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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박경수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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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그들은 누구인가
위그노는 누구인가
16세기에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진영은 루터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루터파, 츠빙글리와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의 개혁파, 스위스형제단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확산된 아나뱁티스트,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성공회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스위스의 개혁파 종교개혁 운동은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유럽 전역으로 가장 널리 확산되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위그노이다.
위그노(Huguenots)는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 1509-64)의 개혁운동에 동참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왜 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스위스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독일어로 동맹자들이란 의미를 지닌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으로 부르다가 축약하여 아이크노로, 다시 유사한 발음의 위그노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위그노 지도자였던 나바라의 앙리의 조상 위그 카페(Hughes Capet)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칼뱅의 제네바가 프랑스 개혁교회의 요람이 되다
1509년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난 칼뱅은 파리, 오를레앙, 부르주에서 공부한 후, 1536년 우연한 계기(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하나님의 섭리)로 운명의 도시 제네바에 정착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제네바에서 쫓겨나 스트라스부르에 머물기도 했지만,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 156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제네바 교회의 목회자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경건과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개혁교회의 신학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하였다. 칼뱅의 제네바가 프로테스탄트, 특별히 개혁교회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제네바로 모여들었다. 제네바가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언어도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며, 칼뱅도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온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유난히 많았다.
1550년대 제네바 교회는 아직은 미조직 상태에 있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지도력을 공급하였다. 특별히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아카데미가 개혁파 종교개혁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도모하였다. 아카데미가 설립된 1559년부터 칼뱅이 죽은 1564년까지 처음 5년 동안 무려 339명의 학생이 등록하였고, 그중에서 프랑스에서 온 학생들이 적게는 60%, 많게는 80% 이상을 차지하였다. 많은 학생이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건너와서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은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프랑스 개혁교회를 위해서 일하였다. 이렇게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안에서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가 세력을 점차 확장하여 갔다. 역사가들은 1560년대에 귀족의 절반 정도가 위그노였고, 1562년 위그노전쟁이 발발할 즈음에는 위그노가 200만 명 이상이고, 위그노 교회도 1,200-1,250개 정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칼뱅주의는 사회적 계층과 계급과 직업을 막론하고 프랑스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귀족들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의 회심은 프랑스 왕정에 본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모색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1559년에 파리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프랑스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위그노 중에는 루이 콩데, 가스파르 콜리니, 나바라의 앙리 등 유력한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위그노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및 로마가톨릭주의자인 기즈 가문과 심각한 충돌을 빚게 되었다. 종교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련의 회담이 열렸고, 제한적인 성과를 담은 칙령이 공포되기도 했다.
1561년 9월 파리에서 가까운 푸아시의 한 수도원에서 로마가톨릭교회와 위그노 사이의 화해를 위한 회담(Colloquy of Poissy)이 열렸다. 회담의 주최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 왕실로 시집온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였고, 그녀의 아들인 국왕 샤를 9세가 11살의 나이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로마가톨릭 측에서는 교황 특사인 페라라의 추기경 이포리토 데스테(Ippolito d’Este)와 제2대 예수회 총장인 디에고 라이네즈(Diego Laynez)를 비롯한 추기경과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위그노 측에서는 제네바에서 온 테오도르 베즈(Théodore de Bèze)와 취리히에서 온 피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그리고 나바라의 여왕 잔 달브레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들이 참석하였다. 보름 이상의 긴 대화를 이어갔지만, 신학적인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고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1562년 1월에는 생제르맹칙령(Edict of Saint-Germain)이 반포되었는데, 위그노들이 총회를 소집하거나 자금을 모으거나 군대를 모집하는 것은 금하면서도 도시 밖의 제한된 지역에서 자유롭게 예배드리는 것만은 보장하였다.
위그노전쟁, 바시에서 낭트까지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1562년 3월 1일 기즈 가문 프랑수아 공작의 군대가 작은 시골 마을 바시(Wassy)의 헛간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프랑스에서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흔히 ‘위그노전쟁’이라 부른다. 바시의 학살 이후 루앙, 드뢰, 오를레앙 등에서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심지어 1563년 2월에는 위그노가 기즈의 공작 프랑수아를 암살하기도 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1563년 3월 앙부아즈칙령(Edict of Amboise)으로 양측의 휴전을 중재하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충돌이 이어졌다.
