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예수님은 세상의 빛(1)
나균용 목사님의 설교 “예수님은 세상의 빛” 을 듣고,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갖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참된 빛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빛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바로 빛 이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빛이 없으면 세상은 혼돈과 공허 속에 빠지지만, 빛이 임하면 모든 것이 질서를 찾고 생명이 깃들게 된다. 하나님은 단순한 물리적인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영적인 빛을 보내셨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밝혀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복음 5:14)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단순히 예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그 빛을 받아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과연 그 빛을 올바로 비추고 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설교 중에서 오늘날 세상의 어둠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는데, 특히 부정부패와 탐욕으로 가득 찬 현실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스포츠 협회의 부패, 정치인들의 끝없는 권력욕, 그리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의한 행태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권력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하며, 불의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어둠이 가득한 세상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빛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하면서, 빛이 없으면 방향을 잃고 실족하게 되며, 죄가 가득한 세상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빛이 있어야만 생명이 있고, 따뜻함이 있으며,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 예수님이 빛이시기에, 우리는 그 빛을 따라 살아야 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 빛을 전해야 한다.
이 설교를 통해 나는 예수님의 빛을 더욱 사모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지 어둠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을 따라갈 때, 나의 삶은 밝아지고, 의미가 있으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설교의 마지막에서 “생명의 빛을 소유한 자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라는 말씀이 큰 도전이 되었다. 빛을 따라 사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사명이다. 나도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빛을 비춘다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이다. 내가 속한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에서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며,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세상의 불의와 부정부패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겠다.
이 설교를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며, 나 또한 그 빛을 비추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하셔서, 나를 통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밝아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 형제에게 미련하다고 하는 자
마태복음 5장 21~22절 말씀을 중심으로 한 이번 설교를 들으면서, 말 한마디의 무게와 책임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와 신앙의 태도를 점검해야 하는 중요한 경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형제’의 의미
설교에서는 ‘형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분석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는 단순히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공동체, 즉 신앙 안에서의 형제자매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셨다. 특히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마태복음 12:5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형제란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 자신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라도 신앙이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내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며 ‘미련한 자’라고 여긴 적은 없었는지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미련한 자라고 하는 자의 죄
설교에서는 성경 속에서 ‘미련한 자’로 언급된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예를 들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 신랑을 맞이하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 등은 예수님께서 직접 ‘미련한 자’라고 책망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예수님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신앙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형제들에게 ‘미련한 자’라고 하는 경우는 어떤가? 종종 우리는 자기 생각과 다르면 쉽게 상대방을 무시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저 사람은 너무 율법적이야", "저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몰라", "너무 보수적이야", "너무 자유로워" 등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설교에서 강조된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조롱하거나, 같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형제를 함부로 미련하다고 비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눈에 미련한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눈에 미련한 것이다"(고린도전서 3:19)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았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의 성공과 지혜를 좇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길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지혜를 따르고 있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설교에서는 특히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도 강조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당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향해 "술 취했다"고 조롱했던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를 불신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자를 모독한 자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마태복음 12:31-32)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성령의 역사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조롱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을 부정하고, 신앙적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미련하다고 정죄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깊이 새겨야겠다.
나의 삶에 적용하기
이 설교를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형제들을 향해 ‘미련한 자’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때로는 나와 다르다고 비난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형제들에게 미련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앞으로는 형제를 바라볼 때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기보다는 더욱 사랑하고 품어주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더욱 사모하고, 세상의 지혜를 따르려는 유혹을 경계하며,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깨달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형제를 더욱 사랑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3. 세상의 빛
이번 설교에서는 ‘빛’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큰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만약 두 다리가 없어 걸을 수 없었다면?"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 보며,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때때로 불평하고, 부족함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감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특히,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청년이 떠올랐다. 그는 처음부터 빛을 본 적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며, 나 역시 영적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진리도 모르고,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살아가던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내 삶이 변화되고, 참된 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빛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양한 빛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의료용 엑스레이, 공항 검색대의 보안 스캐너, GPS 등 보이지 않는 빛들이 우리 삶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생각하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모르실 리가 있겠는가? 하는 깨달음이 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신다.
우리가 감추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척, 믿음이 좋은 척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마음이 낱낱이 드러난다.
때로는 나조차도 모르고 있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이사야 60장 1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빛을 받은 자로서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 (이사야 60:1)
이 말씀을 통해, 저는 과연 하나님의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고 있는가?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복음 5: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저는 정말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살고 있는가? 빛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어둠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빛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어둠과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의 빛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나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 빛을 제대로 받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빛이 시대에 따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 왔으며, 이제는 한국이 복음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과거에는 유럽과 미국이 복음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이 하나님의 촛대를 이어받아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해 주신 사명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받은 빚을 북한과 열방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나는 빛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번 설교를 들으며,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나는 정말 빛을 따라 살고 있는가? 나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빛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분의 빛을 따를 때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저는 이번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빛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 나의 삶이 변화되고,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예수님의 빛을 따라가는 자는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저는 앞으로도 그 빛을 붙들고,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를 다짐한다.
4. 예수님은 양의 문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지만, 어떤 종교도 구원을 확실히 보장해주지 못한다.
불교에서는 “열심히 수행하면 극락에 갈 수도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이 확실한 보장도 아니며 개인의 노력이 전부일 뿐이다. 로마 가톨릭조차도 구원의 확신을 명확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확실한 길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면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혹시라도 세상의 다른 문을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하지는 않았는가?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며, 오직 그 문을 통과할 때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다시금 깊이 마음에 새기며, 다른 길을 찾지 않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실 뿐만 아니라, 그 문을 통과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꼴’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으며, 나는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나는 진정 생명의 양식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헛된 것들로 배를 채우려 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한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으로 나를 만족시킬지 몰라도, 결국 다시 목마르게 하고, 배고프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만족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우리가 그분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어떤 맹수도, 어떤 도둑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
세상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두려움과 걱정이 생긴다.
하지만 양은 목자가 지켜줄 것을 믿고, 그 안에서 평안히 쉰다.
나도 예수님 안에서 더욱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예수님의 보호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고, 불안해하지 말아야겠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태복음 7:14)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좁은 문을 선택하고 있는가?
회개의 문을 통과하고 있는가?
기도의 문을 통과하고 있는가?
전도의 문을 통과하고 있는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가?
넓고 편한 길을 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셨고, 우리도 그 길을 가야 한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때로 힘들고, 세상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생명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통해, 더욱 믿음의 길을 굳게 걸어가기로 결단하게 되었다.
세상의 넓은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좁은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겠다.
예수님은 나의 문이시며, 그분만이 나의 길이시다.
나는 오직 그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