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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면서
2013.04
30대 초, 중반 시절
인생이란걸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치기도 들던 시절, 한편으론 이십대의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상당히 많던 그런시절
사랑은 언제나 늘 목마른 화두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목 말랐고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었을 때도 온전한 사랑의 방법
을 몰라 목이 말랐다.
그때 접했던 강렬하면서도 이색적인 사랑 이야기들을 기억의 저장고에 깊이 간직했다가
20년쯤 세월이 지난후에 풀어 낸 적이 있었다.
이야기 제목을 <사랑은 상처도 그리움이 된다>라고 정하고 스무해 전의 사랑 이야기들을
추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몇해동안 또 어디에 깊숙히 갈무리 해 두었다가 이 곳에 선을 보였
드랬다.
그 사랑 이야길 쓴 지 또 10년이 지났다.
그들은 여전히 석양빛에 반사된 사랑의 잔영이 남달리 짙다.
허무와 슬픔이 교차하는 낙수마냥 회한의 바람이 이는 사랑도 있는가 하면 아직도 황금빛
으로 반사되는 호숫가의 저녁처럼 물빛 고은 사랑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그 이야길 한번 더 써 보았다.
사랑은 상처도 그리움이다.
2003. 04
제가 한 평생 보고, 겪은 경험치와 책자에서 접한 간접적인 경험치를 전부 모아봐도
가장 감동과 전율을 느끼는 사람살이 이야기는 사랑이야기이고
그놈의 사랑이야기들 중에도 그 높고 높다는 종교의 벽을 넘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질긴 건 없더라구요.
그 옛날 함께 가슴 아파했던 사랑이야기 셋을 아둔한 기억을 더듬으며 한번 써 보았습니다.
봄이니까요
1. 사랑의 변주곡
현몽이란 승려가 있었다.
대학을 나온 인텔리 승려인 그는 출가하여서도 담배와 술을 달고 살았다.
계율에 구애받지 않은 바람같은 승려.
사람들이 땡초라고 부르는 스님이였다.
이 스님이 모 암자에서 인근의 고교생들의 불교 학생회를 지도하고 있을 때 였다.
유난히 스님을 따르는 예쁜 여학생이 있었고 이 스님도 그 여학생이 싫지 않았다.
수많은 번민의 밤을 보낸뒤 이 스님 그 학생에게 편지를 썻다.
절 주변에 아람이 열리기 시작하니 밤을 줏으러 오라고....
그리고 날마다 밤나무를 쳐다 보았으나 아직 아람이 열리기엔 날짜가 일렀다.
그래서 읍내 장에 나가 묵은 밤을 사서 밤나무 주변에 뿌렷다.
소녀가 왔고 그들은 산속을 다니며 밤을 주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그들은 그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함께 전국 사찰을 떠돌아 다녔다.
이절, 저절에서 불목하니도 하고 허드렛 일을 하면서....
그리고 둘은 서울에서 살림도 차렸다.
허나 세상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아니하였고 현실도피적인 현몽은 세상에선 무능한 남자일 뿐 이였다.
그녀가 결국은 떠나가고 현몽은 혼자 남았다.
그녀는 멀리, 멀리 아프리카까지 갔다.
그리고 3년 뒤 아프리키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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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홍성은 현몽스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꼭 와 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무슨일인가 하고 여주 신륵사로 달려갔다.
그날이 그녀의 49제 마지막 날 이랫다.
신륵사의 종은 구웅~구웅~ 울고, 그 여자의 유품은 불에 탓다.
유품중엔 전국사찰들의 카다로그. 두사람의 사진들, 그리고 밤을 줍던 날 함께 주워 주었던 노란 은행잎도 있었다.
그녀는 그걸 끌고 아프리카까지 갔었다.
밤새 신륵사의 돌탑 위 벼랑에 달빛은 뜨고, 그 벼랑아래로 여강 물결은 흐르고
시인과 땡초는 캔맥주를 마셧다.
이 이야기를 전한 시인은 말했다.
'이제 우리는 현몽을 잊어야 한다.'
'아니, 현몽이 현몽인것 조차도 잊어야 한다'
그 밤도 신륵사의 범종은 구웅~구웅~ 울었다.