1562년 바시의 학살 이후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는 여러 차례 유혈참극이 반복되다가 1598년 4월 13일 낭트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비로소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끝이 났다. 이 36년이라는 기간은 프랑스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전쟁, 기근, 질병으로 인해 대략 200-4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1572년 8월 23-24일 벌어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은 유럽의 종교전쟁에서 최악의 사건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마르가리타와 나바라의 잔 달브레의 아들 앙리의 정략결혼을 위해 파리에 모였던 위그노들이 로마가톨릭 세력에 의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때 죽은 위그노의 숫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파리에서만 위그노의 지도자 가스파르 콜리니를 비롯하여 2,000명 정도가 죽고 지방의 도시들에서도 수천 명이 죽어 전체적으로는 1만 명 가까운 위그노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위그노들에게 로마가톨릭교회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위그노전쟁의 막바지에 소위 ‘세 앙리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갈등 정국이 펼쳐진다. 철저한 로마가톨릭주의자인 기즈 가문의 앙리, 나바라에서 어머니 잔 달브레로부터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바라의 앙리,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던 프랑스의 왕 앙리 3세, 이 세 사람 사이에 전략적 싸움이 벌어졌다.
먼저 앙리 3세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기즈의 앙리를 1588년 12월 3일 블루아 성으로 유인해 살해하였다. 로마가톨릭동맹은 국왕 앙리 3세에 대해 복수를 선언하였고, 앙리 3세는 자신의 육촌이자 위그노인 나바라의 앙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앙리 3세의 할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앙굴렘의 마르가리타가 바로 나바라의 앙리의 외할머니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육촌지간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앙리 3세는 로마가톨릭동맹의 추종자인 도미니크회 수도승 자크 클레망에 의해 1589년 8월 2일 암살당하고 만다. 임종하는 순간 앙리 3세는 오래된 프랑크족의 왕위계승법에 따라 육촌인 나바라의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대신 로마가톨릭신앙으로 개종할 것을 강권하였다.
앙리 4세, 위그노인가 로마가톨릭인가
1589년 8월 나바라의 앙리는 프랑스의 새로운 왕 앙리 4세가 된다.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가톨릭 세력을 제압한 앙리 4세는 선임 국왕이자 육촌인 앙리 3세의 뜻에 따라 1593년 7월 25일 위그노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때 앙리 4세가 “파리는 미사를 드리더라도(종교를 바꿔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말 앙리 4세가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권력욕 때문에 위그노 신앙을 버리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후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었는지 또한 알 길이 없다.
왕이 된 앙리 4세는 자신의 옛 신앙적 동지 위그노들을 잊지 않았다. 1598년 4월 30일 프랑스 낭트에서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고, 양심의 자유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였다. 앙리는 이를 통해 프랑스의 종교적 갈등이 해소되고 시민적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위그노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반포되었던 1562년 1월의 생제르맹칙령이 협소한 관용조처를 담고 있었다면, 낭트칙령은 보다 폭넓은 관용정책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주의가 프랑스의 확립된 종교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위그노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락한 타협적인 낭트칙령은 로마가톨릭교도도 위그노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현재 칙령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제네바로 보내진 사본은 보존되어 있다.
앙리 4세가 개종을 한 후에도 로마가톨릭동맹은 앙리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늘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1598년 낭트칙령을 반포하여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락한 것도 이런 불신을 초래한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결국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파리 시내 한복판인 이노상 분수 근처에서 로마가톨릭동맹의 열광자인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지금도 앙리 4세가 암살당한 길 위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표지석이 놓여 있다. 앙리 4세는 프랑스 생드니 대성당 바실리카에 안장되었지만, 프랑스대혁명 때 성난 군중들에 의해 유골이 훼손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 개인 수집가가 가지고 있던 두개골이 앙리 4세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역사와 문화로 만나는 앙리 4세
프랑스인들이 앙리 4세를 가리키는 애칭들이 있다. 앙리가 낭트칙령을 통해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끝내고 공존과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를 ‘앙리 대왕’(Henri le Grand)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를 ‘선량왕’(le Bon Roi)이라고도 부른다. 앙리 4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왕국의 모든 백성이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앙리가 백성들의 곤궁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애썼던 선한 왕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일 것이다. 반면에 ‘호색한’(le Vert-Galant)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앙리의 여성 편력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두 번, 즉 1572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uerite of Valois)와, 그리고 1600년 메디치 가문의 마리(Marie de Médicis)와 결혼했지만 비공식적으로도 많은 정부를 두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로 유명한 파리의 퐁네프(Pont Neuf) 다리는 ‘새로운 다리’라는 그 뜻과는 달리 사실은 앙리 4세 때 완공된 파리의 센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지금도 퐁네프를 방문하면 늠름한 자세로 말을 타고 있는 그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으며, 다리 중간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앙리 4세의 별명에서 따온 베르갈랑(호색한) 공원이 있다.
