 중인데 음악협
회, 영화협회, 연극협회, 연예협회 등 여섯 단체에서 그들 근로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민요’같은
것을 보여주면 어떨런지요. 또 다른 하나는 농산어촌 등에는 좀 ‘레벨’이 얕은 것으로 그들 농민의
지식을 깰 만한 연예를 보여주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야나베 문화부장에게서 제1선
에 서서 지도하셨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월 20일)
9
야나베 문화부장 : 김동환 씨 말씀대로 하면 그것은 참으로의 근로봉사의 위로가 아니 됩니다. 경복궁
을 신축할 때는 나라에서 강제적으로 동원하였으니까 그럴 필요가 있었지만은 지금은 그렇지 않은
만큼 근로봉사에다가 위안연예란 아무래도 맞지 않습니다. 곧 지금 부여신궁에 대하여는 국민이 스
스로 봉사하는 것인 이상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농촌에 대한 것은 다소 참고하겠습
니다.
유 보전 교수 : 무엇이든지 거기에 적당한 것을 하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김 삼천리사장 : 그렇지만 그 지방 독특한 ‘민요’를 소개하는 것은 과히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야나베 문화부장 : 소개만은 과히 의의 없는 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일반 사기를 고취시키고 또는 정
신의 정화와 수양을 목표로 하는 고풍인 ‘민요’ 같은 것은 다소 필요하지만 현재의 저급한 ‘민요’는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얼마 전에 내지에서 아마 일본청년회관인 듯 한데 각 방면에서 그 지방 독특한 인형
을 모아서 거기다가 민요를 가입하여 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이런 것도 별로이 의의가 그렇게 크지 못한데 지금 근로봉사를 하는데 그런 것을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금본 본사 상무 : 그렇지요. 특히 부여신궁의 근로봉사는 경건한 태도로써 봉사하는 것이니까 좀 어떠
할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방문연극의 취지는 매우 좋습니다마는….
유 보전 교수 : 최근까지 부여에 가서 근로봉사를 하고 온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금본 상무이사 : 퍽 많았습니다. 학생을 도와서 하루나 이틀씩은 근로봉사를 하고 가니까 상당한 수인
듯 합니다. 아마 수만에 달하는 모양이지요.
김 삼천리사장 :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마는 근로이동연극단이라는 것을 농산어촌에 적극적으
로 보내서 지금 화제가 되어있는 ‘민요’를 충분히 활동시키어 ‘민요’가 얼마나 좋다는 것을 인식시키
고 따라서 여러가지로 연구도 하면 즉 이런 것이 생산능력을 증가시키는 데도 일조가 되리라고 믿
습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저의 연극협회의 가맹단체로서 지방을 순회하던 중에 어느 곳에서 위안연주를 하는
데 노래가 없어서 나중에는 애국행진곡으로 때워버린 일이 있습니다. 요컨대 근로봉사에 대한 노래
같은 것을 작사, 작곡해야 하겠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장 : 내지에 있는 대정익찬회에서는 익찬회의 인식을 깊이 하고자 위원들이 협의한 결과
춤이 좋다고 결의하고 그에 대하야 작시(作詩)를 사토 하치로(サトハチロ) 씨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춤이 나쁘다고 하여서 작시도 폐지당한 일이 있습니다.
야나베 문화부장 :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습니다 그려. 그런데 국총이 문화부로써는 요컨대 금후 조선의
문화만이 아니라 동아 전토(全土)를 지도할만한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어디까지든지 건설적인 방면
에 향하여 일반국민을 상대로써 건전한 오락과 고상한 생활지침이 되도록 힘쓰며 고대문화 현대문
화를 막론하고 전 문화의 통합과 □□□□를 목적 삼아 굳세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
대한 곤란이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문맹층에 문화를 보급 시키려면 결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되
는 것이 아니며 장차 건설될 신동아의 맹주 일본민족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만전책을 다하여
1보1보 침착한 태도로써 성공을 기필하기를 바랍니다. 문화 각 방면에 계신 여러분은 이 문화부를
한 개의 나무뿌리로 삼고 □□의 번무를 기하는 동시에 동체(胴體)인 우리들은 서로서로 힘있게 결
합하여 뿌리에 수분을 받아 긴요한 역할을 하여 신문화를 창립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백 : 여러 가지로 좋은 말씀 많이 하여주시어 여간 감사하지 않습니다. 시간도 거의 다 되고 이만 폐회
합니다.
(2월 21일)
<출전 : 「文化翼贊의 半島體制-今後文化部活動을 中心하여(1~9)」(座談會),'매일신보', 1941년 2월 12일~21일>
2. 조선연예협회
1) 조선연예협회(기사)
연예의 건전한 발달과 연예인의 실질 향상을 도모하여 국민문화 향상에 이바지하자는 목적으로 그
동안 청산철(靑山哲)9), 최무성(崔茂盛) 씨 들이 본부의 알선으로 결성 준비 중에 있던 조선연예협회 결
성식은 26일 오후 2시부터 부내 태평동 부민관 소강당에서 연예 관계자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동회원은연예단경영자, 연예단소속원인각본작가, 연출가, 활동가, 연주가, 무용가, 미술
가, 기타연예단소속원으로연예또는연기자사무에종사하는이들을조직한것으로전기목적을달성
하기 위하여 연예의 통제와 지도, 연예인의 향상의 제도에 관한 시설 등을 하기로 되었다. 임원은 다음
과 같다. 회장 청산철, 이사 미키(三木尚), 최무성, □山□民, 상무이사 임서방, 감사 박원철, 한성준.
<출전 : 「朝鮮演藝協會」, '매일신보', 1941년 1월 27일>
2) 조선연예계
수년 이래 각 레코드회사의 가수를 중심으로 악극단이라는 것을 조직했는데, 그 업적이 호조됨에 따
라 각 방면에서 이것을 모방한 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는데, 군립하는 이러한 연예의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에 1941년 1월 26일 총독부 경무국의 알선으로 조선연예협회를 발회해 연예인의
시국인식과 건전오락의 조성에 착수했다. 현재 동 협회 소속 단체는 총수 25개로 조선 안에 악극단 10,
창극단 3, 서커스단 10이다. 종래 예인들 사이에 소행이 바르지 못하고 사치스럽게 다액의 가불을 해
일반의 비난을 받게 되어 자연 경영자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는 신용이 극히 낮고, 상 문제를 야기해왔
는데, 동협회의 설립과 동시에 이후 회원증을 교부해 소속을 명확하게 하고 더욱이 엄중한 감독 단속을
가해 온 결과 점차 개선되어 가지만 많은 소단체의 난립은 통제상 재미있지 않은 결과, 최근의 이것
등을 통합 강화해 건전오락 달성을 도모해 가고자 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동 협회에서는 이동연예봉임대를 조직해 각 광산 지대 및 오락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산어
촌에 보내 그 활동은 금후 보다 발전 확충될 듯하다.
