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칭 구원파의 아류로 알려진 박옥수의 '대한 예수교 침례회'는 그 본류인 '기독교 복음 침례회(교주 권신찬)'보다도 훨씬 더 맹렬한 속도로 교세를 넓혀 가고 있어 교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자칭 목사인 박옥수는 1944년 6월 경북 선산에서 부친 박재들과 모친 최수만의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외지에 나간 박옥수는 화란인 선교사 림욕이 주관하는 금오산 집회에서 감화를 받은 후 구원파 권신찬의 집회에도 참석하여 권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권씨의 사위 유병언등 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목사가 되려면 정규 신학 과정을 정식으로 이수하고 목사 고시에 합격하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박옥수는 이런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목사를 자처하고 있다. 박옥수의 고향 교회에서는 박옥수와 같은 이단을 배출하여 전국 교계를 혼란시키고 있는 점에 대해 한탄볜눗?생각하고 있으며, 정규 과정도 거치지 않은 박옥수가 목사를 자처하면서 성서의 편협적이고도 아전인수격인 해석과 식견도 없는 제멋대로의 해석으로 선량한 신도들을 비롯 기성 교회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인간 박옥수의 모습이 별로 밝혀진바 없다. 그 자신이 밝힌 바에 의하면, 1962년 거듭난 후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20여 년 간 교파를 초월하여 말씀의 종으로 전국 각지에서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고 있으며, 현재는 서울 제일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 저,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7.5) 언제 신학을 했는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어떻게 대한 예수교 침례회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설교 속에서 보니 그는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에서 땅콩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들이었다는 점(p.23), 1962년에 예수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p.34)과 첫 목회를 대구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김태호씨가 하고 있는 대구 중앙 교회(남구 대명 7동 213-26, ☎621-6251)가 박옥수씨가 이단 교회로 시작했던 곳이라 한다.
교리상의 오류
1. 구원관의 오류
박옥수가 펴낸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 1권과 2권,'두 부류의 신앙'은 그의 설교를 모아 출간한 것으로서 그 내용의 대부분이 구원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책에서 박옥수는 창세기로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죄사함에 대한 방법을 다 알아보았다고 하면서 '죄사함'과 '구원'을 거의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가 '죄사함'과 '구원'이다. 예컨대 눅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해석하는데 그 초점을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강도 만난 자는 잘못한 율법사를 가리키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문맥이나 중심 진리는 파악하지 않고 억지 해석을 하는데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그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중생 즉 거듭남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는 좁은 의미의 구원도 있고 거듭난 이후 성화의 단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구원도 있다. 그런데 박옥수는 좁은 의미의 구원에만 모든 관심의 초점을 모아 마치 그것이 기독교 교리의 전부 인양 편협설에 치중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 전부를 좁은 의미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어 억지로 풀게 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과 자비이지 박옥수처럼 억지로 구원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참된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비유인 것이다. 물론 구원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성경에는 중생을 체험한 이후의 과정인 성화 등 신앙생활 전반에 걸친 교훈도 골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맥에 따라서,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올바른 해석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옥수는 성경 전체를 좁은 의미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다 보니까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과 사견을 억지로 성경 속에 집어넣고 해석하게 되고 제대로 된 구원관을 정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죄관의 오류
박옥수는 죄와 범죄를 구별하여 해석함으로써 억지로 성경을 풀고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 1:9)를 인용하여 죄와 범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이것은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는 현상이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그 자체는 아닌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기가 콧물과 기침을 하게 하는 것처럼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둑질을 했고 거짓말을 했고 살인을 했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고 범죄라는 것입니다. 죄와 범죄는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에서 죄를 자백하는 것은 "내가 도둑질을 했습니다"라고 범죄한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박옥수는 구약 성경에서 다윗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짓고 또한 우리아를 죽게 한 후 괴로운 심정으로 시편 51편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묵상하였습結?모친이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자체를 고백한 것입니다." 박옥수의 죄관은 바로 이런 점이 주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박옥수는 새벽마다 울고불고 통곡하면서 통회자복하는 기성 교회 교인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범죄 문제만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박옥수의 주장대로 라면 죄와 범죄를 구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박옥수는 자신의 생각과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죄와 범죄로 구별하여 해석한 것이다. 마치 대성 교회의 박윤식이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여 억지 해석하는 것과 꼭 같다. 박옥수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증거를 들어보자. 시편 51편에서 박씨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5절 한 절만을 인용했다. 그러나 14절의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박씨가 주장하는 논리를 14절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피흘린 죄'가 아니라 '피흘린 범죄'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박씨는 성경에서 죄와 범죄를 명백히 구별한다고 했으나 그가 즐겨 인용하는 시편51편에 보아도 그런 구별은 없다. 삼하24:10에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다윗의 이 고백은 박옥수의 주장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박씨의 주장대로 한다면 죄가 있기 때문에 인구조사의 범죄를 행했다고 해야 할텐데 다윗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했다고 했으며 그 죄는 큰 범죄라고 하지 않고 다만 큰 죄라고 했으며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지 '종의 범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는 않았다. 또 박옥수는 요한1서1장을 제시하면서 죄와 범죄를 구별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했다면, 우리말 개역성경은 9절에서는 '죄'로, 10절에서는 '범죄'로 번역했기 때문에 성서 원어에 무식한 박옥수는 한글 성경만 보고 죄와 범죄를 구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헬라어 성경에서 이 두 단어는 9절에서는 명사로, 10절에서는 동사로 쓰여졌을 뿐 같은 단어인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auaptina(하마르티나) 즉 '죄'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이와 관련하여 auaptanv(하마르타누) 즉 '죄짓다'는 동사로 되어 있는데 '범죄 하다'라고 바꾼 것이다. 한글 성경 요한1서에서 죄와 범죄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원서 성경과 대조해서 읽어보면 대부분 명사는 '죄'로 동사는 '범죄'로 번역된 것을 알 수 있고 번역 과정에서 문장의 구성상 적절한 단어를 골라 사용하다 보니까 죄와 범죄라고 한 것을 원어를 모르는 박옥수는 이를 억지로 구별하여 해석함으로써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3. 사죄 문제
박옥수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녁 저는 여러분들의 어떤 의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오늘 저녁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시고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술을 끊으려고, 담배를 끊으려고 방탕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속에서 그 모든 죄악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박옥수가 주장하는 대로한다면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죄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고 죄를 안 짓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를 안 짓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되고 죄를 지었다면 마음속에 죄가 남아 있으므로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에 대해서 박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 문제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양심의 가책이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들은 율법 폐기론 적인 입장이 되고 양심에 화인 맞아 마비되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표현하면서 괴로워했으며 딤전 1:13에서 자신이 훼방 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음을 원어 성경에서 과거 시제로,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할 때는 현재 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현재 시제가 반복적인 행동의 표시라는 것이라고 볼 때 이 말은 박옥수의 주장대로 과거에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는 고백이다.
