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殊山에 물 들다
신상숙
지금, 삶의 터전에서 부자가 부럽지 않은 건 사시사철 문수산과 마주할 수 있어서이다. 계절마다 색다른 무늬로 다가오는 저 듬직한 산, 봄에는 이 꽃 저 꽃들이 다 아름다워서 좋고, 소나무들은 여름이 다하도록 푸르러서 좋은데 ,참나무가 단풍 든 가을에는 낙엽을 밟아가며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서 좋다. 함박눈이 온종일 내리는 겨울날에는 문수산을 바라보며 시 한 수 읊조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매달 초승과 그믐 두 차례 찾아오는 눈썹달, 초저녁 선이재에 뜨는 눈썹달을 그이와 둘이서 바라볼 땐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그 눈썹달이 베개머리로 찾아오는 새벽녘에는 늦잠꾸리라서 황홀한 순간을 놓쳐버리기 일 수다. 하여, 낯이나 밤이나 바지런한 자에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어울 릴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부터 지금까지 터줏대감처럼 내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산이 바로 문수산이다. 사시사철 열 두 골짜기가 쉼 없이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니, 우리 동네 십삼만 여 평의 논농사와 가정에서 사용하는 식수는 물론이고, 생활용수까지 풍족한 것은 전부 문수산 덕분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겨울 철에도 개울물이 얼지 않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작은 용못은 아녀자들의 빨래터로 제격이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 자매님이 산행을 하잔다. 하여, *추재고개를 시작으로 *무실미 고개까지 완주를 해볼 량으로 마을버스를 타고,3km정도 달려가 추재 고개에서 내렸다. 문수산 등산이 자유로울 때가 아니어서, 해병대 검문소에 신고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초병들의 눈을 피해 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흔적이 드문 때이라서, 길도 없는 산길을 대충 짐작으로 오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구나 대북방송을 할 때이니, 대형 스피커 옆을 지날 때는 북녘 땅을 행해 울려 퍼지는 굉음소리에 무섭기도 할뿐더러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비지땀을 흘려가며 정상에 우뚝 서 봐야 그 맛의 기쁨을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북녘 땅에서도 사람냄새가 난다. 누런 벼이삭들이 논배미마다 그득 한 걸 보니, 그 동네도 풍년이 든 것 같아서 동질감을 느꼈나, 아님, 우리가 수년 째 벼농사를 짓고 있어서 일게다. 마당 넓은 우리 집도 보이고 작은 산 넘어 조강도 보이는데, 저 멀리 고양시에 즐비한 아파트까지 아주 가까이 보이는 게 아닌가. 강화 다리를 오가는 차량들의 모습까지 볼거리 다양한 정상에서 숨 고르기가 끝나자마자 무실미를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세 시간에 걸쳐 산길을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무실미 고개가 코 앞이다.
이웃들은 겁 없는 여자들의 무모한 산행을 헛웃음이 나올 일이라 하겠지만, 내가 나를 생각해 봐도 여간 대견스러운 게 아니다. 농촌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위인이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서 더 그렇다. 우리 집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정도 산을 오르다 보면 물 한 병을 비움과 동시에 산등성이에 다다른다. 남편과 둘이서 낙엽을 밟아가며 주거니 받거니 정겨운 대화가 오고 갔으니 별반 힘든 걸 몰랐다. 해서, 그날의 체력을 밑천 삼아 등산을 해도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리 한 것이다. 아무튼 그날의 산행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책 속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아마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힘든 과정을 건망증이 다 모셔가서 일 게다.
이기울 사람들의 대화 속에는 늘 문수산이 들어간다. 봄에는 고사리와 취나물을 비롯해서 여러 종류의 산나물들이, 여름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머슴아들 책 보따리 내려놓자마자 야들야들 한 풀 찾아 산기슭으로 소 몰고 나가던 일까지, 가을에는 아낙네들 도토리 줍고 알밤 줍던 이야기와 한겨울에도 따듯한 물이 넘쳐흐르는 용 연못야기까지 토씨도 틀리지 않은 채 여태 단골메뉴로 등장을 한다. 김포에서 제일 큰 산이 문수산이라서 일까? 골짜기가 자그마치 열두 골이라 하는데, 남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음에도 아직도 못다 알겠다. 골짜기마다 사연도 다양해서, 도둑이 훔쳐가던 부처를 버리고 가서 부처 골이라 부른다는 둥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사연도 제각각 열두 가지도 넘는다.
처음에는 문수산을 보통 산으로 만 알았다. 게다가 지금처럼 좋아하지도 않았다. 마음 한 자락을 그에게 내어 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지금은 동네 토박이들처럼 문수산과 아주 찐하게 친하다. 이 동네 여자들 산에 오르는 걸 부담스러워한다. 때문에 혼자서는 산을 오르기가 버거운 상태여서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을 한다. 저녁노을이 선이재에서 붉게 타오를 때와 초승달이 살짝 걸쳐있을 땐 먼저 본 사람이 소리친다. “어서 와 초승달이 떴어, 저것 좀 봐 서쪽 하늘이 다 붉게 타오르고 있어,”라고 말이다.
산 높이가 376m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한데, 산 둘레의 거리가 궁금한 것이다. 자동차가 알아서 거리를 계산해 줄 터, 구금타 할 게 뭐람, 자동차 계기판에 0을 시작으로 추재고개를 넘어 보고곳리와 성동리 그리고 포내리를 지나서 군하리와 고막리 조강리 등 문수산 자락에 자리한 동네를 다 지나 우리 집에 도착 한 다음 계기판에 나타난 숫자를 확인하니 18km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해마다 시산제를 지내는 것은 높이 376m의 산 주인의 존재를 알고 있음이다. 하니, 주인의 영역에서 몸과 마음을 조신하게 다스려야지, 산 정상에서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대는 몰지각한 사람들, 산에 깃든 수많은 생명체들의 훼방꾼으로 전락이다.
지나치게 우직한 산, 늘 다정다감한 산, 내가 아플 때마다 그도 아파하는지 나보다 더 우울해하는 산,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나를 좋아하기를, 저 산처럼 몸과 마음이 푸르고 푸르게 물들어가는 기쁨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1,용강리와 보구곳리 경계
*2,조강1리와 고막리 경계
카페 게시글
인천교구
文殊山에 물 들다
다음검색
첫댓글 문수산성길 문수산 ...
아른거리네요 용강리 군하리 기ㅣㄹ산리 ....
잘읽었습니다 상숙샘 늘 건강히시고 행복하세요 햇살타고 마리아~.~
거의 일년을 놀아서 글쓰기 실력이 엉망진창 입니다.
@햇살타고, 마리아
글이한 쓰면 글이고 그림이한 그려지면 그림입니다
ㅎ.ㅎ
평안한밤 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