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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8. 성공회 대전교구 성직자단을 위한 기도문. 유낙준모세주교.
기도하고 대전교구의 새로운 선교전략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마음이 되어서 성공회 대전교구 사제들에게 부탁합니다.
먼저 하느님께 한 목소리로 기도를 바칩시다.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전능하신 천주 하느님이시여,
하느님께서 세우신 신품성사를 받은 자들, 성공회 대전교구 성직자단에게 은혜를 베푸사,
주님의 거룩한 길인 성도聖道를 깊이 깨닫고,
정결한 행위로 주님을 성실히 섬겨,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성공회를 흥성케 하소서.
이는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이는 동계제 12월 13일 이후의 수, 금, 토요일에 바치는 본기도입니다.
거룩함이 하느님의 특성이고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성직자단(모세)의 특성은 거룩함입니다.
성직자 한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거룩함입니다(1베드1:15).
자신이 지닌 하느님의 특성을 알게 하는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묵주반지, 십자가목걸이, 삼위일체 이콘, 예수님과 메나스수도원장 이콘, 예수말씀액자 등등.
성직자의 거룩함을 유지하게 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자신만이 갖는 기도생활, 말씀새기기, 아픈이와 함께하기, 등등이 있습니다.(92공도문 43쪽).
두 번째 기도를 한목소리로 하느님께 바칩시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 하느님,
주님의 종 교구 성직자단에게 주님의 양들을 맡기시고
정성을 다해 돌보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인聖人의 거룩한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분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는 성공회 대전교구 성직자단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본기도입니다.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라(요한21:17).”는 세번 베드로제자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맡긴 양들을 제 때에 물과 먹이를 줘야 하는데 잘 돌보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웰리엄틴들 사제가 1525년 라틴어성경을 영어성경으로 번역하여 화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국어 성경을 출판한 웰리엄틴들사제로 인하여 성공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세속에 너무 젖지 않았나 하여 목숨 건 틴들사제가 되어 제단 앞에 엎드립니다(기도서 98쪽).
세 번째 기도를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바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주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을 돌보아주시나이다.
비오니, 마약(싸움, 분파)중독으로 건강과 자유를 잃어버린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고, 괴롭히고 있는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소서.
또 자신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용기와 힘을 주시고,
그들을 돌보는 이들에게 끈기있는 이해심과 변함없는 사랑을 주소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기도서 212쪽).
이는 마약중독의 피해자들을 위한 기도문인데 싸움중독과 분파중독과 사랑을 하지 못하는 중독과 일치하지 못하는 중독으로 편협함에 갇힌 저희들을 위한 기도문을 바칩니다.
하나.
+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슴속 전체를 울리게 해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1베드1:13).”
행동을 위하여 생각을 가져야 하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생각의 한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예수께 희망을 세팅하는 성공회 성직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를 중심으로 사는 운명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 되고 나의 삶이 예수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세팅해 주시는 삶에 기댈 때 하느님의 권능이 성공회 대전교구 성직자단에게 임하기를 빕니다. 아멘.
둘.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서로 존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살아가는 성공회 성직자단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성공회 대전교구 성직자단은 서로 존경하려고 하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부족했고, 성직자단이 가족이라는 연대언어라는 말은 있지만 실제 가족이 아닌 남처럼 살았습니다. 동료사제에 대한, 부제에 대한 그리고 주교에 대한 존경이 부족했고 가족이라는 연대가 약했기에 각자의 영혼은 많이 외로웠고 홀로 광야에 부서진 채로 살았습니다.이렇게 사제로 살다가 죽으면 사제의 관을 들어 줄 동료사제가 없을지도 모를 정도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여 자조적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기치 못한 일이 사제의 가정에 들이닥쳤을 때 연락할 동료사제가 없다는 생각에 비참해지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제에게 힘을 주고 비젼을 주어 하느님 마음으로 일치를 세워야 하는 주교의 리더쉽에 한계가 분명히 노정된 모습입니다.