사람이란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었고 또한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었으며 죄를 짓고 나서 더욱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박옥수처럼 어떤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죄인임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박옥수는 요한 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모세의 율법에 의해 정죄 받았던 여인을 사랑의 법으로 무죄하다는 부분까지만 거론을 하고 그 후반부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예수의 당부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음으로서 성경에서 자신의 교회에 적합한 부분만 주장하고 그 외에는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구원의 마지막 목표는 죄사함만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영생을 체험한 뒤 성화 되어 가는 것이다. 구원도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복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이미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구원을 받았고 지금 현재도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 가고 있으며 장차 구원을 받을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박옥수의 구원관은 초대 교회사에 나타났던 율법 폐기론 자들이나 영지 주의자들과 같은 류의 주장이다. 교묘하고 교활한 여론으로 기성 교회를 공격 비판하고 구원받고 성화 되어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단지 율법적인 열심이라 매도하여 눈물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있는 것을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은 기성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 그 약점을 공격하고 나선다. 박옥수는 기성 교회(침례교회 제외하고)가 구원에 대해 교인들에게 확실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지 못하는 약점과 빈틈을 이용하여 침투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이 요청된다.
박옥수‘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특징
왜곡된 구원관으로 신도 미혹 기성 교회 공격· 헌금 강요 등으로 물의 계속돼 빠른 속도로 한국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박옥수의 ‘대한 예수교 침례회’는 세칭 구원파의 아류로 알려진다. 일명 ‘기쁜 소식 선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단체는 목사임을 자처하는 박옥수란 사람이 전국을 순회하며 체육관 등 대규모 공간을 빌려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부흥 성회를 성황리에 치뤄 내고 있다.
목사를 자처하며 편협적이고 아전인수격인 성서 해석으로 선량한 신도들을 비롯 기성 교회를 놀라게 하는 박옥수의 대한 예수교 침례 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이들의 구원관에는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이 빠져 있고, 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빠져 있다. 소속 교인들은 대상자에게‘구원받으셨습니까? 라고 질문함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그들과 접촉해 본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들은 기존 교인들을 만나면 먼저 첫 단계로 ①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②당신은 완전히 중생 했습니까? ③당신은 지금 죄가 있습니까? 등의 질문을 던져 확신에 대한 혼란을 일으킨다.
제2단계로 기존 교회의 약점을 들추어(예를 들어, 교인들이 육체적으로 힘들게 생각할 수 있는 새벽기도, 십일조, 성전 건축, 목회자 우대 등의 부당성을 지적함) 기성 교회를 부정하게 한 다음,
제3단계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達靡봉?강조하여 공포심과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구원 방식에 따라 해방감을 안겨 준다. 양심의 죄책감으로부터의 율법의 억압에서의 해방, 종교에서의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구원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담의 원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성경의 특정 구절에서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거듭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제한하는 편협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전도 대상자가 기존 교회의 교인인 경우 그의 구원을 의심하게 한 다음 과거의 교회 생활이 헛된 종교 생활이었음을 인정하게 하고 여러 성구를 통해 강한 죄의식을 느끼게 해 준다. 그 다음 영원한 속죄(죄사함)에 관계되는 성경 구절을 읽게 해 죄사함을 깨닫게 함으로 확신을 안겨 준다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에게 접근할 때에는 방법을 달리한다. 개인 전도와 5~7일 동안 계속되는‘성경 강연회'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둘러 싼 중동 정세와 환경오염, 인구 폭발, 기아 등 긴박한 시사문제를 거론하여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억지로 주입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3. 구원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한 속죄를 받았으니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과 관계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 은혜를 받을 때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 3:22~2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적으로, 위치상으로 의인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 여전히 죄를 짓는다.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라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을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 시제로 밝히고 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때는 현재 시제를 쓰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박씨는 반 교리적인 이단 집단의 교주이다. 그는 기성 교회와 기성 교인을 공격하는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불신자 편보다는 신자 편에 더 많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수도 없이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 기도에 참여하는 행위 등을 공격하고, 특히 목사, 장로, 집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 대다수 사람들이 박씨의 설교를 듣게 되면 기성 교회를 비판하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 아래서 많은 신도들이 박씨의 집단에 미혹되어 가정이 파괴되므로 써 끝내 파멸을 길을 걷는 사례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기성 교인들은 말씀 중심, 교회 중심, 교역자 중심, 성도 중심으로 개혁할 것은 개혁하고, 이어받을 것은 이어받는 신앙 안에서 더욱 확고한 믿음을 고취시켜야 할 것이다.