앙리 4세의 흥미진진한 생애는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의 『앙리 4세』(서울: 미래 M&B, 1999)에서 만날 수 있다. 원작은 2부작 소설로 1부는 『앙리 4세의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1935년에, 2부는 『앙리 4세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1938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말로는 총 3권으로 번역되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여왕 마고>(La Reine Margot, 1994년 개봉)를 보면 위그노전쟁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국민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열연한 여주인공 마고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마르가리타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마고와 나바라의 앙리의 정략결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앙리 4세의 어머니 잔 달브레
앙리 4세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어머니 잔 달브레(Jeanne d’Albret)를 빼놓을 수 없다. 잔은 1528년 나바라의 왕 앙리 달브레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누나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잔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략결혼 상대였던 독일 클레베의 빌헬름 공(Wilhelm of Cleves)을 끝까지 거부해 교황에게서 공식적으로 결혼 무효선언을 받아낸 당찬 여성이었다. 그녀는 1560년 크리스마스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고백하면서, 빵과 더불어 포도주도 받는 프로테스탄트 성만찬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잔은 최고위층 프랑스 여성 위그노가 되었다. 잔은 편지에서 “내 생각에 종교개혁은 정말로 옳고 필요한 일 같아서, 내가 계속해서 어정쩡하게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이 못 되고 비겁한 일이며, 내 양심에도, 내 백성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칼뱅은 1561년 잔을 직접 만났고, 이후로도 잔을 격려하는 편지를 자주 썼으며, 그녀를 위해 목회자를 파송하기도 하였다.
이후 잔은 위그노파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이 역할은 그녀가 라로셸(La Rochelle)에 거하던 1568-71년 동안 그 정점에 달하였다. 제도적 변화를 통해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잔의 사상과 영향력은 포(Pau) 지역의 『교회법령』과 라로셸의 『교회치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잔은 아들 나바라의 앙리를 위그노로 기르고 가르침으로써 긴 안목에서 볼 때 프랑스의 위그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572년 6월 9일 숨을 거두어, 두 달 후에 벌어질 바르톨로뮤 학살 사건의 잔혹함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 남부도시 오르테즈(Orthez)에 있는 잔 달브레 박물관(Musée Jeanne d’Albret)을 방문하면 그녀의 흔적과 유산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잔을 포함한 16세기 여성들의 이야기는 키르시 스티예르나(Kirsi Stjerna)의 『여성과 종교개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에 소개되어 있다.
낭트칙령에서 퐁텐블로칙령까지
앙리 4세의 낭트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위그노들이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긴 했지만,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낭트칙령 이후에도 위그노들의 고단한 신앙 여정은 계속되었다. 특히 1620년대 위그노의 근거지였던 라로셸에서의 항쟁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1560년대 이후로 위그노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라로셸은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1620년대에 이르러 3차례에 걸쳐 로마가톨릭 군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을 받고 도시가 함락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2만 5,000여 명의 주민들 가운데 1,500여 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결국 낭트칙령이 반포된 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85년 10월 22일,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통해 할아버지의 낭트칙령을 취소하고 위그노 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종교 갈등이 다시 점화되었고, 강력한 박해가 재개되었다. 위그노들은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2주 내로 프랑스를 떠나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대략 30만 명 이상이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연상시킬 정도의 대규모 피난 행렬이었다. 이들은 영국, 프러시아, 네덜란드, 스위스, 남아프리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등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위그노들 가운데는 숙련된 장인이나 전문적인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해외 망명은 프랑스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인 혼란이 결국 프랑스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프러시아 브란덴부르크의 선거후(=선제후, 신성 로마 제국에서 1356년에 황금문서에 의하여 독일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퐁텐블로칙령 반포 1주일 만인 10월 29일 포츠담칙령(Edict of Potsdam)을 반포하여 위그노들의 브란덴부르크 유입을 격려하였다.
광야시대를 거쳐 관용령까지
망명 대신 프랑스에 남아 투쟁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산악 지역에 숨어 지내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모든 법적 지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위그노는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었고, 로마가톨릭 교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으며, 자녀들은 학교에 진학할 수조차 없었다. 재산권과 상속권도 박탈당했고, 예배당은 폐쇄되었으며, 죽어서는 정식으로 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주민등록증이 발행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소위 ‘광야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위그노의 ‘광야 박물관’(Musée du Désert)에 가면 당시 위그노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모진 박해와 광야의 고난은 루이 16세에 의해 1787년 11월 7일 관용령(Edict of Tolerance)으로 알려진 베르사유칙령(Edict of Versailles)이 공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박해받던 위그노는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법적·시민적·종교적 지위와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2년 뒤인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로마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박경수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교(M. Div., Th. M.)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Th. M.), 클레어몬트 대학원(Ph. D.)에서 공부했다. 현재 장신대 역사신학 교수(종교개혁사 전공)이다. 저서로는 『교회의 신학자 칼뱅』, 『박경수 교수의 교회사 클래스』, 『여성과 종교개혁』,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 등이 있다.
