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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사무 9,1-4.17-19; 10,1
복 음 : 마르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4년 주목하는 젊은 트랜드 중 하나가 ‘육각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의 여러 가지 특성을 비교 분석할 때 사용하는
육각형 이미지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합니다.
모든 기준 축이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정육각형이 되기 때문에
육각형은 완벽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성격, 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흠이 없는 ‘육각형 인간’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가능할까요?
올해의 트랜드라고는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그 완벽한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의 나약함과 부족함, 불완전한 모습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한 후배에게 신학생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형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싫어.”
가까이 하고 싶은데, 너무 완벽하게 보여서 가까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약간 나사 빠져 보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 부족함을 보고서 “나도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 빠져 보이는 것 역시 괜찮습니다.
함께 살면서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모습만을 보이려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지요.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 역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면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에 매국노였고 그래서 부도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거지들도 이들의 돈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우월감에 가득 찬 바리사이들이 이들을 멸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멸시의 범주 안에 예수님까지도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옳고, 나와 같지 않으면 틀렸다’라는 교만을 예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면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주님까지도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저도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넷 세상의 힘을 실감한 경험이 있습니다.
운동 중에 한 분이 핸드폰을 분실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요즘 핸드폰은 예전에 허각이
‘천 년을 살아도 그대 사랑하는 마음뿐인 바보 였죠.
그대 핸드폰이 난 너무 부럽습니다.
지금도 니 옆에 같이 있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모두가 소중하게 여기는 필수품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한 분이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애플에 접속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핸드폰의 위치가 지도 위에 깜빡거렸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이지만 알람을 울려주는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 복사기의 토너를 갈아야 했습니다.
저도 직원도 방법을 몰라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이 문제없다고 하면서 복사기 토너 가는 법을 검색했습니다.
친절하게도 복사기 토너를 가는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영상을 보면서 쉽게 토너를 갈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잘 들리다가 한쪽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로 사야 하나 걱정이 컸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친절하게도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방법대로 하니 양쪽이 모두 잘 들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면서
사울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암나귀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원수들의 손에게 구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굳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능한 1개월에 한 번 정도는 고해성사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성사를 보면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성사를 보고 나서 그 거룩해진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작심삼일입니다.
허물을 벗은 기쁨이 큰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자유를 얻고는 곧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과 깊이 만나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위선을 떨면서 여전히 사랑을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으며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 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 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은 선택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서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주님의 부름을 받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죄인을 끌어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적 환경에서 살아야 하고, 복음적인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면, 먼저 익숙하게 앉아 있던 고정된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를 따라나설 것인가? 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랜 세월 보육원에서 사목하신 수녀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이 키우신 한 아이가 주먹 세계의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전화를 준답니다.
“수녀님, 저예요. 힘든 일 없으신가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참으로 특별한 상황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답니다.
언젠가 한 건물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새까만 정장 차림의 어깨들이 입구부터 시작해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얼굴들도 한결같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데,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조폭 두목쯤 되는 사람 부모님의 축하연 자리였던가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알패오의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그는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들의 삶은 오늘날 조직원들과 유사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의 기둥이 공포에 덜덜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인간 말종으로 여겨지던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를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으로,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
박상대 마르코 신부
드디어 예수님 주위에 군중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을 떠나 다시 호숫가로 가시는데 제자들뿐 아니라 군중도 함께 따라나섰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뉘어 있다.
한 부류는 얼마 전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에 냉큼 요(침상)를 걷어들고 걸어가던
중풍병자를 눈앞에서 지켜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예수께서 죄 사함을 운운하여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하며
언짢은 마음으로 따라가는 율법학자들이다.
前者는 또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과 신명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오,
後者는 예수가 또 어떤 발상으로 하느님을 모독할까? 하는 조바심이나 경계심,
또는 감시적 차원에서 따라붙은 사람들이다.
호숫가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아마 두 가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제자들과 이미 호감을 가진 군중을 제대로 교육시켜 나가는 것이고,
둘째는 반대자의 어리석은 생각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 두 생각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어제 복음에서 이미 언급된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2,10)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시려는 듯 예수께서는 세관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14절)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말하는 알패오의 아들로 세리출신인 레위는
12제자단의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12사도 중 하나로서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이며, 세리였던 제자는 마태오이다.
(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그러나 알패오가 두 명의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세리인 레위가 마태오일 가능성도 있다.
오늘 召命을 받은 레위는 세리였다.
세리들은 예수님 당시에 동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으니,
예수께서는 죄인을 제자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처사는 당시 유다인 랍비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분명 스캔들이다.
이어서 율법학자들이 보기에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 차원 더 높아진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은 레위의 집에서 다른 세리들과 어울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이다.(15절)
세리들은 되도록 멀리하고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 거룩하여 聖別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출신 율법학자들의 원칙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어제 복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죄는 격리와 이별을 초래한다.
따라서 죄인은 모든 인간적인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소외된다.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식사공동체라니?
이는 죄인들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죄인들을 공동체에 복귀시키는 일이다.
공동체로의 복귀는 ‘용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수와의 식사공동체에 초대받은 이들은,
그가 죄인이라면 이미 죄의 용서가 先行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스런 현실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신다.
죄와 떨어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분은 죄인들을 떨어내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오히려 죄인들을 찾아가시는 분이며,
그들을 용서하여 식탁에 불러 기꺼이 음식을 나누시길 원하신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며,
예수님은 이들을 고쳐주실 의사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승화 시몬 신부
신앙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걸어간 길은 안전함을 알려주고
누군가가 내밀어 준 손은 디딤돌이 되지만
결국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실천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준다고 했지만
그 사람을 찾는 건 사무엘의 몫이었습니다.
그를 찾아 나서서 만났을 때
그에게 다가가 왕으로 임명할 사람은 사무엘의 몫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사무엘은 그저 준비할 뿐입니다.
처음부터 왕을 키운 것이 아니고
스스로 준비한 이에게 기회가 주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따서 주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부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받았어도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또 본인이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길이 있어도 가지 않게 됩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준비했기에 예수님이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이를 보며 우리도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을 스스로 키워나가고
주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