* 이 이야길 전할 때의 김홍성은 40대을 갓 넘긴 장쾌한 사내였으나 이제 이 사내는 아내를 잃은
네팔에서 한국식 식당을 열고 60을 코앞에 둔 밥짓는 늙은 사내로 살아간다.
설산을 바라보며 밥을 지으면 아내가 보고싶어도 위로가 될려나?
아님 그리움 위로, 히말라야 설산의 연봉 위로, 싯귀라도 하나 두둥실 떠 올라 주려나?
2. 그 찬란한 사랑의 노래
그는 개신교단에서 설립한 신학교의 학생이였다.
장차, 참 목자가 되려는 크고 야무진 꿈과 사명감에 불타는 신학생이였다.
어느날 그는 한 여인에게 마음을 뺏겼다.
그리고 그에게 번뇌와 고통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당황스러웠던 그녀는 그를 피해 멀리 도망을 갔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호소를 했다. 제발 그녀를 그냥 놔두어 달라고....
그녀는 그보다 너댓살 연상이였고 천주님께 생을 의탁한 수녀였다 .
그녀는 수도원으로 피난을 갔다.
그들은 힘든 오랜 시간을 보냈다.
* 이제 그녀는 그 어린 신학생이였던 최일도 목사님의 사모다.
밥퍼 목사로 유명하고 천사병원 설립자로 유명하며 다일공동체 설립 운영자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안사람으로 바쁘게 살아 간다.
그들에겐 그 고통스럽던 스무해 전의 상처가 사랑의 훈장으로 남았다.
3. 작은 우산속 축축한 어깨를 끌어 안는 사랑
김영웅 그는 소설가다.
그는 환속한 스님이다.
그는 한 여인을 보고 환속을 결심했다.
그는 그 여인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돈을 번다.
박재희 그녀는 시인이다.
그녀는 아가다란 법명을 가진 전직 수녀였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이제 그들은 한 그릇 따뜻한 밥상을 앞에 놓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성호를 긋고
그리고 염불을 왼다.
그들의 이야기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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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막 차를 타고 오는 사람
- 박 재희 -
비가 내린다.
젖은 옷자락을 펼쳐드는 안개
그 슬픔속으로 달아나는 밤
앞집 김씨가 빈 리어커를 끌며 아는 체하고
가파른 밤 열두시의 고개를 오른다
안개 그리고 꿈틀대는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길게 늘어선 가로수 그림자 사이로
죽음의 파도가 밀려 닥쳐 온다
그래, 죄지은 사랑이야
돌아서는데 낯익은 발자욱소리
취한 머리카락 쓸어올리는 사람이 있다
작은 우산속에 축축한 어깨를 끌어 안는 사랑
무섭지 않아?
-걱정이 돼요
한걸음 걸음 옮길 때마다 물러서는 어둠
간다, 그 어둠을 뚫고
새벽으로 만든 집을 향하여
* 사랑, 그 빌어먹을 사랑은 돌풍과 천둥을 동반한 젊은날의 빗줄기 같은 것이다.
가슴 아파하며 그래도 그리워하며 ...
나이가 들면 잊혀지는게 사랑이라던데....
그러나 기억하라.
우리에게 사랑마져 휘발해 버릴 때 그 피폐함을 어찌 감당할지를...
시간의 여적(餘滴)
2013. 04
하나,
시인 김홍성이 현몽을 처음 만난 장면을 묘사한것이 재미 있습니다.
은진미륵 앞에서 무슨 행사가 벌어졌는데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쓴 땡초가 수십명의 구경꾼에 아랑곳 않고
담배를 물컹물컹 피우고 있었는데 주위를 전혀 개의치 않는 그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 호감이 갔다고...
그뒤 파계승이 되어 살림을 차린 서울 단칸방으로 놀러를 갔었는데 그날 부부 싸움이 일어나 여인이 휘두룬
식칼이 김홍성이 자고있던 방 한쪽을 막아 서재로 꾸며놓은 베니아 판을 뚫고 들어 와 잠자는 복장 그대로
옷을 들고 튀었다 합니다.
