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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5;21-24, 5;35-43. 예수님의 달리다굼, 2023. 7. 9.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희로애락을 겪는데 좋은 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절망을 합니다. 아픔과 고통과 극도의 위기감에 사로잡혀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가장 큰 절망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요? 가장 큰 낙심을 할 때가 언제 일까요? 권세와 명예를 잃을 때? 가지고, 누리고 있던 재산이 날아 갈 때? 사랑하는 이와 이 땅 가운데서 이별할 때? 통계에 의하면 무엇보다 건강을 잃을 때라고 합니다. 60-70퍼센트 이상이 건강을 잃을 때 나는 이제 끝났구나! 생각을 한데요. 그러면서 왜 하필 나입니까? 억울해 합니다. 이 경우를 무엇이라 합니까? 절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절망이라는 말은 바라는 것이 끊어졌고, 더 이상의 삶에 소망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위로와 치유 아닙니까? 절망 앞에서 소망을 갖고 낙심 앞에서 일어날 소재를 주는 위로와 회복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위로와 치유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 사역이 계속 되던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 난 일입니다. 한 사람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과 위로와 치유 사역으로 바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역 유지이고 존경받는 회당 장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이며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회당 장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 다가 와서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청을 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내 딸에게 손을 얹어 구원을 얻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의 간청에 주님은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도중에 지체 되는 일로 인해서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훤화하면서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인들 어찌하겠느냐?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며 죽은 딸에 대한 동정을 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조용히 회당 장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그 순간 딸이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주는 멧세지가 무엇입니까?
1.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회와 모든 위로가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가 주어지고 해결할 방법이 있고 치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회당장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회당장이 주님께 찾아 왔고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간청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 회당장을 위로하고 소망을 줍니다. 여러분, 위로가 무엇입니까? 고후1:3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위로의 주님입니다. 이 시간, 이 순간에도 여러분을 위로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위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는 모든 위로입니다. 모든 위로는 완전하다는 뜻과,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의 위로입니다. 위로의 παρακλήσεως, 파라클레세오스는 긍휼과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심리적인 것과 함께 환경과 여건과 환란으로부터 실제적인 구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1:4-5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다.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가 넙칩니다. 그러면 환란이 무엇입니까? 억압과 상처받음과 고뇌와 핍박과 고통입니다. 고 후서에서 9번 환난이라는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실존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이 환란을 당할 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시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환란 속에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응답의 기다림 속에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기다림은 응답의 소망입니다. 엘가나의 아내이자 자식이 없었던 한나가 성막에서 기도드리면서 처음에는 통곡하고, 나중에는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입술만 움직이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를 생각하여 잉태케 하셨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환경에 대한 간구를 다 들으십니다. 그러면 들으신 주님은 어떻게 위로를 하시는가? 시40;2,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기가 막힌 것은 갑작스런 황폐함과 소름끼치는 일 앞에서의 표현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을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거나, 예상을 했더라도 그 범위가 생각을 훨씬 벗어 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고, 이야기를 해도 쉽게 믿지 못합니다. 웅덩이는 수조와 늪지대를 의미하고, 수렁은 진흙으로 질퍽한 구덩이를 의미하는데,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거기에 빠지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들으신 주님께서 반석 위에 세워두시고, 걸음이 더 이상 빠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소속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규정입니다. 때문에 어디에 속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했느냐? 세상에 속했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환란과 핍박을 당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고,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경우인지 모르면 무섭고 죽음을 알면 두렵습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가 이렇습니다. 딸에 대하여 장래를 모르기 때문에 무섭고 그래서 주님께 왔습니다. 딸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하사는 가까이서 부르고, 초청하고 안위하고 위로하다는 뜻의 현재 분사형입니다. 현재 분사는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 환난이 연속될 수도 있지만 그에 상응하여 주님의 위로하심 또한 계속됩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또한 그 것보다 더욱 큰 은혜의 위로하심이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겪는 고난과 환경은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극심한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약할 때 강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할 때마다 항상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위로를 체험했던 바울은 고후1: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복음과 신앙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이 받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모든 고난이 다 의미가 있겠지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고난이 더 큰 의미가 있고 더 큰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이런 고난은 필연이라고 했습니다. 골1;8,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고, 롬8;17,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셀 수 없을 만큼 당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었었고,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하여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대인 자객 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를 계속 받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고통을 당하는 회당장에게 위로를 하십니다. 찾아온 회당장의 요청을 뿌리치지 않고 따라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과 미래의 불확실과 모르는 것 때문에 한 없이 두렵고 무섭지만 계속해서 위로하시는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 때문에 무섭고 두려운 것이 사라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주님은 어떤 위로를 하십니까?
