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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사무 4,1ㄴ-11
복 음 : 마르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세기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마흔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평균 수명의 두 배 가까이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지내는 연명 수명이 아니라,
삶을 활발하게 사는 건강 수명으로 팔십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 시절의 총명함과 체력을 유지했고,
뇌는 전혀 노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도 맑지 못해서
후손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계속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만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알고 따르는 것도 우리가 멈춰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을 알고 또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안에서 앞을 내다보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자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리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나병 환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모두 당신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지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주님 곁으로 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을 알고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르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받은 한 나병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혹시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 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피해 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 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에 대한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인구가 오천만이니 5명 중에 1명은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는 명량을 비롯해서 열아홉 개가 있었으니
서울의 봄은 20번째 천만 관객 영화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장충동에서 신문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주보에 ‘광주’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딘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자들은 매일 성당에 모여서 본당 신부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형은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나중에 ‘국난극복 훈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온 동네 형들도 있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과외 금지를 실시 하였습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교복 자율화와 두발 자율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제가 기억하는 서울의 봄입니다.
영화는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그 권력의 빈자리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채우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의 빈자리는 몇몇 정치군인들의 총과 칼에 의해서 탈취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 비판적인 언론은 통폐합되었습니다.
권력에 비판적인 민주인사들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 되었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청년들은 고문을 당하였고,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저항하는 국민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 신문은 폭도들에 의한 혼란이 있었고, 정부는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권력은 막강했고, 민주시민들의 저항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들풀처럼 시민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87년 저항하는 국민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 ‘6.10 항쟁’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를 부활하였습니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많은 민주인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의 제단 위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병환자의 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병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에게는 긴 겨울이 계속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죄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육체가 병들어 가면서 절망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져서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주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예수님께 다가와서 간절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에게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나병환자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우리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한때 허리통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아무리 기도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 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이기도 하지만 견디고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시간이 단련의 시간으로 성화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그런데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 존엄을 말하면서 ‘개 식용 금지법’은 만들고
더 중요한 ‘낙태 금지법’, ‘사형금지법’에는 소홀할까요?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고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께 온전히 의탁합니다.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은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남도 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짠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하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같은 말과 동의어입니다.
얼마 전 자주 다니는 한적한 길목에 누군가가 유기를 한 반려견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버려진 강아지는 언젠가 주인이 데리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졌는지 모릅니다.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것저것 주렁주렁 팔에 달고 있는 한 아이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황을 보니 어린 암환자였습니다.
아이를 케어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젊은 엄마까지....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지던지요.
오늘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계속 봉독 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양한 병고와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을 향한 짠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짠한 마음은 곧 연민의 마음이요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영어로 적합한 단어는 compassion일텐데,
이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괴로워하다.’ ‘함께 고통 당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compassion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한 가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던 대표 인물이었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의 나병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사람들이 다들 고개를 저으며 피해 갈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인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하며 살아왔던 그는
이번이 자신의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즉시 짠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나병 환자의 환부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련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켜 주실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不淨과 不正
박상대 마르코 신부
소록도나 산청 성심원이나 삼랑진 루가원 등
한센병 환자들이 고생하며 모여 사는 곳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들의 삶이 인간의 눈에 얼마나 저주받은 모습으로 보이는가를 말이다.
이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치유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의 험악한 처지를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不淨한 사람들인가?
“선생님께서 願意만 있으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병환자의 애달픈 간청이다.
그러나 간청 속에는 확신에 찬 믿음이 흐르고 있다.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나병환자의 치유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적은 나병환자의 不淨함을 淨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 대로(레위 14,2-32) 치유받은 자에게,
곧장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 예물을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하셨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오늘 복음의 기적사화가 일어난 장소는
대략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 근처였을 것이다.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려면 예루살렘까지 가야 한다.
