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호랑이, 김종서
신 웅 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밝은 달은 눈 속에 찬데 만리 국경에 큰 칼을 짚고 서서 긴 휘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구나. 함경도에 육진을 개척, 여진을 호령할 때 지은 호기가이다. 무인의 호방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김종서가 세종께 육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 비록 내가 있으나 종서가 없이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세종은 일체를 그에게 위임했다.
육진을 설치하던 날 술과 풍류로 장수들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살 하나가 그의 술잔을 꿰뚫었다. 그는 아무런 놀람도 없이 태연히 앉아 술을 마셨다. 그는 그렇게 담대했다.
어느날 맹사성이 황희에게 물었다.
" 대감, 종서는 당대의 훌륭한 관리인데 왜 그리 매양 허물만 하시오?"
" 고불, 내가 종서를 미워하는 것 같으시오?"
" 종서를 아껴서 그런 것이오. 종서는 큰 그릇이오. 허나 고집이 세고 과격하여 자칫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오. 훗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경계하려는 것이오 "
황희는 훗날 김종서를 정승으로 추천했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는 호는 절재, 본관은 순천이다.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세종 16년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 여진족을 평정하고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했다.『고려사』를 개찬하고 『고려사절요』를 감수했다. 단종 1년 수양대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지략이 뛰어나고 강직해서 대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저서에 『제승방략』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한다. 시호는 충익이다.
그는 계유정란의 첫 희생자였다.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등에게 후일의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김종서의 권력이 커지자 야심 많은 수양 대군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수양 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다. 대권에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은 물론 김종서였다. 1453년(단종 1년) 계유년 10월 10일 수양은 무사, 유숙․양정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찾았다.
“ 좌의정 대감을 뵈러 왔네 ”
김종서의 아들 승규가 집 안으로 안내했다.
김종서가 서둘러 방안에서 나왔다.
“ 대군께서 저녁 무렵 어인 일이시오? ”
“ 긴한 말이 있어 왔소이다. ”
“ 안으로 드시지요. ”
“ 아니오, 여기서 잠깐 얘기를 나누시지요. ”
김종서의 좌우에는 아들 승규․사면․광은이 버티고 서 있었다. 섬뜩했으나 수양대군은 태연한 척했다.
“길을 가다 사모뿔을 잃어버렸소이다. 좌상댁이 여기라 빌리고자 들어온 길이외다.”
김종서는 내심 의아했으나 아들 승규에게 가져오라 했다. 승규가 사모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 때였다. 유숙․양정이 김종서의 뒤통수를 철퇴로 내리쳤다. 순간 승규는 몸을 날려 아버지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아들 승규가 정통으로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숨이 붙어있는 김종서를 다시 내리쳤다. 김종서는 그만 실신했다.
얼마 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 차 이흥상을 보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던 김종서를 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 호랑이는 갔다.
수양 대군은 단종에게 아뢰었다.
“김종서가 모반하여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계할 틈이 없었나이다.”
“숙부, 날 살려주시오.”
“염려마십시오. 전하.”
수양 대군은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이하 여러 신하들을 불렀다. 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이 연달아 살해당했다. 안평대군과 정분은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한명회의 살생부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어나갔다.
계룡산 동학사의 숙모전(충청남도 기념물 제 18호)에는 계유정란 때 죽은 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월 장릉의 배식단, 공주의 요당서원에도 배향되었다. 김종서의 묘는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있다. 당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어 시신 전부를 거두지 못하고 다리 한쪽만 묻혔다고 한다. 생가지는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 있다. 의당초등학교 건립시 이 유허지를 확보하여 1927년 개교 이후 학생들의 교육장으로 관리해오고 있다.
그의 또 하나의 호기가 한 수를 소개한다.
장백산에 기를 꼿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장백산에 기를 꽂아놓고 두만강에 말을 씻기니 모함하고 시기하는 썩은 선비들아, 이 장한 우리의 사나이다운 모습을 보아라. 당태종이 스물네명의 공신의 얼굴을 그려 붙인 능연각에 누구의 얼굴을 그려넣어야 하겠는가. 변방 개척의 공로를 씩씩한 기개로 표현한 작품이다.
역적과 충신, 명분과 실리의 잣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 필요한 때이다.
김종서묘. 충남 기념물 제16호.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 45
김종서장군유허비
-출처 : 신웅순, 『시조는역사를 말한다』(푸른사상,2012),145-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