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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 4:7-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2023년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은 2023년 마지막 날이요, 마지막 주일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한 해 동안, 잘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모든 날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일은 어김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하루하루를, 한 해 한 해를 살아나가야 합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절망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지적하며, “절망은 죄”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몰트만은 “오늘날 인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절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절망은 재앙을 부르는 가장 나쁜 죄”라고 말했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웃음과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테는 그의 책 “신곡”에서, 지옥 입구에,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지옥은 소망을 포기하는 자, 절망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절망을 포기함으로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매순간마다,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꿋꿋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고라 자손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라고 말했습니다.
불안하고 낙심되는 상황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식간에, 그러한 상황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낙심되고 불안한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39:7, 시 62:5)라고 외쳤습니다.
환경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모든 문제들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 71:5)라고 말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할 수 있습니다. 환경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오직 소망의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쉽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내 생각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불쑥 찾아온다 할지라도, 세상이나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직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외쳤던 것처럼,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무궁무진한 발명품들을 개발하고,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혁신을 이끌어내며,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발명가입니다. 쉽게 쉽게 성취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으로 많은 발명품들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 포기하지 마라.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했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어쩌면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새로운 시작을 했기에, 우리는 지금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시련이든, 어떤 문제이든, 그것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 놀라운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그날, 그가 졸업생들에게 말한 축사의 전부였습니다. 처칠은 그의 말대로, 절대 포기하지 않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한 현실이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가는 길에, 넘어지고 쓰러진다 할지라도, 상처가 나고, 아프다 할지라도, 끝까지 승리를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이은상 시인이 쓴 “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는 시조가 있습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이라는 조국의 역사적 현실 앞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싯구 가운데, 항상 기억되는 싯구는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주로 높은 산에 오를 때, 숨이 차고, 힘들 때,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문득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오래전, 약 20년 전에, 울릉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울릉도 중앙에 위치한 높이 986,5m인 성인봉이 있는데, 올라가다가, 그만 포기하고 내려왔습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오후 늦게, 숙소 앞에 성인봉이 있어서, 한번 올라가 볼까 하고, 아무 생각없이 올라가다가, 어두워져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한라산, 서쪽으로는 강화도의 마니산, 남북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태백산까지, 정상을 밟아보았는데, 울릉도의 성인봉은 올라가다가 중간에 내려온 것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울릉도에 가게 되면, 성인봉을 꼭 올라가 보고 싶지만, 울릉도에 갈 기회가 없어, 늘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감으로, 아쉬움이 남는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는, 로마 감옥에서 바울 사도가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7-8절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우리는 달려갈 길을 마쳐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절대 중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고, 딴 길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는 쉬운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님을 믿기 전, 바울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쉽고 편한 길이 그에게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전에 그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그는 복음을 안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미지의 땅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놀라운 믿음의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2: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바울은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쉽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셀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을 막는 수많은 장벽들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헤쳐 나갔습니다.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삶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정착한 여호수아는 그의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라고 당부하며,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끝까지 섬겨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했을 때,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오직 믿음의 사람이 되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라. 너는 여호와의 길로만 행하라. 너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라.”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간곡한 당부의 말을 들었거만, 왕이 된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온갖 일들을 다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하며,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지혜를 엉뚱한 데에, 사용한 꼴이었습니다. 그렇게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던 그는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년이 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솔로몬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라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를 마감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의 마지막의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준다고 약속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멀리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 마음껏,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인 모니카를 두었지만, 어리고 젊었을 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진리를 찾는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된 진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마침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그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고백록”을 저술하였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보면, “나는 이제 내가 과거에 저질렀던 추하고 부끄러운 일들과 내 영혼이 타락하여 육신적인 정욕을 따라 행하였던 일을 회상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내가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일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지난날의 너무나 악한 행실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몹시 괴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기꺼이 그러한 괴로운 성찰을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신 주님의 달콤한 사랑, 내게 행복과 평안을 주시는 그 사랑을 더욱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달콤한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하루가 전쟁터입니다.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1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세상이나 마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강대한 나라 러시아를 상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아주 약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 힘만으로는 절대 러시아를 상대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방 나라들에 대하여, 우크라이나를 절대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실 때, 우리는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29-31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험한 세상을 끝까지 달려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 23:3절을 보면,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실 때,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2023년 마지막 날이요,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올 한 해 잘 달려오셨습니다. 주님 바라봄으로, 끝까지 이 믿음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요,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주시는 주님,
매순간마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도록, 믿음의 길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만 바라보오니, 우리에게 더욱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