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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20.5.31.) 말씀/ (엡 4:15)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늘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도, 동물도, 나무도 꽃도 자라는 것을 볼 때 아름답고 기쁩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면 아프고 슬픕니다. 제주에서 사역을 할 때 캠퍼스에 피싱을 나가니 아주 작은 곱추 형제 한 사람이 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무나 작은 키에 곱추 였기에 어디를 가나 그 형제가 눈에 확 띄었습니다. 저는 제자 사역을 하는데 제발 우리 형제들이 이 형제를 피싱해오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 사람 저사람 피싱해서 창세기 성경학교 때 이 형제가 뒤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염려하던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이 형제는 초청에 응하여 자신의 못 생긴 모습을 주목하는 것을 견디면서 무겁게 교회 문지방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저는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을 보지 못하고 육체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형제는 성경공부를 하고, 제자로 남아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장이 멈춘 장애로서 본인은 먹고 자고 공부하는 일상이 다 힘들었습니다. 잠도 편히 못자고 소화 기능도 약하고, 결국 이 형제는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성장이 멈추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무나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신체의 성장이 멈추면 지체 장애, 정신의 성장이 멈추면 지적 장애가 됩니다. 지적 장애가 되면 어른인데도 행동은 아이처럼 합니다. 자주 세상으로부터 휘둘림을 당하고 노예처럼 부림을 받기도 합니다. 결혼 초 두 딸을 낳고 마지막 아들을 낳았을 기쁨은 잠시 나에게도 발육 장애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딸 둘 아들 하나니 아주 딱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태어난 기쁨은 잠시 아이가 세월이 지나도 무릅으로 기지를 못했습니다. 계속 몸을 질질 끌고 다녔습니다. 눈동자도 좀 이상했습니다. 병원에 갔습니다. 임신 중 약물복용 지적 신체 장애였습니다. 성장해야 할 때 성장을 못하고,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못하니 자페증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난폭했습니다. 루디아 엘리도 감당을 못했습니다. 이아이를 키우며 역사를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김호권사님께 맡겨서 키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자식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일찍이 접어야 했습니다. 도시에서 큰 역사를 섬기는 동기 선배 목사님들 으리 번쩍 잘 나가는 자녀들과 비교하면서 저는 이것이 나의 모습인 듯 부정과 불신 절망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나가는 데 왜 나는? 과연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때 하나님은 외적인 부흥과 성장에만 관심 있는 나에게 근본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누가 문제 자녀 문제, 교회 역사 문제도 아니고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 자신의 문제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사역을 하시고, 자녀들도 하나님이 키우신다면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나 자신이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믿음의 사람들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참 신앙이 무엇인지 성경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시작 하였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니 주안에서는 환경과 사람 탓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하나씩 하나씩 깨닫는 묵상의 글을 모아 영성 칼럼을 쓰고,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주님이 하십니다. 다윗의 열쇠, 행복 방정식 등 책을 출판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강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배우고 성장하니 세계적으로 줄 것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독일 유럽수양회에서 강의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개혁의 진통을 격는 당시 슈트트가르트 은정 선교사님은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이 책 때문에 제가 살았습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후 계속 교제가 이어지고 두 분과 스위스 여행도 하였고, 옌스 목자는 무안까지 와서 산장텐트에서 차 까지 마시고 갔습니다. 또 드레스덴의 박영철 선교사님 부산 출신으로 수양회 때 ‘주님이 하심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수양회 내내 섬기면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멜로 연락이 되었고, 몇 년전에는 드레스덴에 가서 독일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색소폰 연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 역시 여기 무안에도 왔다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카톡으로 더 뜨겁게 글을 나누고 있습니다. 최근에 시를 써서 보내옵니다. 웬 시인가 했습니다. 계속 보내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얼마 전에 보니 시가 괜찮았습니다. ‘버티다보니’라는 시도 보니 참 좋았습니다.