박옥수의 설교 내용 종합
박옥수씨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려고 많은 성경 말씀을 왜곡, 도용하고 있으며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설교 내용의 대부분이 옛날 얘기 식이다. 박옥수씨가 자신의 설교 내용을 기록해 놓은 그의 저서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Ⅰ,Ⅱ', '염소와 양', '잃어버린 아들' 등을 종합해 보면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1. 율법의 모든 것을 완전 무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율법의 정의, 의무, 교리 등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
"원수된 것,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라는 말씀을 도용하여 율법을 완전 부정하고 무시하고 있다. 이 말씀은 율법의 교훈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를 폐하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613개의 계명대로 산다면 우리의 목숨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생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 하사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율법의 저주를 폐하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15절은 율법의 저주를 폐했다는 말씀이지 율법 자체를 폐했다는 뜻이 아니다.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히 10:28)"이라는 말씀처럼 율법은 함부로 폐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26절∼28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있다. 분명 율법 속에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고 또한 율법을 무시해 버리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2. 죄사함과 구원받는 데에 있어 회개, 기도, 열심, 봉사 등이 필요 없다고 주장.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엡 2:8)"는 말씀을 왜곡 해석하여, 회개나 기도와는 상관없이 구원받고 죄사함 받는 것이라고 억지 해석하여 자기 주장을 펴고 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서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도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인데 그들은 구원과 죄사함 받는 데에 기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여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가 중요치 않은 것처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또 그들은 훼방하고 있다. 회개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신자의 믿음의 기본이거늘 박옥수씨는 회개하지 못하게 성령을 훼방하고 있다. 마가복음 3장 29절에서는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했다. 또 박옥수씨는 간음한 여자와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단번에 구원받았다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데 간음한 여자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에서 구함 받은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라는 말씀 중의 '정죄'라는 것은 율법의 저주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죄되는 것은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정죄되는 것을 폐하신 것이다. 또 정죄된 것을 폐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도 영원히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한 여자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영생의 길을 얻은 것이다. 누가복음 23장 40∼43절 말씀을 보면 강도가 구원받았는데 그것을 두고 박옥수씨가 주장하기를 강도는 단번에 구원받은 것이다. "강도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 때 강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위해 여러 사람 앞에서 변론도 했고 예수를 믿으면서 분명히 회개도 하였다. 우리가 만약 그 강도처럼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별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예수를 위해 과연 우리가 변론하고 회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항상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 2:17)",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강도는 그 분명한 행함이 있었고 강도의 곁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강도의 행한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의 곁에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3.'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다'라고 의인 행세를 하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회개하여야 한다고 주장. '믿기만 하면'과 '믿음'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왜곡 해석하여 박옥수씨는 자칭 의인으로 행세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특히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를 싫어하는 것을 욥기에서 볼 수 있다. 욥기 1장 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욥을 칭찬하였다. 욥은 두 번째 시험을 만나 결국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다고 한탄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 하니라(욥 3: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6)"라고 탄식하였다. 욥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는 사단에게 손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욥의 문제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신 것은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욥 40:8)",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욥 32:1∼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낄이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욥 32:2)." 이렇듯 욥은 스스로 의롭다 고 교만했으며 더군다나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했으므로 교만 중의 교만이 아닐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 주어야 의로운 것인데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이상 세 가지는 박옥수씨의 설교책 모두를 종합하여 세 가지로 분리하여 풀이해 낸 것이다. 박옥수씨의 행위에 대하여 몇 자 적어 본다면, 박옥수 씨는 무조건 자기가 깨달은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아무 곳에서나 말씀을 꿰어 맞추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교만 주의자라고 확실하게 볼 수 있다. 특히 박옥수씨는 설교를 통해 기성 교회의 십일조에 대하여 마구 비난하고 있는데 5분 설교하고 십일조 얘기, 또 5분 설교하고 십일조 얘기를 반복하면서 기성 교회를 비난하고 있다.
구원파의 창시자 유병언씨 계열에서는 많은 파가 분파되어 있다. 박옥수파를 빼놓고 유병언씨의 계열에 큰 말썽을 일으켰던 송채화의 통용파가 있고 또 하나는 강석을의 이꼬르파가 있다. 이 두 파는 간증을 주무기로 하여 아파트를 아지트로 정하고 간증 모임을 열어 왔다. 그냥 간증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간증을 통해 엄청난 금액의 기업 자금을 거두어들인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십일조를 개발비라고 정하고 헌금을 자루에 담아 봉고차에 실어 나를 정도였다. 더군다나 상습 사기 혐의로 구속된 유병언씨 때문에 구원 파의 가면은 벗겨졌고 각종 매스컴, 신문, 잡지 등에 보도되었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파는 사기 집단이고 이단'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박옥수씨는 십일조 부분에서 크게 물의를 일으킨 것을 감안하고 기성 교회의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비난하고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무척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직접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요구한다는 것을 탈퇴 신도의 체험 수기에서 볼 수 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의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아랫사람을 시켜 구타까지 시키는 등의 악행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가.
구원파인 박옥수씨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니골라당에 비유된다. 계시록 2장 5절에서 니골라당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종한 이단으로 표현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율법을 무시하는 박옥수파가 니골라당에 비유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또한 현대의 니골라당, 율법을 무시하고 성경을 억지 해석하는 구원파가 이 시대의 마지막 이단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 1서 4:1)."
