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
구정이 가까워 지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구정이 새해의 시작이었고
그 날은 너도 나도 자기의 한해 운세인 토정비결을 보곤 하였습니다.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1517년~157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사대부 집안의 양반 자손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쓰고 제자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어렵고 힘든 백성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는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며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 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육신인 이개는 토정의 종증조부이고 동인의 당수였던 이산해는 그의 문인이자 조카이다.
이런 양반 출신으로 상업을 하며 언제 어디서나 밥을 먹는 답시고 머리에 갓이 아닌 무쇠솥을 쓰고 다녔다는 기인이였다.
김시습, 허균, 정렴 같은 인물과 함께 조선시대 기인으로 알려졌으며 양반인 사대부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길을
걸어갔지만 그의 죽음을 두고 율곡 이이가 안타까워 한 인물로 그가 바로 토정 이지함이다.
토정은 장가든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는데 그의 부인이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홍제다리를 지나다 얼어죽게 생긴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한때 학문에 뜻을 두어 불철주야로 경전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와 제자 백가의 책까지 섭렵하였으며 한때 과거에도 뜻을 두었으나 과거에 급제한 자들의 모습이 역겨워 바로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는 초야에 있었지만 학문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관직을 제수 받기도 하였으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토정'을 지은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만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마포상인들과 어울려 장사지식을 배웠고 직접 장사를 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기도 하였다.
토정은 양반집 자손의 권위와 부를 버리고 그 시대에 가장 천대받던 상인이 되어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으로 내려간 것이다.
또한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빈민들에게 전수해주고 장사로 번 모든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는데 그가 장사를 한 목적은 빈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토정이 쉰일곱이 되던 해 재야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그가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선조가 등극하자 관리로 등용된 토정은 백성들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은, 옥등의 산림과 해양자원을 개발하여 해외에 유통 시키자고 주장한다.
소수 지배층들이 독식하고 있는 자원을 국가가 관리해서 외국과의 통상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자는 것이었다.
이 해외통상론은 18세기 영국의 경제 학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와같이 토정은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경제 사상가로서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아야 하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뜻에서 21세기형 복지기구인 빈민구제 기관인 걸인청을 설립하여 걸인들에게 먹고 잘 곳을 제공 해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였다.
이런 토정이 죽은 후
백성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고 그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를 세웠고 그 비문은 아래와 같다.
"현감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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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토정비결에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그의 삶을 엿보 수 있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