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으로 알고...
그 해 그 날 이후 해마다 맞는 9월12일이면 남다른 감회가 인다. 나만의 이런 감회를 느끼는 것은 내가 쓰러진 바로 그날 그해이기 때문이다. 1993년 9월은 대전 엑스포가 열리고 있던 달이고 12일은 모처럼 맞은 일요일이다. 이른 새벽이면 출근 전 늘 보문산을 오르거나 갑천변 걷는 운동을 해왔듯이 이 날은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갑천변 초가을 잔디밭을 마음껏 걸으며 그간 제대로 걷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평일보다 조금 늦은 시간 걷기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 기다리던 교통신호가 바뀌며 서둘러 출발했다. 아파트에 도착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이상한 고추 매운 내음이 코를 찔렀다. 고추를 말리는 계절 밤새 거둬들였던 고추를 말리기 위해 내려갈 때 남긴 매움이려니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나를 쳐다보며 킁킁 댔다.
방에 들어왔으나 메스껍고 자꾸 눕고만 싶었다...119를 부르게 되고 일요일을 맞아 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응급실에는 주치의는 자릴 비우고 레지던트와 간호사만이 자릴 지키고 있는 상황. 응급실에 들어가 3시간 쯤 지나 운동 중에 연락을 받고서 서둘러 나왔다는 전문의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겠다며 MRI촬영을 해야 한다는 것. 이 날 난생 처음으로 119구급차 타고 처음 응급실 들어와 처음으로 MRI도 촬영.
얼마 후 MRI를 판독한 의사는 뇌의 혈관흐름이 막히는 뇌경색이라며 우선 입원, 막힌 피를 뚫어야하다며 이런 저런 투약과 주사를 먼저 하고는 절대안정이 요구된다며 면회도 절대 사절이라는 팻말을 입원실입구 문에 달아놓았다.
이로부터 근 50여일 만에 좌편마비라는 후유증을 안고 퇴원했고 다음 해 3월 초에는 다니던 직장에서 편마비 된 지체를 끌고 물러나오게 되었다. 퇴원 후 입원했던 병원을 찾아 재활물리 치료를 집중적으로 하며 통원 치료를 해 왔다. 그러던 중 처음 진료를 했던 신경과의사가 차린 개인병원을 찾아 주치의의 지료를 받아오던 터였다.
그러던 2001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심한 감기증세를 보여 동네 이비인후과를 다니게 되었다. 나이든 원장은 처방한 약을 복용하고도 낫지 않으며 목소리가 자꾸 쉰다고 하였더니 ‘모두 나이 드신 분들의 일반적인 노화현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나이 드신 동네 병원 원장을 믿고 찾아다니며 진료를 받아온 감기와 쇤 목소리는 좀처럼 낫지를 않고 여전하더니 3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는 특히 더 악화되었다.
한 대학병원에서 오랫동안 방사선과 책임자자리를 가져왔던 아는 전문의에게 상담을 했다. 그는 잘 아는 자기선배가 한다는 이비인후과 원장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주었다. ‘토요일이라 바쁘실 테지만 보내는 분 빨리 잘 부탁드린다’고 속필로 써서. 그리고 그에게 전화부탁도 한통 더.
나를 맞은 원장은 전화를 받았다며 우선 내시경부터 해보자며 한동안 내시경을 훑어 본 원장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써온 소견서를 보여주고 읽어주며 주문했다. ‘후두암으로 보이니 지체하지 말고 가급적 빨리 자기가 소개하는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 4 곳 중 어느 한곳을 찾아 진료를 받아보세요!’
이렇게 뇌경색으로 쓰러진지 10년이 가까워진 2001년 또 하나의 놀라운 전문의 소견을 들어야만 했다. 소개한 대학병원 중 한곳을 찾았다. 소견서와 영상물을 판독한 전문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단 입원, 후두암으로 보이니 확진한 다음 수술여부를 결정 하자며 입원일과 예정 일자는 곧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
해가 바뀌어 새해 2002년이 시무하던 바로 그날 1월3일 아침, 연락을 받은 대학병원 원무과를 서둘러 찾아 올라갔다. 원무과에서는 이비인후과 병동에는 현재 빈 방이 없으니 그 옆 정형외과 병동에서 잠시 기다리라더니 내일이면 입원실 하나가 비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갈 것이냐고 물어 두말 않고 응락.