위 말씀처럼 어리석고 단순하게 판단하여 시험에 들지 말고 과연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지 한 번쯤 시험해 본 후에 건전한 복음 적인 교회의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같이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억지로 해석해서 자칭 '의인'이라는 자들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들의 전도 전략
가을이 한층 제 빛을 발하여 깊어 가는 지난 94년10월10일. 서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장충 체육관에는 아침 일찍부터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작은 손가방이나 성경책 등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아 단순하게 운동경기를 관람하려는 인파는 아님이 분명했는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체육관 앞 도로 주변과 입구에서 그 날 집회를 알리는 전단이 돌려지고 있었다.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오전 10시와 오후 7시에 하루 2차례씩 부흥 대 성회를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강사는 자칭 목사 박옥수 씨로 드러났다. 박옥수 씨는 그 동안 그릇된 구원관의 신봉자로 알려졌으며 ‘대한 예수교 침례회’(일명 기쁜 소식 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관의 혼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가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야기시킨 인물이다. 그는 주로 지방을 순회하며 집회를 가져 왔는데, 서울에서도 집회를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교세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다수 선량한 성도들이 집회 장소 규모나 ‘대한 예수교 침례회’라는 명칭만 보고 참석, 박옥수 씨의 잘못된 교리에 오염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가운데 일단은 집회 내용을 분석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10월 11일 오전 10시. ‘박옥수 초청 부흥 대 성회’가 이틀째 열리고 있는 장충 체육관 앞에는 교회별로 같은 차량을 이용한 시도들이 속속 도착했다. 체육관의 로비에서는 박옥수 씨의 설교집 등을 주로 출판해 온 ‘기쁜 소식사’ 간행 서적들이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10시 30분. 처음 5백여 명이던 참석자 1천여 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찬양 인도자의 진행으로 이날의 집회는 막이 올랐다. 박옥수 씨가 단상에 오르자 같이 나온 목사 한 명이 기도를 하고, 이어진 여신도의 찬양까지는 여느 부흥 대 성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찬송과 기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마침내 박옥수 씨의 설교시간이 되었다.
사도행전 1:1~14의 말씀을 주제로 한 박옥수 씨의 설교는 전날에 이어 “내 마음속에”란 제목으로 행해졌다. “명예를 얻기 위해 이것만하면 내가 잘될 수 있다는 욕망을 갖는 사람은 쉽게 죄를 용납한다”는 요지의 내용으로 왕하 5장의 나아만의 예화를 들어 ‘내 생각에는’이라는 생각으로 삶을 산다면 신앙생활에 가장 문제가 된다고 하고, 자기 방법대로가 아니라 신앙은 절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며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갔다. 설교 내용에 있어 특기할 만한 사항은 ○○○ 목사를 들먹이며 “돈 많고 교회가 크면 이단이었다 가도 이단이 아니라고 해주고 돈 없고 교회가 작으면 이단시하는 것이 한국 교회”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단 시비를 둘러싼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를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서 내 삶을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선언과 함께 나머지 사람들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것으로 주기도문이나 축도 없이 집회는 대충 끝이 났다.
그와 함께 앞으로 나간 사람들은 상담을 하기 위해 진행 위원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집회의 형식과 분위기, 신도들의 반응은 부흥회라기 보다는 일반 강연회 같았고, 집회가 끝나자 상담하기 위해 남은 사람들을 빼고는 별 반응 없이 속속 집회장을 빠져나갔는데 상담을 원한다고 하는 이들 중에는 주최측의 요원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다는 쑥덕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접근하는가?
대한 예수교 침례회 전도자들은 주로 기성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고 우물쭈물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증거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답변하면 언제 어디서 받았느냐고 다그쳐 묻는다. 그리고 당신은 의인인가, 죄인인가 묻기도 하며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아직 의인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정죄하여 성경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잘못된 교리로 유혹한다.
그 동안 이런 전도 수법에 많은 신앙인들이 미혹 당하였는데, 앞서의 부흥 집회 후 이루어지는 신앙 상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저들과 접하게 될텐데 그들에게 대처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소개하고자 한다.
① 그들은 “귀하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확실히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라며 접근한다. 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우리는 확실히 알고 믿는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답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
② 그들이 두 번째로 하게 되는 질문, “귀하는 거듭났습니까”하는 질문을 해 오면 “거듭났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5절에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좋다.
③“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심을 믿습니까?”라고 세 번째 질문을 받으면 “성령님이 내 마음에 계심을 믿으며 더욱 충만해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으며 사도행전 13장 5절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
④“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확실합니까?”라고 물으면 “옮겨졌습니다. 요한 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⑤“귀하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하고 물을 때는 “믿음으로는 의인이 되었으나 행위로는 죄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과 로마서 7장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⑥“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회개할 것은 없지만 성화를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합니다. 요한 일서 1장 8~9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⑦“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은 아닙니까”라고 질문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성도의 견인을 생각할 때 사랑과 감사의 용기를 느끼며 하나님의 공으를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⑧“구원받은 것이 확신이 되어 집니다?”라고 물으면 “확실히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⑨“재림의 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사모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더 큰 상급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7절 이하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대답해야 한다.
⑩“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첫째,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고, 둘째, 약속의 말씀 위에 있고, 셋째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하신 말씀과 요한 일서 5장 13절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사도행전 16장 31절에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상은 물론 예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질문에 성경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삶의 중요성과 동시에 올바른 교회 교육의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비단 특정한 이단 집단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 예방책으로서의 성경 공부가 아니라 진실로 주안에서 확신 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말씀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구원파,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
1987년 8월 29일 용인의 오대양이라는 회사의 공장 다락방에서 32명이 집단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위 오대양사건으로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그들의 정체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순자라는 여인이 일종의 공동체적인 종교집단을 이끌고 있었던 지도자였으며, 이 박순자라는 여인이 구원파(유병언, 권신찬)라는 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매스컴을 통하여 잠깐 보도되었다.
