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교회라는 하나님의 집에서 믿음생활을 시작한 본인은 이번 여행으로 터키와 그리스는 처음 가 보았지만 이스라엘을 세 번째였다. 처음과 두 번째 여행코스, 즉 이집트로 들어가 이스라엘을 거쳐 두바이로 나오는 여정이 출애굽과 시내산 등정 등이 주는 신비함과 성경말씀으로 인해 더욱 큰 은혜로 다가왔다. 이 글에서는 여행을 통해 얻은 터키, 그리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근세사적인 의미에 맞추어 적어보고자 한다.
여정의 순서에 따라 터키부터 시작해보면,
BC 2000년경 중앙아시아에 있던 흉노족이 14개의 왕조를 거쳐 오늘날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이동해왔으며, 이들은 수많은 민족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전사의 정신이 몸에 배인 민족이 되었고, 몽골족의 핏줄이 남아있어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을 뿐 아니라, 특히 6.25동란에 최정예군을 참전시킨 우방국이 되었다.
AD 1453-1923년까지 이 지역의 패자였던 오스만-터키제국은 국토의 광대함과 이슬람교의 수장국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교역역할을 독점적으로 수행하며 이슬람교의 전파와 사라센 문명을 이루어 인류 역사의 큰 핵을 장식한 강대국이었다.
터키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은 BC 660년경에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의 하나인 비잔티움이었으나 AD 330년경에는 동로마제국의 서울, 앞서 언급한 오스만-터키제국시대에는 동제국의 수도였으며 1923년 1차 대전 후 케말파샤에 의한 터키공화국의 수도가 앙카라로 바뀔 때까지 무려 1600년간 제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한 곳인바, 이곳의 성 소피아 박물관의 모습이 이러한 역사적 변천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 소피아 박물관은 그리스 시대에는 신전으로, 동로마제국시대에는 제국의 상징인 마그나이클리샤인 성 소피아 성당으로, 동방정교의 본령으로, 그리고 오스만터키시대에는 마야 소피아로, 이슬람의 자미로, 통치자 술탄의 예배처로 개조되었으니 각 시대의 흔적이 지금도 역력히 남아있다.
1차 대전 패배로 이슬람교는 터키공화국의 국교가 될 수 없었기에, 종교적인 용도보다는 하루에 2만 명의 관람객이 관광하는 터키 최대의 관광 수입원이 되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오스만터키제국의 몰락과 케말파샤의 탁월한 판단과 실행능력이었다. 즉, 오스만터키제국은 470년 가까이 이 지역의 최고의 맹주로서의 교만으로 인해 서구 유럽의 산업화와 민주화 및 국민 국가의 힘을 간과하였으며 특히 1차 대전에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등)에 잘못 합류하였다. 1차 대전의 패전으로 인한 오스만터키제국의 분할과 멸망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 케말파샤의 애국심은 이 나라를 이슬람국가에서 공화국으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로 하는 환골탈태의 협상안을 영국 등 승전국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오늘날 터키를 중심으로 독립국가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그 후 꾸준한 내부정비와 미국 등과의 친 서방 외교노선을 택해 지금은 연간 7%이상의 경제성장과 인구 7천2백만 명, 유럽 동남부, 지중해, 흑해 등에 걸친 78만 3천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국토는 강력한 국방력으로 주변 8개 국가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OECD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터키에서 수행한 사도바울의 선교활동은 그가 로마시민이었기에 로마의 황제 중심의 통치철학에 의한 핍박에도 조금이나마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AD 1세기경이었으며 아시아 7교회가 있었던 지역도 그 전부터 온천 관광지, 무역을 했던 항구였던 번화한 곳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당시 그의 선교활동은 아시아 7교회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은 가정교회의 수준이었다. 후에 AD 313년 기독교 공인 칙령을 내렸던 콘스탄틴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라나 황후의 깊은 신앙심에 힘입어, 사도바울의 선교활동이 높이 평가되었고 그녀의 지시로 그를 기리는 기념교회가 각처에 세워졌었으나 500년마다 닥치는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나마 초기 십자군 운동에 의해 많이 복구되었으나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자연재해와 이슬람교의 세력 팽창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20세기부터 카톨릭 중심으로 다시 복구되는 모습이다.
다음은 그리스를 여행한 소감이다.
오늘날 유럽경제위기의 상징인 PIGS의 하나로 지목되는 그리스의 어려움은, 잠시 다녀가는 관광객이어서 그런지 직접 느끼지는 못했다.
아테네 중앙역 지하철 근처나 중앙공원 어디에도 노숙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에서는 주택사정은 여유가 있어 더운 저녁에는 교외의 별장으로 나가기도 하며 관광수입이 소득의 40%를 차지하여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의 북유럽인의 주머니사정이 더 중요하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다만 관광 중 잠시 들른 화장품 가게 안내양의 상품 설명 끝에 “물건 좀 사주셔야 어려운 경제사정을 이겨내는 힘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리스의 어려운 경제사정이 실감났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는 BC 8세기에 고대문명을 폴리스 형태로 시작하였고, BC 6세기경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민주정치를 본격화하였으며 특히 마라톤, 살라미스대전 등의 페르시아와의 4차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자유시민의 자부심은 드높아졌다. 그러나 BC 5세기경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독재정치로 바뀌면서 소크라테스 등의 변론과 각종 연극, 시 등의 풍자에도 불구하고 이웃 스파르타와의 필로폰네소스 전쟁을 하였고 BC 338년에는 마케도니아에게 패퇴하며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사라졌다.
