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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9주)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
렘31:27~34; 딤후4:1~5; 눅18:1~8
예레미야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되고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주로 임박한 심판 선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된 사정은 그동안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예레미야서31장에는 그런 심판선고 대신에 희망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구약학자들은 예레미야서 중심에 있는 예레미야서30장, 31장을 “작은 위로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엔 구원에 관한 메시지만 따로 모여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수많은 심판선고와 파멸예고로 가득 찬 예레미야서 중심에, 가장 깊은 곳에, 이스라엘의 희망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파멸과 포로라는 질곡의 역사 한 가운데 희망의 씨앗이 숨겨 있습니다.
몇 주 전 읽은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파멸을 선고했고 이미 다 망해버린 유다 나라의 고향 땅을 사는(매수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또 지난 주일에 우리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포로민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적의 인질로 끌려가 있는 포로민들에게, 적의 나라에서 과수원을 일구고 그 열매를 따먹으며, 장가가고 시집가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내라고 써 보냅니다. 심지어 적이 평안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번영하도록 기도하라고, 그래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라고 권고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코어, 핵심은 무엇입니까? “희망”입니다. 폭력적인 상황, 거의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희망이 들어 있다는 거지요. 이것은 과일의 씨앗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것은 파멸이고 폭력뿐입니다. 그래서 절망스럽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이런 때에도 예레미야 자신은 고향 땅을 사고, 적의 나라에 끌려간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희망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근거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걸까요?
지지난 주일에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애가는, 예언자의 말대로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파괴된 것을 슬퍼하는 다섯 개의 시를 모은 책이었습니다. “아, 슬프다”(에카, 오호라)로 시작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우리에게서 진노를 풀지 않으시렵니까?”로 끝나는 탄식시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절망적인 상황을 노래하는 그 시 한 복판에도 희망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지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늘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그럼 이런 희망은 누가 발견할 수 있는 걸까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애가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시는 걸까요? 왜 희망을 온갖 폭력과 파멸 안에다 감추어 놓는 걸까요? 왜 쓴 쑥과 쓸개즙을 먹게 하시면서 그 속에서 사랑과 긍휼을 노래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왜 이렇게 기다리게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이 무능하신 걸까요? 하나님이 멀리 딴 곳에 가 계시는 걸까요?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그 비유를 소개하기를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고을에 재판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그런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과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기의 적대자에게서 권리를 찾아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신구약성서에서 “과부”란 사회적으로 가장 힘없는 계층을 일컫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이 여인이 소송을 제기한 상대는 부유하고 유력한 남자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 재판관을 찾아갔는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 ‘찾아가다’(에륵케토)라는 동사는 미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미완료는 과거에 계속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한 번 두 번 찾아 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찾아갔다는 뜻입니다. 우리 새번역 성경에는 “줄곧 찾아가서”라고 번역하고, 개역개정판에는 “자주 가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매우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였고, 소송 상대자는 부유하고 힘 있는 남자였으며, 소송을 재판해 줄 재판관은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가진 단 하나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집요함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줄곧 찾아가서’ 졸랐습니다.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이 불의한 재판관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 줄 전망도 보이지 않고 그런 낌새도 없지만, 줄곧 찾아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에게는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절박함이 느껴지시나요?
한동안(얼마동안인지는 모르지만 한참을 그랬을 겁니다) 이 재판관은 여인의 탄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힘 있는 부자의 편을 들어줄지언정, 힘없는 여인의 편을 들어줄 만큼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원문에는, 그가 원치 않았다<우크 에델렌>는 의미가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상상해 보건대, 어쩌면 이 재판관은 이 여인의 소송 상대자인, 부자면서 힘 있는 남자에게서 뇌물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인에게는 가망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의 이런 생각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4~5절에 나오는 이 재판관의 혼잣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이 재판관이 이 여인의 청을 들어준 것은 그 여인의 분풀이가 두려웠다든지 혹은 그 여인의 열성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견디게 할 것이다...’ 여기서 ‘그’라는 단어에는 아주 경멸적인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재판관은 이 여인을 끝까지 경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이 이 여인의 권리를 찾아주고자 한 것은 단 하나,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여기서 ‘귀찮게 하다’로 번역된 말, ‘휘포피아조’는 ‘눈을 가격하다. 시퍼렇게 멍들게 때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이 재판관을 집요하게 찾아감으로써 이 재판관이 지쳐서 눈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을 끼게 했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이 가난한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음으로서 이 재판관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이 비유를 듣게 되면 의아하고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과 비유한 것에서 좀 의아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뒤집어 보면 이 비유가 노리는 효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생소하고 낮선 것을 통해 듣는 청중을 환기시키고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줄곧 찾아가서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지면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러니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줄곧 찾아가게 하시는 걸까? 왜 이렇게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좋으신 하나님이라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누가복음은 ‘성령’을) 주지 않으시겠느냐?”