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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장27~32절/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계보
창세기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많은 실수와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사람이 되었을 때 아브람의 아름을 ‘아브라함’ 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이름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성경에서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함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해서 시날 평지에서 하늘에 닿을 높을 성읍과 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려고 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중심이 되고 권력을 잡고 높아지려고 하고 자기의 지배하게 사람들을 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흩으셨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셈의 후예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벽돌을 만들어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서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들어내고 싶어 했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중심의 사회, 세상의 문화를 가리켜 ‘바벨 문화’ 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셈의 7대손 가운데 데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 아브라함이 태어났음을 말씀합니다. 창세기11장 26절에서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는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입니다. 아브람은 큰 아버지, 나홀은 코웃음치다 하란은 마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데라의 족보에서 우리는 인간의 수명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옴으로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아담으로부터 노아 까지의 인간의 평균 수명은 9백세 내외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인 셈의 계보에 들어오면 4~5백년대로 줄어들고 아브라함과 나홀 대에서는 2백년내외로 더욱 줄어듭니다. 시편90편 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칠십에서 팔십 정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 이유는 죄가 관영 했기 때문입니다. 데라와 그의 가족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 아들인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게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27~28절에.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은 유브라데스강 서쪽에 위치하였던 도시로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며 달의 신을 섬기던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들도 세상의 신들을 섬겼으며 특별히 바벨탑의 지역과 같이 구운 벽돌로 세운 신전들이 복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제2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노아의 아들 셈의 족보에서 중심인물인 아브라함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1장 27~32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를 설명합니다. 가깝게는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직계 조상이며 멀게는 이 땅에 구속사를 완성하기 위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혈통적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의 역사가 기록되는 창세기 12~25장까지의 기록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가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창세기1부라고 할 수 있는 천지창조 역사의 결론이며 제2부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 역사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생활하던 갈대아 우르는 당시 정치, 경제, 문화 등 권력이 집중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역이 인도까지 이루어졌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갈대아 우르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한편 룻은 아브라함과 동행하여 가나안으로 들어왔으나 죄악의 도성 소돔 땅에 거하는 등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룻의 이름이 뜻하는 바 ‘애매한 자, 숨기는 자’ 와 같이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자가 아니라 세상과 짝하는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숭배자였는데 그는 화신 숭배를 거절한 그의 아들 하란을 니므롯(10;8~14)에게 고소하였고, 니므롯은 하란을 아비 데라가 보는 앞에서 불 속에 던져 타 죽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하란의 죽음을 언급한 이유는 하란의 아들 롯이 아브라함과 동행하여 가나안까지 가게 된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르’란 지명은 ‘불사르다’ ‘밝다’ ‘빛나다’ 하는 뜻의 오르 에서 유래하여 ‘불’ ‘빛’ 이란 뜻을 지녔습니다. ‘카스띰’은 갈대아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로 ‘갈대아 사람들이 살던 우르 땅’ 이란 의미로 이곳은 산물이 풍부하고 해상 교통과 육상 교통이 발달한 고대 세계의 주요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풍요로운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31; 12;4)
29~30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라함의 아니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죽은 하란에게는 세 명의 딸 사래, 밀가, 이스가 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과 나홀과 결혼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래가 아이가 없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사래는 결혼할 때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사래가 이삭을 낳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하고 전해주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말하기를 우리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창18;11) 사라는 ‘내가 생리가 끊어진 이 나이에 무슨 아이가 있겠는가?’ 하고 마음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사라가 나이가 들어 경수가 끊어지기도 했지만 임신을 할 수 없었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분입니다. 나이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에서도 구원의 완성을 위해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31절을 보시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와 그의 가족은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머문 장소는 하란이었습니다. 하란은 바벨론 지역과 지중해 연안 그리고 팔레스틴과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북메소포타미아의 교통의 요충지이며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은 고향 우르를 떠나면서 많은 여행객들이 택하는 경로인 유브라데스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은 길대아인의 우르에서 약 970km나 떨어져 있는 하란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늙은 아버지 데라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2절을 보시면 “데라는 나이가 이백 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죽음을 기록함으로서 천지 창조의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타락과 노아의 홍수 심판, 그리고 홍수 이후의 인간의 급속한 증가와 인종의 나누어짐을 기록한 창세기1부는 완전히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창세기2부의 시작으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구속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류 시조 아담의 출현으로 시작된 창세기의 1부가 한 인간의 죽음으로 끝맺는 것은 범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로 인류 역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창조로 시작하였으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죄와 죽음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데라는 끝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데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시작할 수 있지만 끝을 맺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중도에 포기하고 맙니다. 어떤 고난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약속의 땅을 향해 가야하는 동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환경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데라가 칠십 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칠십 오 세였습니다. (창1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날 때 데라의 나이는 약 150세쯤이었을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머무르기를 주장했겠지만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인과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지만 데라는 하란에서 그의 인생을 마칩니다.
비전을 가진 자와 비전을 가지지 않은 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믿고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인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을 위해 내 삶이 쓰여 지는지 심각한 영적투쟁을 하셔야 합니다. 적당히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결혼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면 비참한 결론을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길입니까? 창세기 12장 1절에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는 명령을 듣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도중하차입니다. 잠깐 쉬어야 할 일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고 가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변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데라와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데라와 같이 살다가 죽습니다. 데라는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지 않는 한 새사람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단절되지 않는 한 미래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지 않고 부활하려고 합니다.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옛사람의 모습도 가지고 있으면서 새 세상을 원합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 사람은 절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부도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부도로 인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두려워만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소망과 희망과 기대와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시고 약속의 땅을 약속하시며 기득권과 인간 중심적인 것을 버리고 출발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될 일도 불확실한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서12장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과 시편 62편 1~2절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이 길을 걷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우리를 세워주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내 손에 잡히지 않는 뜬 구름 같은 일이라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길을 가십시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창세기12장 이후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적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택함을 받을 만한 탁월함이나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우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고 실수가 없어서 택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어서 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즉흥적인 선택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자신을 들어내심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택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 없음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들을 무조건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조건이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보상할 수 없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때려서 라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원망이나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말이 있다면 ‘황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가르칠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 자격도 없는 나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2장 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고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형제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난의 흔적만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또 한 가지 발견하는 사실은 믿음은 확실한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 이 아니라 ‘지시할 땅’ 입니다. 참된 믿음은 내용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든지, 성경이 어떤 사건을 기록했든지 간에 그 말씀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이 없고, 떠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옛 모습을 버리지 않고 새 믿음은 생길 수 없습니다. 과거를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새로 출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모험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우리의 시작은 미숙합니다. ‘과연 가능할까?’ 새 출발은 멋지게 시작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은 바른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늦게 가든 일찍 가든 그 길을 곧바로 간다면 영광스러운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지고 깨어져 힘들지만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떠나 미래로 가고,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죄를 떠나 거룩으로 갑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행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발목이 잡힐 뻔했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입니까? 아니면 도중하차해서 쉬고 계십니까? 아무리 멋있고 화려한 유혹이 있다고 할지라도 빨리 그 길을 벗어나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사명의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한 땅은 아닙니다. 전쟁과 개척을 거쳐야만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힘든 상황이 있고 손해보고 생기는 유익이 없어도 여러분이 그곳에 있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있는 곳이 모든 것이 풍성하고 좋은 곳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뜻이 아니거든 그 자리를 떠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