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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 傳 조선의 청백리, 탐관오리
정권교체기 어지럽힌 간신들
“정치는 어려운 것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라”
연산군에서 중종을 거쳐 인종·명종으로 이어지는 1백년 역사는 한결같이 어리거나 무능하지 않으면 폭군이 대를 이었고 그 아래 탐관오리들이 농간을 부려 나라를 어지럽혔다.
朴 成 壽
조선 오백년의 정치사를 돌이켜보면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얼룩져 있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의 경우도 역시 조선시대의 사화나 당쟁 못지않은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50년사는 조선왕조 5백년을 그대로 본떠 만든 축쇄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가 다르고 체제가 다른데도 우리네 정치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비슷한 발상과 비슷한 행동양식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콩 심은 데 팥이 안 나고 팥 심은 데 콩이 안 나기 때문인가. 올해 또다시 총선의 날이 다가왔다. 국민들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지만 아직은 별로 기대를 걸 만한 인물들이 없다는 눈치다. 그러나 좋건 싫건 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조선시대의 정상적인 대권이양은 왕위계승이었다. 정권교체도 있었으나 모두 합법적인 왕위계승으로 위장되었다. 왕위계승은 원칙적으로 임금이 정궁(正宮)에게서 낳은 아들, 즉 대군(大君)들 중 한 명(보통은 장남)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것을 말하지만 세자 책봉만은 임금의 절대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장남 아닌 차남이 될 수도 있고 또 적자 아닌 서자 중에서 세자를 책봉할 수도 있었다.
또 세자 책봉은 원칙적으로 왕이 등극한 뒤 되도록 빨리 매듭짓는 것이 국태민안에 도움이 되었으나 이것 역시 임금의 고유권한이라 끝까지 미루는 경우도 있었다. 11대 임금 명종(明宗)이 그 좋은 예다.
명종은 선조(宣祖)의 바로 앞 임금이었으나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서 차라리 임꺽정이 황해도에서 활동하던 때의 임금이라 해야 알 정도다. 임꺽정이 등장한 것은 7년 잇따라 흉년이 든 데다가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 일파의 탐학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종은 양주 출신 백정보다도 이름없는 임금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나이 겨우 열두 살에 등극하여 22년 동안 재위하다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건강에 문제가 있던 임금이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외척들이 발호하여 농민에 대한 엄청난 수탈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명종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임금이다. 또 의심이 많아서 세자 책봉을 재위 20년이 넘도록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판서 민기(閔箕)가 경연 때 은근히 세자 책봉을 독촉하였다.
탐관오리 민기(閔箕)
『자고로 후계자를 정하여 대통(大統)을 잇는 것은 나라의 근본(國本)을 세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벌써 20년이 넘게 보위에 계시온데 아직도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하루 속히 정하셔야 할 줄 아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 젊고 무능하고 욕심 많은 명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민기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민기는 명종이 죽은 뒤 선조가 등극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명종에게 세자 책봉을 진언한 공로 때문이었다. 요즘에도 명종 때의 민기처럼 차기 집권자인 선조를 위해 뛰는 사람이 많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민기는 탐관오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민기의 집은 청백리로 이름난 백인걸(白仁傑)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끼리 서로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민기는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였다. 정승에 오른 뒤 겉으로는 착한 선비들을 돌보는 것처럼 행세하였으나 실상은 요리조리 눈치를 살펴보고 일을 처리하는 살살이였다. 그래서 민기를 조광조(趙光祖)에 버금가는 대학자로 잘못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당대의 명재상 이준경(李俊慶)의 견해는 달랐다.
『민기는 몸가짐을 단속하는 일이 없이 집안의 비첩을 모두 간음하고 대문으로는 크고 작은 뇌물이 잇따라 들어갔으니 그를 어찌 학자라 할 것이며 청백리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아무리 겉으로 시치미를 떼고 큰인물인 척해도 언젠가는 속이 드러나 보통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무능한 명종에게 전혀 아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렵게 아이를 하나 얻었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그러니 더더욱 보위를 조카에게 넘겨주기 싫어했다. 그것도 적자 아닌 서자 계통의 조카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으니 명종으로서는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싫어도 넘겨주어야 할 것이 왕좌였다. 명종이 후계자를 고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 있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모아 놓고 자기가 쓴 왕관을 벗어 앞에 놓았다.