<출전 : 「朝鮮演藝界」, '朝鮮年鑑', 京城日報社, 1942년, 599쪽>
3. 조선문예회
1) 조선문예회 설립취의서
산업경제 방면에 있어서의 최근 조선의 약진은 근세사상에 한 에포크(기원)를 형성하여 세인에게 경
9) 이철(李哲)의 창씨명.
이적인 것이 되어 있거니와 신흥조선의 기백은 다시 일보 전진하여 사회 및 문화의 부면에서도 그 개
발과 충족을 구하고 있다. 더욱이 표면적 사상으로부터 점차 본질적인 심부의 굴착에 그 보무를 내딛기
를 촉구하여 마지않는 상황에 있다. 정조(情操)의 원천이요, 생명의 율동인 문예와 음악, 무용이 신흥조
선의 사회정세에 조응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재음미되고 사회교화의 유능한 부문으로 정당한 인식하에
서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기쁜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운을 잘 파악하여 부족함을
보충하고 왜곡을 교정하며 또한 옛 전통도 돌아보면서 조선의 문화수준을 차제에 고도로 추진시키어
이천만 동포의 사회생활의 원만과 풍윤(豊潤)을 기하는 것은 실로 중대한 행위인 것을 자신하고 동지와
서로 자문하여 널리 관계 방면의 지도를 받은 뒤에 물러나서는 자생계발의 도장이 되고 나가서는 규운
현창(奎運顯彰)의 사림(詞林)이 되기 위하여 이에 조선문예회를 설립하노니 조선문화재 건설 필지(必
至)의 이 호기회에 다소나마 기여와 공헌이 있으리라는 염원이 절절한 바이다.
문예라고 하여도 그 범위가 넓어서 하여야 할 사업이 한 없이 많고 많지만 현하 국민대중의 정조생
활에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진 악무의 개량 및 그 건전한 발달을 도하는 것 같은 것은 실로 초미의 급
무가 아닌가 하고 통감하는 바이다.
예로부터 예악은 사회규모의 근본적 요소이며 동양에 있어서는 정형(政刑)이상으로 처우되던 시대도
있었으니 고대의 사회인 양성기관이던 대학 같은 곳은 교육의 중심을 전혀 악에 두어왔었다. 문예와
악무의 인심 내부의 동동한 절실함과 기호(嗜好)의 보편함에 따라서 감화의 심각한 점을 생각하면, 우
리는 고대의 이 제도에서 문화의식의 총명과 투철에 다시금 감복치 않을 수 없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악무는 가정 또는 사회적 존재로부터 점차 민중 생활층에 스며들어 더구나 최근에 라디오 또는 레코드
에 의하여 유행력의 증대와 취미의 보편화를 수반하게 되고 그 이해 선악의 영향이 실로 중대해짐에도
불구하고 금일까지 기강규율의 범위 밖에 던져지어 독풀이 눈에 가득하게 만연하도록 방임해둔 느낌이
있는 것은 진실로 유감의 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생활에 피로한 민중의 위안으로 그 영혼의 창호를 두드리는 것이 광명의 덕택이 아니고 어둠의 힘이
라고 하면 화해고독(禍害蠱毒)이 진실로 얼마나 될 것인가. 이것을 뒤집어서 음파는 환희를 가져오고
광영은 명랑을 펼치어, 우리들의 마음의 금선(琴線)에 고탕(鼓盪)과 분기를 부여하는 힘의 원천이 되게
할 수 있다면 인생을 윤택하게 하고 세도를 배양하고 나아가 문화의 수준을 앙양시키는 효능이 대개
측지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원컨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연적(硯滴)의 공을 누적하여 작게는 예술
본래의 사명 달성에 의한 사회적 개화를 위하고 크게는 자손영원의 덕성 축을 위하여 서로서로 신념적
노력을 바쳐야 할 것이다.
1937년 5월 1일
조선문예회설립발기자 일동
<출전 : 「朝鮮文藝會設立趣意書」, '朝鮮文藝會', 朝鮮讀書聯盟, 1937년, 2~3쪽>
2) 요코야 다케오(橫矢武男), ‘조선문예회’에 대한 시시비비적 소감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 씨 등이 나서서 총독부의 원호 아래 지난 5월 1일 조선문예회
(朝鮮文藝會)가 결성되었다는 것은 분명 최근 반도 예원계(藝苑界)의 토픽이긴 하다. 화단 쪽에서는 이
미 선전(鮮展)이 동양화와 서양화 외에 공예를 추가해서 올해까지 16회를 맞이했고, 작년의 추천제도와
함께 올해는 참여제도를 설치하는 등 종래에도 조선의 미술가들에 대한 총독부의 보호는 있었다. 하지
만 유독 문예에 관한 한 총독부의 태도는 말끔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관심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급속히 조선문예회가 실현되면서 총독부의 관심이 문예 방면에도 미치게 되었음은 어쨌거나 좋은 일이
고 반도의 문운(文運)을 위해 일단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꾸민 말이 아니라 필자의 진심을 토
로하고 있는 것이고, 본고의 목적도 당연히 이처럼 꾸밈없는 감정에서 조선문예회에 대한 시시비비적
(是是非非的) 감상을 서술할 생각일 뿐 다른 뜻은 없다.
약진하는 흐름을 탄 조선의 문예 방면의 진흥보급과 조사연구를 목표로 반도 민중들의 생활에 윤기
와 힘을 부여하려는 취지 아래 결성된 조선문예회에 대해 총독부가 측면적 원조를 하기 위해 나선 것
은 최근의 유쾌한 일이고 김대우 씨의 이해력 있는 행동에는 어쨌거나 찬의와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아무튼 총독부의 적극적인 행동의 결과는 그 면면들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권위자를 포함시킬 수 있었
고 명실 공히 조선문예회의 면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은 민간인들만의 운동과 비교해서 앞
으로 실제 활동의 효과에 있어서도 상당한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문예회가 나아가야 할 길, 혹은 취해야 할 방향에 관해서도 여기서 잠깐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
지만, 이는 아직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고 해서 검토할 만한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
기 때문에 지금은 단지 설립취의서 원안을 소개하고 조선문예회가 어떠한 이상(理想) 아래 결성되었는
가를 필자가 대변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산업경제 방면에서의 최근 조선의 약진은 근세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기원(epoch)을 형성하고
도리어 세인들이 경이로움을 자아내고 있는데, 신흥 조선의 기백은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 및
문화 부분에서 그 개발과 충족을 요구하고 있으며, 게다가 표면적인 사상(事象)보다 더욱 본질적
인 심층부의 굴착에 발걸음을 내딛을 것을 희구해마지 않는 상황 속에 있다. 정조의 원천, 생명
의 율동인 문예, 무악(舞樂)이 신흥 조선의 사회 상태에 조응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재음미되어
사회교화의 유능한 부분으로서 올바른 인식 아래 서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운을 잘 파악해서 부족함을 채우고 왜곡된 것은 교정하고, 또는 낡은 전통도
되돌아보면서 조선의 문화 수준을 점차 고차원으로 추진시켜 이천만 동포들의 사회생활의 원만
과 풍윤(豊潤)을 기하는 일은 실로 중대한 행장(行藏)임을 믿는다. 동지들끼리 서로 의논하여 널
리 관계 방면의 지도를 받고 뒤로 물러나서는 자성계발(自性啓發)의 도장, 앞으로 나아가서는 규
운현창(奎運顯彰)의 사림(詞林)이 되기 위해 여기에 조선문예회를 설립하여 조선문화의 재건에
필지의 좋은 이 기회에 작으나마 기여·공헌의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 단지 문예라고 해
도 그 범위는 넓고 해야 할 일도 무한한지만, 현재 국민 대중들의 정조 생활과 가장 긴밀한 관계
에 있는 무악의 개량 및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는 일은 실로 초미의 급선무임을 통감하고 있다.
