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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 세대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No sign will be given it,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루카 11,29-32)
except the sign of Jonah.
말씀의 초대
요나 예언자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니네베로 간다. 죄악의 도시 니네베가 멸망할 것을 전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요나의 예언을 듣고 뉘우친다. 니네베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한다. 임금마저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을 시작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보시고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군중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믿음도 없이 청하기만 한다. 주님께서는 요나 이야기를 하신다.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말을 믿었기에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라는 권고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군중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믿겠다고 합니다. 흥정입니다. 그런 모습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적이 있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기적을 확인하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합니다. ☆☆☆
요나 예언자는 특이한 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예언자가 싫다며 먼 곳으로 달아나려 합니다. 당시 예언자는 신분을 보장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카리스마’가 인정되면 먹고사는 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언자의 신분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가 연출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기적적인 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회개가 먼저입니다. 새 마음으로 기도와 성사 생활을 하면 기적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현대판 솔로몬’을 찾고 있습니다. 물질을 앞세워,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솔로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욕심에서 조금만 물러서면 솔로몬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을 만날 수 있는데, 그걸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외치고 있습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기적은 정성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심혈을 기울이면 ‘기적적인 일들’은 일어납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망각하기에 욕심에 빠집니다.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얽매이는 것이 싫었거나 아니면 남다른 취미 활동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말로써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자 태풍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자기 때문에 무모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 1,12). 요나는 마음을 비웠던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은총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살아 있음’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청중들에게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 안에서 ‘하늘의 표징’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열왕기 상권 10장 1절에서 13절을 보면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었던 ‘스바’라는 나라의 여왕이 솔로몬 임금의 명성을 듣고 그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스바는 문명국이었고, 솔로몬 임금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또한 그 위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지혜가 얼마나 출중한지를 시험하고자 많은 것을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모든 것에 답변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인격이 훌륭하였기에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에티오피아를 건설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편,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 있던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곧, 요나는 하느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던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거나 불을 내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회개하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대로, 그들의 성읍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 예언을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니네베 사람들도 스바 여왕도 모두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지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이방인의 모습은, 마음이 돌같이 굳어 버린 유다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유다인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 실현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아무래도 이번 달은 묵상을 중심으로 기도해야 할 것 같네요. 오늘 요나의 표징에 대해서도 굳이 관상을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묵상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먼저 생각을 가다듬어 봐야 할 것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내적 태도입니다. 왜 표징을 요구하는가, 사람들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좌표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음으론,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다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깊게 알아들으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제기했던 물음들에 대한 답변이 이뤄져야 그 연장선상에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이들도 있는데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에겐 어떤 움직임 내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살펴볼 일입니다.
복음관상도 그렇지만 특히 이런 묵상을 할 때 그저 복음의 내용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으로만 알아듣는 것에 그쳐선 안 됩니다. 알아들은 내용을 반드시 자신의 현재 모습에 비춰 성장의 계기로 이어 줘야 합니다. 단순히 반성하고 결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절로 성장에로 연결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선한 알아들음이 필요하단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영적 만족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새로움과 깊이와 알참이 있을 때까지 반복기도가 요청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양승국신부-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교회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길은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지극히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갈망하고 찾는 누구에게나 그 사람에게 적합한 방법, 지극히 개별적인 양상으로 접근하십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법 역시 너무도 다양해서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봉쇄수도원에서 한 평생 고독과 침묵, 극기와 은둔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시장 한 가운데서 열심히 생업에 종사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쇄신운동을 통해 강렬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신수련이나 다양한 묵상법을 통해 자신 안에 깃들어계신 하느님을 발견해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견뎌나감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치병,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의 투쟁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철야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산이나 여행을 하면서 자연 속에 숨어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체험은 각 사람의 성향이나 기호, 체질에 따라 방법이나 강도가 지극히 다양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통해서 순식간에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0년 이상의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겨우 하느님 체험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하느님의 손길에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풍같이 부드러운 하느님의 손길에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하느님을 체험함에 있어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곳저곳 기웃기웃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그러다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상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이에 세월은 흐르고 모든 것이 시시해지고 하느님의 자취는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너무 조급히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너무 지나친 기대도 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이란 단 한번에 끝장을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두고 계속 추구해야할 그 무엇입니다. 비록 지루하더라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그날을 인내로이 기다리십시오. 귀찮게 여겨지는 매일의 가정사로부터 도망가지도 마십시오. 열심히 이 세상을 사십시오. 오직 하나! 자신에게 적합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찾으십시오.