그러나 정작 경찰과 검찰의 조사는 많은 의혹을 해결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그후 구원파에 대한 교리와 신학에 대한 이단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정동섭교수에 의하여 알려졌다. 정동섭교수는 1982년 서울 침례신학대학원과 미국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하여 현재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정동섭교수는 자신이 대학 3학년때에 구원파교회에 빠졌으며, 그 후 8년 동안을 구원파교회에 추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의 책을 번역하면서 약 3년간을 지방교회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에 비로소 지방교회와 구원파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정교수는 구원파의 교리와 신학을 비판하다가 구원파(유병언)에게 고소를 당하였고, 한때는 패소하여 법정구속을 당하는 등, 오랫동안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하였으나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항소에서 결국 승소하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서 박옥수목사라는 사람이 대규모 체육관 집회를 하면서부터, 다시 구원파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박목사의 저서인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책을 통하여, 또 일년에 몇번씩 체육관의 대형집회를 갖으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 세력이 확장되고 있게 되자, 각 교단에서는 구원파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굿모닝증권의 회장이 기쁜소식선교회를 적극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홀트아동복지회의 회장(미국인)이 기쁜소식선교회임이 밝혀져 많은 문제점을 불러오고 있다.
한때 구원파의 대표적인 실세였던 유병언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주식회사 삼우 트레이딩, 주식회사 세모, 세모 스쿠알렌등의 회사를 운영하다가, 1991년 50명의 고소인에 의해 사기죄로 8년간을 구속되는데, 그 기업체의 사장은 유병언이며 그의 장인인 권신찬(장로교 목사)이 그 교회의 지도자로 있으며, 권신찬은 예장통합 소속의 목사였으나 1964년에 이미 목사면직의 조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 구원파의 한 계열을 이루는 이요한(본명: 이복칠)은 권신찬에게 안수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유병언의 독선적인 기업운영에 대해 반대하다가, 집단폭행을 당하고 교인들과 함께 빠져나와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의 교리와 신학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유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몇몇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군소교회의 계열과 분파도 다수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2003년에 일명 한국녹색회라고 불리는 단체에서 경북 보현산 일대의 270만평을 구입하였는데, 이 한국녹색회가 구원파 단체와 연관이 있다고 전해지면서 주민들이 이 단체의 지역유입에 반대하고 있다고 몇몇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이와 같이 외부로 잘 알려지지 않은 구원파의 분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고 한다. 주로 알려진 구원파의 계열은 다음과 같다.
박옥수(기쁜소식선교회, IYF)..... 대전 중앙한밭교회
권신찬, 유병언(기독교복음침례회)..... 일명 삼각지교회, 세모(스쿠알렌, 세모유람선)
이요한(권신찬에서 분열, 대한예수교침례회)..... 인덕원 서울중앙교회
이들은 정규적인 신학과정이 아니라, 소규모적인 성경공부모임을 통하여 주관적인 성령체험을 하면 목사안수를 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논리라면 성령체험이란 목사안수를 주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되어지는데, 이들은 기존교회의 신학체계를 비난하고 있다.
특히 박옥수와 권신찬, 이요한등의 주장이 거의 유사한 것은 모두 딕욕이라고 하는 미국의 독립적인 침례교회의 한 선교사와 길기수(한국명)라고 하는 네델란드 선교사로부터 함께 성경모임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인데, 또 많은 사람들이 구원파가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에게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 교회를 모두 일컬어 비복음적이며 구원받을 수 없는 잘못된 교회로 간주하고, 기존 신학대학의 신학체계를 부정하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옥수측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는 기존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목사의 자격과 요건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독립침례교회 중 형제교회(brethen church)라는 곳 중에서 구원파와 아주 유사한 주장을 하는 곳이 있다. (다만 현재의 형제교회는 그 분파가 다양하므로 그 교리나 사상에 대해서 한마디로 규정하여 언급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지방교회 워치만 니가 형제교회의 존다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 연관성을 추론할 수 있다.)
또 박옥수목사의 학력에 대한 이야기가 문제가 되어지는데, 그가 중학교 중퇴라는 것이다.
유병언, 이요한등의 학력도 비슷한 저학력이라고 한다. 물론 저학력이라는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외국어, 문법, 문장구조, 해석학, 철학, 역사등 다양한 방면에 대해 공부를 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학문적인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들의 특징적인 교리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략적으로 알아본다.
1.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회개를 하지 말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그가 말하는 이것이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며, 이 비밀을 깨달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상적인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 되어지며,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도덕폐기론이 되어질 수도 있으며, 믿음이 아니고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 되고만다.
2. 천국에는 죄인이 갈 수 없으며 의인만이 들어가며,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과거, 현재, 장래의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이미 온전한 의인이 되었으므로 죄가 없으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죄인이므로 구원을 못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거듭남의 단회적인 회개(믿음)와 성화라는 과정을 통한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 정확한 구별을 못하기 때문이다.
3. 이러한 단회성 회개(믿음과 깨달음)가 곧 구원이므로, 성도는 자신이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궁극적으로 구원의 주는 누구이며 누가 심판을 하는가?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받은 구원의 현재적인 의미만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 구원관이 아니다. 이것 역시 구원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잘 모르기 때문이 빚어진 결과이다.
4. 일반교회를 강하게 부정하고 비난하며, 비성경적인 교회로서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일반교회는 율법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일반교회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키는가? 대한민국의 정통교회는 모두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새벽예배, 십일조, 주일성수등이 율법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교회도 정상적인 정통교회라면 새벽예배나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새벽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야만 하며,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만 율법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박옥수의 구원파라면 오히려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러웁다.
구원파의 주장이 왜 옳지 않는가에 대해서 세가지의 관점에서 비판하여 보며, 또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1) 회개와 믿음이란 무엇인가?
