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2월19일 칠장사 포살일 법문 / 청화스님
지금 세상도 거치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부처님 당시에도 역시 거치러운 대중(大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군비구(六群比丘)라,
비구승(比丘僧) 가운데도 육군비구는 굉장히 거칠고
요새 말로 하면은 깡패 중인 셈이지요.
비구승뿐만 아니라 비구니(比丘尼)가운데도 육군비구니(六群比丘尼)라,
왈패 같은 비구니가 있어가지고서
큰스님들한테도 행패를 부리고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들으실 때에
아난(阿難)존자가 부처님한테 말씀 드렸단 말입니다.
그런 깡패 중 가운데도 차닉비구(車匿比丘) 같은 비구가
가장 거친 사람이었겠지요.
누구 충고도 안 듣고 말입니다.
차닉비구 같은 그런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 때에 어떻게 제도합니까?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범단(梵檀)지법으로 다스려라.
범단지법은 무엇인고 하면은
범천(梵天) 사람들이, 범천은 색계(色界)에 있습니다.
우리는 욕계(欲界) 사는데 색계에 가서 범천이 있습니다.
색계는 욕계의 욕심(慾心)을 떠난 경계(境界)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색계는 사람 같은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이라, 몸이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말을 하려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생각하는 그것이 광명 따라서
그 사람한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해진단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 하고 싶다고 하면은
입을 열지 않더라도 말이 통해집니다.
뜻이.
따라서 범단지법으로 다스리라는 그 말은
말하지 않고서 무언(無言)중에 대치(對治)하라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상대(相對)를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할 때에 묵언(默言)이 참 굉장히 중요합니다.
잡다한 말보다는 가만히 있어버리면
권위(權威)가 서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회의(會議)를 집행할 때도
잘 모르면 가만히 절만 몇 번하면 됩니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은 좀 잘못되고 그렇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묵언 지킨다는 것은
잘 모를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위신(威信)도 서고
동시에 보다 더 우리 마음으로 깊이 느끼는 점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參禪)공부를 해왔는데,
참선공부 이것은 불법(佛法)의 정수(精髓)인 동시에 지름길인지라,
생략 생략해서 자꾸만 건너뛰어서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공부를 별로 안했단 말입니다.
본래 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배운 다음에,
길목을 안 다음에 한다는 것인데,
길목도 미처 모르는데 참선하는 공부만 역설(力說)을 해놓으니까,
더러 붕 뜨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물론 사제법문(四諦法門), 십이인연법(十二因然法),
저런 법문이사 불교(佛敎)에 막 들어가면은 다 아는 법문인데
새삼스럽게 뭘 하려고 하는가? 그러실는지 모르지만
부처님 법문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법화경(法華經)]이나 무슨 경전(經典)이나 어려운 경전을 말씀할 때마다
이런 가장 쉬운 법문(法門)을 곁들여서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불자(佛子)라 하면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런 기본적인 법문은 꼭 외워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이 그때그때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나올 때
번뇌(煩惱)를 대치(對治)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불교가 중국(中國)을 거쳐 와서
중국물이 많이 들어 버렸습니다.
인도(印度)의 부처님 당시에 순수(純粹)한 불법(佛法)이
그마만치 많이 흐려져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불교(佛敎)학자 분들은
근본불교(根本佛敎)가 무엇인가?
부처님 당시에 불법은 어떻게 돼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 것이라고 하면은
덮어놓고 좋다고 하는 사대근성 때문에,
원래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한국은 속국으로 주변국으로 자처해 와서,
그러한 우리 사대근성 때문에
중국에서 하는 식을 그대로 모방(模倣)해버렸단 말입니다.
이러한 데서 더러는 좋은 것들이 있으나
더러는 부처님 당시에 소중한 순수한 불법,
순수한 불법을 많이 흐리는 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점을 생각해서,
부처님 당시는 어떠한 법을 주로 했던가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나온 법은 모두가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 순수(純粹)한 불법,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불법,
부처님의 육성 그대로의 불법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이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원래 포살일(布薩日)은
대체로 계행(戒行)을 주로 어떻게 지켜야 쓴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만,
계행(戒行)이사 여러분들이 청정(淸淨)한 분들이니까
잘 지키실 것이고,
이런 것이 보다 더 나을 성 싶어서
이 시간 이렇게 했습니다.
삼보 :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보배 아닙니까.
보배가운데서 제일 좋은 보배,
제일 좋은 보배가 소위 셋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것이 부처 불(佛)자, 보배 보(寶)자, 불보(佛寶)와,
법 법(法)자, 보배 보(寶)자, 법보(法寶)와,
또 중 승(僧)자, 보배 보(寶)자, 승보(僧寶),
세 가지가 가장 위대한 보배입니다.