요나의 표징 - 류충희 신부-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면서도 그분을
하느님께도 힘든 기적 -김찬선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기적과 신앙 - 배미애 수녀- 수녀원에 98세의 노 수녀님이 함께 사신다. 그분은 젊은 시절에 참 성실하고 명석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능력이 감퇴되어 오로지 기도와 식사, 그리고 실내에서 하는 작은 운동이 그분 활동의 전부다. 노 수녀님은 기억력이 쇠퇴해서 하루에도 수없이 공동 기도 시간과 미사 시간을 묻곤 해서 돌보아 드리는 수녀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믿기 싫은 것은 아닌지 -전삼용신부-
어떤 수녀원에서 부탁을 하여 그 수녀원의 창립 정신을 바탕으로 피정강의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던 한 수녀님이 돌아오는 길에 함께 왔는데 그 원고를 뽑은 출처가 어디냐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쓴 것이라고 했지만 그 수녀님은 계속 인터넷 어디에서 뽑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엔 장난인줄 알았으나 나중엔 그 수녀님이 그 모든 것을 제가 썼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어서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수녀님이 수련 받으실 때 한 연세 든 수녀님이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믿을 분은 예수님뿐이고, 여자는 조금 믿어도 되고, 남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 돌아가시기 전에 참 희한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말씀이 그 수녀님께 영향을 많이 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그 이후로도 제가 하는 말은 거의 믿지 않으셨고 그것은 저의 겸손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믿기 싫은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교리를 가르치다보니 교리서에 한국 천주교는 삼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즉, 소득의 30분의 1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십일조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적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며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마태 23,23)이라 하시며 십일조도 잘 지켜야 하는 것임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천주교인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고 교리서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가끔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느냐고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성경에 그런 말씀이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십일조를 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보이지도, 믿기도 힘든 것이 아닐까요?
과연 기적을 쫓아다니는 신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일까요? 혹 성경 말씀도 믿지 않는다면 왜 표징을 쫓아다니는 것일까요? 어떤 확실한 표징을 본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살아가게 될까요? 믿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그저 표징만 청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 사람들은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또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표징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은 세 명의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처음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인데 어린아이였고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짜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 큰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나임이라는 곳을 지나시다가 과부의 젊은 아들이 관 속에 죽어 있는 것을 살리셨습니다. 조금 더 큰 사람이고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때였지만 역시 사람들은 확실히 믿도록 더 큰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라자로를 살리시는데 그가 무덤 속에서 며칠 푹 썩도록 기다렸다가 살려내십니다. 썩은 사람을 살려내도 사람들은 더 큰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급기야는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냈던 것처럼 당신도 죽어서 땅에 묻혀 3일을 지내다가 스스로 부활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봐야 소용이 없으니 당신 스스로 죽임을 당해 부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성경말씀은 전합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는 사람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야하기에 변화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먼 아프리카로부터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왔던 세바의 여왕, 그리고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던 니느베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바의 여왕은 먼 곳에서 찾아오는 노력을 할 줄 알았고 니느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믿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기적을 찾기 이전에 성경부터 믿고 실천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믿지 못하면서 표징만을 원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맙니다. 믿기를 원하고 노력한다면 표징은 바로 눈앞에 있고 굳이 기적을 요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20여 년간 떡볶이를 팔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오던 90대 할머니가 전 재산을 유산 기부해 주위에 귀감이 되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김정연(93) 할머니가 ‘행복한 유산 캠페인'에 참여해 지금까지 모은 돈 1500만 원과 전세금 800만 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김 할머니는 한국전쟁 중 남편이 실종된 뒤 꽃 장사를 시작으로 지금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 금천교 시장에서 20년째 떡볶이 장사를 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전기담요에 의지해 한겨울을 나는 기초생활수급자 처지이면서도 돈을 버는 족족 남을 돕기에 바빴다.