(2) 죄인과 의인이란 무엇인가?
(3) 죄란 무엇인가?
(4)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1) 회개와 믿음이란 무엇인가?
회개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두 개의 단어가 있다.
첫째 나함이란 단어로 그 뜻은 "후회하다"는 말이다. 과거 자기가 행한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는 것을 말한다(창6:7, 렘8:6) 두 번째, "슈브"란 단어로 "뒤로 돌아서다"는 뜻이다.
헬라어로서 중요한 단어는 "메타노이아"인데 메타란 말은 "후에(after)"이고 누스란 단어는 "마음"(mind)이다.
즉 나중의 생각과 감정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메타노이아"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방향수정>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로에서 이탈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향수정을 "메타노이아"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즉 회개란 용어가 단회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그 "회개"란 용어는 "믿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의 회개를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회심"이라고 하며 "회개와 신앙"이라고 한다. 즉 그 "회개"는 "불신으로부터의 돌이킴. 방향수정"을 말한다.
이러한 회개와 믿음은 분명 단회적이다....
그러나 "범죄로부터의 돌이킴", 즉 그러한 방향수정도 "회개"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지속적이며 반복적이다. 이러한 범죄로부터의 방향수정, 즉 회개도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있다는 것을 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기쁜소식 선교회라고 하는 박옥수(구원파)는 믿음을 의미하는 "회개"와 성화적이고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회개"와 착각을 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러한 단회적 회개(믿음)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회개(성화)를 모두 언급하고 있으며, 일반 교회의 정통신학에서도 단회적인 회개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키고 있다.
즉 박옥수는 일반 교회에서 단회적인 회개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박옥수목사는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그가 주장하듯이 결코 "비밀"이 아니다.
박옥수목사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자로서, 정통신학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정통신학책이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루이스 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256쪽)
- 따라서 최초의 믿음과 회개는 생애 중 단 한번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참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회개의 마음의 자세는 회심때 단지 시작될 뿐이다. 그 때의 그 자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345쪽)
루이스 벌콥과 웨인그루뎀은 장로교의 조직신학 학자로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장로교의 신학은 단회적인 회개(믿음, 거듭남)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성화적인 회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교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라고 하는 감리교의 요한웨슬레의 견해를 들어보자....
- 이 회개(중생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199-200쪽)
즉 박옥수목사의 가장 중요한 이단성은, 성화적인 개념의 반복적인 회개에 대한 정확한 뜻을 잘 모르면서, 회개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정통신학에서 모두 평범하게 가르치는 것을 오직 자신들만이 깨달은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치우치는 편견이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주장이 왜 틀린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회개한다"는 말은 같은 것이다. 회개는 곧 하나님을 향한 궤도이탈에서 방향수정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거스틴은 믿음과 회개는 동전 양면과 같다고 하였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
위의 구절에서 "회개하라"는 말은 곧 "믿으라"는 말과 같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수정을 촉구하는 말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였을 때에 삭개오가 과연 믿음이 없는 회개만을 하였을까? 삭개오의 회개는 믿음이 병행된 회개였으며, 당연히 믿음이 배제된 회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회개케 하는 믿음"이며 "믿게하는 회개"일 것이다.
회개하다는 헬라어의 단어는 "메타노이아"(명사), 메타노에오(동사)"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원파의 주장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을 때에 한번만 회개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장래의 죄까지 모두 사함을 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를 믿으면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으므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믿음의 시작만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성화의 개념을 전혀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믿음을 유지할 필요성과 일상적인 회개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바로 구원파의 주장인 것이다.
마치 한번만 믿으면, 두 번 다시 지속하고 반복하여 믿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화적인 과정에서의 회개가 필요없다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계시록 2-3장을 보자.
일곱교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단어는 모두 "메타노에오"이다.
그 교회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교인들로 처음 믿음의 회개와는 구별되어지며, 다시 믿으라는 경고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메타노에오(회개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계시록에서 볼 때에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오직 단회성에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에베소교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2:4) 그래서 회개하고 처음 행위(사랑)을 가지라고 권한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이르는 말인데, 만일 회개치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것이다.(2:5) 그런데 박옥수 구원파는 회개할 필요없다고 한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에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2:14) 즉 타종교의 우상사상이다.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신다.(2:16) 그런데 구원파는 회개하면 안된다고 한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교회는 음행과 우상숭배를 한다.(2:20-21) 물론 성령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움을 받는다(2:22)
두아디라교회의 교인들이 박옥수의 주장을 따르면 그들은 구원을 잃게 된다.
사태교회: 살았다하나 죽은 교회이며 온전하지 못하다.(3:1-2)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몇명이 있다(3:4) 성령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책망하신다(3:3) 회개치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운다고 하신다(3:5) 계시록의 말씀대로 회개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남게 되지만,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므로 회개치 않으면 이름이 지워진다....
라오디게아교회: 찹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갖었고, 부자이기에 구제사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3:15-17) 그래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권한다.(3:19) 회개하는 자는 보좌에 앉게해 주신다고 하신다(3:21) 그냥 회개가 아니라, 열심을 내어 회개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박옥수는 죄사함의 비밀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보좌에 앉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박옥수 옆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살펴 본대로, 계시록에서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단회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믿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방향수정을 촉구하는 회개를 가르킨다.
즉 이미 예수를 믿는 자는 회개하면 안된다는 박옥수의 주장은 비성경적이 되어진다.
더 명백한 성경적인 증거를 보자.
주기도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일상적인 기도문이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즉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이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죄를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반복하여 용서하여 주실 것이 분명하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3-4)
윗 구절에서 회개는 "메타노에오"이며, 그 단어는 결코 단회적인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 본문의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범죄에 대한 반복적인 방향수정을 뜻하는 것이 명백하다.
