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도 시크교(Sikhism)>
시크교(Sikhism)는 인도 서북부 파키스탄과 가까운 펀자브지방을
중심으로 15세기 말경에 나나크(Nanak)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통합을 꾀한 종교 활동의 결과 성립한 종교이다.
‘시크(Sikh)’라는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교육’ 또는 ‘학습’이라는
뜻을 가진 시스야(sisya)에서 파행했다는 설과
'가르침'이라는 식사(siksa)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나나크는 펀자브 지방 라호르 근방 ‘라이보이디탈반디’라는 마을에서 1469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상인계급인 카트리 카스트(khattris caste)에 속했다.
나나크는 어릴 때부터 특이한 종교적 성격을 나타냈으며,
그는 10대 후반에 결혼해서 관청에 근무했으나,
어느 날 숲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너는 나를 따라야한다. 나는 지금까지 너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이제는 너뿐만 아니라
너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가서 내 이름을 되뇌어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일러라.
세상에 머물되 오염되지 말라. 내 이름을 되뇌고
자선과 목욕재계와 예배 그리고 명상을 게을리 하지 말라.
내가 이 감로주를 네게 주었으니
이것은 내가 너를 돌보아주리라는 약속이니라.”라고 말하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흘 후 숲에서 나와 하루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는 다음날 “힌두교라는 것도, 이슬람교라는 것도 없다.”고
선포함으로써 이후 전개될 종교 활동의 서막을 열었다.
영감을 받은 나나크는 출가해 고행자로서
인도 여러 지방을 여행하는 한편, 많은 성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박티(bhakti-信愛-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계통의
힌두교 성자 까비르(Kabir, 1440~1518)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도 신비주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존경받는 까비르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동질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두 종교에 공통된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부정했다.
그리하여 교조 나나크는 힌두교 개혁을 주장하고
우상숭배와 카스트제도를 부정했으며,
창조신 바히구루(Vahiguru)를 열광적으로 숭배했다.
그리하여 시크교의 기본 사상은 바히구루(Vahiguru)라는
신의 메시지와 이름으로 개인적 수양을 통한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의 강한 영향을 받아
힌두교의 개혁을 시도한 시크교를 창시했다.
그리하여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을 외친
시크교 10명의 구루(guru, 法王, 영적인 스승) 중 첫 번째 구루가 된 것이다.
나나크는 인도 북부와 서부지방을 여행하면서 포교를 시작했고,
자신만의 독특한 의상을 입었는데,
이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조화시키겠다는 의지의 피력이었다.
그가 죽기 전 이슬람교도들은 그가 죽으면 매장하자고 하고,
힌두교도들은 화장을 주장했는데,
나나크는 “힌두교도들은 내 오른쪽에
이슬람교도들은 내 왼쪽에 꽃을 놓도록 해라,
아침에 일어나 봐서 꽃이 아직 싱싱한 쪽의 의견대로 행하라"고
말했다는데, 이튿날 양쪽의 꽃이 모두 싱싱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의 화해를 위해
마음을 두었는지를 시사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나나크는 유일ㆍ절대의 신을 믿어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로 귀일된다고 설파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강조했다.
동시에 형식주의를 싫어해 기성종교의 각종 의식, 우상숭배를 배척했다.
그래서 시크교의 종교생활은 복잡한 의식이 없다는 면에서 단순하다.
교리 상으로 나나크의 입장은
크게 다른 두 신앙을 혼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단순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응축력은 창조주 바히구루(Vahiguru)라는
유일신 사상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시크교는 신자유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평등하다고 해서 카스트 제도도 인정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 타인에의 봉사, 그리고 나눔과 베풂을 권장하고,
신도에게는 술ㆍ담배ㆍ마약을 금지시킴으로써 윤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시크교는 성(性)에 따른 종교적 의무를 차별하지 않는다.
시크교의 신은 성(性)이 없으며 시크교 경전은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 가르침은 시크교 제5대조 구루 아르준(Arjun)이 편찬한 성전인 <간따(Gantha)>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사회경제 및 종교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힙(Guru Granth Sahib)>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스도교의 영향도 컸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힌두교의 신애[信愛:박티(bhakti)-절대적 귀의)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을 융합한 것으로
힌두와 이슬람 사이의 틈새를 노리며 무서운 속도로 교세가 퍼져나갔다.
교조 나나크는 "자비심을 너의 모스크로 삼고,
신앙을 너의 기도 방석으로 삼고, 정직한 삶을 너의 코란으로 삼고,
겸허한 마음을 너의 율법으로 삼고,
경건한 마음을 너의 예식으로 삼아라.