버티다 보니 바람따라이리저리 흔들리는들풀과 나무가지처럼 폭풍 오는 언덕위가로수 위에서 나뭇가지 하나 움켜잡고 앉아 있는 작은새 한마리 험난한 생의 폭풍 한가운데홀로 '버티기' 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에게'아쉬운 부탁'이라도 할까하다행여 그를 더 힘들게 할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다시 홀로 버티기대열로 돌아 온다 버티다 보니 어느새 마음 한 켠에서는 용기와 인내심이 자라고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고 매일이 생의 마지막인 것 같은그런 소중함도 알게 된다 험난한 생의 폭풍가운데홀로 버티기 하는 인생살이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들풀처럼 폭풍타고더 높이 비상하는 새처럼 부절히 버팀의 영광 날개달고폭풍 위를 날아서 간다 ..... 시를 읽고 답장을 해주었습니다. “요즘 선교사님 시성이 넘칩니다.” 다시 답이 왔습니다. 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내가 뭐 보여 줄만한 것이 있어야지 오히려 지금은 내가 선교사님의 시를 감상하고 배우는 처지입니다.” 했습니다. 얼마 전에 보내준 '그루터기와 어머니', '어머니 덕에', '꽃병의 노래' 도 참 좋았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잠시 멈춰서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보게 합니다. 저는 시를 잘 잘 쓰는 사람도 아니고 시평을 잘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간단히 시평을 해서 보냈습니다. 좋은 시는 우선 쉬워야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던 공감이 되어야 합니다. 삶에서 농축되어 울어나와 전달되는 체험적 시어야 합니다. 읽으면서 읽는 이 모두의 시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여운을 남기며 삶의 교훈을 주는 그런 시여합니다. 그런 시가 좋은 시입니다. 선교사님의 시가 그렇습니다. 난해하고 비유가 심한 시는 그저 전문 시인 들의 세계에서 훌륭한 시일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버티다보니.. 사실 인생 살아가면서 버티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지처럼 폭풍오는 언덕위 가로수 위에 나무가지 하나 붙잡고 앉아있는 새처럼... 험난한 생의 폭풍 한가운데 홀로 '버티기'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많은 것을 배운다. 누구에겐가 쉽게 도움을 청하고싶은 마음을 참고 한번 더 버티기 한다. 그러다보면 내 속사람은 점점 더 성숙해진다. 왜 우리는 버티기를 합니까? 이 시를 보면 버티기를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숙이란 말이 나옵니다. 버티면서 속 사람이 점점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성숙은 누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홀로 가야할 길입니다. 외로운 길입니다. 버틴다는 그 말은 그냥 오기가 아닙니다. 믿음이며 오래 참음이며 용기입니다. 버티지 못한 사람은 무너지고 그 것을 버틴 자는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버티기는 바로 성숙의 자리 밑거름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믿음으로 버티면서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버티기 시는 박 선교사님의 삶의 이야기 였습니다. 버티다 보니 어느새 마음 한 켠에서는 용기와 인내심이 자라고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고 매일이 생의 마지막인 것 같은 그런 소중함도 알게 된다. 결과 버티던 손을 놓으니 폭풍타고 더 높이 비상하는 새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벙분 아니라 목사 안수도 받도 교회도 건축하였습니다. 인생의 세파 속에 힘들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버티며 살아갑니다. 나 역시도 힘들어서 남의 도움의 손을 초라하게 내밀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버티었습니다.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때론 버팀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버티고, 실직을 인해서 버티고, 질병으로 인해서 버티고, 생활고로 인해서 버팁니다. 이런 사람들은 격려하며 더 나은 삶으로의 희망을 노래하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의 내용처럼 우리 모두 조금 더 버팁시다. 힘들지만 거기서 우리는 용기도 생기고, 인내도 자라고 더 성숙한 믿음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이란 목표가 분명할 때 두 손을 놓으면 그 때는 한 마리 독수리가 되어 폭풍을 타고 비상하게 될 것 입니다.
사실 성경 속 믿음의 위인들도 다 버티었습니다. 아브라함도 25년을 버티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났지만 발붙일 땅도 없는 이방에서 3대가 장막생활을 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다메섹 엘리에셀을 아들로 삼고, 첩 하갈의 아들 에서를 후사로 삼고자도 하였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버티었습니다.창세기 15:1-6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여러 시험과 인내를 거텨 마침내 믿음의 합격점을 받고 100세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다고 믿음의 승리를 예찬하고 있습니다(11:12)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 모세도 많이 버틴 사람이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고 최고의 대접을 받던 그가 애굽인을 살해하고, 동족을 구한 후 광야의 도망자가 되어 40년을 양똥을 칩니다. 믿음으로 40년을 버티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40년 훈련이 끝나 가시떨기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나는 입술이 둔하고 말이 더듬는 닫고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의 지팡이와 아론의 입을 의지하며 버티었습니다. 그른 430년 이스라엘의 유월절 피흘림의 예를 정하고 대 출애굽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히 11:28-29 28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여러분 암으로 더 이상 나갈 수 없을 때 믿음으로 버티시기 바랍니다. 그 시기 곧 지나가고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는 죽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내가 연약하여 힘들 것 같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체질을 잘 아시고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알고보면 예수님도 버티신 분 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사람들은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손 양발에 대못을 막아 당시 최고의 형인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라, 너를 구원하라 그러면 믿겠다고 또 조롱하였습니다. 마음 같았으면 당장 내려와서 아니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서 이 조롱하는 무리들을 싹 쓸어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버티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으시면서 버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 수 없기에...마침내 예수님은 아버지의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구원자 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돕는 자가 되셨습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경주자들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힘내라 조금만 버티라 조금만 조금만... 성경은 믿음으로 이기는 자는 인내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버티게 되면 믿음의 성숙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다음 날 시 한 편 더 보내주었습니다. 잡목과 새라는 시입니다.