약 100km 떨어진 먼 길이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치유받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을 선전하며 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어떤 모양으로든 깨끗하지 못함은
공동체나 하느님과 일치될 수 없는 요소이다. 모든 부정함의 극치는 문둥병이다.
이는 인간적 삶과 종교적 공동체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모세를 비난한 대가로 문둥병을 앓았던 미리암을 보고
아론이 “저렇게 살이 뭉그러진채 죽어 태어난 아이”(민수 12,12)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보라.
문둥병에 걸린 자는 살아있어도 곧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구약의 사제는 피부에 병이 있는 자를 진단하여 그것이 문둥병(악성 피부염)이면
그를 부정한 자로 선언하고 격리시켰다.
그들은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우고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쳐야 했다.(레위 13~14장)
누구든 레위기의 이 때목을 읽어보면 머리나 몸의 어딘가가 따갑고 간질거릴 것이다.
혹시 나의 몸에 不淨함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 나의 마음에 不正함이 있어 그럴 것이다.
그렇다. 오늘 복음을 몇 번이고 읽어 묵상하면
기적의 핵심이 육체적 악성 피부병에 있다기보다는
내적인 ‘깨끗하지 못함’과 ‘깨끗하게 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인 不淨은 곧 不正이다.
不正은 정직하지 正直하지 못한 것으로서 죄를 말한다.
우리 중에 죄인이 아닌 자가 있는가?
없다. 따라서 우리 또한 不淨한 사람들이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할 자세는 항상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깨끗함을 간청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오늘 복음을 몇 번이고 읽어 묵상하면
기적의 핵심이 육체적 악성 피부병에 있다기보다는
내적인 ‘깨끗하지 못함’과 ‘깨끗하게 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인 不淨은 곧 不正이다.
不正은 正直하지 못한 것으로서 죄를 말한다.
우리 중에 죄인이 아닌 자가 있는가?
없다. 따라서 우리 또한 不淨한 사람들이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할 자세는 항상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깨끗함을 간청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이승화 시몬 신부
성물은 기도의 도구입니다.
기도를 더 잘하기 위해서 도와주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성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안심한다면
이미 성물을 부적처럼 사용하는 꼴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물건에 매여버리고
하느님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티아 인들에게 대패하고
소중한 계약의 궤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병환자가 보여준 간절함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간절함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간절함
이런 간절함이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는 사제라는 신분이 거룩함을 보장하거나
수도자라는 신분이 성덕을 보여주지 않음을 알려줍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이
그 간절함으로 살아갈 때
세상에 주님을 드러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한 자세는
오히려 하느님을 가로막지만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는 자세는
더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을 만듭니다.
주님이 계속해서 외딴곳에 머물게 할지
아니면 고을 안으로 초대하여 함께 할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고
그분과의 만남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가진 희망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우리 안에 초대하고
희망을 키워나가며 은총을 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이 예레미아 수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치유사화이다.
이 구절은 세 공관복음에 다 나오고,
예수님과 나병환자 사이의 대화 내용이 거의 같지만,
마르코 복음은 결론 부분이 다르게 나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한다.
마태오나 루카 복음은 나병환자가 신적 존재에게 하는 행위
즉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마르코에서는 “스승님”이기 때문에 그냥 무릎을 꿇는다.
구약성경에서 나병환자는 몸이 썩어들어가므로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모든 공공의 장소에서 격리되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향한 “가엾은 마음”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레위기 5,3 이하에 나오는 구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은 율법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율법에서 제시하는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을 가리는 정결법 제도를 폐기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운 전통이나 규칙, 법률에 의해
버림받고 있는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것이 하느님의 법임을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을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이제는 격리될 필요가 없는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정결례를 통해 성전으로 인도하심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도 정상적인 관계가 되도록 이끌어 주셨다.
이는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내적 치유
즉 정화예식을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소식을 널리 퍼뜨렸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증거자가 되었다.
오늘도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증거자의 삶을 매 순간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면서
내 영육의 어느 부분도 썩어들어가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하자.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