그런 지혜로서 무슬림이 되고자 하나 바른 행실을
너의 카바(성전)로 삼고, 진리를 너의 예언자로 삼고,
선행을 너의 기도로 삼고, 주의 뜻에 복종함을 너의 묵주로 삼아라.
이렇게 하면 주께서 너를 보호해 주시리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업(業) 사상의 채용은 힌두교적 성격을 강하게 엿보이게 한다.
신과 인간들은 이기심과 감각의 욕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게 되므로
업이 쌓기고 윤회의 바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한 이름 속에 함입될 때, 즉 개체성이 소멸되는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다.
한편 신은 세상 속에 있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 진실한 분을 먼 데서 찾지 말라.
그분은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구루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분을 알 수 있게 되리라.”
나나크는 힌두교에서 행하는 의식이라든가 순례, 극단의 고행,
온갖 종류의 우상 숭배에 대해서도 불신감을 가졌다.
“누더기 옷이나 오긴의 지팡이 또는 온몸에 칠한 재로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귀걸이를 하거나, 삭발을 하건,
나팔을 분다고 해서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무덤이나 화장터를 돌아다니거나 앉아서 사색한다고 해서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라 밖을 돌아다니거나
순례지에서 목욕재계한다고 해서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오늘날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는 힌두교에 있어서의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볼 수 있었으며,
자이나교나 불교와 달리 이슬람교로부터 중요한 요소를 병합한
일종의 힌두-이슬람의 종합으로 본다.
현재 종교로 인도 내에서의 입지는 무시 못할 정도이다.
제1대 구루인 나나크(Nanak, 1469~1539)는 죽기 전에
계승자를 지명하는 관행을 세웠다.
그러나 제4대 구루 람 다스(Ram das) 때부터
구루는 모두 한 가문에서 나오게 됐다.
나낙크 이후 아홉 명의 구루가 계승자로 활동했다.
나나크를 계승한 구루(guru-영적 스승)들에 의해서
교단조직이 정비돼나갔다.
제3대 구루 아미르 다스(Amar Das, 1552-1574)는 전형적 구루였다.
겸허하고 계급의식을 철저하게 떨쳐버린 태도로 유명하다.
“자기 카스트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말라.
세상은 모두 똑같이 한 줌 흙으로 빚어졌나니.”라고 했다.
이 때 시크 공동체의 두 가지 진귀한 제도가 형성되는데,
회중(sangat)과 공동체 식당(langar, lankar)이라는 문화가 생겨
이후 시크교의 민주적 화합 풍토 조성에 기여한 전통이 됐다.
즉, 시크교에는 계급을 따지지 않는 모임(sangat)과
모든 시크교 사원에서 무료공동체식당이 있어
순례자와 모든 방문객들에게 사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채식요리를
바닥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면 국적, 신분을
모두 통합한다는 시크교 이념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무료식당을 운영하는 이유는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 나낙(Guru Nanak)이 평생 탁발을 하며 유랑한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라고 한다.
제4대 구루 램 다스(Ram das)는 제3대 구루 아마르 다스의 사위이자 후계자로서
암리차르시(Amritsar市)를 창립했다.
암리차르는 파키스탄과의 국경에서 약 30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도시로,
라호르와 대치하는 교통ㆍ군사상의 요충지이다.
제4대 교주 람 다스가 시크교 신앙의 중심지로 성천(聖泉) 암리타사라스(불멸의 연못) 주변에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시의 명칭은 여기서 비롯됐다.
제5대 구루 아르준(Arjun, 1563~1606) 시대에 교전(敎典)
<간따(gantha)>를 편찬하고, 암리차르(Amritsar)에 시크교의 본산인
하리만디르(Harmandir)사원, 일명 황금사원(Golden Temple)을 건설하는 등
종교로서 일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황금사원의 경내는 식당인 구루 카 랑가(Guru Ka Langar)를 비롯해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순례지 숙소가 모두 연결돼있다.
헌데 시크교가 교단으로서 그 세력이 확대해 감에 따라
무굴제국(Mughal Empire)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아르준은 1606년에 체포돼 처형됐다.
시크교는 처음에는 평화적 성격을 띠었으나
무굴제국과의 항쟁을 통해 점차 전투집단화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핍박에 저항하기 위한 전사조직이 만들어졌다.
시크교는 카스트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개방돼 있어서
많은 하층민들이 그 조직에 가입하기 위해 몰렸고
이들은 낮은 신분을 떨쳐버리고 용감한 전사가 돼
상층 카스트사람과 동등한 위치로 성장했다.