김 할머니의 소원은 여느 때처럼 장사하고 집에 가서 자다가 편히 세상을 뜨는 것이다. 그리고 30년 전 해놓은 장기기증 서약을 실천하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다. 빛도 들지 않는 방에 홀로 지내는 김 할머니지만, 세상을 뜨는 그 날까지 주위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밝고 따뜻해 보인다.
'늙은 내 몸이 어디 쓸 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수환 추기경처럼 각막이라도 누군가에게 줬으면 좋겠네.'
김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이다.”
김정연 할머니께서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니었지요. 또한 좋은 집과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 것 같은데 남을 돕고 있는 이 할머니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얻는 것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 것을 나눔으로써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면서, 특별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특별한 표징을 구하기보다는 삶 전체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남들이 뭐라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슬프고 암울한 이유는 사람들의 머리가 ‘나 하나만’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 잘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생각으로 인해서 더욱 더 슬프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만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이웃 역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함께 어울려 잘 살라고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행동과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이제 ‘나 하나쯤으로 뭐 세상이 달라지겠는가?’라는 의구심을 버리고 하루에 한 가지씩의 선행을, 그것도 안 되면 하루에 한 번쯤은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그러한 행동이 이 세상을 보다 살맛나게 만드는 기적을 일구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믿으려하지 않고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 한 가지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옛날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니네베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땅 속에 묻히셨다가 사흘 후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종말에 내려와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는데(요나 3장) 이스라엘 백성은
요나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니
종말에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인 스바 여왕
(1열왕 10,1-13; 2역대 9,1-12)도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찾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종말에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자 그것을 듣기
거북해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요한 6,66-68).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 기도는 겸손한 청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기주의적이고 아주 심하게 표현하면 날도둑놈 같습니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지만
‘나의 뜻이 이러하니 나의 뜻대로 하십시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찾지도 않고
하느님 뜻대로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순종하라고 하며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독서는
어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하느님의 뜻이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기를 빌라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복음 다음에
이 세상의 악함을 한탄하시는 오늘 복음을 배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세대 뿐 아니라 우리 세대도 악합니다.
정말 아버지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기만을 바랍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원하니 표징, 기적을 일으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기적은 보여줄 수 없고
반대로 요나의 기적만 보여줄 수 있다 하십니다.
즉 불순종하던 니니베 사람들이 임금에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게 되는
그 회개의 기적밖에는 보여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회개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고
하느님께서 가장 이루기 힘든 기적입니다.
인간이 회개하는 기적은 마른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힘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저희 수도회 영성학교 입학식이 있었는데
축사 내용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고
가슴에서 손과 발까지의 거리는 더 멀다는 말이었습니다.
김 수환 추기경께서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하셨지요.