만일 "메타노에오"가 단회적인 믿음을 말한다면 일곱 번을 믿으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일상적인 죄를 지은 자에게 일곱 번을 용서하듯이, 주기도문의 용서도 그렇게 하여주신다는 것이다.....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주기도문을 회중기도문으로 외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주기도문은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그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는 그 이유일 것이다.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성경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를 믿는 죄씻음의 믿음은 단회적이지만, 그러나 지속적, 반복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정결케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을 상징한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또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도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박옥수는 이 동사의 시제가 과거라고 주장하는데, 이 동사(헬라어, 에이미: am)는 과거가 아니라 분명한 현재동사 일인칭 단수이다.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면, 바울이 과거에만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로마서 7장17-2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아직도 죄가 남아있음을 고백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구원을 잃었단 말인가?
구원파의 주장을 인정하자면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구원을 잃는다....
사도요한과 그의 서신을 받았던 소아시아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구원을 잃는다....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요한은 영지주의자라고 불리는 거짓교사들과 이단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목적으로 이 서신을 쓰게 된다.
우리가 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구원파는 이러한 것을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또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고 의롭다고 말하였는데..... 죄가 있으니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닌가? 박옥수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예수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였는데, 왜 자백을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여야 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가 없는데도 죄를 자백하여야 하며, 없는 죄를 자백하는 사람에게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에게 이미 없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가?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자면 하나님을 거짓말을 하는 자로 만들며 그야말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 자백은 해도 좋고, 회개는 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말장난이 아닌가?
박옥수의 주장을 보면, 일반교회가 새벽에 눈물 콧물 흘리며 울고 불고 하는 회개에 대해서 조롱하듯이 비난하는데, 박옥수목사는 "회개"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반교회는 새벽에 눈물과 콧물을 흘려야만 회개를 하는 것이라고 결코 가르키지 않는다.
울어도 좋고 울지 않아도 좋으며, 새벽에 회개하여도 좋고 저녁에 회개하여도 좋다.
박옥수목사는 자신의 궤변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반교회의 회개의 개념을 왜곡, 과장하여 희극화시키며 비난하고 있다.
어느 일반교회가 회개의 정의에 대해서 "새벽에 울고 불면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가르치는가?
게다가 구원파는 새벽예배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구원을 받는가? 박옥수는 새벽에 기도를 하신(막1:35) 예수님도 비난하는가?
또 시몬의 경우를 보자.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팔라고 하다가 사도들에게 큰 핀잔을 받는 장면이 사도행전에서 언급된다.
-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이 구절에서 혹 사람들은 시몬이 과연 예수를 진정으로 믿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본문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몬이 참신자였는가가 아니라, 베드로가 시몬에게 충고한 내용에 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충고하였으며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박옥수목사의 경우에는,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악함을 회개하면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사도와 박옥수목사 중에서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물론 시몬이 진정 베드로의 충고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성경에서 더이상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메타노에오)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베드로가 시몬에게 "회개하라"는 말은 시몬이 그 악함을 뉘우치고 다시 고하여 기도하고 사함을 받으라는 의미가 분명하며,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죄로부터의 돌이킴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앞에서 엄급하였듯이, 일반교회는 거듭남(중생)의 단회적인 회개와 성화과정의 반복적인 회개의 두가지 개념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키고 있다. 즉 거듭남은 단회적이라는 것도 분명히 가르친다.
더욱이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 한번의 제사라는 것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것을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코메디가 아닌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욥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다.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욥의 회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믿음을 갖겠다고 해석을 할 수는 없다. 즉 구원파의 주장대로라면 의인이었던 욥은 자기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잃어야만 한다.
그런데 욥은 구원을 잃지 않았다.... 구원파에서는 욥이 구원을 잃었다고 가르키는가?
-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24:10, 대상21:8)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죄를 범하였으며 자신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구조사를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또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범죄를 저지른 후에,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고 회개하는데,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으므로 구원을 잃었는가?
-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12:13)
이 사건에 대해서 다윗은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1-5)
다윗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하였으나 구원을 잃었는가?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가?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을 받은 다윗은 죄가 없어야만 하며, 온전한 의인이므로 회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의 죄를 말갛게 씻겨달라고 하였으며, 깨끗이 제하여달라고 하였는가?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주께 범죄하고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인구조사 후에 또 우리아를 범하고 난 후 두 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는데,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분명히 구원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이 성경본문에서 "회개"라는 용어가 예수를 처음 믿는 단회적인 신앙의 거듭남만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어진다.
다음 성경구절은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였는데, 왜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한다고 하였는가?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 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 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겔18:30)
박옥수목사는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 되어서 구원을 잃는다고 하였는데, 다음 성경본문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죄악을 숨기지 않고 죄를 아뢰면 주께서 죄의 악을 사하여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박옥수계열의 구원파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못받는다.
# 한번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죄가 실제로 전혀 없어지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진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박옥수가 주장하는 거듭남의 비밀이란, 겨우 성경에 기록된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박옥수는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 비밀을 깨달아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케 하였다할 자가 누구뇨?(잠20:9)
-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죄가 있다고 하였던 아래 성경구절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구원을 잃어버렸는가? 성경의 기자들은 과거에만 죄인이었다고 말한 것인가?
-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36)
-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8-9)
-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2) 의인과 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알 듯이,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 의인으로 바뀐다.
그것을 칭의라고 부르며, "의롭다함을 얻음" 혹은 "의롭다함을 받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칭의란 실제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우리는 죄사함, 속죄라는 용어를 잘 파악하기 위하여 구약의 제사에 대해 살펴보자.... 어린 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 양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과연 구약의 유대인들이 짐승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그 죄가 실제로 없어지며 온전한 의인이 되어질까? 그들은 결코 온전한 의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계속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면책을 주시는 것이다.