셋. 한국전쟁이후 가난한 살림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기에 경제개발과 성장만이 살길이라는 생활방식에 익숙한 세대에게 성공회 신앙의 삶은 다른 생활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의 선한 영적인 삶도 있다는 성공회 신앙이 참으로 인간적이었습니다.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것이 주류의 삶의 방법에 대해 성공회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신 예수를 본받는 삶인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사는 방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공회는 한민족, 한반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겸손한 삶을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다가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덕분에 이유도 모른채 우리는 성공회에 들어왔고 성공회 신앙인이 되었고 하느님께서 신품을 성사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당에서 신부님의 옷이 신비스럽고 거룩하게 보여서 가난한 청년이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가만히 보니 하느님이 그런 마음을 심어 주셨고 성공회로 이끌어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성공회 성직자가 된 것에 감사의 마음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넷.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자유의 맛을 알았기에 힘으로 강제하는 독재정권이 싫어서 저 스스로는 힘으로 권위를 세우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느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조직인 교회가 움직이리라 믿었습니다. 작은 조직체이니 서로 알아서 움직이리라 판단하고 조직적 경영체계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직적이라면 최소한의 운영을 하기 위한 합리적인 의견을 듣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실은 교구자체가 세상에서 하느님 왕국을 세우기 위한 조직이니 세속과 하느님왕국과의 맛부딪치는 위치임을 알고 더 기도하게 되었고 성경에서의 원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세속적인 경영도 교구운영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만 가지고 달려가는 모습을 오히려 뉴욕교구와 영국 서덕교구, 람베스 궁에서 인정을 해 주셔서 무진장 고마웠고 그 기쁨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는 살기 어렵지만 하느님께서는 인정해 주셔서 살게 만드신다는 믿음이 더 강해진 모습입니다. 성공회는 선한 마음을 지닌 성직자단이 있기에 종국에서는 출애굽기 15장처럼 파라오제국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하느님 왕국의 승리를 세울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다 배우지 않아도 신학으로무장하여 하느님이 주신 말씀을 세울것입니다.
다섯. 하지만 현실은 세속일들을 많이 알을 때도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게 욕망이 곳곳에서 저를 휘둘러 저를 당혹하게 했고 정신을 못차리게 했고 넘어지게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직자단이 은총 안에서의 성령이 주는 일체감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를 바치는(요한4:24)” 사목을 잘하는 성직자가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익숙했던 “하느님이 몸으로 오신(요한1:3,10)” 성육신의 사목활동에 익숙한 성공회 사목에 성령의 부족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육신으로의 활성가를 하느님은 원하셨지, 성령없는 사회적 활동가를 하느님은 원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공회는 성육신 사목에 집중해서 이웃사랑을 실천했지만, 약해진 성령의 활동으로 전락되어 성령이 충만한 사목활동의 강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충만한 영적 리더쉽이 필요한 한반도이고 한민족이고 인류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듯이 성공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성직자단을 세운 것입니다. 성공회 성직자단은 사람들을 빛의 세계로 늘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소5:8).” 그래서 성직자단이 먼저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혀모양의 불길로 우리 영혼을 덮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교는 늘 성령에 젖어 살아야만 합니다. 그 성령은 기도 속에서만 부어지게 됩니다. 기도에 젖어사는 성공회 성직자단이어야 합니다. 이제는 이런 성령에 젖고 기도에 젖은 영적리더쉽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여섯. 제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본받아 살게 이끌어주신 분은 김창렬권사 할머니이십니다. 얼굴이 항상 주님을 찬미하는 밝은 얼굴을 하셨고 타령조의 주기도문을 우리 가족을 위해 늘 바치신 분이셨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또는 기도하실 때, 찬송가를 부르실 때에 할머니의 얼굴에서 늘 예수님의 빛이 나셨습니다. 다른 한분은 박노열 권사 백모님이십니다. 매일 새벽종을 치셨고 이 종소리를 듣고 동네사람들이 밥을 하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박노렬권사 백모의 얼굴이 늘 빛이 나고 밝으셨습니다. 신앙적인 삶을 지니게 하신 두분의 권사님이 제게는 성령의 빛을 받아 사신 분으로 신앙의 길의 모본이셨습니다. 이렇게 두 분의 신앙이 제게 전해져 와 제 얼굴이 까만해도 밝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시는 사람은 성령에 충만한 얼굴로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사모님의 얼굴이 성령에 젖은 얼굴이면 성직자의 얼굴에 예수님의 빛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밝은 빛이 우리 성직자단의 얼굴에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얼굴이 어두운 성직자는 성령의 빛을 수용하지 못한 얼굴이고 예수중심의 삶이 아닌 삶일 때 나타날 것입니다. 신도들은 성직자들의 얼굴이 밝은 빛을 주님의 빛으로 보고자 합니다. 대전교구 성직자단의 얼굴이 성령에 젖고 기도에 젖어 예수의 빛으로 밝기를 바랍니다. 일단 성직자단이 밝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속이 타는 문제를 가지면 얼굴이 어둡게 되니 성직자단에게는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긍정적인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단단히 서 있어야 합니다.
