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____조현상
김장 김치
조현상
오늘 김장을 했다. 해마다 전통방식대로 집에서 배추를 절여서 하던 것을 올해는 아내와 딸들의 뜻에 따라 절임배추로 김장을 담갔다. 늘 3∼4일은 김장에 매달려야 했었는데 아주 손쉽게 김장을 마칠 수 있어 편리해서 좋긴 했는데 예전과 같은 맛이 날지는 미지수이다.
반세기 전 김장 풍속도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온다. 그 때만 해도 무, 배추, 파, 갓, 마늘, 고춧가루 등의 재료는 거의 다 집에서 재배하여 장만하였고 소금이나 생강, 굴, 새우젓, 황석어젓, 생태 같은 것만 사서 썼다. 그렇기 때문에 젓갈류나 해산물 같은 것은 늘 모자란 듯 넣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예 젓갈류를 넣지 않고 파, 마늘, 고춧가루 같은 순수한 농산물로 된 양념만으로 김장을 담기도 했다. 그 맛도 순수하고 좋았다.
요즈음 김장은 배추 이삼십 포기도 많다고들 하지만 예전엔 백 포기는 기본이고 많은 집은 이삼백 포기가 다 넘었다. 우리 집도 항상 백 포기 넘게 김장을 했다. 김장하는 날 아침 일찍 전날 절여놓은 배추를 소금물에서 건져 리어커나 달구지에 싣고 샘이나 강을 찾았다. 비닐이 없던 시절이라 깔개로 볏짚이나 수수깡 같은 것을 물에 잘 씻어 깔고 그 위에 배추를 실었다. 우리 마을은 물이 귀해 집에서 1.5km가량 떨어진 한탄강漢灘江이나 장진천으로 싣고 나가 배추를 씻었다. 옥수처럼 맑은 강물은 식수로도 손색이 없었을 때였다. 낯익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강변에 길게 늘어앉아 배추를 씻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포기김치 싸기와 깍두기를 버무리는 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땅 구덩이를 파고 김칫독을 묻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허리 깊이만큼 흙을 파낸 뒤 크고 작은 독들을 가지런히 집어넣고 그 주변에 왕겨나 짚으로 보온을 했다. 독에 김치를 가득가득 채우고 뚜껑을 덮은 뒤 그 위에 이엉으로 된 삿갓모양의 김치 광을 지었다. 그리고 조석으로 드나들어야 하는 내리닫이 거적문을 만들어 달면 한 해의 김장이 모두 끝났다.
농촌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김장을 하는 일이 한 해를 마무리 짓는 큰 행사였다. 김장 날은 동네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이웃 간에 품앗이로 팔 걷어 부치고 서로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왔다. 요즘에는 김치가 밑반찬의 일종으로 라면을 끓여먹을 때나 김치찌개를 끓일 때 즐겨 먹고 있지만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반찬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주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래서 ‘김치는 반양식이다’라고들 말했다. 쌀독이 부실한 만큼 김칫독이 대신 그 공간을 메워주었다. 부족한 식량을 조금이나마 보태기 위해서 김치무밥과 김칫국이 늘 밥상머리를 떠나지 못했던 게 그리 멀지않은 세월 속의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동치미는 약방에 감초처럼 우리와 친숙했다. 겨울만 되면 사랑방에 모여 앉아 밤늦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새끼를 꼬고, 돗자리나 지직(왕골로 짠 깔개)을 매고, 가마니나 멍석 같은 것을 짜다가 출출해진 속을 채워주던 음식으로 동치미만한 게 또 있었을까? 얼음이 살짝 언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거나 새큼 짭짤한 동치미를 어적어적 깨물어 먹으며 허전한 빈속을 달래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다.
문헌에 나오는 김치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신맛, 짠맛, 매운맛 순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시경』에 ‘밭두둑에 외가 열렸다. 껍질을 벗겨 ‘저菹’를 담가 제사를 지낸다.’는 구절이 있다. ‘저’란 신맛의 채소로 오이를 식초에 절인 것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와 『고려사』 등에도 ‘저’가 자주 등장하다가 고려 중기 『동국이상국집』에 ‘순무를 소금에 절여 담그면 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김치 담그는 일을 감지監漬라고 불렀으며 절임중심의 김장이 널리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66년 발행된 『증보산림경제』에는 고추를 김치 양념으로 쓰고 배추를 김치재료로 쓴다는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지금의 매운맛 배추김치의 원조로 보고 있다. 따라서 양념류의 첨가가 다양화 되면서 김치 담그는 방법이 새롭게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치를 집에서 만들어 먹는 시대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전국에는 700여 개의 김치공장이 있다. 한 해 매출액이 1조원이 넘고 수출도 해마다 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공장김치를 사먹는 편안함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전해내려 온 김장이라는 단어를 아예 잊어버리지는 않을는지? 또한 김치의 세계화를 위해 전통적인 맛과 종류가 다변화되고 있다. 매운 맛이나 강한 양념을 줄이거나 아주 뺀 새로운 맛과 모양의 김치가 개발되고 다양한 김치 소스까지 만들어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이러다가 김치 고유의 맛과 향이 제대로 보존될지 괜한 걱정이 앞선다.
조현상 / 2004년 『책과인생』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명주섬 봄햇살』, 수필집 『세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