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곱 명의 사람들이 희귀질환인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1980~90년대 유행했던 드라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들이 걸리는 질병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재생 불량성 빈혈은 정상인의 뼈 속에 존재하는 골수(骨髓)가 황색 지방 조직으로 대체되는 질환이다.
골수는 혈액을 생성하는 기관이므로, 골수가 지방 조직으로 변한다는 것은 조혈(造血) 기능이 떨어짐을 뜻한다. 즉,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리게 되면 환자는 적혈구 부족으로 인한 빈혈과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면역 기능 저하, 그리고 혈소판 부족으로 인한 출혈 등의 증상으로 고통받다가 치료하지 않으면 6개월~1년 내에 사망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질환이다.
이처럼 재생불량성 빈혈은 매우 심각한 질병이지만, 발병율이 100만명당 2~6명 꼴로 매우 낮은 질환이다. 그런데 전체 인구가 10만도 채 못 되는 작은 마을에서 짧은 기간에 일곱명이나 사망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이 이 마을에서 재생불량성 빈혈의 발병율을 이토록 끌어올린 것일까?
희귀난치병인 재생불량성 빈혈의 집단 발병은 드라마 [메디컬 인베스티게이션]에서 다뤄진 에피소드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NIH(미 국립보건원) 소속 기동의학팀이 작은 마을에 닥친 비극을 조사하기 위해 급파된다. 처음에 이들은 아버지와 딸이 동시에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이 가족의 어머니가 만성 C형 간염 환자였으며 최근에 사망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들이 우려했던 것은 ¡Ç전염되는¡Ç 재생불량성빈혈이 발생한 것인지의 여부. 극히 드문 예이긴 하지만, 간염바이러스가 재생불량성빈혈을 일으킨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곧 간염과 재생불량성 빈혈은 관계가 없음이 밝혀지고, 기동의학팀은 다시 범위를 넓혀 일곱 명의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에 주목한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모두 다른 이들. 그러나 그들을 유일하게 이어주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새우를 좋아했고, 같은 생선 가게에서 새우를 사다가 먹었다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그들은 재생불량성 빈혈의 집단 발병 원인이 새우에 있다고 결론내린다. 맛 좋고 영양가 높은 해산물로 손꼽히는 새우가 도대체 재생불량성 빈혈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 클로람페니콜, 무서운 두 얼굴
자료: 이화 조혈모세포 이식센터( http://www.ewhabmt.org)
그들이 새우를 재생불량성 빈혈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이 새우에서 높은 농도의 클로람페니콜이 검출되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람페니콜은 재생불량성 빈혈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알려진 화학물질로, 드라마 내용 자체는 허구였지만 클로람페니콜에 의한 재생불량성 빈혈 발병 사례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 클로람페니콜(Chloramphenicol)은 1947년 베네수엘라의 지역에 서식하는 토양세균인 ¡ÇStreptomyces venezulae¡Ç에서 발견된 물질로, 항균작용이 있어서 ‘클로로마이세틴’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된 항생제였다. 클로람페니콜은 세균의 단백질 합성 기능을 저해하여 방식을 통해 항균 작용을 가지는데, 그람 음성 및 그람 양성 박테리아의 성장을 방해할 뿐 아니라, 리케치아나 클라미디아, 마이코플라스마 등 다양한 미생물에 대해서도 살균 작용을 지니는 광범위한 항생제이다.
페니실린이 푸른 곰팡이에서, 결핵 치료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이 방선균의 일종인 Streptomyces griseus에게서 얻어진 것처럼 진균류나 방선균류에서 항생물질을 얻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클로람페니콜은 초기에는 방선균에서 얻었지만, 최초로 인공 합성법을 알아낸 항생제로 꼽히는 물질이었다.
공장에서 인공 합성이 가능해지자, 클로람페니콜은 대량 생산되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클로람페니콜이 주목받은 곳은 축산 분야였다. 클로람페니콜은 소나 돼지 등 가축들에게는 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미생물에 대한 항균 효과가 뛰어났기에 가축들의 질병을 예방 및 치료하기 위한 축산용 항생제로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인공합성이 가능하고 광범위한 미생물들에 살균 작용을 가지며, 경구 및 비경구로도 모두 흡수가 잘 된다는 특성(클로람페니콜은 약이나 주사 모두 사용가능하며, 안약을 통해 점막에 넣어도 흡수가 잘 된다) 때문에 1950년대 클로람페니콜은 사람과 동물에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몇 년 지나지 않아 클로람페니콜이 재생불량성 빈혈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동물 실험을 통해 생쥐와 고양이, 개와 토끼에게서 클로람페니콜 투여 이후 골수에 이상이 있음이 알려진다.
곧 이어 사람에게도 클로람페니콜이 골수 독성을 가진다는 보고가 등장했다. 감염으로 인해 클로람페니콜을 투여받은 몇 달 뒤,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사 결과, 클로람페니콜에 의해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릴 확률은 1만1500분의 1로 나타났다. 겨우(!) 만 분의 일의 확률이지만, 일반적인 재생불량성 빈혈의 확률이 10만분의 1에서 100만 분의 1 정도인 것에 비하면 10~100배 이상 높은 수치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클로람페니콜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체에 사용하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으며, 동물의 고기를 통해 인체에 유입될 가능성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식용 가축에게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식품 중 클로람페니콜 잔류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보고되는 실정이다.