제9대 구루 테그 바하두르(Tegh Bahadur, 1664-1675)
역시 델리로 끌려가서 무굴의 왕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처형을 당했으며,
그 이유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마지막으로 구루 자리에 오른 아들이 고빈드(Gobind)이다.
제10대 구루 고빈드 싱(Gobind Singh, 1666~1708)은
마지막 구루(지도자)로서 30년 이상을 무굴제국과의 싸움에 몸담았으며,
시크교도의 군사결사인 ‘할사(Khalsa-순결한 자라는 뜻의
전사-칼사라고도 함)’를 창설한 사람이다.
※할사(Khalsa-칼사)---시크교의 지배적 종단. '순수한'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 khāleṣ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함.
대부분의 시크 소년과 소녀들은 사춘기가 되면 할사단에 입회한다.
파훌(세례)이라고 불리는 간단한 의례를 받는다.
의례가 끝나면 소년들에게는 싱(Singh, 숫사자)이라는 성(姓)이,
소녀에게는 카우르(Kaur, 암사자)라는 성이 부여된다.
고빈드 싱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시크교도에게 요구되는 독특한 복장도 고빈드 싱이
전쟁에서 적과 동지를 쉽게 구별해 내려고 지시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시크교도 남자들은 종단의 상징인
아래와 같은 독특한 복장인 5K를 반드시 지녀야 했다.
① 케샤(Kesa)---머리와 수염을 자르지 않는다(터번을 쓰고 다님).
② 캉하(Kangha)---빗을 가지고 다닌다.
③ 카치(Kacch)---속에 짧은 바지를 입는다.
④ 카라(Kara)---강철로 만든 팔찌를 한다.
⑤ 키르판(Kirpan)---양날 단도를 지닌다.
그리고 고빈드 싱은 이렇게 외쳤다.
「손에 활을 든 그 분에게 경배하노라.
그 용감한 분에게 경배하노라.
모든 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이며 영원하신 그분에게 경배하노라.
양날 칼, 단검에 경배하노라.
철퇴를 든 그 분에게 경배하노라.
활과 대포에게 경배하노라. 만세,
세상의 창조주께 만세,
구세주, 나의 보호자, 당신께 만세, 오 칼이여!」
위와 같이 외치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교단 내의 칼의 세례를 통한 정화라는 의식을 추진해,
고빈드 싱은 다섯 명의 추종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신앙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가 돼있다는 신실성(信實性)을 시험한 끝에
양날 칼로 휘저어 향료를 섞은 음료수를 만들어 다섯 모금씩 마셨고,
남은 음료수로 각자의 머리와 눈에 다섯 차례씩 뿌렸다.
“정화는 신의 뜻, 승리는 신의 것”이라는 전투구호도 생겼으며,
이 다섯 명과 그 후 할사에 가입한 사람들 모두 5K의 용모를 갖추게 됐다.
시크교는 교조 나나크와 그를 계승한 시크교 구루(Sikh gurus)의 영적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고빈드 싱은 시크교 성서인 그랜트 사 히브(Guru Grant Sahib)를 후계자로 지명해
인간 구루(Gurus) 제도를 종식시키고 경전을 시크교의 영원한 종교적 영적 인도자가 되게 했다.
※구루 그란트 사히브(Guru Granth Sahib)---줄여서
‘그란트사히브’라고도 한다. 시크교의 5대 구루(영적 스승)인
아르잔 데브가 선대 구루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시크교 경전이다.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가(讚歌)를 모았으며, 편찬 직후인 1604년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에 위치한 시크교 성지 황금사원에 안치되었다.
16세기 초 2대 구루 안가드가 시크교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처음 작성됐다.
이후 1604년에 아르잔 데브가 집대성했고 9대 구루 테그 바하두르가 찬가 116편을 추가 작성해
1430편의 찬가로 최종 완성됐다.
이어 1708년 10대 구루 고빈드 싱이 사망하기 전 모든 시크교도들에게
<그란트사히브>를 구루로 받아들이라고 천명하면서
영원한 시크교의 구루가 됐다.
제10대 구루 고빈드 싱이 시크교의의 거룩한 경전인
<구루 그랜트 사 히브(Guru Granth Sahib)의 최종판을 편집했다.
시크교 구루의 설교뿐 아니라 힌두교, 이슬람교의 교리도 담겨 있다.
언어가 단순명료하고 정확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시크교도들에게 구루의 화신으로 숭배되며
구루와 동일한 신성한 존재로 간주된다.
실제로 마지막 구루였던 고빈드 싱 이후로 구루의 권한을 계승해
시크교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시크교의 종교생활은 복잡한 의식이 없다는 면에서 단순하다.