2. 달리다굼 입니다. 달리다굼은 원문이 Ταλιθα κουμ 탈리다 쿰인데, 이 말은 아람어 탈리다 쿰입니다. 달리다는 아주 작고 미천하고 불쌍하고 연약한, Little child, 작은 아이입니다. 쿰은 일어나라는 말인데 합성어가 달리다 쿰 입니다. 연약하고 미천하고 불쌍한 여성일지라도 일어나라는 멧세지입니다. 어떤 경우와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명령이고 위로입니다. 수7:10에서 여호수아가 아이성 공략에 실패하여 좌절감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여호와께서 연약한 자여,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사 60:1, 하나님이 이사야야! 이스라엘 백성들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눅7:14, 나인성 홀로 사는 여인의 아들이 죽어서 관에 메어 성문을 나갈 때 어미를 불쌍히 여겨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죽은 청년을 살리셨습니다. 행 12:7절에서는 옥중에 지쳐 쓰러져 있는 베드로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베드로야, 일어나라! 그 때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면서 베드로는 구출되었습니다. 엡 5:14,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잠자는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낙심한 자가 일어나고 청년이 일어나고, 여호수아가 일어나고, 이사야가 일어나고 하나 같이 달리다굼 입니다. 오늘 은 12살 된 소녀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달리타쿰입니다. 여러분, 죽음이 연령과 관련이 있나요? 예. 그렇지만 죽음은 나이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청년과 어린 아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2살 된 소녀, 죽은 소녀 곁에 예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그런데 이 달리다쿰은 상당히 많이 쓰이던 보편적인 말이고, 당시의 가정에서 일상화 된 용어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깨울 때 사용한 단어로서 애정이 담긴 가정의 상용어가 또한 달리다굼 입니다. 아침이 되고 날이 밝아 오면, 야, 너 일어나.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과 함께 이 소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일어 날 수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절망의 시대입니다. 다시 일어설 기력이 없이 주저앉아 버린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앉을 영역이 없고, 설 땅이 없고, 쉴 곳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필요한 것이 달리다굼의 기적입니다. 도덕이 아니고 사회적 갱신이 아니고 의지가 아니고 오늘 움 추릴 수 없는 나에게 필요 한 기적, 나에게 필요한 말씀, 달리다굼입니다. 날마다 아침마다 시간마다 나에게 예수님의 달리다 쿰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일어나라! 연약한 사람아 일어나라! 병든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자야 일어나라! 두렵고 무서운 사람아 일어나라! 이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려지고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재현되고 일어나고 다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러면 이 달리다 쿰의 기적과 은혜는 어떻게 임하게 되는가? reset 과 reborn 그리고 이 것 위에 restart해야 합니다. 리셋이 무엇입니까? 리셋은 테이터나 기구전체를 초기단계로 돌리는 것입니다. 기억을 영의 상태로 만드는 것과 삶의 바탕을 백지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한 순간에 흔들렸고, 한 순간에 낙심이 되었습니다. 두려웠고 어두운 터널 안에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시작하고 싶으십니까? 흔들림이 없고, 시온의 대로이시기를 소원하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고 주님께서 바라시고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상황과 삶의 모습과 현실을 되돌려 놓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을 지우고 리셋을 해야 합니다. 반드시 리셋을 하고 반드시 리본을 해서 다시 리 스타트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리셋 해야 합니까?
3-1. 모든 문제는 예수님 앞에서 리셋 해야 합니다. 22-23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 소녀의 아버지는 회당장입니다. 회당 장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입니다. 회당은 이스라엘의 시나고개 입니다, 쉬나고게는 종교적 기능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복판에, 중심에 있었던 기관입니다.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었지만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수행되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으로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운용 보존을 책임지고, 예배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고, 율법의 낭독과 설교를 할당해 줍니다. 회당장 아래 랍비들이 있는데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회당은 학교역할과 재판소 역할을 했습니다. 이 모든 역할을 회당장이 겸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명예와 존경이 있습니다. 오늘 야이로의 인품은 훌륭하고 랍비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왔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러분, 이런 정도의 권위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공인되지 못한 젊은 예언자이었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 회당장이 엎드립니다. 최고의 지성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특히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엎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음 앞에 있었습니다. 모든 노력을 다 했고, 살릴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소망으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당장에게 사랑하는 딸로 말미암은 고통의 딜레마 그것이 없었다면 이 회당장이 예수 앞에 나왔겠습니까? 고통 받지 않는다면, 인생의 역경이 없었더라면, 비바람과 폭풍우가 없었더라면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리셋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통이나 역경을 가리켜서 예비 된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고 나사렛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 리셋을 했습니다. 신앙을 리셋하고 문제 앞에 리셋하고 주어진 지위와 권한을 백지 상태로 돌렸습니다. 엎드려서 어떻게 합니까? 23절에 많이 간구했습니다. 한 번만 호소한 것이 아니고 살려 주세요. 내 딸 살려 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소리치고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체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때는 명분보다 체면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들은 체면에 민감합니다. 자기 얼굴과 의식과 자기체면 때문에. 내가 뭐 이 나이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체면 때문에 깊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언어를 잘 살펴보면 유달리 발달된 언어 가운데 하나가 얼굴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체면이란 말이 얼굴이라는 말이잖아요. 뵐 낯이 없습니다.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얼굴 한번 넓다. 그 사람 얼굴이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내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아 다오. 