그만큼 우리 인간은 바뀌기 힘들고
더욱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바뀌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심은 대단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당신을 배반하고 거역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신 것이니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유의지로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지요.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에
우리에게 회개를 강제하실 수 없고,
그래서 당신 아들의 순종을 모범으로 보여주시며
그렇게 따라 순종하는 회개를 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자유의지로 순종할 것이고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끝까지 자유의지로 떼를 쓸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31일 마지막 송년 묵상과 나눔 시간에, 노 수녀님을 돌보는 수녀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과 중에 노 수녀님이 심하게 고집을 부리거나 수없이 질문을 하실 때는 때때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날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힘을 달라고 매달리면 그 화가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사랑할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신앙은 미움과 분노를 삭이고 사랑이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시험하면서 초인적인 기적을 일으킨다. 그 기적은 물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의 기적, 세속적인 시각 너머로 걸어갈 수 있는 용기의 기적,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기적이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요나가 기적이 된 것처럼, 초대교회의 믿는 이들의 삶의 자세가 기적이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그 사랑의 모범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새벽을 열며
저는 어제 동창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동창 신부들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강원도 홍천에 있는 어떤 콘도로 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저는 월요일 낮에 다른 동창들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조금 멀기는 했지만, 공기와 물이 좋은 더군다나 아름다운 경관이 있다는 그곳으로 기쁜 마음과 설렘을 가지고 출발했지요.
드디어 저녁에 도착. 그리고 객실에 들어갔는데, 1박2일 동안 묶을 숙소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우와~~~ 좋다.’를 말하면서 둘러보다가 벽에 붙어있는 객실 이용료를 보게 되었습니다.
“1박 2일 350,000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냥 하룻밤 자는 것인데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렇게 비싼 거야?”하고 다른 동창에게 물었지요. 그랬더니만 이렇게 말해주네요.
“누가 요즘에 제 값 다 내고 이용하니? 각종 할인 받아서 85,000원에 이용하는 거야.”
생각해보니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종 할인 카드와 할인 쿠폰을 이용해서 값을 치루는 것 같습니다. 영화, 식사, 놀이동산 등등, 제 값 모두 다 치르고서 이용하면 오히려 바보 소리 듣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할인을 어떻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정보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지요. 모른다면 할인 카드와 할인 쿠폰을 이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제 값 모두 치른다고 ‘돈 많은 사람이구나.’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보’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비싼 콘도 객실도 할인 카드를 이용해서 싸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께서도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또한 각종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이벤트를 많이 만드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종 성사를 통해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쉽게 들어가는 특혜를 주고 계시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 특혜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성당에도 잘 나가지 않으며, 일반 사람들처럼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러한 특혜를 누리도록 각종 표징을 통해서 홍보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각종 표징을 우리들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천 년 전,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도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아무런 느낌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즘 시대에 현명한 사람은 각종 할인 카드와 쿠폰을 이용해서 싼 가격에 물건을 구입하고, 각종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시대에는 잘 적응하면서, 왜 주님 앞에서 현명한 사람은 되지 못할까요? 주님 앞에 현명한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종 표징을 통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표징인 사랑을 내 주변에서 찾아봅시다.
빠다킹신부
들음
-이정호신부-
통계에 보면 남자들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7천 단어를 이야기하고 여자들은
3만 단어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말하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봅니다. 말의 양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지도 다르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설명하고 묘사하는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실망하고 분노하고 외면합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때 거짓이라 여기고 무시하며 한편으로 밀쳐둡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아듣고 싶어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남다른 길을 요구합니다. 내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합니다. 낯선 방식이
두렵고 불안하여 우리는 알아듣기 어렵다고 외면합니다. 그래서 뚜렷한 표징을
요구하며 말씀을 뒷받침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말씀을 들었고
마음 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말씀을 가로막지
않도록 용기를 냅시다. 믿음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심판 때
-이회진신부-
어느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당신은 3가지 금(金)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낮은 순서에서부터 말하자면,
3번째 금은 황금이고, 2번째 금은 현금이며, 1번째 금은 ##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어서
한번은 수도회 형제들에게 첫 번째 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장난삼아 어떤 형제가 비상금 아니냐고 하자
어떤 형제는 비자금이냐고, 어떤 형제는 상금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여러분은 어떤 금을 제일 좋아하세요?
넌센스 퀴즈 같기도 하겠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금은 “지금”입니다.
강론 중에 그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요지와 같은 이유입니다.
“나” 자신이 살아가는 이 순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죠.