금은보화나 그런 것은
유한상대(有限相對)의 있다가 없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참다운 보배는,
부처라는 보배,
또는 부처의 법이라는 법 보배,
부처의 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중,
중은 우리 출가한 분만이 중이 아닙니다.
집안에 계시는 분이나 출가한 분이나
부처님 법을 믿는 분들은 다 중입니다.
집안에 계시는 부처님 제자는 재가승(在家僧)이요,
우리 같은 출가한 스님들은 출가승(出家僧)입니다.
차이뿐인 것이지 다 똑같은 중입니다.
아무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배가 삼보라, 세 가지 보배인데
부처라는 보배,
부처의 법이라는 보배,
부처의 법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중, 승보 이것이 삼보입니다.
1. 불보(佛寶)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
맨 처음에 부처라는 보배 이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도 쉬운 것 같지만은 굉장히 논의가 분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간략하고 골수(骨髓)적인 것만 뽑았습니다.
물론 부처님 이것이 앞으로 우리 생명을 다해서
거기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인지라
부처님에 대한 인식을 그르쳐 버리면
우리 공부도 막대한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부처님에 대한 견해(見解), 인식(認識)을 바로 해야 됩니다.
대체로 부처란 무엇인가?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신명(身命)을 바치고 있는 셈입니다만
부처가 무엇인가?
이 문제만 바르게 알면 공부도 순탄하고
나아갈 길도 평탄한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단 말씀입니다.
부처란 오직 말로도 표현도 못하고
글자로도 표현도 못하고
우리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그 무엇을 중생(衆生)이 잘 모르니까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생이라는 것은
아는 것이 제한되어 있어놔서 별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제한되지 않은 절대적(絶對的)인 영원적(永遠的)인 것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법신(法身)
따라서 무제한적(無制限的)인 영원적인 것,
언제나 변치 않는 부처님을
그때그때 중생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붙였단 말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속성 가운데서 부처님의 본체(本體),
본모습보고 법신(法身) 그럽니다.
2) 보신(報身)
부처님의 본체 본모습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 말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능력(能力)이나 안락스러운 행복(幸福)이나,
부처님의 법신(法身) 가운데 몸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 보고
보신(報身) 그럽니다.
3) 화신(化身)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일체현상,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해서
더러는 사람모양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고
더러는 짐승 모양도 나타내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한 것을 비롯해서 일체(一切) 현상계(現象界)가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 아미타불(阿彌陀佛)
내 밖에 ‘나’라는 것에 상대해서 부처가 있다고 생각지 말으십시오.
나와 너와 모두를 다 포함해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을 똑바로 우리가 알아야 만이
거기에서 혼돈(混沌)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와 너를 포함해서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의 하나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부처님인데,
부처님의 몸, 부처님의 전체 몸 이것 보고
법신(法身)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
모든 기능(機能)이나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그러한 것 보고 보신(報身) 그러는 것이고,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나나 너나 천지(天地) 일체만물을 가리켜서
화신(化身)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은 따로 있는 것인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몸인 것입니다.
법신 가운데 보신·화신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동시에 화신 가운데 법신·보신이 들어 있는 것이고,
보신 가운데 법신·화신이 들어 있고,
이것이 하나입니다.
다만 아까 말씀처럼
전체를 한 번에 표현 할 때는 법신 그러는 것이고,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의미할 때는 보신 그러는 것이고,
현상적(現象的)으로 우주만유(宇宙萬有)를 나투고
일체 모두를 생성하는 그런 면에서는 화신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은
법신은 체(體)라고 말하고,
보신은 상(相)이라고 말하고,
즉 말하자면 일체 공덕상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또 화신은 용(用), 활용(活用) 이것은 활동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니까
합해서 말할 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비단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어떤 부처님이나 삼신(三身)을 겸해 있습니다.
그러면 가령 컵 이것은 무엇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부처일 바에는
컵도 부처 가운데 들어 있어야 합니다.
강도나 누구나 티끌 하나도 부처 가운데 안 들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됩니다.
한 물건도 버릴 것도 없고
한 물건도 취할 것도 없습니다.
컵 이것도 모양은 컵이지만은
저 깊이 들어가면 끄트머리는 보신·법신이 나옵니다.
화신에 있어서 컵이요, 마이크요 뭣이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똑같이 보신·법신입니다.
개미 한 마리나 독사 한 마리나,
독사도 역시 파 들어가면 그 본질(本質)은 역시 보신·법신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문제가 근본적(根本的)으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 불타관(佛陀觀)
따라서 우리는 불타관(佛陀觀), 부처가 무엇인가?
불관(佛觀)하는 이와 같이 우리 영상에다가 못 박아 두어야 합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너까지 포함해서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의 몸을 한 번에 말할 때 법신인 것이고
법신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이 보신인 것이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일체 현상이 화신이란 말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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