제 얼굴을 봐서 선생님 한 번만 한번만 부탁을 드립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체면 때문에 인생의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어도, 해결될 수 없는 인생의 딜레마를 안고 있어도 주님 앞에 나오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대면하고 관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비바람 없이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갈등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 속에 주님의 능력과 부활의 소망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리셋을 위하여 문제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 앞에 나와 주님 앞에 엎드리면, 리셋을 위하여 인생의 마지막과 최후의 소망을 걸고 주 앞에 엎드리면, 그때 달리다 쿰의 기적은 시작이 되고 달리다 쿰의 일어나는 은혜가 시작이 됩니다. 인생 속에 주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문제 가지고 주 앞에 엎드리시고, 아직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함께 다시 리셋을 위하여 엎드리고 걸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문제 앞에서 기도가 리셋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다양한 문제를 맞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문제를 더욱 큰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기도는 응답의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응답의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 9:23절에서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21~2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가정에 큰 문제는 사랑하는 12살 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경건하게 살아도, 믿음으로 살아도 인생의 삶에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의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면, 22~23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이 말씀 안에는 문제의 해답이 있고 복음이 있습니다. 기도로 리셋합니다. 이전의 시나고게, 회당에서 했던 기도가 아닙니다. 야이로는 리셋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문제에 걸 맞는 기도를 했습니다. 리셋하는 기도가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3-3. 많이 간구하여 리셋 했습니다. 기도가 주님을 향한 마음 자세라고 한다면 간구는 필요하고 절박한 것을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지금 절박함이 있고 간절함이 있습니까? 회당장은 딸이 죽게 된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딸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간절함이 있고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간절함이 있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함과 문둥병자의 간절함과 삭개오의 간절함은 하나 같이 문제 앞에서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바램입니다. 약4:2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마7: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많이 계속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 안에 문제의 해답과 응답이 있습니다. 간구를 많이 했습니다. 반복하고 반복을 했습니다. 잠시가 아니고 계속해서 간구했고, 끝까지 간구를 했습니다. 이루어 질 때까지 간구를 했습니다. 리셋을 위하여 많이 간구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3-4.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입니다. 리셋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문제에 구원이 어디로 오는 것인가를 회당장은 알았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주님께로부터 라는 확신 있는 믿음입니다. 자꾸만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도리어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문제 해결은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12년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고 막 출발하는 길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런데 사실은 이 말씀이 마음에 믿음으로 확신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 후서 3:2절,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어둠을 통과하는 빛입니다. 절망을 이기는 소망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입니다. 좌절감에서 일어나는 힘입니다. 이것이 달리다 쿰의 시작이고 준비된 은혜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이 믿음으로 리셋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5절에 딸이 죽었다는 절망의 소식이 회당장에게 왔습니다. 38절, 집안에 들어서니 이미 죽은 상황이라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보실 때에 40절,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습니다. 군중들은 비웃었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주님은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의 모든 범사에 일어나는 어떤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죽음을 해결하시는 주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의 하실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간구하지만 문제가 악화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말씀은 한결 같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사55:8~9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보는 한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현실만 바라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주님의 창조적인 미래를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믿음이 있는 모세는 사막에서 샘과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이젠 끝이라고 절망했지만 믿음이 있는 모세는 바다에서도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믿음이 없는 데마는 세상의 것을 보고 갔지만 믿음이 있는 바울은 하늘의 것을 보고 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역사를 어떻게 쓰시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삶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합니다. 칠 배를 뜨겁게 한 풀무 가운데 던짐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들을 용서하고 기도하면서 숨을 거둔 스데반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돌로 맞고, 톱에 켜임을 당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선진들의 삶은 믿음으로 이겨낸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십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눈물겨운 아픔과 환난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에 주님은 변함없이 말씀을 하십니다. 달리다굼, 아들과 딸아 일어나라, 절망에 주눅 든 사람들아 일어나라. 여러분, 우리 앞에 보여지는 현상은 언제든지 바뀝니다. 가변성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지 않으려면, 절망하지 않으려면, 달리다쿰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믿음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삶과 사업과 건강과 공동체도 달리다굼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시121:7-8.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네 영혼을 지키시되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리셋하여 리본이 되는 달리다 쿰의 복과 그리고 이제 새 출발, 리 스타트를 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Bravo하고 주님이 주신 행복이 Forever하고 경이롭게 만드신 삶은 Encore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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