그것은 먼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 살아있다는 감사의 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기쁨의 순간이며,
하느님을 향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이 때로 힘들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포기하고 주저앉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지금 일어나 용기를 낸다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쁘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내가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일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의 굴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기계처럼 일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 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지금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루가 11,32)라고 말씀하시며,
심판 때에 일어날 일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구원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Hic et Nunc"를 말합니다.
곧 “아직 그리고 지금”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구원의 시간은 아직 완전히 우리들 안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구원의 때가 되었을 때 완전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지만,
또한 분명히 지금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이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기쁨의 순간이며,
지금 바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분의 나라를 지향하는 희망의 순간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심판의 때 역시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 때란 니네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우리를 심판할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아직” 우리에게는 다가오지 않아 기다리고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금” 요나의 설교를 들으며 돌아설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하느님을 향해 살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현금도 좋고, 황금도 좋고, 비자금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나 자신과 같이 하며
기쁨과 감사와 희망을 이야기하며 내가 살아가는 행복에 대해 함께 웃어주는
지금 이 순간만큼 중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자주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다는 것이죠.
오늘은 다른 금(金)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
“지금 주님과 함께” 일어나 세상을 단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이 있어 감사합니다. 아멘.”
"끊임없는 회개만이 살길"
-이수철신부-
매일 매일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요나가 회개를 촉구하는 니네베 도시의 현실이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
안팎으로
많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흡사합니다.
“이제 40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아니 ‘40일이 지나면’이 아니라
이미 안팎으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니네베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치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며
회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니네베의 요나의 모습이 참 흡사합니다.
오늘 주님은 사순 광야 피정의 초반에
우리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이제 40일이 지나면 부활대축일이다.”
오늘부터 꼭 40일 째 되는 4월 8일이 부활대축일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시며,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40일 광야 피정의 지도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촉구하시는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의 모범은 단연
니네베 사람들과 남방의 스바 여왕입니다.
요나의 선포에 즉각 응답한 마음 순수한 니네베 사람들이요,
지혜의 말씀을 열망하여
그 멀리서 솔로몬을 찾은 스바 여왕이었습니다.
두 부류 사람들, 공히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과 같은
마음 굳어진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니네베 사람들과 같은 즉각적 회개요,
스바 여왕 같이 지혜의 말씀을 찾는 순수한 열정입니다.
저는 여기서
니네베 사람들의 공동회개 행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의 총체적 타락과 부패의 현실도
이런 안팎으로의 공동회개의 실천이
참 절실하다는 생각입니다.
요나의 회개 선포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었고,
단식을 선포했으며,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고,
니네베 임금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합니다.
거국적인 회개의 모습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내리겠다는 재앙을 거두셨다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교회,
하느님 백성의 공동 대청소 회개 기간이기도 한
사순 40일 광야 피정 얼마나 고마운지요.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로 다시 거듭 난 우리 공동체에
주님은 축복의 은총을 가득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로다.”(요엘2,12-13 참조).
아멘.