그 여인은 아프리카로 갔고 거기서 죽었읍니다
현몽, 그는 당시에 드믄 서울 소재 4년재 대학을 다닌 인텔리였읍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김성종 작가의 베스트 셀러 <만다라>의 주인공 지산스님의 실지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뒤에도 가끔은 현몽의 이야길 신문에서 읽었읍니다.
속세의 어머니를 모시고 청도읍 거연리라는 곳에서 <까페 템플>이란 문패를 달고 "이 안에 정신병자 수행중
입니다. 조용히~ 쉿!'이란 주의문을 써 붙이고는 그림과 조각을 하면서 10년째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신문
기사에서 읽었고....그 뒤 그곳을 떠났다 하고...
그 가 쓴 인도, 네팔 기행문 <영원보다 긴 시간>이란 책자는 독자의 반응이 좋아 꽤 팔려 나간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밖에도 7권 가량의 책을 더 내었으며 일반인이 보기엔 딱히 승도 속도 아닌 그런 삶을 살아 갑니다.
열아홉 살 이후로 하산과 입산, 연애와 이별, 자살 미수, 수행과 깽판, 이런저런 헤프닝을 벌리며 방황하는
그는 구도자인지 방랑벽 환자인지는 신 만이 아시겠지요.
이 이야기를 전해준 시인 김홍성씨의 근황도 말씀을 드리면 월간 <사람과 산> 편집장을 거쳐 문단
활동을 활발히 하던 김 시인은 네팔 카드만두에다 부인과 함께 <소풍>이란 한국식 식당을 차리고 운영을
하다가 부인이 죽고 10년을 하던 식당을 접고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를 펴 냈습니다.
'당신은 떠났지만 나는 당신속에서 영원히 숨쉰다'란 제목의 행복에세이로 독자를 울리기도 한 김시인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장쾌한 모습 그대로 남은 생은 빛나는 삶을 사셧으면 합니다.
둘,
얼마전 최일도목사님의 은퇴소식을 들었읍니다.
청량리 588에서 길거리 식사봉사를 시작으로 다일 공동체를 이루기까지 무지 고생을 하신 밥퍼 목사님으로
유명하신 최목사님은 아직 현역 목회정년이 몇년 더 남았을텐데 하였는데 알고보니 목회하시는 교회는
41세의 젊은 후임 목사님께 인계하고 전적으로 빈민 봉사 사역에 전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였습니다.
역시 최일도 목사님이십니다.
목사 사모님도 여전히 내조를 활발히 하시고 두분의 사랑도 연륜 만큼이나 빛이 납니다.
황금빛 빛깔로 눈이 부십니다.
교회에서 30여년 봉직한 보답으로 퇴직금쪼로 준 4억원도 자선단체에 기부해 버리고 교회 사택을
비워 줘 갈곳 없게 된 걸 안타깝게 여겨 전세금으로 준 2억원은 사후 기증서를 만들어 버린 분이지요.
목사 사모님이 몇살 더 많으신데 더 화사하고 젊어 보이시네요.
보람차고 좋은일로 평생을 보내고 좋은 분과 함께 사시니 늙지도 않는가 봅니다.
셋,
2006년도인가 2007년도인가 기억이 안나지만 김영웅 작가가 경기도 문학상 소설부문에 수상을 하게 되었다
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간간이 각종 심포지움이나 문학 강연회등에서 연사로 참여 한다는 소식을 신문 문화면에서 보곤
했습니다.
소설가 김영웅씨의 소식이 들릴때면 덩달아 부인 박재희 시인의 소식도 궁금하게 되더군요.
박재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이 여럿이라 제가 짐작 가는 여류 시인이 한분 있기는 한데 딱히
그분인지 모르겠더군요.
이글을 쓰면서 아 이 미숙하고 못난 글이 끝맺음이 안되는 글이로구나 하고 자책이 들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어렵고 힘들게 만난 두분의 사랑은 환한 불꽃으로 타 올라 아직도 훨훨 타고 있을테지요?
사족,
서른살 즈음에 아내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룬 저는 나름 진하게 사랑도 하고 진하게 싸움도 하며
스무해를 보냈읍니다.
남들은 평화롭게 잘들 살더만 우리 부부는 왜 원수처럼 맹렬히 싸웠을까요?