즉 죄를 가리워 주시는 것이며 심판을 면제해 주시는 것이다.
"속죄"를 가르키는 대표적인 구약의 히브리 단어는 "카파르"인데 그 단어는 "덮다, 가리우다"를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희생제사였으며, 신약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과연 구약에서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당사자의 죄가 모두 없어지며 실제로 의인이 되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롬3:25)이라고 말하였는데 "화목제물"이란 단어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르킨다.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
이것이 바로 대속이다..... 우리 죄인들이 의인으로 정말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임을 잊지말자.
그의 피흘림으로 인하여 우리 죄가 덮어진 것이며, 사함을 받은 것이며,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성경을 잘 정독하여 보자..... 죄가 정말로 없어져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죄가 가리워지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사하심을 받은 것인지 말이다.
-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우리들이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화목제로 희생하였기에 우리 죄가 가리우심, 덮으심을 받은 것이다.
다음 성경구절을 보자....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다.
-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7)
-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이 "디카이오마"(의롭다하심을 얻음: 칭의)에서 파생된 "디카이오시스"라는 단어는 원래 법적인 용어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법적신분의 무죄선언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면, 내가 교통사고로 어떤 사람을 다치게 하였는데 재판에서 무죄선언이 되었다고 하자. 실제로 나에게는 죄가 있지만, 무죄선언이 되므로 나는 정죄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면책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의인이 되었으므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이라고 칭하여 주시는 믿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가 완전히 없어져서 완전한 의인이 되었으므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무죄선언을 하여주셔서 그 죄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값없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3) 죄란 무엇인가?
죄는 원죄(sin)와 자범죄(crime)로 분류하며 원죄는 죄책과 죄성(부패와 오염)으로 나눈다.
죄란 물질병사가 아니며, 그러므로 죄가 우리 몸 안에 없어지거나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A라는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나와 A와의 관계를 말하며, 내가 B에게 죄를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한다.
즉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죄"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죄책"(죄에 대한 책임, 罪責)과 그 죄로 인한 "오염된 죄성"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는 것은 죄책(죄에 대한 책임)에 대한 사함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신칭의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 (롬8:1)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는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을 면책하여준다는 의미이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정죄함"이 없게하여 준다는 것이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6-19)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같이 실제로 완전한 의인이 되어 장래 죄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 면제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죄책은 없어지지만, 원죄로 인하여 오염된 죄성은 우리에게 남으며, 그 오염된 죄성은 전가되어지므로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원죄의 쓴 뿌리가 자범죄의 원인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단 거듭난 신자 안에 남아있는 것은 원죄의 결과로 인한 죄성(오염)이다.
아담으로 인한 죄로부터 전가된 죄책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지만, 죄성은 거듭남과 동시에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더라고 할지라도 아직 완전하게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거듭난 자도 자범죄를 짓게 된다. 거듭난 자에게도 죄악된 옛본성과 정욕이 아직 남아있어 성령의 소욕과 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화라는 과정이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고 도처에서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실제로 완전한 의인이 된다면, 성령의 인도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바울같은 사도도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자신에게 육신의 법, 즉 죄의 법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아래 성경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속에 죄가 있으며, 그 죄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20)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의인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온전한 의인만을 구원하신다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예수를 믿었다 하더라도 그가 실제적으로 온전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의인이라고 불려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임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 죄와 허물을 덮고 가리기 위하여 다른 대안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히9:22) 속죄의 원칙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8)
4)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시다. 또 심판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구원파의 주장에 의하면 단 한번만 회개하면 두 번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즉 그들의 구원받은 날짜는 그들이 처음 믿고 회개한 날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원파의 교리를 깨닫고 알게된 날이 될 것이다.
박옥수구원파들이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9시30분경에 웨슬레목사가 회심한 시간과 날짜를 알고 있었다고 변명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웨슬레목사의 회심은 그가 시간과 날짜를 고의적으로 기억하였던 것이 아니라, 웨슬레목사의 그 사건이 일기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상에서 이렇게 그들에게 질문하였고, 그들은 물론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1) 웨슬레목사의 회심의 날짜와 시간이 구원파의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시간인가?
(2) 웨슬레목사가 반드시 그 시간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가?
(3) 웨슬레목사가 한번만 회개하라고 하였는가? 회개하면 죄인이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는가?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어떤 비밀적인 것을 깨닫는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에 대한 확증이 없이 무조건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곧 일반교회는 구원이 없으며, 자신들의 거듭남의 비밀을 아는 구원파만이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즉 박옥수목사가 주장하는 거듭남은 더 이상 회개치 않는다는 것이며,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되어진다.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일반교회는 반복적인 회개를 하여야 한다고 하니 구원파가 말하는 거듭남과 깨달음이 없으며, 그러므로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이 "회개를 안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회개를 하면 구원을 잃고 회개를 안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들이 말하는 거듭남과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일반교회의 그것과 동일하다면, 그들은 "비밀"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넷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
2.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3.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
4.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구원의 확신이란 1번과 3번의 경우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믿음의 확증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구원"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길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섰지만,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의 지속성과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주의하여야만 하며, 궁극적인 구원은 최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의 연속"이어야만 한다.
어떤 비밀이나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히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고...."(엡3:17)
즉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어떤 행위만으로, 혹은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어떤 비밀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이다.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즉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과거적인 사실이나 어떤 깨달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다.
즉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이미 얻었고, 이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할 것으므로 장래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확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주체는 언제나 인간의 몫이며 인간 스스로의 책임의 한계라는 것을 잊지말자. 너무나 당연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안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맹목적이며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믿음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을 자기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서는 곤란하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
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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