잡목과 새/ 박영철 -
외딴 길가 낮고 초라한 잡목더미 사이를 가만히 보니 웬 작은 새들이 이리도 많을까요
우람하고 멋진 나무보다 볼품없는 잡목의 품안으로 모여든 것은 낮아서 힘들이지 않고도 안착할 수 있는 까닭이요
외딴 길가 인기척 드물어 새들이 편안히 쉬며 실껏 목청 뽑을 수 있는 까닭이요
.....
시를 읽으면서 잡목처럼 볼 품 없이 낮아져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ㄴ껴졌습니다. 감동이 되어 답장을 해드렸습니다. “보는 안목이 예리하네요. 그리고 교훈적입니다. 영적인 은유가 들어있습니다. 계속 중단 없이 쓰세요 계속 다듬어질 것이며 많은 사람을 위로하는 시가 될 겁니다. 저는 이런 시가 좋습니다. 시의 기교와 재능은 못할지라도 시심의 깊이와 내용은 김수영 시인보다 더 좋습니다. 선교사님의 시는 하나씩 마음에 담겨겨지네요. 굿!” “너무 격려가 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을 목사님이라 부르는 것도 좋지만 작가님이라 부르는 것도 좋네요. 김해영 작가님...” “박 선교사님이 작가죠.” “목사님의 성령을 갑절로 받고자 기도합니다.” “이미 받았으니 제가 배워야할듯~ㅋ” “목사님의 이전 책들을 다시 읽으며 은혜받고자 합니다.” “배우는 자는 반듯이 넘어서게 됩니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비상하십시요~”“예...명심하겠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오흥상 목사님, 김길수 목사님, 임재범 집사님 와서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이 분 이야기를 하면서 시를 읽어주었습니다. 다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범 집사님은 대둔도 교회에 가서 이 시를 읽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오늘 예배 때에 ... 여러분 버티는 사람은 반드시 성장 합니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성장 합니다. 왜 성장해야 합니까? 러시아의 문화 톨스토이는 회심을 한 후에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은 것이 성장이었습니다. 인간은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성장해야 기쁘고 행복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지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장하는 자만이 남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능적인 요구의 삶은 그것이 사랑이던 헌신이던 곧 비극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쟁과 평화 안나까레니나 등 그의 모든 작품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 해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저는 성장이란 것에 대하서 절대적으로 공감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은 늙고 죽고 무엇이던지 썩고 부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순간이라도 성장이 멈추면 기쁨이 사라지고 회의 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을 돕고 외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모두 책을 읽던지 성장을 위한 시간 투자입니다. 예수님도어릴 때부터 키와 지혜가 자라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하였고, 젊은 나이에 교회를 맡아 사역을 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디모데 4:15-16절에서 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끊임 없는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빛이요 소금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기치고 그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습니까? 세상 보다 나아야 합니다. 더 성숙해야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이 한주간고 저와 여러분 들 모두 한 발자국 더 전진하고 성숙해지는 시간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주일 생명 말씀(2020.5.24.) 말씀/ 마태복음 9:11 죄인과 식사하시는 예수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2주 전 5. 14일 무안 풍성한 교회 김길수 목사님이 들렸습니다. 전화가 왔길레 갑자기 무슨 일인가했는데 정심식사를 하자고합니다. 그러면 다음날 12시까지 오라해서 대림 식당으로가서 명태탕을 시켰습니다. 그럴 보더니 좀 더 좋은 데로 가자고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왔는데 합니다. 아니 나는 이게 좋다고 했습니다. 국물 시훤하고 반찬도 좋고 여기오면 깡다리나 이걸 먹는다고 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교회에 외서 차를 마셨습니다. 차를 마시며 요즘 교회 어렵지 않는지 사모는 잘 지내냐고 물었습니다. 작년에 집사들이 무리져서 떠나고 장로님 부부와 몇 분이 남았는데 사모는 잠을 많이 못 잤다고 합니다. 아마 교회 상황 인간 관계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교회운영도 어렵겠네요 하니 교회 융자 받은 것 이자 150만원 값고 남어지 80만원 생활비 들어가는 것 그게 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사명감을 갖고왔나고 하니 교회는 어렵지만 감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에게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 여전히 말씀 섬길 수 있는 것이 주님 은혜라고 합니다. 맞장구 쳐줬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교회 없고, 성도 없는 목회자들 아주 많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언듯 듣기로 목회 접을까도 생각했던 모양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목회자기 되기까지 처음 이끌어주고 지도해주신 목사님 스승의 날 감사하는 마음 식사 대접을 한번 해드리고 싶었다는 것 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특하더라고요. 