● 사라지지 않는 악연의 고리[메디컬 인베스티게이션]에서 기동의학팀은 결국 재생불량성 빈혈을 일으킨 환자들이 먹은 새우가 높은 농도의 클로람페니콜에 오염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그 경로를 추적한다. 조사 결과 새우는 베트남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이에 같은 시기에 수입된 새우에 대한 유통을 금지하고 수입 수산물에 대한 검역을 강화하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끝난다. 현실에서도 클로람페니콜은 어류와 새우 등의 해산물과 우유, 꿀 등에서 자주 검출된다. 그런데 왜 하필 베트남산 새우였을까?
지난 2005년 일본 후생 노동성은 베트남산 수입 새우의 모니터링 결과, 클로람페니콜이 검출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미 2002년 유럽 연합에서는 베트남산 새우와 해산물에서 클로람페니콜이 검출되어서 경고한 적도 있었기에 이 드라마가 만들어질 2005년 당시, 베트남산 새우에 대해서는 일종의 낙인이 찍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진국에서는 클로람페니콜의 골수 독성으로 인해 식용 동물에게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 지역에서는 여전히 클로람페니콜이 축산용 항생제로 통용되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입산 먹거리가 문제가 된다면, 이를 수입 금지하는 조치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클로람페니콜의 사용이 이미 중지된 곳에서도 여전히 클로람페니콜이 검출된다는 것이었다. 클로람페니콜의 사용은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새우와 물고기를 비롯해 가축의 고기와 우유, 벌꿀 등에서는 클로람페니콜이 검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하나는 클로람페니콜의 자연발생론이었다. 원래 클로람페니콜은 토양에서 자연 서식하는 방선균에게서 추출해낸 것이었다.
이에 자연적으로 토양 속에는 클로람페니콜을 합성해내는 방선균들이 살고 있을 것이며, 이들이 동물들이 먹이를 먹을 때 유입되어 자연스레 클로람페니콜이 동물들의 몸 속에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hari@hanmail.net
[참고] 용어설명
1. 그람 염색법에 의한 분류
: 흔히 세균을 분류할 때, 그람 양성 혹은 그람 음성으로 분류하곤 한다. 이런 방식의 세균 분류는 원래 1884년 덴마크의 의사 H.C.J.그람(Gram)이 고안한 세균 염색법에서 시작되었다. 그람은 아닐린과 아이오딘 등을 이용하여 만든 염색약을 표본에 처리한 뒤, 이를 에탄올로 씻어내면 조직은 탈색되지만, 세균은 탈색되지 않고 자주색을 띠고 남아 있음을 알아내 이를 ‘그람염색법’이라 명명했다.
그람염색은 사람이나 동물의 조직 속에 섞여 있는 세균들을 관찰할 때 편리한 방법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조직 속에 세균들이 섞여 있으면 육안으로 구별하기가 불편한데, 그람염색을 거치고 나면 세균만 자주색으로 염색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세균이 발견되면서 그람 염색이 반드시 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세균 중에는 에탄올을 처리하면 탈색되는 세균도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이에 그람염색을 통해 탈색되지 않는 균을 그람양성균, 탈색되는 균을 그람음성균으로 분류하게 된다. 초기에 그람염색은 그저 염색과 탈색의 차이 정도로 받아들여졌으나, 곧 이것이 항생제와 연결되면서 그람 양성인지 음성인지가 항생제 감수성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항생제의 종류에 따라 그람 양성균에만 작용하는 것도 있고, 그람 음성균에만 작용하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물론 클로람페니콜처럼 양쪽 모두에 작용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의 경우, 그람 양성균에 의한 질병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람 음성균에 의한 질환에는 (임질균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따라서 그람염색법에 의한 분류는 특정 질환에 가장 효과적인 항생제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다.
2. 리케차
: 리케차 속에 속하는 병원성 미생물. 발진티푸스, 츠츠가무시병, 선열, Q열 등을 일으키는 원인균이 리케차 속에 속한다. 리케차는 세균의 일종이지만, 보통의 세균들이 숙주에 기생하지 않아도 인공 배양이 가능한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세포 내에서만 증식이 가능한 특징을 보인다. 숙주 내에서만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기나 물로 전염되지 않으며, 진드기, 이, 벼룩 등 흡혈성 절지동물에 기생하다가 이들이 인간의 피를 빨 때 혈액 속으로 유입되어 질병을 일으킨다.
3. 마이코플라스마
: 마이코플라스마는 균류 마이코플라스마 속에 속하는 미생물로, 바이러스와 세균의 중간 크기(125~250nm)를 가진 미생물이다. 페니실린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항생제에 의해 저항성을 가지며, 종류에 따라 인체에 감염되었을 때 폐렴이나 관절염 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첫댓글 TV르뽀에서 보았는데요. 동남아시아에서는 새우가 살던 물은 '죽음의 물'이라고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