일곱. 2천년 전에 아시아의 중심도시가 에페소였고, 유럽의 중심도시가 로마였기 때문에 사도 바우로는 에페소에서 선교를 하셨고, 로마에서 선교를 하다가 순교하심으로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사도바우로처럼 세속의 중심지로부터 선교를 일어나게 하는 길도 있고(중심지에서 더 큰 세계로 퍼뜨리는 선교방식), 사도 바우로처럼 아래로부터 선교의 동력을 끌어내는 선교의 방식(바닥과 변방에서부터 선교하여 중앙으로 향하는 선교방식) 길이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선교방식에서 하나를 택할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 대전교구는 때와 장소에 따라 이 두 가지 방식을 혼용하거나 절충해서 선교방식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전례중심의 보편교회로서의 성공회와 나눔의집에서의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가는 특수선교로서의 성공회 선교방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편교회이던 특수선교이든지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직자단이 예수 그리스도께 미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덟. 성공회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선교의 중심지로 성공회를 향상시키려면 일단 사도 바우로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중심의 선교적인 삶이었기에 세계화에 성공한 그리스도교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미쳤기에 주님께 미쳐서 바치는 기도를 드렸고 예수중심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켄터베리 저스틴 웰비대주교님은 람베스궁에서 사시는데 람베스궁 안에 안셀무스 수도회를 세우셨습니다. 세계에서 오는 청년들로 구성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매일 세계성공회가 성령에 이끌리도록 늘 조만도가 이루어지고 하느님께 예배를 바칩니다. 이러한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저스틴 웰비대주교님이 움직이십니다. 대주교님의 모든 활동이 기도 중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대전교구의 주교의 선교활동이 기도 속에 움직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구의 성직자단의 선교활동이 늘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구 안에 수도회를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수도회의 기도로 성령을 불러들여 우리를 성령 안에서 활동하게 만들어야 선교와 사목활동에 힘이 납니다. 지금은 우리교구 안에 수도회가 없지만 앞으로는 우리 교구 안에 수도회가 생기기를 바라고 희망합니다.
아홉. 지금 우리 교구에서 기도자의 역할을 하는 수도회가 바로 어머니연합회입니다. 어머니성도들의 기도 덕분에 지금까지 주교와 성직자들의 영적리더쉽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기도 없이 영적리더쉽이 없습니다. 우리 교구에 기도그룹을 세우고 그 기도하는 그룹을 통해 기도하는 수도회를 세우도록 합시다. 우리는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밥을 먹기 전에 기도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일하기 전에 기도하고, 누굴 만나기 전에 기도하고, 그렇게 늘 기도하는 생활이 성공회 성직자단이어야 성령의 권능이 살아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배고픔과 허기짐 속에서조차 인내하는 소아시아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신앙을 갖는 모습을 본 베드로사도입니다. 어려움 중에 신앙을 갖는 신도들의 애태우는 속마음을 알고 사목하는 우리 성공회 대전교구 성직자단이 베드로사도의 사목의 가치를 이어받는 계승자입니다.