『너희들, 이 모자를 한번씩 써보도록 하라. 누구의 머리가 큰지 시험해 보겠다』
임금이 평상시에 쓰는 모자를 익선관(翼善冠)이라 했다. 왕관인 것이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해도 신하가 써서는 안될 모자가 왕관이었다. 그런 엄청난 모자를, 임금이 써보라고 한다 하여 왕손들이 어리석게도 모두 한번씩 써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젠가는 이 모자를 쓰게 될 것이라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모자는 나이 순으로 써보았는데 제일 마지막 차례가 어린 선조였다. 선조는 불과 열다섯살이었는데 깜찍스럽게도 모자를 써보지 않고 두 손으로 받쳐들고 도로 임금 앞에 갖다 놓았다.
『이 관이 어떤 관인데 신하가 함부로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이 한마디로 명종은 선조를 왕위계승자로 낙점했다.
간신배를 멀리하라
명종이 후사가 없어 조카인 선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나 선조는 겨우 16세 소년이었다. 명종 자신은 그보다 더 어린 12살에 즉위하였다. 명종은 그의 이복형인 인종(仁宗)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인종은 나이 30세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어린 명종이 즉위하게 되었고 이때 소윤과 대윤 사이에 외척싸움이 벌어져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 때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때 마저 죽이고 말았다.
중종(中宗)은 인종과 명종의 아버지였다. 그 또한 19세에 즉위하였는데 이복형인 연산군을 승계했다. 승계했다기보다 폭군 연산군이 폐위당한 자리에 앉았다. 중종의 아버지 성종(成宗)도 나이 15세에 즉위하였으니 서기 1470년에서 1568년까지 근 1백년 동안 임금이 다섯번 바뀌면서(연산군 제외) 모두 어린아이들이 왕위에 올라 늙고 교활한 간신배들에게 권력을 농락당하였으니 부정부패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어린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애비의 마음이 오죽 불안했겠는가. 아무리 충신이 있어 왕을 보필한다 하더라도 선왕이 살아 있을 때 말이지 눈을 감으면 벌써 마음이 달라진다. 그러니 누굴 믿고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겠는가. 왕비가 있었지만 아내 또한 믿을 것이 못 된다. 외척이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자신이 반정공신들에게 업혀서 등극했기 때문에 정치가 어려운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종이 여섯살 되던 해에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면서 교명문(敎命文:세자책봉 때 내리는 훈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자를 세우는 것은 나라의 큰 근본이다. 이제 어린 너를 세자로 책봉하니 공부 잘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라. 너 세자는 반드시 가르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하는 공부를 익히도록 하라. 그리고 항상 정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잊지 말라』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고 정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잊지 말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요즘에는 40대, 50대도 믿을 수 없는 판인데, 나이 겨우 여섯살 난 어린아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일이니 얼마나 불안하고 조심스러웠겠는가.
그런데 인종을 낳은 어머니 윤씨는 곧 죽고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들어와서 늦게 명종을 낳았다. 중종이 55세가 넘어 노환이 들자 어느날 밤, 동궁(東宮)에 불이 났다. 동궁에는 세자(인종)와 세자비가 자고 있었는데 밖으로 뛰어나오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자칫 죽을 뻔했다. 누군가 방문을 잠가 놓고 방화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나자 문정왕후는 도리어 어린 명종을 안고 중종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누가 이 아이를 죽이려 든다는 것이었다. 동궁에 불을 질러 세자를 죽이려 해놓고 도리어 자기 아이가 죽는다고 엄살을 부린 것이다. 늙은 중종은 젊은 문정왕후의 말을 곧이 듣고 명종을 무릎에 앉히고 『네가 만일 공주로 태어났던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남자가 늙으면 첩에게 약한 법 아닌가.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처 자식인 세자(인종)가 불에 타는 것보다 멀쩡한 첩의 자식이 훨씬 더 귀여워 보였으니 늙은이 마음이 다 그런 것인가.
그러나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8개월 만에 죽은 것은 조선왕조 정치사의 한 숙명이었을까. 만일 인종이 단 10년이나마 재위했던들 을사사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간신 이기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기가 어떤 사람이었나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호로 미루기로 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한다.
측근자를 경계하라
그러나 중종과 명종의 왕위 이양은 차라리 평화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종은 폭군 연산군을 밀어내고 보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자력으로 형인 연산군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속칭 삼대장(三大將)이라 불리던 혁명 주체세력에 의해 보위에 올랐다. 말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에게 업혀서 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종은 보위에 오르기까지의 행태부터 꼴불견이었고 오른 뒤에도 차마 있을 수 없는 실정을 거듭했다.