시크교도의 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숙한 연령에 달했을 때,
위에서처럼 간단한 입문식이 이루어진다.
입문식과 마찬가지로 결혼식과 장례식도 단순하다.
인도의 거리에서 터번을 둘러쓰고 멋진 수염을 기르며
체격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시크교도들이다.
• 시크전쟁(Sikh Wars, 1845-1848)
시크교도들은 무굴제국 쇠퇴 후에는 영국과 끝까지 싸웠다.
19세기 중엽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 때
두 차례에 걸쳐 영국에 저항해서 소위 ‘시크전쟁’을 일으켰다.
인도 서북부 펀자브 지방에 세력을 신장하고 있던
시크교 란지트 싱(Runjit Singh, 1801~1839, 일명 maharaja)이
펀자브 지방에 할거하던 시크교도들을 규합해
시크왕국(19세기 초~1849년)을 건설했다.
이후 이들은 영국에 저항했으며, 1818년 제3차 마라타 전쟁
이후에도 영국에게 굽히지 않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마라타전쟁(Maratha Wars)---인도의 마라타 동맹 제후들과
영국의 동인도 회사 사이에 일어난 전쟁.
1775년부터 1818년까지 3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서인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 오늘날의 시크교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전쟁 후에 시크교도들은
펀자브지방에 구역을 할당받기는 했지만 이전과 비교해볼 때 많이 위축됐다.
현재 시크교(900만-인도인구의 2%)의 85%가 펀자브지방에서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델리 등 다른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할당받은 영지에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1999년 4월 시크교가 창설 300 주년을 맞았다.
시크교는 본래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번 300주년 행사는 제10대이자 마지막 시크 구루인
고빈드 싱(Gobind Singh)이 종전까지 평화주의자였던
시크교도들 상당수를 할사((Khalsa)라 불리는 호전적 종파로
개종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시크 교도들은 대부분 할사에 속해있다.
시크교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날은 제10대 구루 고빈드 싱이
300년 전 그의 추종자들 중 첫 번째 그룹을 할사의 신앙으로
세례를 베푼 4월 13일이다.
지난 1984년 6월 인도군은 중무장한 시크 과격분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시크교 최고 성전인 암리차르의 황금사원(Harimandir)을 공격했다.
이 작전에서 약 600여명이 죽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무고한 순례자들이었다.
이 공격을 지시했던 인도 총리 인드라 간디(Indira Gāndhī)는 1
984년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 2명에 의해 보복 사살됐다.
이 사건은 전국 규모의 시크교도 대학살극을 촉발시켰는데,
이때 목숨을 잃은 시크교도들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산채로 불에 태워졌다고 한다.
이때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있는 시크인들이 델리에서만
몇 천 명 이상이 거리에서 혹은 집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이 폭동을 피하고자 했던 많은 시크들이 이때 머리를 자르고
터번을 벗어 던짐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후로는 젊은 층을 주축으로 해서 자신들의 전통 복식인
이 터번을 벗어 던지는 경향이 늘고 있으며,
수염이나 머리를 기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갈수록 그런 경향을 띄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오직 그들의 사원인 구르드와라(gurdwara)에 들어가서
기도 할 때만 터번을 쓴다든지 아니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구르드와라 주변에서 많이 볼 수가 있다.
젊은 층에서는 이 터번이 거추장스럽고 용모를 추하게 만든다고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크인들이 그들의 고향의 절반을 파키스탄으로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빨리 회복됐다.
그들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수천의 시크인들이
주로 중동과 영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해 갔다.
국내적으로 시크인들은 상위계층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특별히 군의 지휘관, 정부부처의 장관, 인도의 대통령까지 배출되기도 했다.
시크인들은 실제의 그들의 숫자보다 더 많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뚜렷한 용모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들은 인도 인구의 2%이하이나 인도 전역에서 그들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들은 주로 군사, 비즈니스, 식당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특히 군사 방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상점주인, 무역상인, 학자, 변호사, 의사, 공무원 등의 직종에
두루 퍼져 있으나 그들의 가장 많은 직업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고향인 펀자브가 아니라 인도의 수도인 델리이다.
시크인들은 인도에서의 가장 뛰어난 농업인들로 알려져 있다.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인도에 녹색혁명을 가져 왔으며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농부들이기도 하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9명의 인도인 가운데 3명이 시크인이며,
인도 육상의 1/3이상의 선수가 시크인이다. 또 시크인들은 군인이 많다.
오늘날 인도에서 유니폼을 입고 있는 군인 네 명 중에 한 명은 시크인이다.
시크교도 중에는 거지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열심히 일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