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곳이었습니다. ~ 신작로에서 조그만 등성이 너머 마을 ~
일주일인가 열흘쯤 뒤인가 ? 신작로에 나가 보니
북한군이, 소가끄는 우마차에 대포를 달고 뒤에는 보병들이
백여명 뒤따르는 말그대로 일사천리로 진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얼마뒤 후속부대가 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동네우물가 감나무 그늘 밑에 모두 모여 놓고
그들의 노래 - 첫소절이 ~ 장백산 줄기 줄기 한라산까지 ~
라는 노래를 가르치더니 조용히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뒤 유엔군이 참전하여 밀고 올라 왔습니다.
그 피란지를 가운데 두고 신작로 남쪽 등성이 너머에는
미군들이, 북쪽등성이 너머에는 북한군들이 대치하고 있는
거리가 2.5km 정도 , 며칠을 대치하고 있었는데
밤이면 양쪽에서 곡사포를 퍼붓는 거에요.
우리는 밖에나가 시뻘건 불덩어리 포탄이 날아가는 걸
구경 하였습니다. 이 마을이 중간 지점이니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안전지대 였습니다.
어린이었기에 그런 광경을 재미있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 뒤 계속 유엔군이 밀고 올라가 서울을 탈환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 아버지와 엄니 큰언니 셋이서 집에 다녀
오겠다며 우리들을 남겨 놓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 얼마 지나지 않은 오십일년초 중공군의 북한 참전으로
다시 밀려 내려온게 1.4 후퇴 또다시 서울집을 뒤로 하고
피란길에 나선 셋중의 큰언니는 스무살이니 현역으로,
아버지는 마흔이 넘었으니 현역군인들 주먹밥 날라주는
국민병이란 이름으로 피란중에 현지에서 끌려간 것이었어요.
- 서울 수복되었다고 잠시 서울에 있는 동안 태어난 놈이
내 여동생 ~~~
남편과 맏아들을 이렇게 헤어지게 된 엄니는 갖난쟁이 애때문에
들르는 집마다 마흔 넘은 애엄마 배곯지 말라고 하는 분들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 그렇게 내려가는 중에
앞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불발탄 ~ 복덩이 아이덕에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 하였습니다.
그해(51년) 여름 육개월 정도 만에 아버지가 돌아 오셨는데,
못먹어서 걸리는 병, - 부황병에 걸려 몸은 누렇게 뜨고
부어 있었습니다.
음식이면 음식, 무었이든 최고였으며 조카며느리들까지
시집살이를 시키셨다는 호랑이 할머니 ~
아버지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시는 건 이때 처음 보았어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 전쟁중에 대통령을 대신하여
모들걸 검어쥔 국방장관이란 사람이 보급품을 떼어먹고
밥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일이 전쟁난리통에 있었다니, 사형으로 참수 하였어야
마땅한 것인데 대통령의 극진한 신임을 받은 그를 누가 처단
한단 말인가 ? 참으로 한심한꼴을 눈뜨고 볼 수없는 ~~~
다행이 덕지산을 끼고있는 이 마을은 뱀천지 였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번씩 만나는 뱀을 보는대로 잡아
날것으로도 드시고 탕으로도 ~ 껍질은 말려 가루를 내서
겨울에 드실 것으로 준비하셨습니다.
두어달 그렇게 드시고 나니 부황병이 치료 되었습니다.
- 1.4후퇴로 내려온 피란민들은 첫번째 보다 몇배 많은
숫자였는데 그해 여름에 피란민중에 염병(콜레가인가?
장티부스)에 걸려 우리할머니가 돌보았으나 저세상으로
떠났고 할머니마저 전염 되었던 것입니다.
부황병에서 치료 된 아버지는 할머니를 작은방에 모시고,
식사는 물론 대소변까지 처리 하셨습니다.
엄니에게 들은 얘긴데 , 할머니가 남긴 음식을 아버지가
다 드셨다 합니다. 그런 정성에도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멀쩡했습니다.
그 뒤 얼마가 지났을까 ? 유엔군과 우리국군이 재차 밀고
올라가 서울을 탈환하여 서울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큰언니는 휴전 뒤에도 삼년을 더하여 오십육년도에 제대
했습니다.
제대 뒤에 아무것도 하지않고 저에게 누런원지를 사오게 하여
십육절지로 잘라 노끈으로 묶어 놓고 전쟁수기를 두달여에 걸쳐
완성 하였습니다. 동생들인 우리는 그걸 모두 읽었지요.
- 형이 맡은 지역은 지리산 공비토벌 이었는데, 여기서는
중대전투고 소대전투를 할 수없는 산악지대라, 분대전투를
하는데, 분대장인 형의 분대는 한명의 죽음도 없었다 합니다.