반도국가인 로마의 동방진출정책 중 일환으로, 로마는 그리스에 대하여 우대 및 존중 정책을 펼치며 그리스를 조금씩 로마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AD 376년 동로마제국이 성립하면서 그리스는 지구상에서 국가로서의 이름이 사라졌다.
세계문화유산 보물 1호인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보면서 가진 몇 가지 상념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1500여 년 동안 국가의 존재를 잃어버린 이 나라가 1823년부터 1827년까지 터키와의 독립전쟁을 통해 나라를 되찾은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바로 민주주의의 발상지로서 인류의 영원한 철학적 스승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출시키고 희극, 비극의 연극과 함께 인류에게 가장 멋진 그리스 신화를 만들어내고 전파했던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의 자부심이 독립정신과 전투의식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여겨졌다.
또 하나는 1687년 베네치아군의 아테네 공격 시 터키군의 탄약고로 쓰였던 파르테논 회당이 포격에 맞아 탄약이 폭발하면서 그때까지는 온전했던 신전 건물이 파괴되고 기둥 몇 개만 남게 된 것을 보고, 인류가 만든 그 어떤 최고의 걸작품도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아테네의 여신 아씨나를 모셨던 신전에서 기독교 교회로, 이슬람의 회당으로, 탄약고로 바뀌면서, 결국 볼수록 안타까울 정도로 훼손되는 것을 보고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영원히 온전할 수는 없되 오로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영원히 변치 않고 전승됨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가 우리에게 직접 주는 교훈을 살려보면, 6.25전쟁의 발발 시 북한의 남침을 즉각 침략으로 간주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스탈린의 세계적화전략의 한 곳이 그리스요, 다른 한 곳이 우리 남한임을 간파한 것이라는 점이다. 1948년 그리스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좌우대립을 겪게 되었으며 이는 1950년 한국전쟁에도 소련의 배후 획책임을 알고 유엔을 통해 이를 즉각 저지할 수 있는 안목을 미국이 갖게 된 것이니,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리스의 내전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 싸움의 결과는 그리스를 사회보장정책을 과도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무상교육, 전 국민 연금제, 의료혜택 등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하였고 관광수입이 40%를 차지하는 입장에서도 조상이 물려준 자존심으로 버티는 듯하였다.
한편 아테네의 엘리트들을 전도하는 데 실패한 사도바울이 18개월 가까이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함께 천막을 깁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설교를 강론하며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고린도 교회의 옛 정취가 남아있는 곳도 겐그리아 항구와 가까운 곳으로, 여기는 토착세력의 횡포가 비교적 적고 여러 민족의 교류가 빈번한 곳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대하여 비교적 전도하기에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교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이자 핵심목표지인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전쟁분위기가 가시지 않는 곳이었다. 공항 입출국 절차가 가장 까다롭고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대한 높은 장벽 울타리며 검문, 검색이 일상화된 듯하였다. 이스라엘의 총인구 720만 명 중 15%가 아랍인이나 그들의 수입은 이스라엘인의 평균 수입이 32,000달러인데 비해 1천 5백 달러 수준이라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그런 가운데에서도 친 이스라엘 시민권 신분으로 바꿔야 생계가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봄의 언덕이라는 텔아비브, 평화의도시라는 예루살렘은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는 비아돌로로사 라는 단어에서 현실의 양면성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는 것 같다.
흔히 유대인은 흙, 토라, 안식일, 메시아 그리고 가정을 싸들고 다니는 민족이라고 한다. 땅의 신앙은 룻기로, 토라는 유대인의 생명을, 안식일은 유대인의 존재 의미를, 그리고 메시아는 그들의 꿈이요 기다림인 것이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있으며 한 몸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에 간 아들이나 출타중인 부모를 마치 같이 있는 것처럼 식탁에 수저를 두고 밥을 준비해두고 기도드린다.
1948년 독립을 한 이스라엘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국 등과의 정치 외교적 차원의 안전조치로서 입출국을 허용하는 듯 했고 관광수입에 관심이 많은 듯 하였다.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의미인 마사다의 비운을 국가 수호의 이념으로 승화시켰고 2천년전에 숨겨둔 사해 구약 사본을 국보로 생각하고 금덩이를 보관하듯 엄중한 보호 장치 속에 보관중이라 한다.
감람산-올리브-갈릴리-무덤교회-통곡의 벽이 주는 한없이 큰 울림과 함께, 사해사본을 소중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스라엘의 성서적 의미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가장 소중히 우리 마음속에 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여행을 통해, 그리스나 터키의 경우에서처럼, 국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따라오는 국정책임자와 국민의 교만에 의해 결정되는 국가의 존망을 보며, 한편 그리스의 페리크레스, 터키의 케말파샤,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등 영원한 상징적 지도자가 우리나라에는 준비되고 있는지, 세계 강대국의 이해가 상충할 가능성이 높은 우리 한국을 생각할 때 가슴이 답답해진다.
첫댓글 세계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다시 읽는 기분으로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 자주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계3대 정복자 중 한 사람인 아띨라가 최근에 흉노족이라는 것이 문헌상으로 확실히 밝혀졌고, 백두산 화산폭발 수년 전에 발해가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야율라보기 한테 나라를 내어 준 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던 우리의 조상이 캄차카, 그리고 중근동 으로 무슨 이유인지 이동해 간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현재 터키어나 인디안 언어에 우리의 고조선 시대 어휘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장포의 글 다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