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어두운 이면에서 찾은 언어로 구원의 노래를 부르다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한 이후 독특한 발성과 어법으로 개성적이고 활달한 시 세계를 펼쳐온 박소란 시인의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이 출간되었다. 등단 6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의 어두운 이면을 낱낱이 포착해내는 섬세한 관찰력으로 도시적 삶의 불우한 일상을 감성적인 언어로 면밀히 그려낸다. 체념과 절망뿐인 비참한 현실 속에서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슬픔을 연민의 손길로 다독이며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곱씹는 내밀한 성찰과 사유의 깊이가 돋보이는 시편들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모순을 끄집어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자의 삶과 시대의 아픔까지 껴안으면서 “맨살로 죄와 병을 감내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써”(김성규, 추천사)온 시인의 고뇌 또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채 실려간다//한시절 누군가의 노래/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영원이 아니어라/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다만 흉터였으니/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노래는 아무것도」 전문)
결 고운 서정적 어조로 신산한 삶의 그늘과 “도시의 절망적 풍경”(남승원, 해설)을 그려내는 박소란의 시에는 서늘한 아픔과 “물컹한 슬픔”(「베개」)이 배어난다. 시인은 삭막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꼬리가 잘린 채 버려”(「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지거나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용산을 추억함」)면서 가뭇없이 스러져가는 존재들에게 애틋한 눈길을 건넨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세상의 통점을 짚어내며 공동체적 삶에 대한 오롯한 믿음을 바탕으로 사회적 문제를 에두르지 않고 예민하게 파고드는 시인은 “정처 없이 한데를 서성”(「미자」)이는 소외된 존재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지금-여기’ 끊임없이 되살리면서 “집집마다의 비극을 모조리 깨워”(「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고통의 현장으로 재현해낸다.
추천사
맨살로 죄와 병을 감내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써나가는 시인이 여기 있다. 왜 박소란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서(「아현동 블루스」) “아무도 벼릴 수 없고, 어쩌면 누구도 벼리려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단”(「칼 이야기」) 낼까. 현란한 시대에도 예술은 스러져가는 세상 만물과 자신을 위무하는 것이라고 시들은 일관되게 말하는 듯하다. 이런 깨달음은 자신의 생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오래전 울음의 방에서 혼자 울며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울음의 방」) 스무살에, “방 한 귀퉁이 중고 산소호흡기를 들여놓고/새벽마다 동네 장의사 명함만 만지작거”리던 시절에 이미 “체념만이 오랜 밥이고 약이었음을”(「체념을 위하여」) 이해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악한 통증을 둘러업은 채”(「약국은 벌써 문을 닫았고」) 문을 닫은 약국 앞에 서 있어도 자신의 이마를 짚어주는 이 하나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삶으로부터 체념하라고 애원하며 그녀는 살아왔다.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용산을 추억함」)하였고 “노래는 구원이 아니”라는(「노래는 아무것도」) 처량 맞은 가락을 뽑아내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대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무명배우의 죽음에 “걷고 또 걸어 마침내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행복하였다”는(「무명배우의 죽음에 부쳐」) 조사(弔詞)를 남길 뿐이다. 노래의 무용성을 알면서도 곡을 해야 하는 가객의 운명은 불우하다. 그러나 세상 곳곳을 떠돌며 아무도 보지 않는 통점을 풀어낼 때 노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품은 태초의 언어가 될 것이다.
-김성규 시인
용산을 추억함 박소란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지옥불 일렁이는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가는 불온의 미몽이 사이렌처럼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 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영영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