연산군 타도의 주역은 박원종을 비롯하여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 소위 삼대장이었다. 이들 세 실세는 반정에 성공한 뒤 번갈아 영의정을 해먹었다 하여 일명 삼대신(三大臣)이라고도 했다. 반정군의 삼대장 시절에는 폭군 연산군을 몰아냈다 하여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반정 후에는 연산군 못지않은 오만불손과 부정부패로 인해 삼대신 하면 국민의 원수였다. 즉 소신없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욕만 채우다 보니 이름은 반정이었으나 그 실질은 뒤엎어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 뒤엎어 다시 부정으로 되돌아간 단순한 정권이동이요 인물교체였다. 이런 것을 두고 도루묵 혁명이라 한다.
중종반정의 삼역인 박·성·유 세 사람은 모두 무과 출신이었고 연산군에게 총애 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숙청을 당한 사람이었다. 연산군의 하루 일과는 사냥과 주연이었다. 박원종을 비롯한 무신들은 연산군을 모시고 사냥 가는 일이 그 전부였다. 그래서 어떤 충신은 나랏일을 걱정하여 『전하! 사냥을 하시다가도 마상(馬上)에서 시구(詩句)를 생각하소서』라 충고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연산군은 진노하여 그를 귀양 보냈다. 그런 이유로 억울하게 귀양살이하게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므로 거사만 하면 전국에서 벌떼같이 의병이 일어날 판이었다.
성희안은 연산군이 아직 세자로 있을 때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成宗)을 따라 양화진에 놀러갔다가 『성상께서는 본시 깨끗한 선비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聖心元不愛淸流)』란 말을 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이조참판 벼슬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11년 연산군 시대를 재야에서 우울하게 세월을 보냈으니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원종은 우연치 않게 그런 성희안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 박원종의 원한은 그 성질이 좀 달랐다. 박원종 집안은 누님을 왕실에 시집 보낸 아주 부잣집이었다. 그러나 공부가 시원치 않아 문과를 못하고 무과에 합격하여 연산군 밑에서 호위병 노릇을 했었다. 그런데 연산군이 자기 숙모라 할 박원종의 누이를 범간하였으니 도저히 그런 놈을 임금으로 모시고 다닐 수 없었다.
유순정은 반정 당시 이조 판서로 있다가 제1착으로 포섭되어 박원종, 성희안을 지원한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이 저지른 갑자사화와 기묘사화로 유배된 사람이 전국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먼저 일으키는 자가 임자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하마터면 다른 사람이 먼저 거사하여 주도권을 빼앗길 뻔했었다.
군의 동원은 박원종이 맡고 동조세력 규합은 성희안이 맡았다. 박원종이 비밀리에 동원한 군대는 평소 연산군을 모시고 토끼사냥을 하던 바로 그 군대였다. 거사일은 연산군 11년 9월 1일 저녁이었고 집결지는 지금의 을지로 6가 훈련원이었다.
형제는 겁쟁이였다
훈련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에 입성하는 모습은 마치 12·12군사반란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한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박원종이 백마를 타고 부채를 휘두르며 군을 지휘하는 모습은 마치 귀신이 나타난 것과도 같았다』고 한다.
그때 연산군은 사냥을 나가기로 했다가 계획을 취소하고 기쁨조인 흥청(興淸)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밖에 반정군이 들이 닥쳤다는 말을 듣고 『활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는데 중전이 급히 말렸다. 중전 신씨(愼氏)는 『공연히 저항하다 죽는 것보다 항복하여 비는 것이 죽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본처가 제일이었다. 흥청들은 모두 도망갔고, 대신들도 수챗구멍으로 궁을 빠져 나가다가 실족하여 뒷간에 빠졌다. 이때 연산군은 겁에 질려 턱이 떨리는 바람에 살려달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박원종의 과감한 군사행동으로 겁에 질린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되었다. 연산군은 이내 교동에서 죽고 연산군의 이복동생 중종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박원종은 경복궁에 입성하기에 앞서 일부 부대를 중종의 사가(私家)로 급파하였다.
중종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이었으나 영문을 모르는 중종으로서는 밤중에 말 탄 군사들이 들이 닥쳐 집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부인 신씨(연산군의 중전과 같은 신씨)에게 떨면서 말했다.
『필경 연산군이 나를 죽이려고 군사를 보낸 것 같소. 이대로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편이 낫겠소』
부인 신씨는 『너무 성급하십니다. 그러지 마시고 먼저 밖으로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기로 합시다. 만일 군사들이 말머리를 우리 집 쪽으로 향해 지키고 있으면 당신을 죽이려는 것이지만 그러지 않고 군사들의 말이 엉덩이를 보이고 있으면 우리집을 경호하러 온 것이니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과연 부인의 말이 옳았다. 하인이 나갔다 들어오더니 『말 엉덩이가 우리집을 향해 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혁명은 끝나 이튿날 중종이 경복궁의 근정전에 나아가 옥좌에 앉았다. 죽는 줄만 알았던 것이 하룻밤 사이에 운명이 바뀌어 일약 최고 통치자가 되었으니 순전히 조강지처 신씨의 덕이었다.