그뒤 십년은 싸움을 거의 안했읍니다.
아니 못했읍니다.
아내가 몹시 아퍼서 피차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모진 고통을 이기고 아내는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우리는 또 전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측은지심이 들어 서로를 아낀다던데 우리는 여전히 전투적입니다.
그래서 저에겐 사랑은 여전히 달콤하고 아쉽고 목마르며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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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잘 읽고갑니데이~~ 왕머저리님 가정에 평화가 깃드시길~~ 지나는 교회첨탑마다 기도 드릴께요 () ㅎ
아름다운 글이네요. 잘보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진국이여요!!
나무관세음보살 아미타불---- ' 일체 유심조 " 이니라~~~ 아 메ㅐㄴ.... 인 샬라 ....옴마니 밤메홈...
나무본사 아미타부~울~~^^
왕님!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랑도 새싹처럼 잘 가꾸어야 자란다고 합니다.
부부로 살아가다보면 연애적의 낭만은 사라지고
각박한 현실에 부딪치게 되는 거지요.
싸움도 관심과 사랑이 남아 있으니까 하는것 아닐까요?
그래도 서로 상처주는 싸움은 마시길...
지도 연애 5-6년 하고 결혼했는데 신혼때는 참 싸움 많이 했지여.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닌거 가지고 ㅉㅉ... 지도 다 포기하고 싸울 의사도 없이 그냥 다 져주는데도 마누라는 뭐거 더 이길게 있다고 아직도 불만이 있는지여. 내가 항복 할때마다 쓰는 백기 까지 뺏어야 양이 찰랑가여? ㅎㅎㅎ.. 지는여 그냥 마누라하고 딸레미 한테는 개털이라고 생각하고 살려구래여. 이한 목숨 불살라 두년들 행복하다면 기꺼이 불쏘시게기 될랍니다. 그게 지 팔자지여. 세상 사람들위해서 살 위인은 못되구여 그냥 두년들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서 살면 두년들이 나중에 순국선열이 아니고 "순녀선부" 라고 불러 줄까여? 그럼 좋겠는데.에이고 깨갱
ㅎㅎㅎ"순녀선부"
이 꼬리글을 사모님과 딸래미가 봐야 할텐데...ㅎㅎㅎ
사랑....아~ 이젠 그런 단어 입밖에 전혀 못 내는데요......그냥 편하게 사는게 좋아스리...헌데 최일도 목사님의 사랑은 증말 본 받을 만 하네요. 그치만 나라면 그케 몬살뀨....다~ 팔자랑께요...왕님~~ 이제 사랑은 내려 놓으셔요~글고 농사많이 많이 지으셔여~~ 그라믄 생이 새로워 질뀨~
요런얘기는 단락단락나눠서 조금씩 올려주심 더 감동일텐데요,,,ㅎ
한편읽고 감동받아 맘이 짠한데,,,
또한편을 읽기위해 맘을 추스려야하고,,,ㅎ
하튼 저는 아직도 목마릅니당,,,ㅎ
아마도 죽을때까지 목마를듯합니다....ㅎ
결혼 20주년이 약 한달반 남았습니다.저 역시 결혼 13년을 매일 같이 전투적(?)으로 살았었지요.
언젠가 이야기 했듯 그때 지금의 가슴과 머리였다면 그렇게 어리석게 살지는 않았을테지요.
전쟁 같았던 13년에 7년이 흐르고 보니 왜 그리도 어리석게 살았나 싶은게 모든게 후회 투성이 였습니다.
50중반을 바라보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측은지심을 느끼고,때로는 길들여진듯,간혹은 포기도 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그 어느때 보다 행복합니다.달콤한 언어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눈빛 하나만로도 그 남자의 마음을 알것같은 지금
바로 우리의 사랑이랍니다.왕님도 전투적인 사랑은 이제 그만하시길 바랍니다.상처가 아주 크거든요~ ㅎㅎㅎ
글 잘 봤습니다.
저 영원한소녀, 소설같은 이야기에 푹 빠져서 가슴애태우며 접했습니다.
천사가 되기에는 모두 비워야만 가능한것 같습니다.ㅎㅎㅎ
왕머저리님, 건강하시고 사모님과 행복을 가득채우세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