시대의 표징
-김훈일 신부-
‘시대의 표징’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하느님의 참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를 깨닫고 이에 응답하여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쁜 일상 속에서 세상과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찬으로 식사하는 가정과 최악의 식량난 속에 있는
북한 가정들과 아프리카 가정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면 시대의 표징을 본 것입니다. 끝날 줄 모르는 전쟁 속에서 무수한
민간인과 군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 나의 가족들을 한 번 돌아보며 마음이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다면 시대의 표징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매일 나의 주변과 이웃을 통해서 보여지는 많은 시대의 표징들 가운데서 지내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이들의 고통을 한순간의 의식으로 흘려
보내지 않고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시대의 표징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가슴에 간직된 시대의 표징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정의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우리 가슴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앞에서 늘 자기 가슴속을 들여다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요나는 미천한
자신의 힘으로 니네베가 구원되리라 믿지 못해서 도망갔다가 잡혀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외침에 한 도시가 구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외친다면 얼마나 커다란 구원이 일어나겠습니까?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짝사랑의 괴로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 정녕 고통스런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응답 없는 사랑’ 다시 말해서 ‘짝사랑’이란 것,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쪽에서는 지속적으로 사랑을 보내는데, 다양한 몸짓으로, 여러 가지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 눈길을 외면합니다. 딴전을 부립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한 ‘짝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짝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은 오가는 맛이 있어야 제격인데,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사랑은 일방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도 끔찍이 우리를 챙기시는데, 그리도 간절히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우리는 그분께로 눈길 한번 드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묵묵부답인 우리 때문에 늘 괴로우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결코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유로움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예속되셨다는 것. 사랑스런 손자손녀 앞에서 꼼짝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속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완전무결하신 하느님, 우리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없이는 하느님이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시고, 우리 없이는 행복하지 못하겠노라고 단언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사랑을 갈구하십니다. 이것처럼 큰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하느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이 사건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구세주께서 죄인들 앞에 벌거숭이로 서셨습니다. 조롱의 표시로 병사들은 예수님께 홍의(紅衣)를 입힙니다.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웁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한갓 병사들 앞에 고개를 숙이십니다. 그 철없는 인간들은 존귀하신 예수님의 얼굴에 침까지 뱉는군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십자가 위로 자진해서 올라가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마음만 먹었다하면 지금까지의 최악의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는 능력의 예수님께서 인간의 횡포 앞에, 인간의 실수 앞에, 인간의 착각 앞에 침묵하십니다. 그저 조용히 희생제물이 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요하게도 기적과 표징만을 쫓아다니는 백성들을 향해 강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들은 많은 경우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 갑자기 먹구름이 걷히고 나타나는 십자표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암세포... 사실 이런 기적들은 대체로 유한한 기적입니다. 치유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치유의 은총을 입었다고 합시다. 끝없이 치유가 계속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영원히 살겠습니까?
결국 진정한 의미의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기적입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함을 통한 기적입니다.
우리가 매일 지고 가는 십자가를 얼굴 찡그리지 않고, 투덜거리지 않고, 오히려 환한 얼굴로,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지고 가는 것이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입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유능하지만,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기쁜 얼굴로 상대방의 밑에 서는 것이 또한 기적입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끊임없이 우리 인생 안으로 드나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무수한 십자가, 힘에 겨운 십자가 앞에 울고불고, 힘들다고, 외롭다고 외치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중의 왕십자가인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 고독과 소외라는 십자가, 배척이라는 십자가, 낙담과 내적 번민이라는 십자가, 이 모든 십자가를 나 홀로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지고 오셨고, 앞으로도 함께 지고 걸어가실 것이기에 십자가 앞에서도 행복해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기적의 표
강희수 수사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십사 청하기도 하고, 무엇을 원하니 들어주십사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저는 이런 현실보다는, 그것보다는, 저것보다는 이렇게 되고 싶고, 저렇게도 되고 싶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하느님의 뜻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임을 체험합니다.
오늘 니느웨 사람들은 40일 후면 망한다고 하니까 잿더미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기도해서 하느님의 뜻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이미 정하셨던 것이고, 그들이 잿더미에 앉아서 회개하여 그들 자신이 변화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본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그걸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 그걸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기적, 요나의 기적이 바로 그런 기적입니다. 오늘을 사는 저는 기적을 바라고 하느님의 어떤 엄청난 힘과 능력을 기대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변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 있게 변화되었을 때 비로소 기적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사순시기의 첫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회개와 뉘우침과 사랑의 실천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저도 무언가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 자신의 변화라는 기적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 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 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
그것은 요나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니느웨에 나타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는 표징을 주 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거절하셨을 까 ?
