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생명의노래, 닥판에 먹과 채색, 72.0×54.5㎝, 1998.
■ 더블린 애비극장
1904년 시인 예이츠가 건립
아일랜드 문예부흥 거점으로
민족주의 극작가 작품 올리며
英으로부터의 독립 꿈꾸던 곳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뒤
전세계적인 찬사·명망 얻어
드디어 더블린 애비극장에 왔다.
작가 박물관의 첫 느낌처럼 이 역사적 장소 역시 지나치게 소박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거점이자 민족운동의 현장이기도 한 장소라는 데도 에둘러 그 의미는 가린 듯하고, 자칫 지나쳤을 만큼 평범했다.
하지만 이곳은 사실 아일랜드 국민 연극의 메카이자 비밀결사 같은 곳. 시민들은 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윌리엄 예이츠나 오거스타 그레고리, 존 M 싱 등 자국 극작가들의 연극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가 지켜야 할 민족적 자존과 가치는 무엇인가”를 되새기곤 했다.
말하자면 극장 애비는 우리로 치면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아우네 장터 같은 곳이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체성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극장은 의도적으로 아일랜드 민족주의 계열 극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무대에 올렸고 그만큼 그 계열의 희곡 작품들 또한 활발하게 생산됐다.
같은 문학 작품이라 할지라도 희곡은 소설과 사뭇 다르다. 소설이 눈으로 읽는 것이라면 희곡은 소리로 듣는 문학이다. 소설이 혼자 밀실의 공방에서 생산되는 수공업적 장인의 그 무엇과 같은 것이라면, 희곡은 그 과정은 같다 하더라도 펼쳐지고 공감을 얻는 데에 장소적 제약을 받는다. 극장이 열악한 곳에는 희곡 문학이 꽃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문학이라 해도 희곡은 배우의 생생한 동작과 함께 소리를 통해 나왔을 때 전혀 다른 울림을 준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집단 예술이 된다. 따라서 그 문자의 성격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마치 어부가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퍼덕이는 생선들처럼 활자는 살아 생동감을 띤다. 글이 소리로 재탄생될 공간, 즉 무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아무리 뛰어난 희곡이 쓰인다 해도 소리와 동작으로 완성돼 보이고 들려줄 무대가 없다면 사산아(死産兒)가 될 수밖에 없다.
1900년대 초(정확히는 1904년)에 이 극장이 세워지지 않았던들 세계 연극을 이끌었던 아일랜드의 근대 연극 융성의 역사 또한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희곡 분야로 노벨상 작가를 배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이 극장에 작품이 올려진 뒤로 세계로 팔려 나가면서 사뮈엘 베케트라는 작가에게 벼락같은 영광을 몰아다 준 것이 그의 지루하고 난해한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였다(그 창작집의 초판본은 극장에서 멀지 않은 더블린 작가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대학 시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포스터를 봤을 때 나는 고도를 고도(孤島)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아직 베케트도 그의 작품도 알지 못하던 때여서 속으로 ‘외로운 섬을 기다린다고?’ 이렇게 멋진 표현이 있다니 싶었다. 그러나 막이 오르고, 고도는 언제 오나? 식으로 두 남자가 주고받는 대사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고도가 외로운 섬이 아닌 누군가의 이름임을 알게 됐다. 더구나 고도라는 이름의 그 사내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런던에서 더블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나는 ‘고도…’가 초연됐다는 애비극장 생각에 설?다. 청년기 연극에 빠져 정신 못 차릴 때 많이 듣던 극장 이름이었고 그때 사진으로 밋밋한 절벽 같은 무인(武人) 이미지의 베케트도 처음 보게 됐기 때문이다. 더블린이 가까워져 오면서 그 옛날 그 ‘고도를 기다리며’의 그 폭력처럼 느껴지던 지루함과 작가의 절벽 같은 느낌의 얼굴이 겹쳐졌다.
세월이 많이 흘러 명동 예술극장에서 다시 만난 그 고도는 역시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책장만큼이나 넘기기 어렵고 지루했다. 그토록 대중성 없고 미궁 같기만 하던 희곡이 더블린의 이 애비극장에서는 큰 성공을 거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극 인구의 저변이 그만큼 넓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실제 와본 현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낮인데도 매표소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던 것. 그러고 보니 거리에서 영화관은 좀체 보기 어려웠는데, 자그마한 극장 간판들은 간간이 눈에 띄었다. 확실히 연극 도시라 할 만했다.
연극. 빠져들어 가 본 자는 안다. 헤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문턱을 오르기까지 수년간을 거의 연극 동네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인이 된 서울 녹번동의 영문학자 여석기 교수 댁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작 워크숍이 열렸는데 나는 열심 당원처럼 거르지 않고 그 모임에 참석했다. 거의 모두가 극작가 지망생이거나 PD였는데 미대생인 나는 어쩌자고 그토록 열심을 내었던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쓴 작품들이 연출가와 배우들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을 때의 그 설렘과 흥분 때문이었다.
객석의 어둠 속에 앉아 불빛 떨어지는 무대를 바라볼 때의 그 흥분이란 무엇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서울 용산과 신촌의 소극장에서 시작해 드디어 내 작품이 국립극장 무대에까지 올려지게 되자 얼핏 이 동네를 못 벗어나겠구나 하는 예감 같은 것이 들 정도였다. 바로 이 느낌 때문에 지금도 허다한 배우들이 주린 배를 움츠리며 무대에 서는 것이리라.
걷다 보면 더블린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듯한 인문적 공기가 느껴진다. 대기는 청량한데 묘한 저력이 있다. 대도시다운 경박함, 떠들썩함이나 번쩍거림이 아닌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물길을 보며 그 묵직한 공기 속을 걷는다. 자고 나면 신기하고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인데도 오불관언(吾不關焉). 어둑한 실내에 앉아 그 옛날의 예이츠와 베케트 연극을 보는 도시. 오래된 마호가니 빛 도시 더블린만의 매력이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베케트·오닐 등 애비극장서 연극운동…신작 등 1800편 무대 오르며 유명해져
애비극장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49)에 의해 1904년 건립됐다. 영국의 저명한 극장 운영자였던 애니 호니먼(Annie-Honiman, 1860~1937)의 도움이 컸지만 차츰 애비극장은 반(反)영국적 아일랜드 문예운동의 거점이 돼갔다.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의 극작가들을 계속 발굴, 그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애비극장은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는 아고라(광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연극 운동을 펼쳤던 예이츠가 최초로 노벨상을 받고 이어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상을 받으면서 애비극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다른 유명 극장들이 앞다퉈 세워지게 되면서 더블린은 세계 근대 연극을 견인하는 연극의 도시가 됐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애비극장은 아일랜드를 대표할 만한 많은 극작가를 배출하는데 ‘밤으로의 긴 여로’의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고도를 기다리며’의 베케트 작품들이 초연된 극장으로도 유명하다. 800여 편에 이르는 신작과 1000여 편을 상회하는 기존 희곡 작품이 애비극장의 무대에 올려져 세계 연극사에 유례가 없는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