대게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해주십시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힘든 것 넉두리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주님은혜 감사하고 도리어 섬기는 마음을 가진 것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어렵다는 이야기를 튿고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봤는데 마음에 강동이 되어 돌아갈 때 교회명 감사헌금 50만원을 주고 당분간 어려울 텐데 10만원이라고 기도하는 마음 표현할테니 교회계좌번호 알려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요즘 매일 먹는 밥이 밥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몇 년 전에는 아들 대학 입학했다고 김치통 들려 인사를 왔길레 축하한다고 노트북 선물을 한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의날 밥을 사준다고와서 감동을 주길레 교회 감사한금도 전했습니다. 밥이라는 것이 참 묘하고 신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냥 "밥은 잘 먹고다니냐?" 묻거나 아니면 "식사 한번하죠 " 합니다. 그런데 평상 먹는 그런 밥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포함하고 관심과 사랑을 내포할 때는 강력한 힘의 메시지로 전달된다는 것 입니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되기도 하고, 무기력한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밥 한끼가 그렇습니다. 이기주씨 책 말을 품격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내 한 언론사 기자가 세계적 협상 전문가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교수님 대한민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입니다. 남북의 당국자가 만나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을 신경써야 할까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수의 대답은 기자의 예상을 벗어났습 니다. "글쎄요 협상 실무자들이 점심을 자주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휘둥그래진 기자가 되물었습니다. "네? 점심요?" "그렇습니다. 서로의 의도를 어림짐작하고 납득할 만한 제안을 건네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얘기를 먼저 주고받는 게 도움이 됩니다. 월드컵이나 스포츠 관련 화젯거리가 좋겠군요. 스무 번쯤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또 서로 사적인 영역도 파악해야 해요. 그런 다음에 제대로 된 협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 석사와 박사 위에 ‘밥사’라는 학위가 존재한다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교수님 밥을 자주 사드리는 사람이 학위를 받는다는 것 입니다. 오래전 신학대학 Thm 강의 들을 때 김명수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박사 되려면 책 값도 많이 들지만 밥값도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밥을 많이 샀는지 나중에 학위를 땄습니다. 조직이나 단체에서 동료를 위해 기꺼이 밥 한 끼 사는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 되고, 때로는 상식과 지식보다 밥을 먹는 회식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신문 정치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중에 ‘식사정치’라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정치는 밥상에서 시작 된다”는 말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식사 정치란 정치인끼리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라는 편안한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정치적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식사를 하는 것을. 말 합니다.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정치적 고비마다 '식사 정치' 카드를 꺼냈다고 합니다. 2013년 3월,공화당과 민주당은 예산 처리산을 두고 서로잡아먹듯이 으르넝거렸습니다. 예산 합의산을 끌어내기위해 오바마대통령은 공화당 의원 12명을 백악관 인근호텔로 초대했습니다. 폭설로인해 교통제중을 뚫고 거물급 정치인들이 집결해 함께 저녝을 먹었슥니다. 십사비용은 오바마 대통령이 시비를 털어 계산했습니다. 정국은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었지만 호텔을 나서는 의원들의 입가에서는 봄 햇살 닮은 웃음기가 돌았습니다. 식사 자리에세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갔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협상 전문가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는 협상에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명확한 답보다 함께 점심을 자주 먹었으면 좋다고 말합니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의도를 어림짐작하고 납득할만한 제안을 건네기 전 일상적인 얘기를 먼저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식과 지식보다 같이 밥을 먹는 행위 '회식'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회식은 비생산적이고 획일적인 단합 대회가 아닌 함께 밥을 먹으며 온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오바마의 식사정치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태도는 물론 장소와 방법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정치뿐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틀은 메신저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상대방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더라도 메시지를 전하는 당사자의 태도와 몸짓이 그 자체로써 메시지가 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장소인가도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막 문에 앉았다가 길가는 세 사람의 나그네를 달려나가 영접 합니다. 몸을 굽혀 영접하고, 발 씻을 물을 주고, 급히 장막으로 가서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도록 하고, 또 가축 떼에로 가서 기름지고 살질 송아지를 잡고, 젖과 우유와 함께 한 상을 차려 놓고, 자신은 서서 섬깁니다. 말은 없지만 아브라함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식사를 대접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떤 이는 부지중에 천사들 대접한 이들도 있으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히 13:2) 그러나 19장에 똑같은 손님을 대접하는 롯의 대접은 아브라함과 전혀 달랐습니다. 