형이 제대한지 몇달 뒤 분대원이었던 너덧명이 찾아와 -
우리가 호랑이 분대장님 때문에 죽지않고 살아왔다며
감회를 털어 놓았습니다.
- 지리산 공비란 그지역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어느집에 들렀을때 특별히 친절하게 대우하는 곳에선
경계를 더 철저히 하고 잠은 산에서 눈을파고 자는데,
대원의 절반은 재우고 나머지는 경계근무, 다시 교대하여
이런식으로 피로를 최소한으로 하였다 했습니다.
식사는 민간집에서 얻은 것과 산에 열려있는 감이며 열매들을
따먹으며 ~~~
- 다른 분대중엔 호의적으로 대하는 그 집에서 자다가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하더군요.
날짜까지 기록한 이 소중한 전쟁수기를 보존하지 못한 것을
사십오십오세에 일찍 돌아가신 큰언니 앞에 낯을 들지 못하고
안타까워 하니 무슨 소용 있으랴 !!!
전쟁난리 중에도 위와 같이 썩어 문드러진 정부가 그 뒤에는
조직깡패들을 앞세워 말만 민주정부지 독재정치로 일관
하였습니다. 참다 못한 학생들이 육십년도에 들고 일어난
것이 4.19혁명 입니다.
그날 사월십구일 밤에는 시청앞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고
연기까지 솟아 올랐습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청파동이었기에 알 수 있습니다.
같은반 동무가 가보자고 했는데, 그는 집이 후암동이라
거길 갔다가 집에 가기 쉬우나 나는 노량진이라 그 동무만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곱시쯤 전차를 타고 시청앞 국회의사당 앞을
들러 보았는데, 도로에 보도에 시신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어요.
그런지경에도 꿈쩍않던 정부가 사월이십오일 대학교수들과
지식인들이 합세하여 " 대통령은 하야 해라 " 는 데모를
벌이니 어쩌는 수없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자유당의
독재정권이 끝을 맺음으로서 피흘린 사일구 혁명은 성공
하였던 것입니다.
이어 받은 민주당 정부가 이런 저런 좋은 정책을
내놓으며 나라를 꾸려 나가고 있었습니다만 ,
독재정권에서 고삐풀린 각 단체들은 나라의 앞날은
제쳐 두고 그동안 억울하게 당했던 모든걸 찾을 심산으로
각종 요구사항으로 연일 데모가 끊이지 않아 나라일을
해 나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군부에서 육십일년 오월 십육일
군이 쿠테타로 일어선 것입니다.
피흘리며 찾은 자유국가가 군부독재 국가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제대로 끌고 나가기 위해선 독재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억울하게 당한 분들도 많게 된 것입니다.
빈민 농업국가로 허덕이던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이
이루어지며 한단계 끌어 올려 놓고 , 국가의 앞날을 위한
중화학 공업의 기틀을 잡아 놓은 상태에서 ~~~
유신헌법이란 ~ 만년 대통령을 할 수있는 법을 만드니
결국 밑에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러지 않고 민간이양을 했었으면 좋았으련만 ~
정권이란 한번 잡으면 놓지 못하는 중독증상이 걸리나 봅니다.
- 나라의 기틀을 잘 잡아 놓고 이렇게 되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군사정권이었으니 다음도 이어 받은 ~ 그다음도 ~
그러나 군사정부의 마지막 노태우대통령이 , 자신을 물태우라
불러도 좋다하며 서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일반국민의 정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시점에 공직자건 국민이 뽑은 나라일을 보는 이들이
나라의 긴 앞날은 나몰라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동안 한몫
챙기려고만 덤벼드니 ?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들이 이러니 국가가 정책적으로 키워준 재벌들도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한심한 세상입니다.
그뿐인가 배가 뒤집혀 조난당한 이들의 일부가족과 여기에
편승하여 허울좋은 이름의 단체들이 여기에 들러붙어
엉뚱한 제몫을 내라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이들이 나라를 위해서 떠나간 사람들인가 ?
정작 나라를 위하여 목숨바친 분들께 해주지도 못한 것을,
이들의 떼씀에 몇배를 더 해주었거늘 ~~~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선 백성을 위해 헌신하신
세종대왕의 정신을 가진 대통령을 뽑아야 하고,
오직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순신장군의 정신을
국민 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위에 ( 엄니 )라 했지요.
어머니를 빠르게 되뇌어 보세요. -엄니-가 되지요.
어머니의 준말입니다.
또한 형을 (언니)라 했는데, 같은 항렬의 윗사람에게 부르는
순수 우리말이에요.
지금은 형, 누나, 언니, 오빠, 이렇게 구분하여 부르지만
원래는 남녀 상관없이 같은 항렬의 윗사람에게 부르는게
언니로 통용 되었던 것입니다.
2015. 8. 15. * 수필가 * ~ 한가람 ~ 최종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