예부터 예악은 사회규범의 근본적인 요소로서 동양에서는 정형(政刑) 이상으로 취급한 시대도
있었고, 고대의 사회인 양성기관인 대학 같은 곳은 교육의 중심을 오로지 악(樂)에 두기도 했다.
문예, 무악이 인심 내부의 충동이 절실하고 기호(嗜好)의 보편인, 즉 감화가 심각한 점을 고려하
면 우리는 고대의 이 제도에서의 문화의식의 총명함, 투철함에 새삼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시
간이 흐르면서 무악은 묘정(廟廷) 또는 사회적 존재에서 점차 민중의 생활층에 침윤했고, 특히
최근에는 라디오 혹은 레코드에 의해 유행하는 힘의 증대와 취미의 보편화에 따라 그 이해관계
와 선악의 영향은 실로 중대한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기강규율의 테두리 밖에 방
치되어 잡초만 무성하게 방임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
다. 생활에 지친 민중들의 위안으로서 그 영혼의 창문을 두드리는 것이 은혜로운 빛이 아니라 어
둠의 힘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겠는가. 이에 반해 음파는 환희를 가져오고 광명
은 명랑을 넓혀 우리 마음의 금선(琴線)에 고탕(鼓盪)과 분기를 부여하는 힘의 원천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생을 윤택하게 하고 세도(世道)를 다스리고 나아가서는 문화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효
과와 이익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바라건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물방울 같은 공을 조금씩 쌓으면서 작게는 예술 본래의 사명 달성에 의한 사회적
명랑화를 위해, 크게는 자손 영원의 덕성 구축을 위해 서로 함께 신념적 노력을 바치기를.
이를 통해 보면 문예와 음악을 결부시켜 보편화와 영향력이 큰 라디오나 레코드 방면도 움직여 진정
한 정조 문예, 정조 음악을 반도 민중들을 위해 제공하겠다고 하니 우리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문
예회의 높으신 분들께 기대하는 점 또한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회원들의 면면도 언
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서 현재 회원의 명부를 펼쳐보면 다음과 같다. (○표시는 제1부원, △표시
는 제2부원)
○윤성덕(尹聖德, 이화여자전문), ○박경호(朴慶浩, 이화여자전문), ○양주동(梁柱東, 숭실전문), ○현
제명(玄濟明, 연희전문), ○김영환(金泳煥, 숙명여고보), ○이종태(李鍾泰, 이왕직[李王職]), ○함화진(咸
和鎭, 이왕직), ○아규일(阿奎一, 정악전습소), ○김억(金億, 경성중앙방송국), ○홍영후(洪永厚), ○최남
선(崔南善)
△하부 요네사쿠(土生米作, 모토마치[元町]소학교), △오바 유노스케(大場勇之助, 제1고여), △아미야
기이치(阿宮儀一, 용산중학), △안도 요시아키(安藤芳亮, 경성여자사범), △요시자와 미노루(吉澤實, 경
성사범), △사토 기요시(佐藤淸, 경성제대), △미야하라 신타(宮原眞太, 경성사범), △스기모토 나가오
(杉本長夫, 법학전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 진명여고보), △다카모토 지다카(高本千鷹, 경성여
고보), △도쿠다 사토시(德田三十四, 이왕직), △다나카 하쓰오(田中初夫, 총독부 도서관), △가마다 사
와이치로(鎌田澤一郞),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이상협(李相協, 매일신보), 박영철(朴榮喆, 상업은행),
이시모리 히사야(石森久彌, 조선신문), 다카다 도모이치로(高田知一郞, 경성일보), 오사카 히사마쓰(保
阪久松, 경성중앙방송국), 하기야마 히데오(萩山秀雄, 총독부 도서관), 다카기 이치노스케(高木市之助,
경성제대)
이상의 면면들을 보면 조선문예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반도 문예계의 현 상황을 조금이라
도 알고 있는 자라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명부를 일별해 보면, 무려 32명의 회원들 중에
절반인 16명이 학교 선생들이었다. 무릇 문화란 그것을 천직으로 삼아 그것에 의해 생활을 꾸려가는
이른바 전문 문사가 아닌 한, 홀망(忽忙)한 와중에 생생한 현세의 생계를 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
게 손을 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일이고, 조선처럼 문예작품을 그대로 생활의 양식으로 삼기 어려운
토지에서는 특히 이 학교 선생이라는 계급의 사람들이 이 길에 종사하면서 고갈되려는 문예의 싹을 황
폐한 적토 속에서 보육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위와 같은 통계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다른 16명을 보면 회 전체의 앞으로의 활동에 편
의와 발판을 제공할 터인 신문사 주뇌자(主腦者)라든가 방송국 관계자 등을 제외하면, 다른 대부분이
개인으로 채워져 있는 상태이므로 무엇보다 이 모임에 대해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는 점은 관료적 취
향과 교육적 취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교원과 관료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나쁘다거나 좋다는
것이 아니라, 요는 진정 문예를 이해하고 몸소 문예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망라하기만 한다면 우리
는 만족하고 안심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면면들 전부가 스스로 다난한 조선 문예 진전 운동의 선두
에 나서서 문예의 싹을 키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적토에 손을 더럽히겠다는 사람들뿐일까? 이것이야말
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고 묻고 싶은 점이자 또 말하고 싶은 제목인데, 지금은 이를 자제하기로 하고
어쩌면 조선문예회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라 할 수도 있는 ꡔ경성잡필(京城雜筆)ꡕ 5월호에 수록된 「조선
문예회에 대한 희망(朝鮮文藝會へ希望)」에서 글을 인용함으로써 필자의 발언을 잠시 맡겨두는 임시 그
릇으로 삼겠다. 게다가 그 논자인 다나카 하쓰오(田中初夫) 군이 다행히도 조선문예회의 회원 중에서도
우선 실제 조직자로서의 존재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 한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필자의