발씻을 물은 제공하지만 손님을 위한 식탁에는 겨우 무교병 맛 없는 떡만 있습니다. 그는 겨우 아브라함을 인해서 겨우 소돔 고모라 심판에서 피하지만 그의 아내는 조금기둥이 됩니다. 밥이 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믿음, 사랑, 존중, 정성 유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양성경에도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죄인들과 제자들과 그리고 무리들과 떡을 떼며 식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는 공인된 죄인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앉아 식사를 하십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지금이야 별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행동이 율법을 거스린다고 그들은 지적을 했지만 당신 죄인들에게는 무언의 강력한 메시지가 되셨던 것 입니다. 죄인을 부르러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편견 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는 의원이신 예수님!. 죄인들이 의인들과 상종도 할 수 없던 당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식사하셨다는 것은 정말 파격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 였습니다. 누가복음에 세리 삭개오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불러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겠다 하시자 삭개오는 내려와 즐거이 영접하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십니다. 그 때 뭇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그런데 죄인으로 그동안 자기 욕심만 채우던 삭개오는 그 식사자리에 서서 하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회개와 결단을 합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 예수님은 말씀만 아니리 행동과 삶은 강력한 감동의 메시지가 되어 아무 말씀 안 하셔도 삭개오는 스스로 회개하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그 동안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듣고 배웠는데도 깨달음이 더딘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가다 부활의 예수님 만나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식당에 들어갑니다. 식당에 들어가서 떡을 뗄 때 눈이 떠지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갔습니다. 더욱 극적인 사건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갈릴리 해변에서의 사건 입니다. 갈릴리 바닷가라는 장소도 그렇습니다. 그곳은 과거 제자들이 부름 받았던 곳이고 예수님과 추억이 많은 곳 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크게 낙심해서 갈릴리 고향 바다로 돌아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춥고 배고픈 아침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불을 피우고 떡과 고기를. 굽고 제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그렇게 중요한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 후 인데도 예수님은 책망이나 영적 교훈 한 마디 없이 다만 일상의 식사에 초대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주는 메시지, 떡과 생선이 주는 메시지. 처음 사랑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도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가 이런 나를 지금도 감당하주시는 예수님! 무언의 행동이었지만 그게 다 갈렬한 메시지가 되어 전달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눈물에 젖은 아침 식사를 하며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김수미의 "밥은 먹고다니냐'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이 분이 자주 집에서 밥ㅇ르 손수지어 사람들을 초대 하곤 한답니다. 연예인들 가수들도 뜨기 전에는 알고 보면 정말 힘들고. 배고픈 시절을 많이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수미는 그것을 알고 정성것 밥을 지어 옛날 어머니가 만들어준 그런 가정식 음식을 준비해서 섬깁니다. 그 밥을 먹는 사람들은 그냥 밥만 먹지 못합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들의 지나온 아픔 들을 털어놓고 치유를 받게 됩니다. 가수 설운도도 잔소리 심해진 아내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고, 간암으로 투병했던 김정태씨는 친엄마처럼 건강을 걱정하는 김수미에게 간이 안 좋은 집안 내력과 갑작스러운 투병으로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김수미의 국밥집 초대를 받고 “돌아가신 엄마가 부르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트롯 가수 김호중, 류강수도 나와서 밥을 먹으며 과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성이 들어간 밥은 밥이 그냥 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이런 밥을 가리켜 '밥은 하늘 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은 하늘 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 입니다" 공감이 됩니다. 우리도 기회가 되면 많은 말보다 이렇게 밥 한 끼 함께 나누며 서로 사랑과 신뢰의 메시지 위로와 존경의 메시지를 나누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사랑을 나누지 말고 한번씩 따듯한 밥을 사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임근호 형제님 오셨는데 일고보니 건강도 많이 좋아지고 열심히 농사일도 학, 신앙도 안정되어 교회도 다니는 것을 알고 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해남 가서 밥이나 한번 같이 먹어야겠습니다. 요즘 코로나 재난 지원금도 받았는데 누군가에게 밥 한끼 사주는 시간 가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죄인들과 제자들과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찬양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