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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칠보사 목조석가불좌상(왼쪽)과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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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문명대(동국대 명예교수)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서울 칠보사 대웅전 본존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지 선근 스님의 부탁으로 이 목조석가불좌상을 살피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상호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1622년 조각승 현진 조성 “17세기 최고 불상 중 하나”
지장암 불상과 함께 있다가 폐불 겪으며 제각각 흩어져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 전체 삼존불 중 2구 ‘확인’
문 소장은 이 불상과 꼭 닮은 또 다른 불상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2009년 보물 1621호로 지정된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지장암 비로자나불은 17세기 조각승인 현진 스님 등이 1622년(광해군 14)에 조성한 최고의 법신불로, 초기 현진파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상이다. 그런데 이 칠보사 석가모니불 역시 이 같은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문 소장은 지장암 비로자나불이 보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치밀한 조사·연구를 했었기에 그 상호의 특징과 형상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고 있었다. 발우를 엎어 놓은 듯한 머리 형상과 촘촘한 나발,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형에 넓은 이마, 눈두덩이가 부푼 듯한 가는 눈매, 짧고 오뚝한 코와 작은 입이 대단히 흡사했으며 착의법도 마찬가지였다.
문 소장은 두 부처님이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만약 두 부처님이 함께 조성됐다면 칠보사 불상 역시 보물로 지정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상호가 유사하다는 이유로 같은 조각승의 작품이라고 단정 짓기는 근거가 미약했다. 두 불상이 함께 조성됐다 하더라도 지금 각각 지장암과 칠보사로 흩어져 안치된 과정을 알 길이 없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였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달 후, 칠보사에서 개금불사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문 소장은 불사를 위한 조사 과정에서 많은 양의 복장유물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왕실 발원문과 ‘화엄경소’ 등 복장물이 지장암 비로자나불과 동일했다. 예측대로 지장암 비로자나불과 함께 조성된 삼신불 중 1구라는 사실이 비로소 드러난 셈이다.
이와 함께 두 불상의 애초 봉안처가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인 점, 그리고 헌종대 폐불정책으로 자인수양사가 폐사되면서 경기도 광주 법륜사로 옮겨지게 된 사실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폐사된 사찰에 안치됐던 불상의 경로가 확인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자인수양사의 삼존불 중 2구를 찾아낸 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칠보사 석가모니불상의 조성발원문을 통해 지장암 비로자나불에 대해 풀리지 않던 의문도 말끔히 털어낼 수 있었다. 자인수양사에 있던 비로자나불이 어떤 연유로 법륜사로 옮겨졌는지에 대한 것인데, 칠보사 사적기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덕분이다.
문 소장은 “서울 지장암이 법륜사라는 절 이름을 계승하면서 모든 삼보정재까지 옮겨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지장암 비로자나불이 법륜사로 이안됐음은 짐작했지만 그 연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면서 “그런데 발원문을 통해 칠보사 석가모니불 발원 공덕주가 영창대군의 모후 인목대비이며 이 같은 연고로 영창대군의 원찰로 추정되는 법륜사로 옮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삼존불 중 나머지 1구로 추정되는 불상을 조사 중”이라고 밝힌 문 소장은 “이것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수백년 전 흩어졌던 세 분의 부처님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 당시 조성된 삼존불로서는 유일한 사례가 되어 문화재적 위상 또한 대단히 높아질 것으로 본다”고 의미를 전했다.
한편 칠보사 불상에 대한 문 소장의 논문 ‘칠보사 대웅전 1622년작 목(木)석가불좌상과 복장품의 연구’는 최근 발간된 ‘강좌 미술사’ 43호에 수록돼 있으며, 지장암 관련 내용은 한국미술사연구소와 지장암이 2009년 발간한 ‘지장암의 역사와 문화’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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