다음 날 점심시간이 가까운 이비인후과 병동으로 입원실을 옮겼다. 방을 옮기느라 오가며 복도에 로만칼라를 한 많은 신부님들이 거니는 모습이 보여 여기는 신부님들만 입원하는 곳인가 보다고 의아하게 여겼다. 병상을 배정받아 자릴 잡으며 같은 방에도 입원한 신부님들이 많아 역시 신부님들만이 입원하는 곳인가라는 생각을 한동안 떨쳐버리지 못했다. 얼마 후 알고 보니 그들이 목을 가린 흰 에이프런은 로만칼라가 아니라 목 수술을 한 환자들의 목에 난 구멍-氣道空을 가리기위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 대학병원에서는 후두암에 대한 방사선치료를 우선했으나 재발하는 바람에 결국은 수술을 한 후에 언어장애라는 후유증을 얻어 근 3개월의 입원치료를 거쳐 퇴원하게 되었다. 그 후 대전에서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으나 언어장애는 여전. 한 번은 병원에 다녀 내려올 때 어느 날 오후 서울에 사는 누님 아파트를 찾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문을 열고 나오던 40대 내외가 나를 본 순간 멈칫 멈춰 서서 나란히 목례를 하고는 다시 가벼운 목례를 하고나서 바쁜 걸음으로 가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에 누가 섰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흰 목가림을 두른 나를 보고 순간 틀림없이 나를 신부님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 천주교를 함께 믿는 고교 동창들의 모임이 마련한 성지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내려올 동창들과 성지에서 만나기로 하고 대전을 서둘러 출발 성지에 도착 마리아와 나는 성지주차장 옆 벤치에 앉아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주차장에는 많은 순례버스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신부님이 앞에서 안내하는 순례객들은 성지 쪽으로 걸어 서서히 줄지어 올라갔다. 올라가던 행렬의 앞에 선 신부님은 벤치에 앉은 나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고 뒤따르던 많은 신자들도 따라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영문도 모르고 얼마간 인사를 받은 우리는 자리를 피해 앉았다. 그리고 나서야 그 지방에서 유명한 대학찰옥수수 찐 것을 사서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서 배식을 받을 때 배식하는 사람이 바로 성지관리 주임 신부님임을 알고 가볍게 놀랐다. 앞치마를 두른 신부님은 친구들이‘ 얘는 오늘 주차장 벤치에서 우리일행을 기다리다 다른 순례단을 인솔하신 많은 신부님의 인사를 받았다’고 하자 신부님도 나를 쳐다보고 ‘아마도 선배신부님으로 안 모양’이라며 ‘괜찮다’며 ‘선배 신부님 식사 많이 하시라’며 함께 웃었다.
이와 같이 살다보면 착각이 빚어내는 가벼운 웃음거리가 많겠지만 신부가 아닌 처지에서 착각한 신부님들의 인사를 받으며 내 목을 가린 흰목가림이 더 이상 로만칼라로 여겨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2013. 9. 7 .)
첫댓글 이 글을 통해 천규의 병력과 어려웠던 세월의 흐름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험로를 다 극복하고 매일을 밝게 살아가는 천규의 삶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네...박신부님! 힘내요!
천규! 오래간만에 방문하게 되였구나 그동안 잘 지내고? 금년 (2013,9,12) 이달 12일 내주 목요일이 꼭 운명의 20주년이 되는 날이구나!! 아무튼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아름다운 가을하늘을 또다시 볼수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씩씩하게 살자꾸나. 어제 승표가 루가 꿈을 꾸었다고 같이 루시아 한테가서 점심을 하자기에 다녀왔단다
마리아씨는 좀 어떠신지? 보고싶구나
현일아 존경의 박수까지 주니 신부가 아닌 처지에 고맙기도 쑥스럽기도-현일아 네 백만불짜리 파안대소 한번 더...명절 즐겁고 건강하게 잘 보내렴. 풍길아, 의리의 사내 승표가 루가의 꿈을 꾸어 루시아 자매님 한테가서 함께 점심을 하고 왔다니 참 잘 했구나. 루가는 얼마나 좋아하고 루시아 자매는 아주 큰 루가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겠구나. 자매님, 그래도 루가가 뿌려놓은 사랑의 열매에 얼마나 행복하실까? 풍길아 마리아는 85일만에 퇴원 요즘은 매일 통원재활치료중이니 얼마나 다행이니?주님께 감사!
꿈 같고 드라마같은 병력이군. 그 많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어 낸 천규가 보통사람은 아니야 . 2002년 수술을 받고 병실로 옮겨진 천규의 모습은 글자그대로 목불인견이었지. 그때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잠겨 있는데 살아 준 것이 참으로 기적이고 은총이라고 여겼네. 그후로 또 10년이 지났으니 세월의 빠름을 전광석화라고 지칭한 의미를 알게 하는 군. 앞으로는 악몽의 전철을 더 이상 밟지 않기를 기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