그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영원한 삶인 구원을 알아듣지 못하 고,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자기만족을 위해서 기적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적행위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분의 복음이
진정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뒷받침하 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용하면 그들이 원하는 현세적인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현세적인 지상낙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선택받은 백성 인 그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먼저 보여주신 그 뜻을 알아 듣지 못하고
외면하였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 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상의 인물인 시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을 예를 들어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하신다.
솔로몬 왕 때, 시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길을 여 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느웨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 에 이르기까지
단식 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시바의 여왕이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 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 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 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잇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 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 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 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 이다.
유다인처럼 주님의 뜻은 멀리한 채 이기적인 기적만 보여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도 변화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모든 것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면서 살 것이다.
진정 구원의 말씀으로 나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기적을 청하여야 한다.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며 기도하자. ♡
†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전 †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도우려면 앞서간 대목을 함께 읽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루가복음에서도 어제 마태오복음(6,7-15)에서와 같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셨고, 아버지께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청원하라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마귀가 들린 언어장애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보이셨다.(11,1-14) 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만큼 의구심도 컸다. 사람들은 예수의 능력을 의심하여 더러는 '예수가 마귀의 두목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들을 쫓아낸다'(11,15)고 하였고, 더러는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달라'(11,16)고 요구하였다. 어떤 여인은 예수를 포유(哺乳)한 어머니를 찬양하기도 했다.(11,27)
이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여기에 기적 이상의 볼거리를 즐기는 유다인들이 가세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인정이 될만한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업적들을 마귀짓거리로 몰아붙여 폄하(貶下)하려는 그들이다. 참으로 고약하고 야박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이 말씀은 고약하고 야박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診斷)이다.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이는 악한 세대로 진단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전(處方箋)이다. 예수께서는 좀처럼 믿지 못하고 하늘의 기적까지 요구하는 사람들이 악한 '불신(不信)의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하셨고, 이 병에 대한 약전(藥箋)으로 '요나의 기적'을 처방하신 셈이다. 사실 요나의 기적은 기적이 아닌 기적이다.(요나 2,1-11; 3,1-10)
이 처방전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니느웨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기적을 보고 회개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일어났던 일은 하느님께서 요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였던 일과 파견된 요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었다. 이 외침 하나로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기적과도 같은 것이 된 셈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써주신 처방전의 참뜻은 요나의 니느웨 방문이 곧 하느님의 현존이요, 그의 외침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의 현존이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요나의 사건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기적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 또한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기적의 표징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표징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현존보다 예수님의 현존은 더 실재적이며, 그들의 외침과 지혜보다 예수님의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은 이미 예수 안에 선재(先在)하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져 있을 것이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세대가 비록 불신하는 악한 세대로 진단을 받았지만 처방전에 따라 약을 잘 복용하여야 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요나와 솔로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께 대한 선택이다. 사순시기는 표징을 요구하는 시기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표징을 잘 읽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의 과제 또한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루가 11,29-32)
-유광수 신부-
예수님은 당신이 생활하셨던 시대를 가리켜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현재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2천년 전의 세대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왜 악한 세대인가? 무엇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었지만 연일 서울 지하철의 안전 소홀로 적지 않은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고, 부정 부패가 극에 달하고, 이라크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위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말하시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만 본다면 분명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한 세대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사건들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가 꼭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세대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무슨 뜻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사건이나 부정 부패 등에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고 요나 예언자와 당신에 관한 것이다.
즉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와서 말씀하시는 데도 전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 가 하룻동안 돌아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의 뜻을 모아 니느웨 시민들에게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실지 아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 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요나 3, 4-10)라는 것이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이다.
즉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사건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즉 요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단순히 요나의 말만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그리고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 세대에 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는 요나보다 더 크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과연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세대가 악하다는 것은 어떤 부정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 때문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선포된 복음은 믿지 않고 어떤 특별한 표징(기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을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하느님이 직접 복음을 선포하시는데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세대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순절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지정된 날에 단식을 하고 금육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의 삶을 생활하는 것이다. 즉 복음과 달리 생활하였던 생활에서 다시 복음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포된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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