장황하고 쓸데없는 입이 불필요함을 통감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조선문예회의 회원이자 시인인 다나카 하쓰오 군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췌해 독
자들 앞에 가만히 앉아서 볼 때, 필자와 같은 둔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아닌 한 조선문예회라는 존재의
일면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말이 길어지는 느낌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
고 싶은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선문예회의 일면이지 결코 그 전면이 아니라는 점을 독자들이 염두
에 두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전략)…… 창립 준비회에 모인 사람들 면면을 보면 순수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
분은 이른바 명사들이다. 일본 내지인 측에서는 유행가를 정화하는 데 유행가를 쓸 수 있는 작
가 또는 시인이라 불리는 자는 한 명도 이 모임에 초대되지 않았다. 어쩌면 초대할 만한 작가가
없다고 간주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이러한 모임의 성립은 문예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높이기에는 의외로 도움이 되지
않게 되고, 자칫 문예의 귀족원을 만드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일보 전진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문예의 통제에까지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후략)……
<출전 : 橫矢武男, 「‘朝鮮文藝會’に對する是々非々的小感」, '朝鮮行政' 제1권 제7호,帝國地方行政學會, 1937년 7월, 46~49쪽>
4. 조선문인협회
1) 조선문인협회 금일 발기인회 개최(기사)
거보의 조선문인협회의 발기회는 예정과 같이 20일 오전10시 부내 남미창정(南米倉町) 국민정신총동
원조선연맹 회의실에서 이광수(李光洙) 씨 등 16명의 문인 참집리에 열리었던바 먼저 정국신사(靖國神
社)어친배에 배례가 있은 후 계속하여 박영희(朴英熙) 씨 사회로 회의는 진행되어 이광수 씨의 취지설
명이 있었다. 계속하여 결성에 대한 토의가 있었으며 취지급 회칙작성의 좌기위원 5(五) 씨의 선정이
있은 후 동 12시반 폐회하였는데 선정된 위원의 씨명은 다음과 같다. ▲이광수(李光洙) ▲최재서(崔載
瑞) ▲유진오(兪鎭午) ▲정인섭(鄭寅燮) ▲박영희
<출전 : 「朝鮮文人協會今日, 發起人會開催」, '東亞日報', 1939년 10월 21일>
2) 일본정신을 발양! ‘문(文)의 내선일체’를 절규, 조선문인협회 결성대회 성황(기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에 가담하여 흥아 건설에 한 개의 힘이 되고자 지
난 17일 발기회를 열었고 다시 22일 회칙과 같이 강령을 결정한 조선문인협회의 결성대회는 29일 오전
10시 반 예정보다 40분 늦게 부민관 중강당에서 내빈측으로 도동(渡東) 중에 있는 시오바라(鹽原) 학무
국장 대리로 야기(八木) 학무과장, 가와시마(川島)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총재대리로 정교원(鄭橋源)
참의, 도서과장 대리로 이데 이사무(井手勇) 제씨를 비롯하여 백여 회원이 모여 조선문화사상에 새로운
출발의 막을 열었다. 박영희(朴英熙) 씨의 사회로 먼저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전몰장병의 영령에 대한
묵도로부터 대회는 시작되어 지금의 결성식에까지 밟아온 경과와 규약을 부의하여 만장일치 박수로써
이를 가결하고 김동환(金東煥) 씨로부터 성명을 발표한 다음 회장으로 이광수(李光洙) 씨를 선거하자
이씨는 단에 올라
“이번 이 협회의장 창립의 참뜻은 새로운 국민문화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에 있다. 인류는 유사
이래 국민생활을 떠나서 생활을 해 온 일이 없다. 문학도 국민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의 문단의 새로운 건설의 길은 ‘내선일체’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이 협회 창립도 아
름다운 내선문화인의 서로 신애하는 정(情)으로부터 빚어낸 것이라고 하겠다.”
는 뜻의 의미 깊은 취임인사가 끝나고 다시 회장으로부터 이 협회의 명예총재로 시오바라 학무국장
을 추대하였다는 보고를 한 후 다시 내지인 측 4명, 조선인 측 6명을 지명하자 만장은 박수로서 찬의를
표한 다음 총재의 대리로 야기 학무과장이 등단하여
“문학이 국가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붓을 가진 사람의 책임은 전선에 나아가 총칼을
잡은 병사와 마찬가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본 협회 회원의 활약은 신동아 건설에 새로운 박차
를 가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는 뜻의 간곡한 인사가 있었고 이어서 내빈의 축사에 들어가 가와시마(川島) 총재 대리로 정교원 씨
의 간곡하고 뜻 깊은 축사가 끝나자 본사 최(崔)사장으로부터
“내선일체의 정신운동이 능히 각 방면으로부터 부르짖고 있는 이때 내선인으로 결성된 협회야말로
앞으로 크게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조선 문인들 가운데는 과거에 있어서 길을 그르친 사람도 한둘이
아니였지만, 시국은 국가총력이 요구되고 있는 때임에 여기에 각성의 깃발을 들었다는 점은 경하하여
마지않는다. 또 조선은 병참기지라고 하지만 사상상으로도 병참기지라고 생각한다. 신동아 건설의 기
초는 내선일체에 있다고 늘 말하나 그것은 너무 의미의 범위가 넓어 일반 민중에게 대해 이해하기 힘
드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은 여기에 착안하여 숭고한 황국의 국체를 똑똑히 가르
쳐 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하는 뜻의 열에 넘치는 축사에 뒤이어 멀리 내지와 각 방면으로부터 들어온 축전낭독이 끝나자 김용
제(金龍濟) 씨의 답사, 가라시마(辛島) 성대교수의 폐회사에 이어서 이 회장의 천황폐하 만세삼창으로
문장보국의 굳센 약속을 하고 역사의 결성식이 막을 내리니 때는 열두 시였다.
협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 명예총재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 회장 이광수 ▲ 간사 (내지인 측) 모모세 지히로
(百瀨千尋) 스기모토 나가오(杉本長夫)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쓰다 가타시(津田剛) (조선인 측) 김동
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이상 6명)
그리고 상임간사는 추후 발표하기로 되었다.
