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 측 “스트레스 너무 받아 의지 상실”
법원 “즉결심판, 판사당 하루 십여건… 현실적 어려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정말 억울합니다. 블랙박스 한번만 보고 판결해주세요.” (피고인)
“여기 서류에 다 있으니까 안 봐도 됩니다. 10만원 벌금 합니다.” (판사)
주행 신호(파란불)가 들어온 2초 뒤 옆쪽 후방에서 달려온 보행자와 부딪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 판사에 블랙박스 영상을 봐달라고 읍소했지만 이 같은 대화 끝에 거절당한 사연의 주인공이 정식 재판을 포기했다.
대구 달서구 한 도로에서 행인을 차로 친 혐의로 지난달 즉결심판에서 벌금 10만원 판결을 받은 A씨 측은 3일 조선닷컴에 정식재판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A씨 측은 “운전자가 이 사건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며 “(추가 대응을 할) 의지가 없다”고 했다.
A씨는 6월 18일 오후 2시쯤 달서구의 횡단보도에서 행인을 차로 친 혐의로 지난달 즉결심판을 받았다. 당시 A씨는 횡단보도 앞 빨간불에서 대기하다가 주행 신호가 들어온 2초 뒤 엑셀을 밟았지만, 때마침 차량 왼쪽 뒤편에서 뛰어든 보행자와 부딪혔다. 경찰은 A씨에게 ‘주의 의무 위반‘으로 10만원짜리 범칙금 처분을 내렸지만, A씨는 이에 불복해 즉결심판이 진행됐다.
이 즉결심판 내용이 한 교통사고 전문 유튜브 채널에 소개되며 온라인에서 공분을 불러왔다. ‘블랙박스 영상이라도 보고 판결해달라’는 A씨 읍소를 판사가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억울하면 정식 재판을 청구하라’는 취지의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네티즌들은 “증거자료를 안 보고 판결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36초도 시간이 없으면 그냥 집에서 쉬어라”라는 식의 비판을 쏟아냈다.
대구지법 서부지원 측은 ‘신속’과 ‘효율’이 강조되는 즉결심판의 특성상 모든 증거를 일일이 다 훑어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즉결심판은 교통법규 위반 같은 경미한 범죄에 대해 경찰서장의 청구로 판사가 심리하는 약식재판 절차다. 경찰이 제시한 증거가 곧바로 증거능력을 갖고 검사가 아닌 경찰이 사실상의 기소권을 행사한다. 정식 재판과 달리 유죄가 나더라도 전과 기록이 남지 않고, 소송 비용 부담도 거의 없어 피고 측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즉결심판 결과에 피고인이 불복하면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즉결심판법은 이 절차의 속성에 대해 “신속·적정한 절차”라고 밝혀두고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서부지원 관계자는 조선닷컴 통화에서 “즉결심판은 법정에서 (경찰의) 증거 기록을 보고 심증을 형성해서 재판하는 재판이며, 일반 재판처럼 그렇게 심도 있게 재판 하는 절차 자체가 아니다”며 “즉결심판에서 일반 재판 수준에 요구되는 정도까지 요구하게 되면 다른 재판에 지장이 많다”고 했다. 즉결심판을 맡은 판사 한 명이 하루에만 십수 건의 즉결심판을 처리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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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지원 관계자는 그러면서 “당연히 모든 재판을 다 충실하게 하면 다 좋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민사소송에서) 소액 재판 제도라는 걸 왜 만들며, 즉결 심판 제도라는 걸 왜 만들었겠나”라며 “전국 어느 즉결재판 법정에서도 교통사고 블랙박스 다 보고 재판하는 곳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