[출처] 위그노, 그들은 누구인가, 박경수 교수|작성자 고경태
순교의 피가 된 위그노의 지도자 꼴리니
<7>프랑스 종교개혁의 이야기-성 바돌로메 대학살
이극범 목사l 한국기독공보 2017.06.24
개혁자 칼뱅이 제네바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후 세상을 떠났지만 30 여년이 지난 칼뱅의 영향력은 전 유럽에 빠르게 확산 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조국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이 발발할 정도로 개혁 신앙은 30년간 종교 전쟁으로 쉽게 사그라 지지 않았고 복음의 불은 타올라 수 많은 지도자들의 순교의 피가 있었다. 30년 종교전쟁은 16세기 후반에 8차례에 갈친 전쟁으로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 20만 명이 죽는다. 특별히 1572년 파리에서 바돌로메 대학살로 3000명의 개신교인 특히 리더들이 죽임을 당하며 그 중에는 위그노의 수장이며 왕의 중요한 자문관이던 갸스파 드 꼴리니 제독 (현 국무총리)이 혜성같이 등장하지만 살해되고 만다. 여기에서 성 바돌로메 대 학살의 상황을 잠시 알아야 한다.
1572년 파리에서 성 바돌로메 대학살은 3000명의 개신교 특히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한 순교의 사건이다. 프랑소와 2세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앙리 2세의 둘째 아들 샤를르 9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그의 어머니 까뜨린느 드 메디치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여인은 성 바돌로메 축제일 밤에 위그노의 대학살을 주도한 악마의 딸이다. 그녀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카톨릭의 분노와 증오를 무릅쓰고 자신의 딸 마르그리뜨와 브르봉 왕가의 앙리 드 나바르(훗날 앙리 4세)에게 시집 보낸다.
이 정략 결혼의 희생자 마르그리뜨를 주인공으로 그린 영화, 여왕 마르고의 첫 장면은 바로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권력을 장악한 국왕의 보좌관 꼴리니 제독(현 국무총리)은 샤를르 9세와 스페인과의 전쟁을 숙의했고, 영국의 지원을 확신한 꼴리니 제독의 구상에 사를르 9세는 동의하고 있었다. 까뜨린느는 이에 크게 분노했다. 꼴리니 제독이 마음 어린 왕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생각과 개신교도들의 출현이 더욱 그녀를 격분하게 한 것이다. 불안을 느낀 그녀는 위그노의 수장 꼴리니 제독의 암살을 모의한다. 1572년 8월 22일 루브르 궁전을 향해 가던 꼴리니 제독은 저격병의 총탄을 맞는다. 그러나 다행히 팔에 부상만 입은 꼴리니 제독은 분노했고 사를르 9세는 철저한 조사 명령을 내린다. 이제 날이 밝아오면 모든 진상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위그노들은 이미 주모자로 지목된 그녀가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선고 받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죄를 모면하기 위해 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기로 작정한 마르고는 아들 샤를르 9세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죄 사함을 구하기 보다 아들을 공갈 협박했다. 마음 약한 왕은 실신한 모습으로 위그노대학살 명령에 서명하게 만들고 때마침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 많은 위그노의 지도자들이 파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이다. 결국 성스러운 예배당의 종소리는 개혁교인들의 학살을 알리는 악마의 종소리가 되었다. 8월 24일 새벽 1시 하늘을 가르며 울리는 생 제르멩 옥세르와 성당 종소리는 학살을 알리는 악마의 종소리였다. 학살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들의 손에는 칼과 창뿐만 아니라 위그노의 명부까지 들고서 학살했던 것이다. 영화 '여왕 마르고'는 이 살인 장면을 너무 처참하게 보여줬다는 이유로 비난 받기도 했다.
무기를 든 괴한이 꼴리니 제독의 집에 당도했을 때 제독은 영웅답게 목숨을 끊었다. 이 날 새벽에 위그노의 지도자 60여 명과 3000명의 개혁교도들이 파리에서 참옥한 죽음을 당했으며 리옹과 오를레앙에서는 더 많은 시체들이 참혹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전체 3만에서 7만여 명이 학살당한다.
파리의 중심 루브르와 옥세르와성당 주변은 프랑스 개신교 역사에 뼈 아픈 상처를 남긴 바돌로메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현재 세계적인 문화의 왕국이 된 프랑스는 개혁교인들의 값진 순교의 피로 얼룩진 가슴 아픈 역사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극범 목사/총회 파송 프랑스선교사
이극범 목사 knlee@pckworld.com
서대신교회 목사 장호익/프랑스의 개혁교회-위그노의 신앙 https://youtu.be/VbufqPxSljk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야고보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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