<출전 : 「日本精神을 發揚!-“文의 內鮮一體”를 絶叫-朝鮮文人協會結成大會盛况」,'매일신보', 1939년 10월 30일>
3) 조선문인협회 창립
10월 17일 이광수(李光洙) 씨 외 10여 인이 회합하야 조선문인협회발기회(朝鮮文人協會發起會)를 연
뒤 다시 22일 회칙과 강령을 결정한 동회(同會)에서는 10월 29일 오전 10시 40분 정각보다 40분 늦게
부민관(府民舘) 중강당(中講堂)에서 내빈측으로 도동중(渡東中)에 있는 시오바라(鹽原) 학무국장대리로
야기(八木) 학교과장, 가와시마(川島)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총재대리로 정교원 참의, 도서과장 대리
로 이데(井手) 사무관 제씨를 비롯하야 100여 회원이 참집(參集), 조선문학사상에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었다. 벽두(劈頭) 박영희(朴英熙) 씨의 사회로 먼저 궁성요배(宮城遙拜), 전몰장병(戰沒將兵)의 영령
(英靈)에 대한 묵도(默禱)로부터 대회는 시작되어 오늘날의 결성식이 있기까지의 경과를 보고 한 뒤 규
약을 부의(附議)하야 만장일치로써 가결을 하고 김동환(金東煥) 씨로부터 성명서 낭독. 이광수 씨를 회
장으로 선거하자, 즉시 회장이 등단, 이 창립의 의의를 설명하고 아울러 신임인사(新任人事)를 한 뒤
다시 회장으로부터 명예총재로 시오바라 학무국장을 추대한 후 조선인측 간사로 박영희, 김문집, 김동
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내지인측 간사로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쓰다 가타시(津田剛), 모모세
히로(百瀨千尋), 스기모토 나가오(杉本長夫) 등 10명을 지명한 후 최린(崔麟) 씨의 축사와 각지에서 온
축전축문의 낭독이 있고 김용제(金龍濟) 씨의 답사와 가라시마 씨의 폐회사로 끝을 막었다. 그리고 성
명서 및 규칙은 다음과 같다.
성명서
이제 아제국(我帝國)은 국력을 도(賭)하여 흥아(興亞) 대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의 비상시
에 당하야 국민된 자는 모-두 화□협력, 그□여 의하야 기재(其才)를 다하여 국책선(國策線)에 연(沿)하
여서 분투노력한 것은 췌언(贅言)을 불요(不要)하는 바입니다. 우리들 문필에 관하는 자는 이런 시기에
먼저 붓에 의하야 그 임(任)을 다할 것입니다. 즉 조선에 있어서 참으로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는 동
지가 합하야 여기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고 흥아의 대업을 완성할 황국10)적 신문화 창조로 위하여 용
왕매진(勇往邁進)하고저 맹서(盟誓)하는 바입니다.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씨명 (무순)
이광수, 정지용(鄭芝溶), 김동환, 김기림(金起林), 최재서(崔載瑞), 가라시마, 이태준(李泰俊), 백철(白
鐵), 쓰다 가타시(津田剛), 임화(林和), 임학수(林學洙), 이하윤(異河潤), 김상용(金尙鎔), 김억(金億), 김
동인(金東仁), 김기진(金基鎭), 김문집, 박영희, 방인근(方仁根), 김소운(金素雲), 김형원(金炯元), 박태원
(朴泰遠), 유진오(兪鎭午), 함대훈(咸大勳) 이극로(李克魯), 이기영, 정인섭, 김용제, 전영택(田榮澤), 조
용만(趙容萬), 데라다 아키라(寺田瑛), 미치다 마사야(道田昌彌),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교섭중), 사토
기요시(佐藤淸)(교섭중)
조선문인협회 회칙초안
제1조 대회는 조선문인협회라 칭하고 기(其) 사무소를 경성(京城)에 치(置)함.
제2조 본회는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달성을 기하고 차(且) 문인상호의 친목향상을 관하므로 목적함.
제3조 본회는 본회의 취지에 찬동(贊同)하는 문인으로 조직함. 단 본회에 가입함에는 간사 일인(一
人)의 추천에 의하야 간사가 차(此)를 심의 결정함
제4조 본회는 본회의 취지목적을 실행키 위하야 좌의 기관을 치(置)함.
1) 명예총재 1명
2) 회장 1명
3) 간사 약 10명
제5조 회장은 대회에서 선거하고 간사는 회장 차(此)를 지명함.
제6조 본회회장의 임기는 2년, 간사 임기는 1년으로 함.
제7조 본회의 상임(常任)간사는 간사회에서 적의(適宜) 선출함.
제8조 본회의 경비(經費)는 회비 및 유지의 찬조금으로 차에 보충함.
10) 일제 강점기에,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라 하여 일본이 자기 나라를 이르던 말.
제9조 본회의 회비는 연 1환(圜)으로 함.
제10조 본회는 연 1차(신상제에 개최(神甞祭에 開崔)) 회장 차를 소집함, 단 필요에 응하야 임시대회
를 소집함을 득함.
제11조 본회는 본회의 취지급사업에 찬동후원(贊同後援)하는 자를 찬조원으로 하고 회장 차를 추거
(推擧)함.
제12조 본회의 부칙 및 세칙은 필요에 응하야 간사회에서 작성할 회장의 재가(裁可)를 수(受)함.
<출전 : 「朝鮮文人協會創立」, '朝光' 제5권 제12호,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년 12월, 225~226쪽>
4) 이광수 등의 조선문인협회 창립에 대한 비난에 관한 건
경고특비(京高特秘) 제2805호
1939년 11월 7일
경기도 경찰부장
경무국장 귀하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귀하
요지
여기에 이광수 등이 발기인이 되어 결성된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에 대해 조선인 유식자들 사
이에서는 조선 통치사(史)에 있어서 일대 오점을 남긴 동우회(同友會)사건의 중심인물인 이광수가 동
사건의 공판 중에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에 광분하는 것은 매우 근신(謹愼)치 못한 일이고, 그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사상 경향에서 보건대 이번 행동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다, 동 협회의 조직
경과를 살펴보면 그가 동우회사건의 판결을 눈앞에 두고 재판관의 동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영합적
단체를 결성한 것에 다름 아님이 판명되어 일부 회원들 사이에서는 벌써 이광수와 같은 형사피고인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하는 데 불만을 표명하는 자가 있다고 털어놓는 자도 있다.
경성부(京城府) 내 조선인 측 문사 이광수, 김문집(金文輯), 박영희(朴英熙) 등은 문필의 움직임은 그
영향력이 매우 심대하다. 문인이 조선인 일반 민중들을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로 선도하는 일은 당면
문인들에게 부여된 중대 책임이다. 이런 때에 보효(報效)의 정성을 피력한다는 취지 아래 10월 29일 내
지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조선문인협회를 창립하는 건에 관해서는 이미 보고한 바와 같고, 조선인 유
식자들 중에서 동우회사건의 중심인물인 이광수 본인은 형사피고인으로서 공판 중인 신분임에도 불구
하고, 비록 온건단체라고는 하지만 이를 결성하기 위해 광분하는 것은 매우 근신치 못한 것이라며 다음
과 같이 비난하는 언사를 털어놓는 자도 있다.
들은 바 그대로를 참고로 보고하는 바이다.