(마7:11) 하셨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좋은 것을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뜸을 들이고 기다리게 하시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기다렸을 때 우리는 정말 “좋은 것”을 받은 경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알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은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려 몸부림칠 때, 나비를 도와준답시고 고치의 끝을 조금 잘라줌으로 결국은 나비를 날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 다 아실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엊그제 잠깐 본 방송 프로그램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오은영 박사가 문제 아이의 부모를 상담해주는 금쪽인가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거기에 6세된 여자 아이를 늘 업고 다니는 부모가 나왔습니다. 마치 샴쌍둥이처럼, 아이는 한 시도 부모 등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늘 녹초가 되어 있었는데(정말 다크 서클이 끼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엄마가 그런 아이에게 한번도 심각하게 “안돼”라는 말을 못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아직도 젖을 물리는데 밤에 대여섯 번 수유를 할 정도고,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 엄마하고 부르면, 엄마는 하던 일을 다 놔 두고 아이에게 쫓아와 젖을 물렸습니다. 상담자는 그런 모습이 기괴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왜 서서 자기 발로 걸어야 하는지, 그것은, 엄마가 힘든 건 두 번째 문제고, 아이가 자기 발로 걸어야 아이의 두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아이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생기고 등등 여러 가지 조언을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엄마가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는 것을 막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제가 본 것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사실 영상을 통해 사례를 분명하게 보아서 그렇지, 우리가 다 아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지금도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도 6세난 아이처럼,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우리 속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은 가열차게 돌고 있으니까요. 편하게 돈 벌고, 그것도 많이, 한마디 하면 엄마가 쫓아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듯이, 내가 원하는 소원대로(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한다면, 우리도 6세난 아이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정말 갑작스런 사고와 재난이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가령, 갑작스럽게 자식을 잃었다든지, 교통사고로 평생을 누워있어야 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 내가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되는 일도 있지요.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전쟁을 겪으며 서민들이 당하는 고통도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무서운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됩니다. 그런 일을 통해 자신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고 삶의 의지를 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 힘이 들 것이고, 주변의 도움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말하자면, 그 6세 아이가 만난 어려움과도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 아이는 어려움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이는 아주 쉬운 방법을 알아냈고 그것이 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성장하려는 의지가 사라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이 통하는 시간에 한계가 왔다는 겁니다. 이제 아이는 엄마 등에 달라붙는 대신 자기가 혼자 서서 걷고, 따듯한 엄마 품과 젖 대신 친구들과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는 시간을 맞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행스럽다고 말했지만, 그 아이에게 이것은 얼마나 혹독한 시간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졸라서 따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성장하는 것, 어린아이의 좁은 자기중심에서 어른의 전체를 보는 의식으로 성장하는 것,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좀 더 유연하고 쉽고 자유롭게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성장하고 자라기를 그렇게도 바라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가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정작 간절히 기다리는 분은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제발, 혼자 서서 걷는 어른으로 자라다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혼자 설 수 있는 시간, 혼자 걸을 수 있는 시간, 딱딱한 음식을 먹을 시간,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는 시간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시간이요, 우리에게는 줄곧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계속해서 찾아가고 찾아가고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이 응답임을 알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끈기 있게, 낙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요? 믿음을 구하고, 대범함을 구하고, 마음을 넓혀 주기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용히 주님 앞에 앉아서 우리의 생각을 떠나보내는 순간, 그리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순간이, 바로 믿음을 구하고 대범함을 구하고 마음이 넓혀지고 의식이 변하는 시간입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충실한, 신실한, 끈질긴 기도입니다. 그 시간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같지만, 그러나 그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좋은 것을 주시기에, 복주시기에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루스 버로우스가 <영혼의 성 탐구>라는 책에서 기도에 대해 한 말입니다.(테오리아를 보십시오.)
“만약 결심을 해서 매일 매일 충실하게 기도의 장소로 나간다면, 우리는 최고의 믿음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 시간보다 더 큰 확신,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며 그분만이 유일한 의미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있는가? 그 기도시간은 기쁨에 잠긴 시간도, 요동치는 시간도, 흥미로운 생각과 감정이 있는 시간도 아니다. 유쾌하고 위로에 빠져드는 시간도 아니다. 인간적으로는 지루한 시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으로 방향을 틀지 못한다. 이 세상의 가치로 보자면, 이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이며 손실이다. 하지만 그것에 충실할 때,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모든 것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완전히 가지지 않으신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기도는 바로 우리 존재의 외침이며, 진실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달라는 초대의 외침이다. 하나님이 그 외침을 무시하면서 ‘육신’에게 비싸게 구실까?”
그러면서 루스 버로우스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면서 루스 버로우스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추가하신 말씀에 주의하라고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이 믿음은 무엇일까요? 절망스런 상황,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상황, 다 틀린 것 같은 상황, 다 망한 것 같은 상황 속에 희망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끝끝내 놓치지 않고 힘들고 고통스런 지금 여기를 정상적이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정규적으로 기도자리에 앉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 아닐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심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가 자라고 성장하기를 진정 바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