열. “사랑은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습니다(1고린13:5).” 이를 공동번역성경에서는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말씀을 보니 새롭게 그 말씀이 들립니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면 사랑이 부서지기도 하니까 자기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사랑을 살리는 길로 보는 시각이 좋아 보입니다. 이기심을 채우려는 것이 자기방식을 고집하는 것으로 비쳐서 현대인의 성경에는 그렇게 번역하나 봅니다. 성직자단 안에서 약간은 자기방식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이가 있고 보이지 않게 그 고집을 더 강하게 하는 사람도 보입니다. 자기 방식을 너무 고집하면 동료에 대한 사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랑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는 사람처럼 우리 교구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성직자단이기에 얼마나 성직자들이 힘들게 사목활동을 하였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자기고집을 주장하는 사랑없는 방식으로 성직자단으로 엮이지 않는 방식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고집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자기고집을 내려놓지 않으니까 선배도 없고 동료도 없고 오직 유아독존 혼자만이 남는 삶이 됩니다. 그러려고 가난한 와중에 신학교를 다닌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서로 함께 하느님 왕국을 이 땅에 세우고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단단하게 하려 했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 안에 살게 하시고자 사랑에 젖은 성직자단으로 만들고자 원하십니다.
열하나. 분열은 우리의 영혼을 힘들게 합니다. 분열은 사목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하고 편집증적인 사목을 하여 통전적인 사목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분열은 인간관게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낮은 자존감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성장하는 교회는 평생하지 못할 것으로 보아 스스로 작은 교회라고 칭하며 작은 목자로 스스로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런 비참한 사람으로 살라고 성공회 성직자단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 힘들어하고 하느님이 주신 순수는 마음 깊숙한 곳에 처박혀 두고 이상한 얼굴과 이상한 행동만이 드러내 그것이 진짜 자신인줄 알고 사는 성직자가 되면 안 될 것입니다. 분열은 우리를 극단적인 보수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극단적이고 부분적인 진보를 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분열 속에 사는 성직자를 본 신도는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정착하지 않은 불안정한 성직자로 보기 쉽습니다. 불안정한 성직자가 되면 폭력적인 세상에서 안전을 찾아 온 신도에게 안정감을 줄 수 없기에 신도를 교회에서 떠나가게 만듭니다. 분열로 균형감각을 잃은 성직자의 사목은 하느님 왕국을 세우는 교회성장을 어렵게 만듭니다. 60%(70%)의 보수적인 신앙전통에 40%(30%)의 진보적인 배치가 신도들이 안정 속에서 교회의 신앙생활을 할 때 안정 속에서 혁신을 꿈꾸게 됩니다. 분열로 인한 성직자단의 균형을 갖지 못한 사목활동으로 인하여 아슬아슬하게 사는 신도에게는 더 위험한 신앙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수없이 흔들려지는 시대에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균형감각을 가진 성직자의 삶이 중요합니다. 분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은총으로 일치의 성직자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일치가 되기 위해 지금 대전교구 성직자단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열둘.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신뢰를 쌓아가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주류가 가진 가리스마에 얹혀살기가 싫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룹이 생긴 것입니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가리스마를 지닌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이 주신 운명대로 사신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성공회 성직자단입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는 긴장 속에서는 신뢰쌓기란 쉽지 않습니다. 함께 하느님 안에서 은총을 찾았던 것처럼 신뢰를 하느님 은총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면서 신뢰가 쌓아집니다. 한번 신뢰쌓는 길을 알았다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자주 가봐야 합니다. 신뢰쌓기는 자주 반복적으로 훈련해야만 길이 단단해지고 확장된 대로가 됩니다. 그러면 신뢰쌓기가 수월해집니다. 우리 교구의 성직자단의 분열을 겉과 속의 신뢰쌓기로 일치될 길을 모색해 주시길 바랍니다. 늘 잘났다는 외부인들이 사목을 맡아 공동체의 선교로의 힘을 강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못났어도 그 안에서 서로를 복돋아 주는 방식으로의 사목활동이라면 하느님께서 하늘의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 성령으로 인하여 지혜가 넘치고 힘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자기조절력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 아픈 사람들의 안전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성직자단이 그러하기를 빕니다. 아멘.