기(記)
조선 통치사에 있어서 일대 오점을 낳은 저 동우회사건의 중심인물인 이광수가 동 사건의 공판 중에
조선문인협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형사피고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회장에 취임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사상 경향에서 보건대 납득하기 어려운 동시에, 형사피고인 신분
이자 보석으로 출소 중에 비록 온건한 친목단체라고는 하지만 이를 결성하고 게다가 회장으로 취임하
는 것은 매우 근신치 못한 행동이다. 그가 진정 황국신민으로서 각성했다고 한다면 작금에 이르러 새삼
스럽게 이런 종류의 단체를 결성해서 총독부의 고관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또 그 단체의 결성이
아주 갑작스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매우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최근에 이르
러 그 조직의 경위를 알게 되면서 역시나 그의 이번 행동은 형식적으로 전향을 표명하고 총후(銃後)의
국민적 활동을 위장함으로써 동 사건의 재판관의 동정을 구하려는 자기보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되면서 마침내 그는 곧장 마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즉 이광수는 동우회사건 보석 출소 후에 빈번히
문인 김문집의 방문을 받고 당초에는 발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보였지만, 김문집이 이광수의 사건과
관련해서 물질적 원조를 바라고 있다는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고 그가 조선문단에 상당한 권세가 있다
는 점을 이용해 그를 앞잡이로 활용해서 어떤 일을 꾸미고자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두 사람의
왕복은 빈번해지면서 지난 달 15일경 김문집은 이광수의 뜻을 받아 삼천리사(三千里社) 주간 김동환(金
東煥)을 방문해 이번 문인협회 창립 계획을 전하고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이하 순차적으로 각 문인들
을 방문해 동의를 얻은 것으로 보이고, 그 뒤 같은 달 19일 김문집은 앞서 언급한 김동환, 인문사(人文
社) 주간 최재서(崔載瑞) 등에게,
“지난번 찬성을 얻은 문인협회 조직의 건은 시오바라(鹽原) 학무국장이 알게 되었고, 국장은 그 계획
에 깊이 감동하여 내일 조선호텔에 일동을 초대한다는 뜻을 안내했으니 출석하라”
고 전하고 주요 조선인 문사 15명을 집합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동 회합은 이광수, 김문집 두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학무국장을 끌어들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10월 20일 이광수 이하
16명은 정신총동원 사무국 회의실에서 제1회 발기인대회 석상에서 이광수가 발기인으로서 그 취지를
말하고 마지막에 협회 결성 후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여 동 연맹의 지시에 따라 활동할 예정
이라는 뜻을 말하자 모(謀) 문사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가맹을 위해 문인을 조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먼저 조직을 위해 국민적 입장에서 활동함으로써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가맹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나아가 10월 23일 제2회 발기인대회 석상에서 규약 초안 중에서 간사를 회장 지명으로 한
것은 불가하다는 말을 한 자가 있었다. 결국 거수로 찬반을 가렸는데, 선거제 희망자가 절대다수를 차
지하면서 이광수는 크게 낭패를 보고,
“본 회는 신속하게 결성해야 하고 또 회장과 의견을 달리하는 간사를 선출하게 된다면 회무에 지장
을 초래할 것이다”
라며 일단 결정된 초안을 개별적으로 애원하는 방법으로 승낙을 구하고 당시 이미 회장 취임을 시사
했으며, 또 김문집은 제1회 발기인대회 이래 각 회합이 있을 때마다 개회에 앞서,
“만약 본 회의 결성에 반대의견을 갖고 있는 자가 있다면 파괴를 위한 야유이다”
라며 위협하고 발언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으로 이광수가 제2회 발기인대회 석상에서 김문집으로부
터 회장 취임의 추대를 받고 동석자도 그의 위협적 언동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에 찬성했다. 이광수
는 내심 뜻대로 되었다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사퇴하겠다고 꾸미면서 이를 승낙한다는 뜻
을 전하는 형태였다. 그가 이번 문인협회를 조직하기까지의 행동은 이상과 같이 오로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경위를 알아차린 회원들 중에는 이미 이광수와 같은 형사피고인을 초대회장으
로 추대하는 데 대해 크게 불만의 심경을 털어놓고 있는 자도 있다고 한다.
<출전 : 「李光洙等ノ朝鮮文人協會創立ニ關スル非難ニ關スル件(京高特秘第2805號)」,1939년 11월 7일, '思想ニ關スル情報綴(4)'>
5) 문예상(文藝賞)에 문인회관, ‘문예의 밤’과 시시(時時)로 지방도 순회, 반도문인협회 사업대강(기사)
흥아 건설에 도움이 되고자 깃발을 든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의 명예총재 시오바라(鹽原)학무
과장의 초대로 열린 협회결성과 □□를 겸한 사업계획협의간담회는 3일 오후 다섯 시부터 남대문 통에
있는 금천대회관에서 열리었다. 이날 경동조선연맹으로부터는 유상(由上)전무이사 본부 사무국으로부
터는 중도교화관 등이 출석하였고 협회 측으로부터는 회장 이광수 씨를 비롯하여 데라다 아키라(寺田
瑛),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유진오(兪鎭午), 주요한(朱燿翰), 쓰다 가타시(津田剛), 스기모토 나가오
(杉本長夫), 모모세 지히로(百瀨千尋) 씨 등의 간사 전부가 모여 시오바라 명예총재를 중심으로 금후의
사업계획에 대해서 협의를 하였는데
1. 문인회관을 건설할 것 : 지금 남미창정에 있는 경동조선연맹 사무국 앞뜰에 반도문예의 전당이라
고 도□만한 회관을 세우기로 한다. 그런데 그 회관 안에는 사무실, □습실, 담화실, 도서실, 사교실,
오락실, 식당, 숙직실 등을 설치하기로 되어 전문기술자에 의뢰하여 설계를 급히 서두르게 되었다.
2. 문예상을 설정할 것 : 국문 언문을 불문하고 반도에서 발표된 평론, 소설, 시, 희곡 같은 것의 작품
속에서 1년에 한 차례씩 우수한 작품 한 편 또는 수 편을 골라 본상으로서 명예스러운 시계와 부상으로
서 천 원 정도를 증정하는 등 활발한 문예활동을 촉진하기로 되었다.
3. 문예상 심사위원을 뽑아 연□□에 ‘문예상 심사위원회’를 상치할 것
4. 협회결성□로□□한 ‘문예의 밤’은 오는 21일 오후 여섯 시부터 부민관에서 열고 다시 ‘□케’의 ‘마
이코’를 □□하야 전선에 부르짖는다.
5. □□□□를 평양을 비롯하여 대구 합동 기타 중요도시를 시오바라총재를 진두에 세우고 순방하여
‘문예의 밤’ 또는 ‘좌담회’를 열어 일대 국민문화운동을 일으킨다.
6. 명년을 동경에서 문예의 밤을 열고 중앙문단에 조선을 인식시킴과 함께 조선문단을 인식시키고
내지의 문단인과 밀접한 제휴를 할 것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대강을 결정하고 아홉 시 반에 일오□ 산회하였다.
<출전 : 「文藝賞에 文人會舘, ‘文藝의 밤’과 時時로 地方도 巡廻-半島文人協會事業大綱」,'매일신보', 1939년 12월 5일>
6) 조선문인협회에 보낸다 -그 성과를 완수하라(사설)
흥아(興亞)의 대업은 착실히 그 보무를 내딛으며 조만간 중국에는 신정권이 수립되려고 한다. 그러
나 사변은 이로써 곧바로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새로운 단계에 서서 동아가 하나가 되어 건설
진군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있다.