그러나 급히 먹은 떡이 잘 소화될 리 만무했다. 중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삼대장은 소위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으스댔고 왕은 이들이 나타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나갈 때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서 있었다. 이런 중종에게 가장 아픈 결정은 부인 신씨를 폐하고 궁에서 내쫓은 일이었다. 신씨는 조강지처가 아닌가. 반정이 일어나던 날 밤 자칫하면 죽을 뻔했던 중종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런 신씨를 삼대장의 강요에 못이겨 쫓아내야만 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겠나.
신씨를 내쫓고 얻은 아내가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25세에 죽고 말았다. 다음에 얻은 왕비가 문제의 문정왕후였다. 수렴청정의 원조였고, 명종을 낳고 중종에게 눈물을 흘렸던 부인이다. 조강지처 신씨는 죽은 뒤에 정비로 복권되지만 죽은 뒤의 일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반정공신 가운데 박원종의 공이 제일 컸기 때문에 그에게 내린 상도 가장 후했다. 반정 후 ‘박원종’ 하면 시골 나무꾼이나 소먹이는 아이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배운 것이 없는데다가 성깔이 고약해서 조금이라도 자기 의사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을까. 그런 박원종이 중종 5년 3월에 스스로 관직을 버리니 모두가 후련하게 생각했다.
박원종의 흥청망청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박원종이 중종반정에 성공한 뒤 개혁의지만 뚜렷했더라면 조광조 못지않은 정치가로 대접받았을 것이고 조선왕조의 정치사는 그 진로를 크게 바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거들먹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른바 건달정치가였다. 게다가 연산군 못지않은 호색가요 탐관오리였다.
한 젊은 예조 낭관(郞官)이 박원종 저택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가 목격한 박원종의 사치는 도원경을 방불케 했다.
『박원종 집에 들어가려면 대문 세 개를 지나야 했다. 대청마루에 이르니 붉은 난간에 푸른 창문이 너무 화려하여 눈이 부셨다. 다시 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그마한 누각이 날아갈 듯 서 있고 붉은 발이 땅에 드리워져 있어 마치 구름 속을 가는 것 같았다. 이때 한 시녀가 머리에 장식을 하고 누른 적삼 붉은 치마를 땅에 끌면서 나오더니 「대감께서 듭시라 합니다」 하였다.
다시 문 하나를 들어서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박원종이 연못가 평상 위에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박원종 옆에는 수놓은 베개와 비단자리가 놓여 있고 옆에 두 여종이 부채를 들고 서 있었다. 발을 드리운 배후에는 수많은 시녀들이 수청을 들고 있었다』
삼대장의 한 사람인 성희안도 마찬가지였다. 성희안은 제일 먼저 계획한 사람이었다. 박원종의 배후에서 반정을 사실상 반정을 조직한 사람이었는데 일하는 것이 치밀하지 못하여 실수가 많았다. 연산군 치하에서 두 차례 사화를 사실상 주도했던 역적 유자광을 반정에 가담시켜 비난을 샀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데다 공부가 시원치 않은 점 또한 박원종과 같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삼대장이 중흥의 공신으로 추대되어 영화를 누렸으나 자기 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여 세상에 남길만한 공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특히 성희안은 일찍이 평양에서 만난 기생 신(申)씨를 못 잊어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형편없는 위인들이 우연하게도 거의 때를 같이하여 죽었으니 세상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셋 모두 자기 욕심만 채우는 데 혈안이 되었으니 염라대왕께서 그들을 한꺼번에 잡아갔던 모양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연산군에서 중종을 거쳐 인종·명종으로 이어지는 1백년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한 시기였다. 한결같이 어리거나 무능하지 않으면 폭군이 대를 이었고, 그 아래 탐관오리들이 농간을 부려 나라를 어지럽혔다.
왕위계승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바로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에 해당되는데, 그것이 모두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폭군은 물러갔으나 반정공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삼대장이 폭군 못지않은 탐욕을 부려 나라는 망해갔다.
세자책봉 교명서에서 『간신을 멀리하라. 정치는 어려운 것이다. 책에 있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지금 대권후보들의 공부는 어느 정도 충실한지 궁금하다.
정권교체기에 또다시 민기 같은 탐관오리가 나타나서는 안될 것이고, 유자광, 윤원형 같은 간신배가 등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중종반정 때 홀연히 나타난 박원종 같은 도깨비는 정녕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므로 경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