열셋. 모세주교의 영적리더쉽은 혼자 열심히 하는 헌신적인 사제의 삶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외향성인 성격으로 인하여 혼자 열심히 하는 것이 과장되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국제관계로 미국성공회와 영국성공회와 일본과 홍콩, 대만, 필리핀과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상승되었다고 봅니다. 대전교구의 내적으로는 평신도의 리더쉽 향상을 위하여 교육원을 운영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선교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복음화는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길위학교가 선교적 입장에서 모범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단의 내부적인 분열로 단단한 일치로 하느님을 향하지 못함은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모세주교는 이제 혼자 잘하는 사목활동이 아니라 단결된 공동체로의 선교활동이 필요할 때이고 그러한 리더쉽이 나와야 할 때라고 봅니다. 대전교구가 그동안 선교에 동력을 강화한 것이라면 교육원을 통한 종신부제양성과 다음세대를 위한 길위학교입니다. 신앙강화와 종신부제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원으로 대한성공회의 새로운 선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에 종신부제직에 반대하던 이웃교구의 사제가 신학생이 급감한 이후 종신부제양성을 세워야 한다고 마음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종신부제양성을 기반한 선교비젼을 세우는 영국에는 이를 담당하는 주교님이 계셔서 종신부제의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에서만도 2000명이 넘는 종신부제가 있어 사제의 사목에 도움을 주고 사제가 할 수 없는 사목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난다고 합니다. 미국은 종신부제의 출신교회에서는 사목을 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에서 종신부제가 사목을 합니다. 영국에서는 출신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사제의 선교를 돕고 새로운 선교를 도모한다고 합니다. 194개의 교회를 지닌 뉴욕교구만해도 종신부제가 2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교회의 사제가 서로 종신부제를 모시려고 한답니다. 종신부제를 둔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종신부제를 대전교구는 대한성공회에서 처음 시도했는데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상황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를 원한다면 종신부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신부제의 양성하는 길이 우리 성공회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사목적으로 돕는 종신부제가 교회에 있다는 것만해도 얼마나 사제의 사목에 든든한지요? 대한성공회는 곧 법개정을 통해 선교에 집중하는 성공회가 되어 종신부제로 선교의 활성화를 세울 것입니다. 또한 길위학교는 대전나눔의집의 성공회선교의 좋은 길이기에 청주와 전주에서 길위학교를 성공회가 세워 나아갈 길을 모색해 특성화된 선교를 다음세대를 위한 좋은 길로 보입니다. 교무구단위로 초등학생, 중고생을 묶어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요. 또한 전라교무구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입니다. 성장하는 전라교무구를 만들기 위해서 특설선교교무구로 정해 8년간 새로운 선교전략으로 선교에 집중하는 방법을 세운다면 더 나아진 전라교무구가 될 것입니다. 모세주교의 초기에 거점교회별 선교와 사목활동이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넷. 지금 이대로 간다면 기존의 교회유지는 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아마 교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고령자가 많은 교회가 우리들의 교회이니까요. 지금 이대로만 하면 안 됩니다. 전례교회로 보편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선교의 방법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지금 새로운 동력을 세운다면 그만큼 새로운 선교로 교회가 성장할 것입니다. 새로운 동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성직자단이 무엇보다도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람이 바뀌면 선교가 바뀌게 되고 교회가 바뀌게 됩니다. 성직자단이 새로워지면 교구와 교회가 선교의 동력을 얻을 것입니다. 성직자단은 가만히 있고 다른 것을 바꾸어서 선교의 동력을 얻으려고 지금까지 애를 쓴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대전교구 성직자단을 새로워지게 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분열을 일치로 바꾸면 큰 힘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힘으로 선교에 박차를 가한다면 하느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고집피우는 것을 내려놓고, 선배 동료 후배를 깊이 사랑하는 자신을 만들고, 경직한 사제로 살지 않고, 욕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큰 품으로 껴안고 살기, 서로 도우려는 마음으로 산다면 관게가 깊어지고 우정이 깊어질 것이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성직자단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는 있지 않겠다는 마음은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선교전략을 행동으로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우리 대전교구가 힘차게 성장할 때라고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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