즉 이 국가 비상시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각자 직분에 따라 화충협력(和衷協力), 생업보국(生業報國)
의 정성을 다하고, 그 능력에 따라 재능을 다해서 국책의 선에 입각해 분려노력(奮勵努力)해야 함은 새
삼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이런 시국에 눈뜬 반도의 내지인·조선인 문인들이 궐기하여 조선문인협회
(朝鮮文人協會)를 결성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기를 기하고, 시오바라(鹽原) 정신총동
원 이사장을 명예총재로 추대해서 “흥아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황국적 신문화 창조를 위해 용왕매진
(勇往邁進)”을 다짐한 것은 참으로 반도 문화사상 특필할 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결성되자마자 벌써 어느 정도 진용을 정비하고 장래에 나아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에 대해
순조롭게 그 기획을 진행시키고, 일전에는 전선에 위문품을 보내면서 회원 자신들이 직접 쓴 위문글을
동봉함으로써 총후(銃後) 문인의 사명과 열의를 표명했는데, 아울러 문인회관의 건설, 반도문예상을 설
정 등을 비롯한 기타를 심의해서 앞으로 실행할 단계에 들어서려고 한다. 그 기백이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고, 잎으로 더욱 시국의 선에 따라 칼을 들고 싸우는 무인에 대해 펜을 들고 이끄는 문인으로서
총후의 일익을 담당해야 하는 사명을 강화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반도에는 약 3년 전에 조선문예회라는 것이 설치된 적이 있는데, 이는 완전히 낙하산식 관선위원들
로만 구성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내부에서 발산하는 정열이 부족하기 때문에 운동다운 운동, 사업다운
사업조차 하지 못하고 용두사미의 존재로 끝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정(市井)의 일반(布衣)
문인들이 자발적으로 단결 결성하여 시국하 총동원운동에 힘을 보태려는 적극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 특이성이 있다. 또 바로 거기에 우리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의 제각각인 이념과 파벌을 초극해서 여기에 국책에 따른 대동단결을 실현한
이상, 한 뜻으로 그 본연의 사명을 향해 견실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함부로 눈앞에 있는 업적의
화려함에 초조해 하지 말고 더욱 회원 각자의 자성과 자계를 염려하고 반도 전 민중들을 문화적으로
지도 고양시킨다는 자부심에 살고, 이로써 비상시의 일익을 실질적으로 담당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세상의 유식(有識)·유산(有産) 인사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어쨌거나 경제적으로 풍요롭
지 않은 저 문인이 진정으로 유종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갖고 있는 재력의 일부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여 활동을 원활하게 하도록 하는 일 또한 문인협회가 지향하는 총동원운동에 공헌
하는 일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출전 : 「朝鮮文人協會に寄す-その成果を全うせしめよ」(社說), '京城日報', 1939년 12월 6일>
7) 조선문인협회, 지식인에게 호소한다(상·중·하)
1
성전(聖戰) 4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먼저 온몸으로 사의(謝意)를 ‘황군(皇軍)’11)에 바친다. 4년에 걸친
우리 충용한 황군의 전과는 일찍이 세계사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용
맹한 전투기는 연일 충칭(重慶) 폭격을 감행하고 적의 요인들은 대부분 멸망했으며 잔적(殘賊)들 사이
에서는 천도설(遷都說)까지 나돌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평화와 명랑한 건설을 목표로 삼고 대
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확립에 매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세계적 강국으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또 우리나라의 정의의 이념을 중외(中外)에 선명(宣明)하였다.
지난번 일본·만주·중국 3국의 조약을 비롯해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조약 체결 등은 세계에 드러
낸 우리 국위와 실력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2
또한 사변 후 4년간 우리 국민생활은 매우 풍요롭고 안락했다.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는 통제 아래
생활문화는 향상하고 풍부한 물자도 국민의 체력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저 영국 등은 1년도 채 되지
않는 전쟁으로 이미 식료품이 결핍되었고 시민들은 벌써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들은 한 조각
의 빵을 구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대용식일(代用食日)에는 남아돌 만
큼의 빵과 기타 식료품이 산적해 있고 또 우리는 여전히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우리 국민은 국가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훌륭한 일본국에 태어난 자부심과 더불어 건전한 총후(銃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진심
으로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절약하는 생활을 하면서 저축을 하고 대용품을 사용하고 사치를 부리지
않는 것 등은 사려 깊은 국민의 일상생활이지만 신동아 건설을 위해 황야에서 4년간 혈전을 계속하고
있는 황군의 노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3
또한 반도에서는 교육의 개정, 지원병제도의 실시, 창씨제도 등이 실시되었다. 이는 내선일체의 고마
운 구현이다. 이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감격스런 사실과 더불어 ‘반도인’은 완전히 황국신민이 될 수 있
었다. ‘반도인’은 폐하의 적자(赤子)가 됨으로써 명예로운 황군으로서 충의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써 ‘반도인’은 당당한 일본인이다. 용감한 일본인, 정의에 불타는 일본인이다. 낡은 조선인의 허물을 벗
어던지고 야마토다마시(大和魂)12)로 살아가는 일본인이다.
이 광고(曠古)의 황은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읍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감격과 감사를 그대로 우리 생
11) 일본군.
12) 일본혼.
활에서 표현해야 한다. 국민적 의무를 다하고 총후 국민의 열성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지금 반도는 일어섰다. 곳곳에 애국운동이 전개되고 각 개인은 신도(臣道) 실천에 노력하고 있다. 빛
나는 내선일체의 아름다운 이야기(佳話)도 매일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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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는 어떠한 적성국가가 오더라도 이를 곧바로 격파하기에 충분한 실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고 방심을 해서는 안 된다.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시국이 더욱 중대해질수록 국
민은 결의를 새로이 하고 보다 높은 고도국방국가의 완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장제스(蔣介石)를 지원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우리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방해하려는 적성국가의 책동
이 있는 한 우리는 단호히 이를 격파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 성업(聖業)의 완수는 제일선에 선 황군만 짊어진 의무가 아니다. 일억의 동포들이 한마음이 되어
야 비로소 가능하다. 총후의 국민은 총 없는 병사이다. 옛날의 전쟁은 병사들만 싸웠다. 그러나 현대의
전쟁은 국민과 국민의 싸움이며, 단결된 국민의 힘이 강할수록 승리한다.
제일선에서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워도 국내의 국민들이 방심하면 전쟁에 절대 이길 수 없다. 즉 국
내의 경제가 흔들리거나 국민의 사상이 건전하지 않고 혼란에 빠질 경우에는 제일선의 병사들의 분투
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총후의 국민은 제일선의 장병들과 완전히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긴장하고 분투해야 한다. 우리 생활
을 최저 표준으로까지 끌어내려 검소하게 생활하며 가능한 국채를 많이 사고 저축을 실행해서 건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열심히 직역봉공(職域奉公)에 노력하는 일 등은 모두 총후 국민의 태도인데, 시국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더욱 더 긴장하고 한층 더 분발하여 총력운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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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가에 대한 우리의 감격은 이것으로 모두 표현했다고는 할 수 없다. 황군과 같은 마음가짐
을 가져야 한다. 황군은 신명을 모두 폐하께 바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노고도 견딜 수 있고
또 누구보다 강한 것이다. 총후의 국민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면 일상생활의 사소한 불편 따위는 문제
가 되지 않는다. 가령 전시 국민생활에서 다소의 불편이 있다 해도 황군의 신고(辛苦)에 비한다면 그것
은 부끄러울 정도로 미약한 것이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시국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비국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국민적 열의는 충분하면서도 개인의 생활 혹은 개인의 사상에 있어서 여전
히 탈피하지 못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국에 대해 정확한 이해와 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이 있
다. 즉 사변 전까지 족출한 제각각이고 제멋대로인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현실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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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생활체제가 일변하는 동시에 국민의 사상도 일변했다. 간단히 말
하자면 총력전을 위해 각 방면의 체제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힘을 성업 완수를 위해 집중하고
모든 사상은 하나의 사상-일본적 사상으로 통일해야 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범람한 구미의 사상과
그 사색 방법은 매우 유해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유물주의가 그렇고 개인주의가 그러하며 자유주의
또한 그렇다. 이러한 사상들이 지식인들의 양식이 되고 문화의 반려가 되어 한때는 전성기를 맞이했지
만, 사변 이후 우리는 숭고한 우리나라 국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빛나는 일본정신으로 되돌아
가 일본적 사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비판의 눈을 치켜뜨고 논리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자는 결국 불평을 늘어놓으며 구미
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이며, 일본정신에 반하는 일이다.
총력전에 참가하는 국민생활에는 모든 것이 실천으로서 나타난다. 올바른 일은 실행한다. 의무와 책
임은 기꺼이 완수한다.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이 있어도 훌륭하게 완수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실천이 있을 뿐이다. 이론은 무능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총력전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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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을 자주 말하는 사람은 실천이 부족하다. 저축이 필요하다고 떠들어 대도 저축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하는 한 푼의 저축이 더 실천적이고 국가를 위한 것이다. 선을
말하는 사람이 선인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이 선인이다. 국민의 책무를 논하는 사람보다 국민적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 더 나은 국민이다.
아침에 일어나 궁성을 요배하고 정오에 묵념을 바치는 일도 실행하기 전까지는 결코 쉽지 않다. 이
를 실천해야 비로소 그 경건함을 안다. 즉 이론으로는 진정한 감정을 알 수 없다. 거리에서 묵념을 드
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국민의 실천력이 성장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때때로 지식
인이 공격받는다. 그것은 이론에 밝고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국민적 실천을 통해 비로소 국민적 신념이 견고해진다. 가령 묵념 같은 것도 거리에서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신념만 있다면 어떤 장소, 어떤 사람
앞에서도 묵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지만 국민생활의 전체에서도 마찬가지
이며 신념이 없는 자는 그저 형해(形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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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농번기인 농촌에서는 생산확충운동에 박차를 가하며 부인과 아이들까지 총동원해서 근로봉사
에 노력하고 있다. 수십만 명의 농촌 부인들은 국가를 위해 뜨거운 햇빛 아래 묵묵히 일하고 있다. 농
촌사람은모든것을실천속에서살리고있다. 애국운동도모든부문에서도회인을훨씬능가하고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도회인은 거의대개 지식인이 많고 이론에 능하다고 일컬어진다. 반면에
농촌 사람은 실천이 그들의 생활이다. 현대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성취하기 위한 총력전이다. 모든 힘을
합쳐 단결해야 한다. 각자가 직업은 달라도 종국의 목적은 모두 국가를 위해 국가의 힘이 되기 위함이
다. 국가를 위해 모든 기술을 능력을 학문을 몸을 생명을 바쳐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총력전이 되고
고도국방국가가 완성된다.
숭고한 국가의 이념을 비판하거나 국책을 해부하려는 자는 총력전의 적이자 반역자이다. 그러므로
아이도 부인도 농부도 노동자도 관리도 상인도 학자도 문학자도 예술가도 모두 일어나야 한다. 여기에
는 아무런 논리도 의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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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표준으로 사물을 판단하거나 개인의 자유의사를 최고로 생각하는 것은 이제 과거 일이다. 구
체제의 주검이다. 지금 우리는 주검을 끌어안고 만족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고도국방국가를 건설
하는 전사(戰士)이다. 국가 없는 개인, 국가 없는 개인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실로 참혹하고 비참한 것이다. 국가가 번영해야 비로소 개인의 존재가 있고 국가가 강대해야 비로소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이처럼 행복하게 지내는 것도 우리가 훌륭한 일본이라는
국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사상은 일본정신을 거스르는 이단임을 알아야 한다. 총력전에서는
한 사람의 개인주의, 한 사람의 자유주의 이단자가 섞이면 그만큼 일억의 힘은 약화된다. 한 사람의 불
건전한 사상, 한 사람의 회의적인 사상이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억일심(一億一心), 굳게 단결하고 국가를 위해 매진하여 고도국방국가의 건설의 전
사로서 전력을 여기에만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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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제4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큰 감격과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며 앞으로 맡아야 할 우리나
라의 중대한 사명과 더불어 결심을 새로이 하고 보다 적극적인 국민적 실천에 용진(勇進)해야 한다. 시
국이 중대해질수록 지식인과 문예가의 임무도 중대해진다.
지식인은 민중의 지도자로서 일본정신의 철저한 보급을 도모하며 올바른 사상의 선양자로서 민중의
국가에 대한 열의를 고양시켜 국내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격멸하여 숭고한 우리 국체의식을 철저히
갖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억일심, 총력전은 이제부터다.
지식인, 문필가들이여, 분기하라!
조선문인협회는 일전의 정신총동원운동의 일익으로서 탄생했는데, 이제 국민총력운동의 산하에서
문인이기 전에 먼저 진정한 국민이라는 자부심에 살고 일체의 사상적 장벽을 배제하고 모든 실천적 신
도(臣道)에 돌진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
작년 12월 조선의 24개 도시에서 터져 나온 신체제의 외침도 어쩔 수 없는 우리 문인들의 열의의 일
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성전 4주년을 맞이하면서 더한층 자성하고 자계하여 일반인들의 모범이
되기를 기하는 동시에, 널리 지식인 대중에게 호소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한뜻으로 국책이 가
리키는 방면으로 함께 나가갈 것을 종용하고 또 이를 떠맡아야 하다.
의의 있는 날, 우리는 이를 지식인들 앞에 성명한다. (끝)
<이상 하>
<출전 : 朝鮮文人協會, 「知識人に愬ふ」(上)(中)(下), '京城日報', 1941년 7월 8~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